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5화 (35/375)

〈 35화 〉 던전

* * *

[035] 던전 #11

불룩 솟아난 흙더미 사이로 새빨간 천 조각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말톤이 암반에 등을 기댄 채 읊조렸다.

“혹시 모르니 자네에게 알리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네. 어떻게 생각하나?”

“...함정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순 없으나 십중팔구 아닐 테지. 함정으로 사람을 낚을 셈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인적이 드문 장소보단 좀 더 왕래가 잦은 곳에 설치했을 걸세.”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한번 파 볼 테니까 네가 망 좀 봐줘.”

“알겠네.”

말톤이 짙은 녹안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고 칼집으로 땅을 파헤치자 불길한 예감이 가중되었다. 잠시 이 모직물의 정체가 모험가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이길 희망했지만, 코가 삐뚤어질 정도의 썩은내는 내 확신을 견고히 했다.

이 악취는 그것이 틀림없다.

사체(死?).

땅을 파헤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속살이 보였다.

덩어리진 체액, 녹아내린 지방, 엉겨 붙은 단백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장비가 없어. 도적들 짓이야.”

옷자락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신원을 특정하기 어렵도록 산성 수액을 뿌린 모양이군. 그리고 보게, 흙이 채 마르지 않았네. 게다가...”

“단독범의 소행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 나도 알겠다.”

단신이었다면 언제 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시체를 땅에 유기할 여유를 부렸을 리 없다. 더욱이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니 비슷한 크기의 젖은 흙덩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혼자서라면 이렇게나 많이 파헤치는 건 불가능했겠지.

무엇보다 도적은 절대 혼자 다니지 않는다.

“...잠깐 기다려 봐.”

발치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구더기. 송장 안쪽을 꾸덕꾸덕 기어다니는 놈들 중 하나를 날끝으로 건져올렸다.

“...새끼손톱 절반 정도. 1령 크기를 못 벗어났어. 사망한 지 대충 하루 하고도 반나절 정도가 흘렀다는 얘긴데...”

“근처에 있거나 다음 층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군... 이 지역은 2층에 가기 전에 잠깐 거쳐가는 길목이니까 말일세.”

“...규모는?”

“딱 잘라서 말하자면... 모르네. 이 정도 단서만으론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겠지. 다만, 이미 모험가 집단을 해치운 데다가 체계적으로 증거 인멸을 시도할 정도의 수완이라면 기습이라도 당하는 날엔 꽤 곤혹스러울 수도 있겠군.”

말톤이 턱을 짚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녀석은 지독한 악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비위도 좋은 놈.

이 광경을 목도하자니 어제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이 떠올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도적 떼 하니깐 생각나는 게 있는데...”

황금빛 들판, 이끼를 채취할 때 조우했던 도적 무리 얘기를 해주자 말톤의 눈빛에 착잡함이 서렸다.

녀석이 수심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자네 왜 그걸 인제 와서 말하는가...”

“미안해. 말할 타이밍을 놓친 뒤로 어쩌다 보니... 미안하다.”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네. 아니, 자네가 몸소 대화를 나눈 덕분에 미리 주의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겠군. 고맙네. 헌데 A랭크라... 그 정도 강자면 분명 이름이 알려져 있을 텐데...”

말톤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다.

“근데 좀 이상한게... 시기가 맞질 않아. 만약 놈들이 이 짓을 벌였다면 사망한 지 하루 넘은 시체가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렇다면 내가 도적 무리를 만나기도 전부터 이미 죽어있었다는 얘긴데. 게다가 여기까지 오려면 뗏목도 타고 와야 하고...”

“그러면 다른 자들의 소행이거나...”

“만에 하나라도...”

“자네가 말한 녀석들의 동료일 수도 있겠군.”

“그래, 같은 조직일지도 몰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려 A급 강자가 이끄는 도적단이다. 일행이 얼마나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더군다나 놈들로부터 엿들었던 대화 중에 2층을 암시하는 내용이 존재했으니 이곳에서 다른 멤버들과 합류해 그곳으로 향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장비들을 노획해 쓰고 있었으니 전력도 상당할 테고.

“제길... 던전 안에서도 도적들이 활개 치고 다닐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주요 사냥터나 길목이 아니면 마추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걸세. 다만, 어제 자네처럼 혹시라도 동선이 겹칠 수 있으니 앞으론 주의하면서 나아가도록 하지.”

“그래, 그럼 슬슬 돌아가자. 놈들이 근처에 있어. 혹여나 라디가 위험할 수도...”

응달에 파묻힌 시체를 뒤로했다.

돌아가는 발길에 조급함이 실렸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만,

만약 앞으로 꼬맹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부.”

