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던전
* * *
[039] 던전 #15
“내가 멍청해서 너를 아프게 했어.”
““.....””
“던전에서 나가면 함께 놀러 떠나자고 하질 않나! 곤란할 때마다 다정하게 웃으며 나타나 도와주고! 왜 사람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어 놓는 거예요!!”
““.....””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내 착각이었냐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
“닥쳐 말톤.”
“흐흐... 다 자네들 입에서 나온 소린데 왜 그런가. 흐흐흐흐....”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폭풍우가 휘몰아친 뒤, 나와 라디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묻어왔던 말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면 비로소 진실되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다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도, 도란님!!”
“어, 어... 왜...?”
“아, 아니... 별건 아니고... 그, 그게...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고마워.”
정적.
어색한 기류가 끈적하게 늘어졌다.
화해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다.
라디는 제 속마음이 다 까발려졌고, 나도 녀석이 이렇게나 날 의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더욱이 내가 해왔던 행동들을 당사자한테 듣고 나니 죽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 지랄을 해댔으니 오해를 하는 것도 당연하지...
“흐흐... 이거 원... 계약서에는 분명 다투지 말라고만 적혀 있었지, 이렇게까지 각별한 사이가 되라고는....”
“닥쳐 말톤.”
“라디, 자네는 어떤가? 도란이 좀 믿음직하긴 하지 흐흐...”
“.....”
라디가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말톤은 그럴수록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푸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도란 자네는 정말 늘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땐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
“흐흐... 이거 원... 이젠 농담도 못하겠군...”
“.....”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진전되자 말톤이 미처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은 아까 소외된 걸 마음에 담아두기라도 한 양, 집요하게 우리 둘 사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설마 고자라고 한 게 그렇게나 기분 나빴나.
제길.
“...야 말톤, 2층까지 얼마나 남았냐.”
“흐흐... 알고 싶나? 알고 싶으면 라디에게 물어보....”
“어우...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그냥 가련다.”
재빨리 말을 끊고 돌아서려는 찰나, 아래쪽에서 팔뚝을 톡톡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고개를 내리자 라디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어... 왜...?”
“그... 아,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이 언덕만 넘어가면 보일 텐데...”
녀석이 눈앞에 있는 바위 언덕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조금 더 나아가자 경사면 아래로 크고 작은 텐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래바람에 펄럭이는 천막들에선 일체의 통일감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 너머로 직경이 백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거대한 동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으니까.
“...장관이구먼.”
“....던전이 살아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되네요...”
“미친...”
우리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조금 전까지의 낯간지러운 공기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곧 맹렬한 위화감에 사로잡혀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자, 잠깐... 저기 이빨 같은 게 돋아있는데... 설마 저거 몬스터였던 건 아니겠지...?”
동굴 입구에는 송곳니 형태의 바위들이 나선형으로 돋아나 있었다. 성인 키의 두 배를 웃돌 정도로 거대한 암석들. 마치 저 멀리 전설 속 바다의 괴수 카리브디스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 원대한 규모만 아니었더라면 초대형 마물이 땅속에서 솟아오르다가 그대로 석화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정도.
지금부터 저 안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꼴깍 마른침을 삼키던 찰나, 라디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저거 아무리 봐도 이빨이잖아요...?”
식은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미끄러진다.
“에이 설마... 저렇게 큰 몬스터가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대전쟁 이전에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마물들이 존재했다고 하더군. 우리가 거주하는 이 비스마르크령의 왕도도 드래곤 사체 위에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아예 터무니없진 않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그럼 저게 갑자기 되살아나서 움직이거나 하진 않겠지...? 아니면 이 던전 어딘가에 후손이 살아가고 있다던가.”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이미 보고되었을 걸세, 다만...”
“다만...?”
“저 남쪽 사막 지대에는 거대한 땅굴벌레가 서식한다는 소문이 있네. 심지어 성채에 버금가는 규모가 관측되었다는 기록도 있더군. ...눈앞의 생물은 아마 그 아종이 아닐까 싶네.”
“...앞으로 사막은 가면 안 되겠다. 절대.”
체급이란 게 있다.
내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저런 초대형 마물 앞에선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
차라리 이쑤시개로 코볼트 킹 수십 마리를 상대하는 게 더 승산 있을 거다.
