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던전
* * *
[036] 던전 #12
‘일단 저지르고 보긴 했다만...’
도합 스물을 훌쩍 넘어서는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무턱대고 돌진했다간 쪽수로 밀리겠지.’
도마뱀 형상의 마물들은 대체로 빠른 편이지만, 저 덩치라면 몸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데만 해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을 터다. 허나 사냥감을 목전에 뒀을 때 촉발되는 힘과 순발력은 경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놈들의 충치 사이엔 지난 몇 년간 먹어치워 온 살덩이들이 덕지덕지 껴 있는 만큼, 자칫 깨물리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감염으로 이어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물리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재빨리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외투를 풀어 왼쪽 팔뚝에 둘러맸다. 고작해야 바람을 막는 게 고작인 얇고 오래된 원단이지만, 뭉치면 약간이나마 이빨이 파고드는 걸 방지할 수 있을 거다.
날카롭게 전방을 주시한 채 치아로 소매를 묶자 곧바로 한 도마뱀이 주둥이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에엑!!!
“...오냐.”
중단으로 내세운 검. 검면을 비틀어 막아냈다. 쩍 벌어진 선분홍색 구내에서 비린내가 훅 끼쳐온다. 나는 즉시 칼자루를 꺾어 놈을 흘려보냈고, 측면을 스치며 옆구리에 자상을 남겼다.
크르르륵...!
“...옅네.”
역시 단순한 철검으로는 무리인가.
단단한 샌드 리자드의 외피에 붉은 실선이 그려지긴 했으나 그뿐이다.
놈은 한층 더 깊은 적개심을 풍기며 재차 돌진해왔다.
크롸아아아!!!
선회.
방향을 틀었다.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가속을 더했다. 칼날을 지면에 수평으로 정렬했고, 투구 속 눈동자에 아릿한 살기를 피워올렸다.
내가 목표하는건 울대.
한 점에 공격을 집중한다.
푸확!!!
.....!!!
턱아래를 뚫고 들어간 검날이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뇌수로 점철된 체액이 흩날렸다. 단면이 선을 이루는 베기와는 달리 찌르기는 내 완력을 온전히 실을 수 있었고, 비교적 연한 아랫가죽과 맞물려 극상의 효과를 이끌어냈다.
허나 뿌리까지 박힌 검을 완전히 뽑아내기도 전에 사각에서 미약한 돌풍이 느껴졌다.
“이크...!”
후우웅!!!
거대한 꼬리. 육중한 살덩어리가 머리를 스쳤다. 압도적인 질량으로부터 오는 위압감이 가슴을 섬짓하게 만든다. 나는 즉각 바닥을 구른 뒤 검을 휘둘러 응수했지만, 놈은 기민하게 네 다리를 움직여 회피했다.
그리고 그를 상회하는 속도로 누런 이빨들이 들이닥쳤다.
“크윽...!”
카가가각...! 까득!!
이가 칼날 표면을 미세하게 긁어내자 새빨간 불똥이 튀었다. 서슴없는 상악이 발목을 물어뜯는다. 황급히 후방으로 뛰어 회피하고자 했으나, 그곳에도 싯누런 마수가 펼쳐오고 있었다.
온 힘을 쥐어짜 허리를 비틀었다.
콰드드득...!
“....!!!”
한 치수 큰 레더아머로부터 실밥 뜯어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용 신체 한계를 웃도는 행동을 벌인 탓에 옆구리가 욱신거렸지만, 덕분에 사지가 찢겨나가는 일은 면했다.
허공에 체류하는 도중 칼자루를 틀어쥐고 전완근에 힘을 불어넣었다.
성인 남성의 체중이 실린 날붙이는 딱딱한 갑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절삭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촤악!!!!
그르르르륵!!!
키리리릭...!
툭, 도마뱀의 모가지가 떨어져내렸다. 그 모서리를 발끝으로 차자 놈들의 증오가 부풀어올랐다. 시뻘겋게 핏발 선 시선. 이걸로 주목을 끌어모은다는 소기의 목적은 이뤘다고 봐도 좋겠지.
순식간에 동료를 세 마리나 잃은 샌드 리자드들은 이제 모험가 따위 안중에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나 또한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놈들에게 질주했다.
아니, 조금 더 위로.
그르루엑?!
그르르르륵!?!
“이 멍청한 뱀대가리 등신들아!!!”
멀뚱히 눈알을 굴리는 녀석들 위를 뛰어넘었다. 아무리 마물이라 한들 파충류의 지능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나는 놈들 한가운데 툭 불거진 바위를 딛고 도약했고, 순식간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선물 겸 꼬리 끝을 절단하자 몇몇 녀석들이 유난을 떨며 발광했다.
그리고 이는 전부 내가 유도했던 대로.
“....”
도마뱀은 기역자로 꺾인 다리 구조 때문에 급격한 방향 전환에 능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균형을 잡아야 할 꼬리의 통증 때문에 더욱 여의치 않겠지.
뚝뚝 신선한 피가 흐르는 검끝이 드리운 장소에는 내게 덤벼들려는 도마뱀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들이 한데 뒤섞여 흙먼지를 피워올렸다.