전부 싸그리 죽이겠다.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

“다녀왔어요?”

서둘러서 돌아가자 라디는 별 탈 없이 모닥불을 쬐며 앉아있었다.

“뭘 그리 허둥지둥...”

“꼬맹아!!”

“으, 읏...?!!”

내가 힘껏 껴안으려고 하자 녀석이 두 팔을 뻗으며 저항했다.

“아니, 갑자기 뭐예요?!!”

“다행이다...”

“이, 일단 떨어지고 얘기.... 무슨 일 있었어요?”

녀석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팔뚝에서 힘을 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다만, 후추 스프레이만큼은 여전히 움켜쥔 채.

“그게 말이다...”

라디에게 어제 조우했던 도적 떼와 기암 아래 묻힌 송장 이야기를 해주었다.

녀석은 곧바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왜 그걸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 알렸어야죠!!!”

“미안해... 기회를 놓쳐서...”

“됐고, 팔 이리 내요! ...윽!! 여태 이런 걸 말도 않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어요?!! 이렇게나 피멍이 들었는데...! 벙어리도 아니고 왜 말을 못 해요!?!”

“그, 그게...”

“연고 어딨어요 연고!!”

“...저 배낭 안쪽에.”

“정말...! 내가 못 살아 진짜!”

다만, 그 방향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녀석은 도적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울그락불그락하며 내 안위를 살폈다.

이젠 웃옷을 들쳐가며 다른 숨긴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꼬맹이를 보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야, 지금 내가 다친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도적이...”

“도적이 뭐요?”

“...그러니까 앞으론 도적들이 급습해 올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상정해뒀던 거잖아요. 이제 수면 위로 불거졌다고 한들 새삼스러울 뿐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도적일 걸 염두에 두고 경계해 왔는데, 도란님은 안 그러셨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얌전히 입 닫고 치료나 받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라디는 내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녀석은 손바닥 모양으로 남은 멍 자국 주변을 정성스레 주무르고 난 뒤에야 굳게 다문 입술을 뗐다.

“...이렇게 하면 피가 빨리 돌아서 멍이 금방 빠진대요. 연고는 이거 다 끝나고 발라드릴 테니까 아파도 조금 참으세요.”

“....고맙다.”

“고마우면 앞으로 잘 좀 하세요. 쐐기풀 먹은 똥개처럼 날뛰다가 또 문제 일으키지 말고. 대체 뭐가 모자라서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거예요? 이번엔 도적 수장한테 길드명하고 이름까지 들키질 않나... 어디 으슥한 곳에서 조우했으면 도란님도 방금 말씀하신 시체처럼 땅에 묻혔을 거예요!”

“....”

할 말이 없다.

겸연쩍게 목덜미를 매만지자 녀석이 연고를 펴바르며 중얼거렸다.

“하아...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A랭크면 저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앞으로는 더욱 주의하며 전진해야겠어요. 말톤님, 이따가 지도 좀 꺼내주실래요? 도적들이 숨어있을 만한 장소를 미리 표기해놓을게요.”

“알았네, 마침 허기도 채울 겸 식사하며 같이 의논해보도록 하지.”

“.....”

잠시 후, 악어 고기로 배를 채운 뒤 우리는 다시 여정에 나섰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걸음이 상당히 더뎌졌다는 것.

“...꼬맹아, 혹시 뭐 있냐.”

“....아직은 없어요. 뭔가 발견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사소한 거라도 부탁할게.”

“네.”

혹여라도 도적이 은신해 있을 만한 지형을 우회해 나아가는 탓에 이동이 굼떠졌다. 허나 어쩔 수 없는 노릇, 화근이 될 만한 일을 줄이는 게 우선이니까.

“...말톤, 던전 2층은 온통 바위로 뒤덮인 곳이라고 그랬지?”

“맞네, 이곳 지형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하군.”

“그러게.”

이제 암벽 수준으로 커져버린 바위들을 유심히 훑으며 발을 내디뎠다. 어느 순간 발목을 살랑이던 들풀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렇게 굵직한 모래와 자갈로 뒤덮인 바위산을 절반 정도 올라왔을 즈음­

“잠깐!”

돌연 라디가 팔을 뻗더니 땅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가 들려?”

“네... 병장기 소음 같은데... 게다가 비명...? 이상한 울음 같은 것도 들려요. 이 주변에 출몰하는 마물이라면...”

“샌드 리자드 계열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아마 모험가 파티와 교전을 벌이는 게 아닐까 싶네. ...이 언덕 너머인가?”

“...네, 공교롭게도 마침 저희가 가는 방향이에요. 어떡할까요?”

“흠...”

