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7화 (37/375)

〈 37화 〉 던전

* * *

[037] 던전 #13

“고마워, 안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아뇨 아뇨!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야 당연하죠!!”

샌드 리자드와의 전투 이후, 유용한 소재를 조금 덜어냈다. 우리끼리만이었다면 부산물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을 테지만, 소년 소녀가 두 팔 걷고 나서준 덕분에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이후 멀찌감치 떨어져 더 이상 혈향이 풍겨오지 않는 장소까지 도달하자 라디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손짓했다.

“아, 도란님. 저기 바위 아래가 좋을 것 같아요! 주변이 탁 트여있어서 누가 오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을 거예요.”

“던전에 비라... 그래, 오늘 거처는 저기로 하자. 다들 괜찮지?

“저희야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감사해요...”

모험가 둘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만큼은 함께 묵기로 했으니까.

한 명은 아까부터 기절한 상태고, 나머지 두 명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이에 선뜻 내일 아침까지만 동행하는 건 어떤지 제안했다. 이대로 보냈다간 구해준 보람도 없이 객사할 테니까.

물론 답례로 소정의 식료품을 받긴 했지만.

적당히 배낭을 내려놓자 모험가의 등에 업힌 또래의 소년이 신음했다.

“콜록! 콜록!! 으... 여, 여긴...”

“톰슨!”

“톰슨!! 괜찮아?! 몸은 어때!?!”

소년이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곧 동료들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해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배님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별거 아니니까 괜찮아. 덕분에 이쪽도 꽤 짭짤했고.”

제법 싹수 있는 녀석들이다. 예의 바른 꼬맹이는 싫지 않다. 아직 중학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들이면서 정중하게 말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나름 귀엽고.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웃옷을 펄럭이자 라디가 코를 막으며 질겁했다.

“윽...! 도란님... 어서 씻고 오는 게 좋겠어요. 냄새가 지독해요.”

“그래?”

“네, 피로 완전히 범벅돼서... 조금만 더 지체하면 완전히 냄새가 배어버리겠어요. 빨리 해 지기 전에 씻고 오세요.”

“...알았어, 계곡이 근처에 있다고 했지? 금방 다녀올게.”

질색하며 몸서리치는 녀석을 보자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태로 침낭에 눕기에는 찝찝하기도 하고.

천천히 바위굴을 나서며 손바닥을 뻗었다.

“말톤, 나 대신 텐트 좀 쳐줄 수 있어? 빨리 씻고 올게. 기왕 가는 김에 물도 채워 올 테니까 수통 있으면 이리 내.”

“잠깐, 혼자 다녀오시게요?”

“응, 그런데?”

“...말톤님이랑 같이 다녀오세요.”

“왜?”

“그야 당연히 위험하니까 그렇죠.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혼자 보내면 또 신나서 무슨 짓을 벌일지 어떻게 알아요. 리자드 소굴을 들쑤신다거나, 여성 모험가가 입욕하는 모습을 훔쳐본다거나...”

...네 머릿속에서 나는 대체 얼마나 모자란 놈인 거냐.

“나 그런 성격 아닌 거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 아무튼 잔말 말고 말톤님이랑 같이 가세요!”

“...그럼 너는? 나랑 말톤이랑 같이 가버리면 너 혼자 남게 되는데?”

세 모험가를 힐긋 쳐다보며 속삭였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닥쳤을 때 녀석들이 전력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아직 저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던전 안에서는 모험가와 도적의 경계가 모호하다.

즉, 저 소년 소녀들 또한 언제든 최악의 적수로 돌변할 수 있다는 뜻.

그런 속뜻을 담아 눈빛을 교환하자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직 도란님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비장의 수가 많거든요. 여차하면 그냥 도망쳐도 되고. ...허튼 짓을 벌일 낌새가 보이거든 그냥 다 죽일게요.”

“...살벌하네.”

“폼으로 은 랭크를 달성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처음 조우했을 때만 하더라도 녀석은 지금과 다른 날카로움이 있었지.

