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38화 (38/375)

〈 38화 〉 던전

* * *

[038] 던전 #14

“흠... 가면 갈수록 지형이 험난해지는군. 좋은 징조일세. 다음 층이 머지않았어.”

“.....”

“....”

“오, 저건 윙뱃 라쿤이로군! 희귀한 녀석이지만 워낙 재빨라서 잡기는 힘들 걸세. 참으로 안타까워... 내가 한 서른 살만 더 젊었어도 당장 뛰쳐나가 모가지를 비틀었을 텐데 말이야...!”

“.....”

“....”

“저, 저길 보게!! 부, 붉은 꼬리 털새일세!!! 저렇게나 희소한 마물을 여기서 보다니 오늘은 행운이 뒤따르려나 보군...! 안 그런가?”

“.....”

“....”

“에잉... 자네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

“....”

“에잇! 이젠 나도 모르네!!”

““......””

날이 밝자마자 다시 행군길에 올랐다.

세 모험가와는 헤어졌지만, 작별하며 각종 식료품을 받은 탓에 적어도 일주일은 사냥하지 않아도 충분할 터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챙긴 비상식량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로 아껴 먹어야 하고.

아니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

“....”

“...저기.”

­휙!

라디가 쌩하니 내 앞을 가로질러 앞서나갔다.

“.....”

“....”

“.....”

거북하다.

거북하다 못해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배심원 앞에 선 프리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살려줘.

“음.... 저기... 꼬맹아...? 내가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봤는데 말야...”

“닥쳐요.”

“정말 미...”

“닥치라니까요?”

“.....”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개소리!

서리가 아니라 설녀가 와도 라디 앞에선 줄행랑칠 거다!!

재빨리 말톤에게 눈짓을 해 봤지만,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

쓸모없는 새끼.

“...꼬맹아 내가 정말 잘못했다.”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계세요?”

“그러니까...”

시발, 이걸 뭐라 말하지?

1번. 미안, 여장 취미가 있는 남잔 줄 알았지 뭐야.

2번. 어쩐지 겁나 이쁘더라.

3번. 오히려 좋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지만, 무슨 말을 해야 녀석의 기분이 풀릴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마지막 저건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

“거 봐요.”

라디가 홱 고개를 틀더니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갔다.

아니!!

솔직히 내 잘못이 맞긴 한데 조금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다.

녀석은 항상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녀서 얼굴 윤곽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펑퍼짐한 로브까지 걸친 탓에 체형도 전혀 안 드러나고.

지금까지 대화를 수도 없이 해오면서 ‘아! 변성기가 아직 안 왔구나!’ 하고 넘어간 나도 빡대가리지만...

심지어 여자란 걸 알고 들으니 목소리도 엄청 예쁘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녀석을 남자라고 오해한 거지...?

...왜긴 왜야 눈깔이 병신이라서지.

“야, 말톤...”

말톤의 뾰족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넌 언제부터 쟤가 여잔 줄 알았냐?”

그러자 녀석이 익사한 물고기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언제부터긴... 당연히 처음부터 아니겠나. 자네에게 소개시켜주기 전부터 알고 있었네. 너무 당연한 걸 물으니 어이가 없군.”

너무나도 신랄한 말에 가슴을 움켜쥐자 그가 덧붙여왔다.

“자네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작은 촌극으로 그칠 줄 알았지, 설마 그렇게 모두의 면전에서 성대하게 터트리라곤 예상치도 못했네.”

“오해하고 있는 걸 알았으면 얘기를 해 줬어야지!!!”

“허... 어이가 없군. 그걸 말이라 하는 겐가. 중간부터는 제법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길래 당연히 알아차린 줄 알았네.”

“.....”

뭐라 할 말이 없다.

턱 아래 송골송골 흘러내린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간신히 말을 붙였다.

“미안해... 내가 눈이 삐었지.... 난 진심으로 그럴 거라고는...”

“아가리 닥치세요 씨발. 개빡치니까.”

“내가 무릎 꿇고 빌...”

“슬개골에 구멍 뚫어드려요?”

“.....”

아무래도 진심 같은데...

어떡하지...?

어젯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계속 저 상태다.

