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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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던전 #17
키이익!! 키에에엑!!!
몸통을 짓밟자 레서 스파이더 유체가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털투성이 다리가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발에 점점 체중을 늘려갔다.
콰직!!
압력이 한계를 넘어서자 가죽 샌들이 외골격을 꿰뚫었다. 동시에 미끌거리는 살점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축 늘어진 몸체로부터 발바닥을 들어올리자 끈적한 체액이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내장으로 범벅이 된 샌들을 물웅덩이에 대충 문대며 고개를 들자, 말문이 막힌 말톤과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의 시선을 보내오는 모험가들이 보였다.
“....자네 레서 스파이더한테 원수라도 졌나...?”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거미 싫어해.”
“아니 그건... 분명 싫어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말톤이 짓밟힌 거미 사체로 시선을 떨구었다. 모험가들에 이르러서는 무기를 늘어뜨리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습기 어린 랜턴에 비친 옆얼굴은 창백하기까지 하다.
“야, 야 저거 봤냐...?”
“저 사람 혼자서 백 마리도 넘게 죽였어...”
“게, 게다가 저거... 지금 마물을 생으로 물어뜯은 거 맞지...?”
“저렇게 잔인한 사내는 처음 보는군...”
“우읍...!”
“.....”
모험가들이 떠드는 말을 무시하며 칼날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거미 털들을 떼어내고 있자니 저 앞에서 갈색 머리의 남자가 걸어왔다. 이번 토벌대의 임시 리더를 맡은 연설하던 남자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더니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저기... 이 거미들을 해치운 게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아뇨아뇨...!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진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쪽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혹 트집이라도 잡으려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예상보다 많은 레서 스파이어가 덤벼든 탓에 부상자가 꽤 나왔다. 심지어 중간부터는 상위종인 래피드 스파이더들도 간간이 섞여 등장했으니.
내가 후방을 맡아주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환자들이 속출했겠지.
“별거 아닙니다.”
“상당히 겸손하시군요. 좀 더 생색내셔도 되는데... 혹시 모험가 등급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F랭크.”
“네?”
“F랭크입니다.”
눈앞에 남자가 어버버하며 당황했지만 내 알 바 아니다.
시큰둥하게 검을 갈무리하자 라디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오다 멈칫하고는, 묵묵히 등에 달라붙은 거미 털을 떼어주었다.
“...고마워.”
“....가만히 계세요. 떼기 힘드니까.”
그 발언을 끝으로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거겠지. 이런 사소한 배려가 내겐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그럼 다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으니 다시 전진하도록 하죠. 이제 곧 그림자 마물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나오니까 다들 긴장해 주세요!”
내가 무표정으로 일관하자 갈색 머리 남자는 전열로 되돌아갔다. 다시금 이동을 재개하니 주변 힐끗힐끗 모험가들이 쳐다봐왔지만, 그들을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야, 말톤.”
“무슨 일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레서 스파이더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거미들은 자네가 전부...”
“아니 그거 말고.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네만.”
“.....”
왜.
어째서.
이 많은 모험가 중 그 누구도.
이 소름끼치는 생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거지.
좋지 않다.
그간 사지에서 단련되어온 예감이 경종을 울렸다.
뭐가 됐든 좋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자네 표정이 몹시 안 좋네. 속이 거북하면 지금이라도 물러나겠는가? 토벌대에도 잘 설명하면...”
“늦었어.”
“늦었다니 대체...?”
“놈이 지켜보고 있어.”
“그게 무슨...”
최초로 눈치챘던 건, 레서 스파이더를 도륙할 때였다. 놈들은 단순히 본능에 따라 우리를 공격했던 게 아니었다. 마물의 틈바구니에 치여 살아온 나이기에 알아챘다. 거미들의 붉은 눈동자에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심연(??).
어둠, 근원적인 공포, 헤어나올 수 없이 깊은 나락에 가라앉은 무언가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동굴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놈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입가에 환희를 머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톤.”
“말하게.”