이제 반격할 시간이다.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들이밀었다 이거지...?”
난폭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검날을 거두어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고, 팔에 감아두었던 외투는 그새 발톱에 찢겨 너덜거렸다.
지면 위를 질주하자 세로로 째진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나는 아랑곳 않고 그 콧잔등을 절삭했다.
퍼석!!!
그르르르르륵?!!!!
“아직 안 끝났어 인마.”
강직된 어깨, 날름거리는 혓바닥, 경악으로 점철되어가는 시선.
하늘로 치솟은 칼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되돌아왔다. 빠르고. 유연하게. 매 불침번마다 손질을 게을리하지 않은 검날은 충분히 날카로웠고, 딱딱한 갑피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듯 치달았다.
장검이 놈의 뒷덜미를 절반 정도 베었을 즈음, 둔탁한 뼈의 감촉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왔으나 그대로 끊어냈다.
푸확!!!!
“.....”
선혈.
시뻘건 선혈이 뭉텅이로 튀었다. 잘린 목이 이리저리 날뜀에 따라 허공에 붉은 궤적이 생겨났다. 뿜어나온 피가 투구를 적시고 멍울져 흘려내렸지만, 그 핏줄기가 채 땅을 적시기도 전에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콰르르르륵!!!!
중단 횡베기. 칼날로 공기를 갈랐다. 핏방울을 흩뿌리며 나아간 장검은 도마뱀의 설근을 찢고 비명을 토해냈다. 뒤이어 되돌아온 검날이 놈들의 텅 빈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기리리리리릭!!!
기에에엑!!!!
한 녀석이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자 땅을 박차고 뛰쳐올랐다. 놈은 허공에서 몸을 둥글게 말더니 그대로 땅을 굴러 무시무시한 속도로 육박해왔다.
콰르르르!!!!!
“나 원... 이젠 별의별 녀석을 다 보겠네.”
푸른 털 고슴도치를 연상케 하는 광경. 경로에 있던 자잘한 돌멩이가 터져나갔다. 저 압도적인 질량에 깔리면 순식간에 쥐포처럼 납작해지겠지.
물론,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 점 베기라...’
응축.
손안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기다란 양날검에. 매끄러운 칼날이 한낮의 광휘를 머금자 서느런 빛살을 드리웠다.
귀를 닫자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샛누런 시선들, 근육의 긴장, 손잡이의 감촉과 지면의 단단함.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살인 전차.
그러면,
내게 남은 일은.
격화(?火).
순식간에 치달았다. 살수가 뻗어오는 전방으로. 총탄처럼. 천둥처럼. 바람조차 뒤떨어진. 무시무시한 쾌속.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 칼날을 내지른다.
이 순간 은빛 검광은,
벼락이 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어마무시한 굉음과 함께 시야가 흔들렸다.
흩뿌려지는 살점. 터져나온 체액.
두꺼운 강철을 타고 전해진 갑피를 부수는 감촉 아래, 휘날리는 피보라를 맞으며 바로 섰다.
귓전을 맴돌았던 이명이 가라앉자 지척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어어...?”
“무, 무슨...”
“.....”
피식.
손을 내저으며 낮게 지껄였다.
“물러나 있어. 방해돼.”
“으읏...”
모험가가 어깨를 흠칫 떨며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 당신 혼자서는 무리에요... 사, 상대는 D급 마물이라고요!!”
“모, 모험가님만이라도 도망치세요!! 안 그러면 전부... 당신마저...!”
샌드 리자드라... 역시 D등급 몬스터였나.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냥 앉아서 구경이나 해.”
칼날을 치켜들었다. 감각을 불태운다. 약 열댓 마리. 그새 더 몰려든 모양.
허나 내 앞에선 한낱 칼밥일 뿐.
투콰아아앙!!!!!
힘을 실어 도약했다. 지면이 폭사한다. 휘몰아치는 풍압. 전신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공기의 떨림. 그리고 다시ㅡ
콰과아아앙!!!
번쩍이는 불빛. 울려퍼지는 뇌성.
검극이 빛을 발할 때마다 폭음이 일었다. 지금 나는 천둥 그 자체. 차디찬 안광과 함께 적지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래, 그리웠다.
이 감각. 이 쾌락.
던전에 들어가면 마음껏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진흙을 온몸에 덧바르고 피로 피를 덧칠하는. 그런 싸움. 그 구역질 나고 냄새나는 그런 전투가 그리웠단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는가.
몬스터라곤 감질날 정도로 몰려드는 피라미가 전부. 그따위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순간을 바라왔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겪은 아픔.
육체를 찢어발기는 고통.
마음을 도려내는 증오.
그때마다 불타오르는 듯한 전투의 긴장에서 위안을 찾았다.
누군가는 잘못됐다고, 일그러졌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나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으니까.
“.....”
“저, 저기... 거, 검사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잔뜩 겁먹은 모험가가 눈에 들어왔다. 황량했던 바위산은 몬스터의 피와 살점으로 물들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중 한 명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목숨을 구걸했다.
음...?