어쩌면 나하고 만난 게 녀석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걸까?

그랬다면 좋겠다.

“...그러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텐트도 제가 쳐놓고 있을게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그래.”

*

갈아입을 옷을 챙겨 계곡으로 향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꼬맹이도 함께 오고 싶었으나, 녀석은 아직 내 머리에 대해 모른다.

언젠가는 말해야 할 텐데...

“그래서, 라디한테는 언제 밝힐 건가?”

“....뭐 말이야.”

“우리끼리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자네 머리칼 말일세.”

“...너 가끔 진짜 소름 돋는다. 독심술이라도 쓸 줄 아냐?”

“흐흐.. 독심술이라...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기엔 자네 표정이 너무 정직하군. 생각하는 게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그 습관은 아직도 못 고쳤나?”

“.....”

입을 다물자 말톤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래서, 언제 밝힐 셈인가.”

“몰라 인마.”

“나중에 사고로 들키는 것보다야 지금 속 시원히 털어놓는 게 낫지 않겠는가?”

“모른다니까.”

투덜대며 걸어가 라디 일행이 작은 점처럼 보일 정도까지 멀어졌을 즈음, 지도에 표시된 대로 계곡과 맞닥뜨렸다.

깊은 바윗골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담수는 암벽 표면에 새겨진 무늬가 선명하게 비쳐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이야... 괜찮은데? 난 또 그냥 작은 도랑 정도일 줄 알았는데.”

“썩 운치 있군. 그럼 나 먼저 들어가 있겠네.”

“그러던가.”

말톤이 주섬주섬 옷을 벗자 나도 상의를 탈의하고 그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아냈다. 이곳에서도 청결은 중요하니까.

실제로 모험가 생활을 하다 보면 이따금씩 전염병으로 인해 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에 대한 소문을 듣곤 했다. 마법이나 신성력 등 과학을 대체할 수단이 있어 내가 있던 세계의 중세보단 비교적 상황이 낫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현대에 비하면 턱없이 뒤떨어진 게 현실이니까.

조금만 더 청결에 신경을 쓴다면 그런 일도 줄어들 텐데.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지, 적어도 하수 시설은 갖춰져 있으니...”

“도란, 안 들어오고 뭐 하나. 어서 자네도 입수하게, 시원하다네.”

“알겠어, 이것만 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한번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혹여나 꼬맹이가 몰래 보고 있지는 않을까 가슴 졸이며 투구를 벗자 석탄처럼 새까만 머리칼이 어둑해진 저녁놀 아래 드러난다.

비록 며칠 동안 눌린 까닭에 떡지고 모양도 이상했지만, 투구 밖으로 삐져나오는 불상사를 대비해 늘 칼로 짧게 다듬은 덕에 도저히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수면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말톤의 시선이 느껴져 재빨리 입수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흐르며 피로를 씻어내는 시린 계곡물이 썩 기분 좋다.

“흐으... 시원하네.”

“던전 생활도 나름 괜찮지 않은가? 자네는 어디 가서 마음 놓고 씻어본 적도 드물 테니 말일세.”

“그러게...”

내게 비싼 대중목욕탕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있었을 리 없다. 지금까지 씻을 일이 생기면 우물가에 세워진 칸막이에서 해결했고, 그마저 타인의 눈이 신경 쓰여 인적이 뜸한 새벽 시간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아니, 그때라도 씻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지.

우물가를 감시하는 기사들 탓에 늘 눈치를 보기 바빴으니까.

하물며 던전 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꼬맹이 때문에 투구를 벗고 있는 시간이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잘 때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매번 투구를 쓰고 잤었으니.

억눌렸던 숨을 토해냈다.

무겁게 짓누르던 족쇄를 풀어버린 듯한,

해방감.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며 머리를 넘기자 말톤이 선선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흐흐... 자네 맨얼굴은 오랜만에 보는군.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몇 달 전 일일세.”

“...그러게, 벌써 그렇게 됐나.”