...언젠가 저 몬스터랑 맞닥뜨리게 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가 아무리 운이 없다고는 해도 그런...
“...도란님, 그럼 여기서 한 번 정비하고 가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하층으로 향하는 모험가와 지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이니만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족속들이니까.
조명에 칼날을 비추어 가며 미세한 흠은 없는지 살피던 중, 배낭에서 독병을 꺼내 늘여놓고 상태를 점검하는 라디를 보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꼬맹아.”
“네, 왜요?”
“혹시 네가 지닌 독 중에서 나도 쓸만한 게 있을까?”
“뭐, 뭐라고요?!”
녀석이 돌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손안에 든 용기를 툭 떨어뜨렸다. ...뭘 그렇게 놀라냐.
“반응이 왜 그래. 혹시 모르잖아? 하나쯤 가지고 다니다가 유용하게 쓸 날이 올지. 작은 병에 담아서 품에 넣으면...”
“잘 생각하셨어요!!”
짝. 라디가 손뼉을 치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독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신났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할 정도.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이 생겨 기쁜 걸까?
“...그렇게 좋아?”
“물론이죠!! 드디어 도란님도 독의 진가를 알아보는 거네요! 어디 보자... 초심자가 다루기 쉬우면서도 다용도로 쓰기 좋은게... 아! 이게 좋겠어요!”
“어디 보자... 바트.. 바트라톡신?”
“네, 저 멀리 열대 우림에서 서식하는 개구리의 피부를 짓이겨서 추출한 건데 어마어마한 맹독이에요! 이거 한 방울이면 호랑이도 사지가 마비돼서 꽥 뻗어버린다고요! 어때요?!”
“...이렇게 무시무시한 걸 내가 쓸 수 있을까?”
“에이, 뭐 어때요. 바보도 아닌데 설마 착각하고 마시기라도 하겠어요? 피부에 닿아도 잘 씻기만 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아, 그래도 점막에는 안 닿게 조심하셔야 해요? 유리병에다가 조금 덜어드릴 테니 잠시만 있어 봐요.”
라디가 병뚜껑을 열더니 배낭에서 꺼낸 자그마한 공병에 조심조심 독을 옮겨담았다. 쪼르르 흘러내리는 투명한 초록빛 액체가 제법 보기 좋았으나 그 실체를 알고 나니 사뭇 섬뜩하기도 하다.
녀석은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은 뒤 끈으로 확실하게 밀봉하고 내 손에 병을 쥐여주었다.
“자, 여기 있어요. 혹시라도 위급할 때 쓸 수 있으니까 늘 품에 가지고 다니세요. 급하면 얼굴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적을 실명시킬 수 있으니 충분히 유용할 거예요!”
“아... 그, 그래 알겠다.”
“....? 왜 그렇게 당황해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봤다.
이어 한 박자 늦게 후끈 뺨을 물들이며 오이를 본 고양이마냥 화들짝 물러났다.
“.....”
“....”
어색하게 고개 숙인 채 침묵하고 있자니 보다 못한 말톤이 툭 내뱉었다.
“...염병.”
*
잠시 후,
우리는 입구에 늘어선 텐트들을 지나쳐 시커먼 아가리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심지어 말톤도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셨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구멍 안쪽까지 나선형으로 돋아나 있는 이빨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어둡군... 조심해서 전진하는 게 좋겠네.”
말톤이 단검으로 부싯돌을 긋자 기름 랜턴에 불똥이 옮겨붙었다.
녀석의 뒤를 쫓아 나아가던 중, 동굴 구석구석을 두루 살피며 읊조렸다.
“...여긴 발광 이끼도 없나 보네. 몬스터의 체내라서 그런가?”
“음... 아마 그렇겠죠?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지형이 아닐까 싶은데... 어마어마한 규모네요. 이런 마물이 살아생전에 먹어치웠을 양을 생각하면...”
“...한 끼 식사가 베라스틴의 모든 시민들이랑 맞먹겠네.”
동굴 내부는 구불구불하게 굴곡진 원형 통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랜턴의 작은 불씨로는 차마 천장 높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 마치 냉전 시대에 비밀리 만들어진 미사일의 발사로를 보는 것만 같다.