“부, 부탁드릴게요... 가, 가진 건 모두 내놓을 테니... 제, 제발 목숨만은...”
모험가들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시선을 내리자 단번에 납득했다.
지금 내 전신은 피와 체액으로 물든 상태. 투구의 뚫린 눈두덩이 아래로 고인 핏물이 뚝 뚝 떨어졌고, 거칠어진 입술을 핥자 비릿한 쇠 맛이 팽 맴돌았다.
“히이이익...!”
방금 내 얼굴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걸로 착각했는지, 소녀가 아연실색하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조금 재밌는데.
잠시간 더 방치해보고 싶었으나 누군가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기에 이쯤 하기로 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아, 네...? 도, 도와주러... 아... 가, 감사합니다...!”
소년 소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갓 이 세계 기준으로 성년이 된 듯이 엣된 얼굴. 그러니까 이 사단이 났지.
“그쪽은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의약품은 있어요?”
“아 그게 실은... 오는 도중에 배낭이 뜯어져서...”
“그럼 저희 걸 빌려드릴게요. 어디 보자... 연고가...”
“괘, 괜찮아요! 전 치유 능력을 쓸 수 있거든요...!”
소녀가 황급히 손사래 치더니 기절한 소년을 바위에 눕혔다.
이어 뭔가를 들이키고 자그맣게 주문을 읊조리자, 따스한 광채가 흘러나와 창백했던 모험가의 얼굴에 핏기를 가져다주었다.
“...걱정 마 톰슨.. 금방 나을 테니까...”
“.....”
아가사 신전 수녀였나.
흰색 수녀복이 낯익다 싶더니 아리엘과 같은 신전 소속 사람이었나 보다.
그제야 턱 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저만치서 뚱한 표정으로 메이스를 만지작거리며 걸어오는 말톤이 보였다.
“역시... 내가 알던 도란은 어디 안 가는군. 뜨거워. 그 심지에 한번 불이 붙으면 꺼지지 않는 성격은 못 고치는 겐가?”
“...미안, 어쩌다 보니...”
“무사히 끝났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었네. 그렇게 혼자서 싸우면 힘들게 파티를 짠 이유가 없지 않나?”
“.....”
“뭐, 잔소리는 이만하고... 멋졌네. 군더더기 없는 솜씨였지. 내 더 붙잡고 싶지만 자네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어 보이는군.”
“문제? 갑자기 그게 무슨... 아.”
말톤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등 뒤를 손짓했다. 녀석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저만치서 우두커니 서 있는 꼬맹이가 보였다.
멋쩍게 뒷목을 긁적이며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녀석에게 다가가자 벌어진 입술 틈새로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도, 도란님은 F급이 아니었어요...?”
떨리는 시선, 다물 줄 모르는 입과 그에 맞춰 올라간 붉은 문양.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지.
“F급 맞는데?”
“아니아니아니, 그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으면서 F랭크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설명해요!!!”
“설명하라고 해도...”
그러고 보니 녀석 앞에서 본 실력을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지금까지는 잔챙이 마물 한두 마리를 사냥하거나 악어때와 교전을 벌인 게 전부였으니까.
팔에 묶었던 외투를 풀며 읊조렸다.
“말했잖아, 나 꽤 세다고.”
“아니아니, 그냥 센 정도가 아니잖아요!!”
“뭘 그렇게 소리까지 지르고 그러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 않아?”
“.....도란님, 도란님은 본인이 얼마나 강한지 자각하고 있어요?”
나?
“글쎄... 한 D랭크 상위 정도는 되지 않을까...? C등급 중에는 마나를 쓸 수 있는 놈들이 많으니까 무리일 테고.”
그 말대로, 순순히 강함만을 놓고 따져본다면 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역마다 등급에 미묘한 차이가 있고, 같은 길드라고 하더라도 랭크 내에서 상당한 수준 격차가 존재하는 만큼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지만.
내 말을 들은 꼬맹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자 어느새 다가온 말톤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흐흐... 내 처음에 말했지 않은가. 실력만큼은 보장하는 친구라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나도 없이 순수 검술만으로 샌드 리자드 무리를 토벌할 정도의 역량인데... 왜 아직까지 F급인 거예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아니 사정도 정도가 있지, 이건...”
라디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닌 게, 당장 왕도에만 가도 나를 능가하는 모험가가 지천으로 널렸다. 손에서 불을 뿜고 번개를 일으키는 그런 초인들에 비하면 나는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다.
부슬비가 아무리 많이 내린다고 한들 운하를 메꾸지는 못하는 것처럼, 나 같이 마나를 쓰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모여봤자 그들을 능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즉, 내 힘은 어디까지나 약자들에게 통용되는 수준. 제대로 된 상대 앞에서는 쪽도 못 써보고 털릴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뒤처리를 해야하는데...”
검에 눌어붙은 피와 지방을 닦아내며 화제를 돌렸다. 주위는 온통 새빨간 살점으로 범벅된 상태. 이대로 있으면 피냄새를 맡고 다른 몬스터가 몰려들 터, 서둘러 자리를 떠야 한다.
헌데 요 도마뱀의 발톱들은 조금 탐난다.
...이걸 어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