말톤이 턱을 짚으며 고심했다. 이내 그 시선이 내 쪽으로 몰리고, 라디의 짙푸른 눈동자 또한 내 투구를 향했다.

“...뭐.”

“아니 그야... 도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긴, 일단 상황을 확인해 보자. 판단은 그 뒤에 해도 되니까.”

“네, 그럼 이대로 전진할게요.”

평소라면 별로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을 겪은 직후라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빠르게 걸어 바위 언덕의 정상 부근까지 다다르자 능선 아래로 드넓은 황야가 내려다보였다.

그와 동시에 마물에게 쫓기는 세 모험가가 보였다.

“제, 젠장! 끝도 없이 몰려들잖아! 아, 안느 어서 힐 좀!!”

“무, 무리야!!! 마나가 바닥났어!!”

­콰직!!

“크윽?!! 내 검이...!!”

“이, 이쪽은 방패가... 으아악!!!”

“톰슨!!!!”

­그르르륵...!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으로 이루어진 혼성 파티. 그들은 열 마리 남짓 마물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위에 선 소년은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신음했고, 한 소녀는 체내의 마나가 결핍되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적당히 이타심을 갖춘 자들이라면 당장 달려가서 돕고자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야 다른 파티의 사냥감을 빼앗는 건 모험가들 사이에서 극도로 금기시되는 일 중 하나니까.

당장에라도 전복될 듯 위태위태한 상황이지만, 막상 구해주고 나서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옛말에도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고 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곤경에 처한 주민을 구해주었더니 되레 도둑으로 몰린 경험도 있었고.

모두 같은 생각인지 옆을 돌아봐도 누구 하나 섣부르게 발을 내딛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글세요... 다른 모험가를 도와주는 건 솔직히 조금 꺼려지지만...”

“저대로 놔두면 죽겠군. 전멸하기까지 아마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테지. 난 자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네.”

“나?”

“네, 저도 도란님의 의견에 따르도록 할게요.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거든요.”

“...또 나야?”

딱히 저들을 원조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도와주지 뭐. 어려 보이는데 눈앞에서 죽으면 꿈자리가 사납잖아. 혹시 답례로 정보나 금전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만약 은인도 몰라보고 기어오른다면 그때 가서 손봐주면 될 일이다.

“...자네답군, 알겠네. 그럼 가보도록 하지.”

“제가 후열에서 차근차근 쓰러뜨릴 테니 도란님은 견제에만 신경 써 주세요. 너무 앞서나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알았다.”

돕기로 정한 이상 일차천리로 나아갔다.

배낭끈을 단단히 움켜쥔 채 언덕을 가로질러 내려가자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톰슨!! 조금만 참아!!! 내가 꼭 살려줄 테니까...!!”

“으, 으으... 날 버리고.. 빠져나가...”

“아, 안 돼...! 베르!! 톰슨이 위험해!!!”

“크윽...! 젠장할!!”

그들은 눈앞에 온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우리가 접근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소년이 부러진 칼을 쥐고 응전하는 사이 소녀가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마물이 에워싸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녀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위로 거대한 도마뱀이 주둥이를 쩍 벌리며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ㅡ

“...나 먼저 가 있을게.”

“도...!”

차마 끝마치지 못한 말이 허공에 붙들렸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도마뱀이라...’

시야가 뒤바뀌었다. 귓전이 울린다. 날카로운 바람이 파공성을 자아냈다.

한 줄기 화살처럼. 한 발의 총성처럼.

홀가분하게 배낭을 벗어던지고 내리막길을 주파하자 순식간의 거리가 좁혀졌다. 거침없는 질주. 놈들도 이변을 감지한 듯, 성인 덩치만 한 갈색 도마뱀이 고개를 든다.

­크르륵...?

나는 그대로 가속했고, 그 탁한 시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ㅡ

“.....”

발도(??)!!

잔혹할 정도의 검광이, 날붙이가 놈의 멱을 찢어발겼다.

­키에에에에엑!!!!!!!

­구르룩...? 구룩!!

­그르르르엑...!!

핏줄기가 뿜어나와 투구를 적시고 떨어졌다. 누런 눈동자가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의 의문과 당혹, 부정 따위가 차례차례 거물거린다. 급작스러운 이방인의 개입에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

한발 늦게 좌중에 경악이 내려앉자, 나는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려 화답했다.

“다, 당신은...?”

“물러나 있어.”

장검을 어깨에 걸치며 내뱉었다. 느릿하게 한 보 내딛자 전방위를 에워싼 도마뱀들로부터 증오 담긴 시선이 물씬 풍겨왔다. 낯익은 풍경. 익숙한 시선이.

...자 그럼 이제 이걸 어쩐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