“만약 일이 틀어지면... 꼬맹이를 데리고 도망쳐.”
“...도란, 자네 정말로 괜찮은가...? 무슨 일인지 일단...”
“늦었어.”
검을 뽑아들었다.
음영이 짙어지고 있다.
놈이 온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일순간. 느닷없이 암석들이 터져나갔다. 곳곳에 돋아났던 바위가 폭발하며 날카로운 파편을 흩뿌린다.
“으아아아악!!!”
“씨발...!”
“하, 함정이다!!!”
“마법사를 보호해!!!”
모험가들이 혼비백산했다. 처절한 비명과 이명이 귓전을 희롱한다. 총탄처럼 날라온 바위 파편에 살갗이 찢겨나갔고, 전사들이 제 몸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뒤이어 폭발적으로 팽창했던 그림자들이 별개의 의지를 지닌 듯 꿈틀꿈틀 모여들더니 점차 형상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건 뭐야?!!”
“한두 마리가 아니잖아!! 얘기가 다르다고!!!”
거대한 거미에 더불어 고블린, 늑대, 코볼트, 아나콘다 등 일체의 통일감 없는 생명체. 아니, 과연 저걸 생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놈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로 덮여 있었고, 안구가 있어야 할 장소에는 희번뜩한 눈동자 대신 붉은 광채가 남실거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코,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다.
“제길...!”
토벌대는 기습을 당해 진형이 무너진 상태. 이대로 가면 끝장이다. 누군가 나서서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말톤.”
“자네 설마...!”
“라디를 부탁해.”
그 말을 끝으로 뛰쳐나갔다. 짙은 어둠 속,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시야가 암전되어간다.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가, 원초적인 두려움이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두렵다.
심장이 요란하게 펄떡댔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미끌거렸고 입안이 비쩍 타들어 갔다.
지금까지는 사냥이었다면 이젠 아니다.
목숨에 목숨을 내거는 대등한 전투. 사소한 실수 하나가 사멸로 귀결될 수도 있다. 평소의 나라면 이딴 희생 따위 고려할 가치도 없이 집어치웠겠지. 다만 이번만큼은
지켜야 한다.
꼬맹이가 보여줬던 미소를 떠올리며 떨리는 몸을 채찍질했다. 굳어버린 발걸음을 내디뎌 웅덩이를 지나쳤다. 꿈틀거리는 음영 한폭판으로 파고들어 전방위로 검을 휘두른다.
파형(??).
은백색 물결이 그림자 사이를 갈라놓았다. 연마된 장검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파도처럼 퍼져나가는 검격이 어둠을 밝히며 검은 형체를 찢어발기자 흉흉한 붉은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슈화악!!!
고블린 형태의 그림자가 시커먼 팔뚝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가르며 쇄도해온다. 나는 허리를 비틀어 피하고, 강하게 발걸음을 내디뎌 자세를 바로잡았다. 놈의 무감각한 시선이 다시 내게 향한 순간 횡으로 칼날을 내둘렀다.
상반신이 찢겨나간 그림자 마물은 물에 젖은 짚단을 베는 듯한 감각과 함께 육신이 허물어졌다.
“...좋아.”
통한다.
가물거리는 외형 탓에 아무 저항 없이 통과해버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벨 수만 있다면 승산도 있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입가에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이 맴돌았다.
......!
지척에서 발톱이 날아들었다. 어둠에 동화된 일격. 고개를 숙여 흘려보내고, 칼날을 내질러 놈의 멱을 꿰뚫었다. 동시에 첨예한 이빨이 들이닥친다. 나는 몸을 던져 회피하고, 웅덩이가 고인 바닥을 굴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쐐애애액!!
응수. 손아귀의 장검을 내질러 미간을 관통했다. 구멍 난 페인트통처럼 검은 그림자가 울컥 쏟아진다. 이어 횡으로 크게 칼날을 그으며 선회하자 날카로운 사선에 닿은 그림자들이 속절없이 터져나갔다.
