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40화 (40/375)

〈 40화 〉 던전

* * *

[040] 던전 #16

“크흠흠...! 자!! 다들 여길 봐주십시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단상 겸 바위 위에 올라선 남자가 목청을 높이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장비가 제법 쓸만하다는 점을 제외하곤 평범한 모험가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의 등 뒤로는 노련해 보이는 동료들이 줄지어 나립해 있었다.

“일단 얘기하기에 앞서, 저희는 라이든 길드의 C급 모험가 파티입니다!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선 이유는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통로를 가로막은 정체불명의 마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목적입니다!!”

남자가 모험가 패를 들어올리며 더욱 언성을 높였다.

“해당 몬스터와 조우하고 살아나온 모험가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놈은 기존의 생물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마물이라고 합니다!! 무려 그림자처럼 새까만 부정형...”

“아니, 거 참 그깟 몬스터 한 마리가 뭐 대수라고... 그냥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냐?”

“다들 겁쟁이로군! 우린 바쁜 몸이오!! 이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시간 낭비했네, 가자!”

몇몇 모험가가 반발하고 나서자 남자가 나직하게 읊었다.

“이미 C급 모험가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당했습니다. 가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지는 않군요.”

소란스럽게 동굴 너머로 발길을 옮기던 사내들이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남자는 그 모습을 흘겨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도 직접 그 마물을 목격한 건 아니지만 생존자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들었기에 쓰러뜨릴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감히 발언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그 정체불명의 마물을 무찌르러 갑시다!!”

이후로도 짧은 문답이 오가고 마침내 남자가 연설을 마치자 곳곳에서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개중에는 주먹을 움켜쥐고 함성을 내지르는 사내들도 있다.

탐탁지 않게 그들을 흘겨보고 있자니 라디가 내 귓전에 대고 속삭여왔다.

“...모두 한패에요. 자세히 보면 전부 같은 외형의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어요.”

“...용케 알아챘네. 어떻게 생각해?”

“글세요...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적어도 도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어째서?”

눈썹을 추켜올리며 묻자 녀석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작게 도리젓고는 조용히 내뱉었다.

“....피.”

“피?”

“...피 냄새가 달라요. 사람의 혈흔은 파충류나 절지동물보다 훨씬 뜨듯해서 더 역한 냄새를 풍기거든요. 물론 멧돼지나 사슴 같은 포유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장비의 통일성을 봤을 때 아마 도적은 아닐 거예요.”

“...그럼 사람들을 불러모아 미끼로 쓰려는 작전일 수도 있겠네... 말톤 넌 어떻게 생각... 말톤?”

“...아, 불렀는가?”

“뭐야 너답지 않게... 어떻게 할까? 2층으로 갈려면 무조건 여길 통과해야 하는데...”

“...별수 없지 않나. 우리도 원정대에 합류하도록 하지.”

“.....”

말톤은 어쩐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별일이네.

*

토벌대가 결성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랭크 두 명에 F등급 한 명... 그냥 대충 후미에서 따라오기나 하슈. 보조 계열이면 저짝으로 가고.”

창을 걸머진 사내가 우리의 모험가 패를 확인하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뭐, 액면상으론 우린 풋내기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이니까.

토벌대는 전위가 약 서른 명, 중위가 열댓 즈음, 나머지는 후위로 이루어졌다. 급조된 파티인 만큼 단결력이나 매끄러운 연계는 기대하기 힘들 테지만, 그 수가 수인지라 어지간한 몬스터는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을 터였다.

“...도란님, 정말 저 없이도 괜찮으시겠어요?”

“난 네가 더 걱정이다. 괜찮겠냐?”

“네, 저야 제일 안전한 위치니까요. 하지만 도란님은...”

“뭐, 우리도 맨 뒤니까 포위라도 당하지 않는 한 별일은 없겠지. 게다가 너도 알잖아? 나 엄청 센 거.”

“......”

일부러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녀석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접근전이 어려운 라디는 필연적으로 중위에 가담해야 한다. 즉 나와 말톤과는 떨어져야 한다는 말. 우리는 후방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까.

“...이쪽은 마법사도 한 명 있다고 하니 괜찮을 거예요. 다만...”

“다만?”

“도란님... 잠깐 귀 좀 가까이...”