하긴,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며칠이나 같이 동고동락해온 동료가 자신의 성별을 착각하고 있었는데 오죽할까. 나라도 자존심에 엄청 큰 상처를 입었을 거다. 최근엔 듣지 못했던 욕설까지 내뱉을 정도니...

그러고 보니 원래 이 녀석은 원래 성깔이 사나웠지.

거칠게 발을 구르며 제 갈 길 가는 건 물론이오, 발치에 돌부리가 걸릴 때마다 뻥 차버렸다.

그걸로도 성에 안 차는지 로브 윗단추를 시원하게 풀어제낀 채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소맷자락이 앞뒤로 흔들릴 때마다 번뜩이는 크로스보우의 은빛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봤다.

“...저기에 그늘이 있군. 잠시 쉬어 가도록 하지.”

묵묵히 발길을 옮기던 말톤이 휴식을 제안했다. 버드나무의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 자리를 잡자 라디는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털썩 배낭을 내려놓았다.

“....”

“....”

“.....”

불편하다.

힐끔 곁눈질해봐도 녀석은 묵묵히 수통만 기울였다.

일부러 슬쩍 소리를 내어봐도 마찬가지.

도저히 화가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만...

지금을 놓친다면 영영 사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의지를 쥐어짜내 그 앞에 바로 섰다.

“.....”

녀석이 배낭을 주워들고 자리를 뜨려 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어.”

“.....”

“진심으로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

“.....”

질끈 눈을 감았다.

깊은 적막이 자리한 이곳에는 간헐적인 숨소리와 바람결에 스치는 버들가지만이 요란할 뿐.

지금 녀석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서.

그저 내 진심 어린 사과가 닿기를 바랬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숙인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알겠어요.”

“저, 정말?!! 요, 용서해주는 거야!?!”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들자 녀석이 날카롭게 눈초리를 올렸다.

“누가 용서해준댔어요? 이대로 가면 말톤님도 불편해하실 테니 일단 보류! 보류에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용서하는 거 아니래도....”

다행이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듯했지만, 이전보다는 한층 누그러든 게 눈에 보였다. 표정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라디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제 몸을 기웃거리며 물어왔다.

“...근데 제 어딜 봐서 남자로 착각한 거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별의별 소릴 다 들어보긴 했지만, 그런 오해를 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 그게...”

녀석이 로브를 젖히자 가려져 있던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체형에 맞추어 늘씬하게 들러붙은 레더아머 아래로 여성스러운 라인이 도드라진다. 아이고 시발. 내가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

“미안... 항상 로브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다...”

“....목소리는요?”

“변성기가 안 와서 그런 줄 알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미 제가 몇 번이나 성인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변성기 안 온 어른이 어딨어요?!!”

“할 말이 없다.”

“...그럼 평소에 꼬맹이 꼬맹이 그러는 것도 애칭 삼아 편하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정말 어린애로 생각하는 거였어요?”

“면목이 없다.”

“아니 진짜... 얼굴은요? 아무리 제가 후드를 눌러쓰고 다녀도 보통은 알잖아요... 보통은!”

“그게... 워낙 예쁘장하게 타고난 줄 알았지...”

“참나... 눈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

...근데.

“....그러는 넌, 사실 네 잘못도 조금은 있는 거 아니냐?”

계속 사과만 주구장창 늘어놓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만...! 왜 나만...! 분명히 녀석 잘못도 있는데...!!

라디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네? 지금 뭐라고...”

“아니, 너도 평소에 오해받을 행동 하지 않았냐고.”

“...그게 무슨 소리죠?”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자 유려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뜸 그 면전에 대고 내뱉었다.

“내가 만져도 가만히 있었잖아! 그 왜... 멧돼지 손질할 때도!!”

“윽...! 그, 그건...”

녀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지! 텐트 안에서 딱 붙어 잘 때도 아무 말 안 했잖아!!”

“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말톤님한테도 별말 안 했고!”

“저 새낀 고자잖아!!!”

“그, 그건.... 그, 그래도 던전에서 누가 그런 거로 칭얼대요?! 어린애도 아니고!!”

“저기... 도란? 지금 좀 신경 쓰이는 말이 나와서 말일세... 그리고 라디...? 자네도 거기선 부정...”