“...꼬맹아.”
“네, 말씀하세요.”
“이 동굴이 던전 1층과 2층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라고 했잖아.”
“네, 맞아요.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한에서는요.”
“그럼 이 마물이 여기서 절묘하게 굳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던전 구획들은 밝혀지지 않았겠네?”
“음... 아마 그럴 거예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유실된 고대 문명들이 많으니까요. 유일한 출입구가 매몰되거나 아니면 통째로 가라앉는다던가... 그래서 큰 지진이 일고 나면 유독 던전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잦은 이유도 그때문이고요.”
“흠흠... 도란 자네가 놓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말일세...”
“뭔데 말톤.”
“대체 어떤 존재가 이렇게 거대한 마물을 한낱 돌덩어리로 만들었을지 궁금하지 않나?”
“듣고 보니...”
그래.
너무 스케일이 큰 나머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결과에는 필시 원인이 있을 터, 이 세상 어딘가에 이렇게나 거대한 마물을 통째로 석화시킨 괴물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행했을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오한이 드는 듯하다.
“...그런 존재가 있을까요...? 이렇게 커다란 몬스터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건 초일류 마법사가 여럿 달라붙어도 힘들 것 같은데...”
“흐흐... 어쩌면 인간이 아닌 무언가일 수도 있잖은가?”
“그런 존재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을까...?”
“그야 나란들 알겠나. 대전쟁 때 죽었을 수도, 어쩌면 우리 틈새에 섞여 살아갈 수도 있겠지. 이 정도의 마력을 지닌 생명체라면 적어도 늙어 죽지는 않았을 것 같군. 혹시 아나, 사실 알고 보니 그게 자네일 수도...!”
찰나, 말톤이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톤님...?”
“말톤?”
등불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무언가에 심히 놀란 듯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칼을 빼들며 주변을 살폈으나 짙은 어둠이 팽배한 통로에는 길게 늘어진 우리의 그림자 뿐, 어떠한 인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잘못 본 모양일세. 계속 나아가도록 하지.”
말톤이 뒤돌아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묘한 녀석의 태도에 라디와 시선을 교환했지만, 곧 떨떠름하게 고개를 젓고는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석벽에 메아리치는 음산한 잔향에 귀기울이며 십여 분 정도를 더 나아갔을 즈음,
“...정지.”
“나도 봤네.”
“저도요.”
기척을 최소한도로 줄이며 자리에 멈춰섰다. 동굴 건너편으로부터 아른거리는 불빛을 목격한 까닭. 말톤이 옷자락으로 랜턴을 덮자 확연하게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함정일까?”
“가까이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발밑을 경계하면서 나아가도록 하지. 주의를 교란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르네.”
“그래.”
예기치 못한 상황. 이런 외길에서 급습이라도 당하면 심히 곤란해진다.
하지만 불빛 근처까지 도달하자 단박에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모험가들이 저기서 뭐 하는 거지? 한두 명도 아니고 족히 쉰 명은 되어 보이는데...”
“도적도 아닌 것 같아요. 잠복한 인원도 없고 우리가 온 걸 아예 신경도 안 쓰는 눈치에요.”
“어째선지 다들 초조해 보이는군. 내가 한번 다녀오지.”
말톤이 랜턴을 거머쥐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긴장한 눈빛으로 추이를 지켜봤지만, 다행히 녀석은 별 마찰 없이 터벅터벅 되돌아왔다.
어깨에서 힘을 빼며 물었다.
“뭔 일이래?”
“흐음... 보아하니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통로를 가로막고 있다는 모양일세.”
“정체불명의 몬스터요? 대체 어떤 마물이길래 다들 여기서 서성거리고 있는 거예요?”
“.....”
“...말톤님?”
“흠... 그게 말이지...”
녀석이 팔뚝을 거칠게 문지르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들 잘 모르겠다더군.”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물 때문에 발이 묶였는데 정작 그게 무슨 마물인지 모르다니...”
“...직접 듣는 게 빠를 것 같군. 저길 보게나.”
말톤이 전방을 턱짓했다. 녀석이 가리킨 장소에는 한 사내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연설을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말톤이 나직하게 덧붙혔다.
“아마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그 정체불명의 몬스터를 공략해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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