자세를 낮추자 라디가 내 어깨를 붙잡고 귓가에 속삭여왔다.

“저기... 왠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불길한 느낌?”

“...네. 이게 뭐라 설명할 수는 없는데... 제 감은 보통 잘 적중하는 편이거든요... 조심하세요 도란님.”

“흐흐... 또 도란만 챙기는 겐가?”

“어휴... 말톤님도 조심하세요.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

“고맙네, 자네도 조심하게.”

“자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임시 리더를 맡은 사내가 소리쳤다. 우리는 그 외침을 기점으로 동굴 안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덜그럭 덜그럭 메아리치는 병장기 소리를 들으며 심층부에 접어들었을 무렵, 점차 통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찰팍찰팍...

“.....”

습기를 머금고 흘러내리는 석벽. 바닥에는 차가운 지하수가 고여 잔물결이 일었다. 사방에 돋아난 기암들은 하나하나가 음산한 기운을 물씬 풍긴다.

아마 저것들은 살아생전에 융털 역할을 하던 게 아니었을까.

수면에 비쳐 일렁이는 랜턴 불빛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그나저나 부정형 몬스터라니... 신기하네.”

“부정형 몬스터를 상대해보는 건 처음인가?”

“아예 처음은 아냐. 예전에 슬라임을 잡아 본 적이 있거든. 근데 이번 마물은 아무리 들어봐도 슬라임은 아니지 않나?”

해당 마물과 조우하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빠져나온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놈은 어떤 생물로든 변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거미의 외형도, 늑대나 인간의 모습도 흉내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적어도 상상 내의 범주에서는 뭐든 가능하겠지.

하지만 결정적인 결함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놈이 흑빛 일색의 색조를 띄고 있었다는 것. 마치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그을음처럼. 흉흉한 붉은 안광을 발하며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모양새는 연옥의 마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그런 마물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말톤, 무슨 몬스터인지 감이 와? 여기 있는 사람 중에는 네가 제일 경험이 많을 거 아냐.”

“흠...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나도 금시초문일세.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몬스터는 그리 흔하지 않지. 게다가 시커먼 색상이라...”

말톤이 턱을 짚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 또한 칼자루를 매만지며 고뇌했다.

‘얼마나 강할까...’

적어도 코볼트 킹 보다는 훨씬 강력하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몬스터 중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른다. C랭크 모험가 파티도 당했다고 하니 최소 B등급은 되겠지. 아마 그 이상까지는 안 갈 테지만.

만약 놈이 A급 몬스터였다면 녀석에 대한 정보가 나돌 리 없다.

그야 도망칠 새도 없이 모두 전멸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비단 그 마물뿐만이 아니다.

“정지!!”

앞서 걷던 모험가가 고함을 터트렸다.

“이제 슬슬 레서 스파이더가 등장할 거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레서 스파이더.

사람 머리통 크기의 거미형 몬스터. 독도, 날카로운 발톱도, 끈질긴 거미줄도 없다.

맷집 자체도 별 볼 일 없는 F급 몬스터지만 놈들의 진가는 무리를 지어 출몰할 때 나타난다.

거미들은 한 번에 세 자릿수를 웃도는 양의 알을 산란하니까.

밤 부둣가에 범람하는 시꺼먼 파도처럼, 수백 혹은 수천 마리의 레서 스파이더 떼가 일시에 달려들면 어지간한 모험가는 대처할 수 없다. 더욱이 어두운 장소에 둥지를 트는 습성 탓에 대부분의 교전이 협소하고 캄캄한 곳에서 벌어진다는 것도 한몫할 거다.

역량껏 검을 휘두르기도 어려운 굴속에서 벽과 천장을 타고 기어오는 수백 마리의 레서 스파이더는 악몽 그 자체이다.

따라서 모험가 길드에서는 놈들이 군집을 이루었을 경우 위험도를 D에서 C급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작은 악몽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정도고.

“...근데 어디서 갑자기 레서 스파이더 무리가 나타난 거야? 앞서 지나갔던 모험가들이 다 토벌하고 지나간 거 아니였어?”

“이 통로도 나아가다 보면 여러 갈림길이 나온다고 하더군. 아마 그중 한 곳에서 개체 수를 불려나가던 게 아닐까 싶네.”