“제삼자는 조용히 해!!”“하세요!!”

거칠게 놈의 말을 끊고 화제를 이어나갔다.

“그러는 도란님도!! 저번에 던전 입구에서 꼬치구이 먹을 때!! 그때부터 설마설마했는데 지금까지 계속! 한 번도! 빠짐없이! 저를 여자로 보지 않았던 거예요?!!!”

녀석이 버럭 소리쳤다.

“그럼 당연하지!! 말을 안 해주는데 어떻게 알아!!!”

“씨발!! 말 안 해도 아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네 짧은 식견만으로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넓다!! 나 같은 둔한 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한 네 탓이다!!!!”

“뭐...! 뭐 이런...!!”

“게다가 너! 그때부터 긴가민가했다면 물어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

“다, 당연히 그다음부터는 별일도 없었고 잘해주길래 당연히 의심 안 했죠!! 게다가 누가 그런 걸 착각...!”

“그게!! 바로 나다!!!”

“......”

적반하장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도 머리끝까지 바짝 달아오른 상태.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나도 너한테 서운한 거 있다! 지금까지 우리 좋았잖아!! 근데 그깟 성별 하나 못 알아본 게 뭐라고...!! 동료잖아!!!”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난 네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어!! 같이 한솥밥을 먹는 사이인데 고작 그게 중요해?!!”

그저 지껄이고 볼 뿐.

“던전에 들어오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내 착각이었냐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거냐!!!”

나도 안다.

이 모든 게 터무니없다는 것쯤은.

열꽃처럼 찰나의 순간에 피어오른 충동.

그 충동에 못 이기고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로 되돌아왔다.

아차 싶은 사이 그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그럼!! 지금까지 왜 그렇게 잘해주신 건데요!!! 안면식도 없던 주제에 밥을 사주질 않나! 자기 먹을 몫을 나눠주질 않나!!”

상처받은 얼굴.

“매일 아침 일어나면 웃으면서 수통을 건네는 것도 그렇고!! 식사할 때도 제일 맛있는 부위만 발라서 넘겨주고! 매번 살갑게 장난치는 것도 그렇고!!”

푸른 버들잎이 고운 뺨에 스치자 거칠게 잡아때며­

“제가 텐트를 짊어지는 날이면 제 보폭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주는 거 알아요!! 제가 불침번을 설 차례면 실수인 척, 더 자라고 일부러 늦게 깨우는 것도 알고요!!”

녀석은 감정에 북받쳐, 가슴 깊숙이 묻어놨던 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힘든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하면서...!!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할 때마다 제가 힘들까 봐 배려해서 거짓말한 거 알고 있어요!!”

푸른 눈동자에서 고여나온 눈물에 내 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난폭하게 닦아내자 소맷자락에 얼룩이 번져들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 애벌레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었을 때!! 사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거기에 있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모른 척 한 거 다 알아요!!! 그때 제가 의기소침해 있어서 일부러 기 세워주려고 그런 거죠?!! 안타깝게 됐네요! 제가 다 눈치채버려서!! 거의 속아 넘어갔는데!!”

거친 숨결에 화상을 입었다.

“던전에서 나가면 함께 놀러 떠나자고 하질 않나!! 곤란할 때마다 다정하게 웃으며 나타나 도와주고!! 왜 사람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어 놓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거예요?!! 말해봐요!!!!”

매번 그렇게 자상하게.

그런 건 처음이었는데.

라디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아ㅡ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내가 무심코 해 왔던 행동들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졌음을.

또 단순한 호의를 넘어선 감정을 내게 품어왔음을.

그래서 더욱 상처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

적막이 내리깔렸다.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진중한.

나뭇결을 스치던 바람도, 드문드문 들려오던 소쩍새의 울음도 이제 없었다.

그저 악다문 이 사이로 간간이 딸꾹질만이 들려올 뿐.

이 작디작고 여린 녀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니,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을 껴안고 있었다.

그 작은 몸이 크게 움찔하며 떨쳐내려 했지만­

“미안해.”

“......”

“내가 멍청해서 너를 아프게 했어.”

“.....”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라디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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