추억에 젖어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의 젖은 금발 사이로는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가 엿보였다. 덤으로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도. ...취향만 정상이었다면 정말 더없이 완벽한 녀석인데.

“...보면 볼수록 외모가 아깝네.”

“그건 무슨 의미인가?”

“뭐, 그냥 말 그대로지 인마.”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응수했다.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무슨 뜻이야.”

“그 잘난 얼굴을 두고도 썩히다니 참 아쉽다고 생각했네.”

“.....”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정적.

가파른 협곡을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골짜기에 잠시 고요함이 맴돌았다. 허나 언제나 그랬듯, 이 녀석과의 침묵에는 마음 한구석을 채우는 편안함이 있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존재.

“....야.”

“듣고 있네.”

“만약에 말이야...”

“.....”

“...만약에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하면 어쩔거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던진 말. 하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기에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

녀석은 내 쪽을 한 번 보고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찰나의 순간이 영겁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입을 열었을 땐­

“그야... 노예로 만들어야지. 서커스단에 팔면 꽤 짭짭할 것 같군.”

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

호흡이 가빠져 온다.

폐 속을 파고드는 냉기에 정신이 가물어지던 찰나, 녀석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농담일세, 자네는 참 알기 쉬워. 뭘 그리 당황하고 그러나.”

“어, 어... 아.... 노, 농담이었구나... 그렇지....”

“그래서, 그 반응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는가?”

아.

고개를 들자 능청스럽게 휘어진 입매가 보였다.

설마 역으로 떠보았을 줄이야.

내 꾀에 스스로 말려들었다고 생각하자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짙은 당혹과 두려움, 고해를 코앞에 두고 망설이게 된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함이 느껴졌다.

주먹을 움켜쥐며 대답을 주저하자 녀석이 시원스레 고개를 돌리며 읊조렸다.

“뭐, 기다리겠네.”

“...뭐?”

“자네가 마음 편히 얘기할 때까지 기다리겠네. 그게 친구 아니겠나.”

“.....”

“....”

고마워.

그뿐이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방금 대화로 알아챈 사실이지만, 녀석은 이미 예전부터 내 출신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테니까.

참 미련하기도 하지.

난 언제나 녀석에게 도움만 받고 있었구나.

마음 한켠에 묻었던 묵은 상처가

조금 씻겨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다녀오셨어요?”

“그래, 넌 안 씻냐?”

“저는 조금 이따가 다녀올게요.”

“그래.”

계곡에서 돌아와 보니 라디가 텐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쐬며 늘어진 모양새가 썩 아늑해 보인다.

근처 나뭇가지에 젖은 옷을 널자 세 모험가가 반갑게 인사해왔다.

“아, 다녀오셨군요!”

“그래, 별일 없었지?”

“네! 도란님이 사냥하신 리자드 고기를 좀 구워봤는데, 드시겠어요?”

“잠깐 이것만 마저 널고.”

일련의 행동을 마친 뒤 모닥불에 둘러앉자, 라디도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보자 비로소 하루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든다.

저물어가는 던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소년이 내게 가장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살코기를 건넸다.

“이 정도면 먹어도 될 것 같아요, 도란 님.”

“고마워, 잘 먹을게.”

“아뇨, 천만에요!”

한 입 크게 베어물자 파충류 고기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조금 흙내가 나긴 하지만 충분히 먹을 만하다.

“맛있네... 베르라고 했던가? 너희는 어쩌다가 마물한테 쫓기게 된 거야?”

“저 부끄럽지만 그게... 샌드 리자드가 무리로 활동하는 몬스터인 줄 몰랐거든요... 라디 님이 말씀해주시고 나서야 알았어요. 한 마리만 잡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잠깐 방심하는 사이 땅굴에서 우수수 뛰쳐나오더라고요...”

“도마뱀이 그렇게 빠른 줄은 처음 알았어요...”

“...조심했어야지.”

주변 지형지물과 마물에 대한 사전 조사는 모험가가 필수로 갖춰야 하는 덕목 중 하나이다. 나는 말톤과 라디가 워낙 해박하니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쨌든, 자업자득이다.