“그래? ...그나저나 너 표정이 안 좋다?”

“난 거미들이 싫네.”

말톤이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

“...뭐야 니가 싫어하는 몬스터도 있었어?”

“...거미는 영 취향이 아닐세. 예전에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 독니에 물려서 고생한 적이 있으니 말이네. 그때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

녀석이 주저리주저리 불평을 늘어놓았다. 눈이 너무 많다느니, 다리가 너무 길다느니... 놈의 미적 기준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 더 징그럽게 생긴 몬스터에도 껌뻑 죽었으면서.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자니 저 앞에서 나아가던 라디가 불현듯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마물이 근처에 있다.

“...말톤.”

“나도 봤네.”

오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어둠 속을 주시하자 바위 뒤에서 빛나는 여덟 개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말톤이 바라보는 방향에도 딱정벌레처럼 반짝이는 네 쌍의 붉은 눈알이 숨죽이며 우리를 지켜보는 중이다.

“...음습한 건 여전하네. 다른 모험가한테도 말할까?”

“그럴 필요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군. 조용히 나아가도록 하지.”

모든 마물이 인간을 보자마자 달려드는 건 아니다. 레서 스파이더는 사냥감을 발견하더라도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덮치는 습성을 지닌 만큼, 일반적으로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한다면 이미 놈들에게 포위된 상태라고 봐야 한다.

미연에 놈들의 존재를 알아챈 라디를 보며 새삼 감탄하고 있자니, 슬슬 모험가들도 눈치채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저거 레서 스파이더 아냐?”

“...맞네. 이제 곧 몰려오겠구먼.”

“다들 전투준비!!!”

“중위는 앞으로 나서지 말고 보조에 전념해!!”

모험가들이 제각각 무기를 빼들었다. 과연 2층 진출을 노릴 정도의 실력자들인지라 마물이 등장해도 당황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들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다.

“에힝, 거미는 싫네만...”

“그렇다고 혹시 이번에도 떠넘기면 진짜 뒤진다.”

“...나도 그 정도 상황판단은 할 줄 아네.”

말톤이 설익은 웃음을 흘리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녀석이 랜턴 대신 메이스를 치켜들자 둔중한 광채가 쇳덩어리를 타고 흘렀다.

뒤이어 한 마법사가 조명을 피워올리는 걸 기점으로 사방에서 거미들이 쇄도해왔다.

­딸깍! 딸깍!

­따그닥!!

“온다!!”

발도(??). 억눌렀던 힘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지척까지 다가온 두 마리를 베었다. 잘려나간 단면에서 푸른 체액이 뿜어나오고 물웅덩이에 거친 물결이 일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놈들의 골통을 가르고 시커먼 파편을 퍼트렸다.

­딸칵!

지척에서 한 놈이 용수철처럼 뛰어올랐다. 검을 회수하기에 늦다. 찰나의 순간에 판단을 마친 나는 손목을 꺾어 검격의 궤도를 바꾸었다. 오른쪽으로 치닫던 검날이 삽시간에 진로를 틀어 세 마리를 벤다.

­푸확!!

“......”

치솟는 핏줄기. 키위 껍질처럼 무른 외골격이 허물어졌다. 이내 더 많은 거미들이 육박해왔지만, 투구 속 검은 눈동자는 놈들의 행각을 전부 좇고 있었다.

거미들이 일직선상으로 정렬하는 순간을 노려 검을 내려찍자 짤막한 단말마가 터져나왔다.

“가세하겠네!”

말톤이 난폭하게 메이스를 휘둘렀다. 뱃전이 울릴 정도로 묵직한 타격. 철덩이는 공동을 난폭하게 헤집고 거미들의 통통한 배에 적중했다. 그 가공할 일격에 얻어맞은 적들은 흔적도 없이 짓뭉개지거나 공중에 뜬 그대로 으스러지며 푸른 꽃을 흩트렸다.

­키익...!

“...오냐.”

네 쌍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곤충 특유의 지성이 희박한 눈빛. 그 시선에 맺힌 건 오로지 먹이에 대한 집념과 본능뿐. 딸깍거리는 앞니와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시커먼 다리에선 부드러운 살점에 이빨을 박아넣고 말겠다는 욕망이 전해져왔다.