말을 삼키며 수통을 들이켜자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도란 님... 아까부터 쭉 궁금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모험가 랭크를 여쭈어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그건 왜?”

“아... 호, 혹시 결레를 범했다면 죄송해요...! 도란 님 정도의 강자면 무슨 랭크일지 궁금했거든요... 아마 C급은 가뿐히 넘겠죠...? 저흰 아직 전부 F등급이라...”

“.....”

미안, 나도 너희랑 같은 F랭크야.

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귀찮아질 게 뻔하니 적당히 둘러댔다.

“뭐... 대충 비슷해. 그나저나 F등급인데 용케 치료사가 있네? 아가사 신전 사람을 파티원으로 고용하려면 성금을 엄청 많이 해야한다고 들었는데.”

이 세계에서 회복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몇 가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치유를 관조하는 아가사 신의 성전에서 오랜 시간 고행을 마친 신도들만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어지간히 대단한 공적을 세우거나 기부를 많이 한 게 아니라면 아가사 신전 사제를 파티원으로 고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라도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간 교단과 완전히 척을 져야 할 테니까.

“아, 저희는 어릴 적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거든요. 안느도 정식 수녀가 되려면 여러 수행을 쌓아야 해서 그 일환으로 같이 던전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냐... 좋은 친구를 뒀네.”

““네!””

모험가들이 천진난만한 웃음꽃을 피웠다. 새순 돋은 봄나물처럼 따뜻한 광경.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게 느껴진다.

나도 저런 인연을 만들 수 있을까.

“...뭘 그리 빤히 봐요.”

뭐, 나 하기에 달렸지.

“아무것도 아니야.”

온화한 시선을 보내오는 말톤과 새침하게 손을 놀리는 꼬맹이를 바라보며 고기를 거의 다 먹어치웠을 즈음, 안느라고 불렸던 소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기... 라디 님?”

“....?”

“식사가 끝나셨다면 저희끼리 계곡에서 씻고 올까요? 어두워서 혼자 다녀오기 무서운데...”

“음... 그게...”

난처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녀석은 자그마한 손을 말아쥐었다 펴며 후드를 만지작거렸다. 하기야...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좀 그러려나?

내가 도와줘야겠다.

“흠흠...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다정하게 라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야.”

“네...?”

“잘 봐봐, 확실히 예쁘장한 외모긴 하지만 남자잖아. 하긴... 이 정도로 곱상하게 생겼으면 착각할 만도 하지. 나도 처음엔 진짜 여자애인 줄 알았다니까?”

양손으로 녀석의 두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치?”

씩 웃으며 안느를 바라보자,

ㅡ정적.

“어, 왜...?”

이상하리만치 묘한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자, 바짝 얼어붙은 세 모험가와 어쩐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줄줄 식은땀을 흘리는 말톤이 보였다.

...잠깐, 녀석이 당황한다고? 도적 떼가 코앞에 들이닥쳐도 태평하던 놈인데...

“도란... 자네...”

“왜?”

“아....”

말톤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그 짙은 녹안에는 두려움마저 서려 있다.

의아하게 녀석을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야, 꼬맹아. 쟤 왜 저러는지 혹시 알...”

ㅡ오싹.

치욕, 분노, 창피, 황당, 수치, 괘씸, 분개.

시뻘건 얼굴, 그에 대비되어 유독 시퍼렇게 불타오르는 벽안엔 수없이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한계를 넘어서 새빨개진 이목구비.

그리고ㅡ

격노(??).

이글거리는 분노가 푸른 눈동자에 맺히다 못해 찔끔 고여나왔다.

심상치 않다.

그것도 매우.

“꼬맹... 아?”

조심스럽게 녀석을 불러봤다.

대답은 없다.

꽉 다문 이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군.”

말톤이 눈가를 짚으며 읊조렸다.

“친구로서 조언 하나 하겠네.”

“.....”

“도망치게.”

순간,

멀어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꼬맹이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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