하찮다.

거칠게 발을 내디뎠다. 왼손 주먹을 거머쥔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자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뭉개버렸다. 뽑혀 나온 주먹에 푸른 장기가 딸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내질러 앞다리를 움켜쥐었다.

­.....!!

거미가 움찔하며 몸서리쳤다. 턱이 파르르 떨리며 내 손목에 앞니를 박아넣고자 발버둥쳤지만­

­콰직!!!

그대로 내리쳤다. 바위에 부딪힌 거미가 형체도 남기지 않고 터져나갔다. 나는 시큰둥하게 물웅덩이 속으로 잠겨들어가는 살점 덩어리들을 괄시하고는 다시금 학살을 이어나갔다.

“......”

거미.

난 거미들이 싫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는 특히 더 싫다.

모험가가 되고 난 뒤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마물을 사냥해 돈을 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비록 정식 사냥 의뢰는 못 할지언정 몬스터의 소재를 내다 파는 것만으로도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성문 밖으로 나섰다. 이미 더한 상황 속에서 생존을 거듭해왔으니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어떠한 몬스터가 덤벼들어도 펄떡이는 심장을 꿰뚫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끔찍한 오만이었다.

거친 소나기를 피하러 잠시 들린 동굴, 그곳에 거미 마물이 잔뜩 살고 있었다. 소리소문없이 배후를 덮쳐온 놈들에게 나는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했고, 사지를 붙들려 굴 깊숙한 곳 고치 속에 갇혀버렸다.

절망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거미들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려두지도 않았다. 놈들은 내게 치사량에 약간 못 미치는 극독을 주입했고, 매 순간순간 온몸의 혈관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런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굴 안에는 먼저 잡혀 온 인간들이 있었다. 네 명 정도.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희망찬 얘기를 나눴다. 좋아하는 음식, 연인, 꿈...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셋째 날. 한 명이 죽었다. 보조개가 인상 깊던 소년. 왕궁 재단사가 꿈이라던 소년은 목에 큰 이빨 자국을 남긴 채 시퍼렇게 변해 죽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푸른 하늘도, 그 하늘을 본떠 구상했던 물망초빛 홀터 드레스도 같이 죽었다.

넷째 날. 또 한 명이 죽었다. 콧수염이 매력적이던 중년 남성. 귀족 자택의 정원사로 일해오던 그가 결국 죽었다. 오늘날까지도 사인은 모른다. 고열에 시달리던 밤이 지나고 옆을 돌아봤을 땐 이미 혀가 가슴팍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가 피워올렸다는 최고의 한 송이. 그 붉은 장미꽃을 꿈속에서나마 보고 갔기를 바랄 뿐.

다섯째 날. 또 한 명이 죽었다. 지구였다면 이제 갓 대학생이 됐을 법한 소녀는, 그간 품어왔던 화가의 꿈 대신 거미의 새끼를 잉태하고 떠났다. 고통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애원했다. 살려줘 도란. 아파 도란. 살려줘.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머지 한 명은 어느 순간부터 없어졌다. 그 흔한 피웅덩이 하나 남기지 않고. 어쩌면 처음부터 내 뇌가 만들어낸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밤마다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내가 마주할 수 있었던 거라곤 간간이 상태를 확인하러 오는 거미뿐. 놈들은 내 망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견뎠다. 그게 먼저 떠난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속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버티고, 또 버텼다.

혼자가 되고 딱 일주일이 되던 날,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드디어 독이 내 몸을 집어삼키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희뿌연 시야 속 뜨거운 연기가 비강으로 들이찼고, 고온의 열기가 거미줄을 녹이고 옷과 살갗을 그을렸다.

마침내 해방되어 가까스로 거미굴을 기어나온 내 눈동자에 비친 광경은 숲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었다. 모든 것을 소독하는 멸화의 화염이 지독한 열기를 내뿜어 폐를 헤집었다.

그렇게 홀로 살아남았다. 언젠가 거미굴에 다시 와봤지만 사람들의 사체는 온데간데없었다. 푸른 꿈의 소년도, 콧수염의 중년도, 미소가 매력적이던 소녀도 없었다. 어쩌면 전부 내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시 또 혼자.

그렇게 방황하다 말톤을 만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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