쩌저적...!!
거대한 뱀 형태의 그림자가 아가리를 쩍 벌려왔다. 사람 한 명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비대한 주둥이. 나는 기민하게 회피하며 바위를 박차고 도약했다. 이어 공중에서 회전. 깔끔한 돌려차기로 측두를 후려찼다. 뒤이어 수많은 그림자가 마수를 펼쳐 오지만,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검극을 휘둘러 쫓아냈다.
때로는 난폭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춤추듯 검광이 흩날린다. 은빛 물결이 파도칠 때마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어울리지 않는 야화(?花)가 피어오른다. 그 짙은 향기에 아찔해질 즈음 내 몸 곳곳에도 붉은 피가 흘러넘쳤지만, 이 정도로 멈춰 세울 수는 없다.
“.....”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입안에 피가 고여 비릿한 향이 팽 맴돌았다.
극한의 몰입으로 멀어졌던 감각이 서서히 되돌아오자 짙고 짙은 어둠 속,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솜털을 스치는 기류가 적들의 숨결을 말한다. 찰랑 찰랑 발목을 간질이는 잔물결이 그들의 살의를 전해주었고, 오싹한 한기를 실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팔뚝에서 팔등으로, 팔등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리는 선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 나를 옭아매었다.
야수처럼 들판을 배회하고 날고기로 배를 채우던 그 시절의 기억이.
“...감히 기습을 해?”
우습다.
잇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보다 약한 것들의 생명을 허락할 수 없다. 놈들을 벤다. 놈들을 죽인다. 살점을 물어뜯겠다.
날카로운 발톱에 찢겨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조금 다치면 어떠한가. 피 흘리면 어떠한가. 이렇게 즐거운데.
단검을 뽑아들었다. 오른손에 장검을, 왼손에 단검을 역수로 쥐고 질주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적이 몰려든다. 그래서 즐겁다. 베고 또 베고, 베고 또 벤다. 본능에 충실하게.
피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를 테니.
촤라라라락!!!
왼손의 단검과 오른손에 장검을 바꿔쥐었다. 단검을 정수로 장검을 역수로. 어깨를 찍고 올려베고 다시 바꾼다. 예리한 첨단으로 살갗을 가르고 엄지와 검지 사이로 단검을 돌렸다. 이어 장검을 횡으로 내두르고 손목을 돌려 치솟는다.
군더더기 없는 전환. 다시 베고. 돌리고. 긋는다. 스타카토처럼 짧고, 짧고 더 짧게. 수없이 많은 공격을 이어 연격으로 만들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화톳불처럼 격정적으로.
빠르게. 빠르게. 조금 더 짧고 빠르게. 역동적으로.
핏물을 흩뿌리며 놈들의 무가치한 삶에 끝을 선사한다.
“.....!”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웃음. 즐겁다.
“.....!!”
화동(??)한다. 치명적인 일격. 복횡근을 비틀어 피했다. 단검을 회전시켜 역수로. 막힌다.
막아?
바꿔쥔다. 장검으로 올려친다. 손목을 비틀고, 단검으로 내려찍었다. 다시 엄지에서 검지로 돌려 칼날을 교차한다.
“도...!”
무릎차기. 밑날베기. 돌려긋기. 크게 회전하며 거머쥔다. 치솟는 검. 날카롭게. 신속하고. 정밀하게.
“....란!”
그림자들이 사방에서 옥죄여든다. 그럼 더 강하게. 빠르게. 짧게. 사선에서 물러나 힘을 끌어모은다. 한계에 달한 코르크 마개처럼 대퇴근에 압력이 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전방위를 향하자 입꼬리에 전율이 깃든다. 그렇게 적들과 눈을 맞추고, 시선이 닿은 순간 그대로ㅡ
“도란님!!!!”
와락. 무의식에 파묻혀 적을 쓰러뜨리던 도중 불현듯 등 뒤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돌아보니 그곳엔 라디가 눈을 질끈 감은 채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었다. 뿌리치면 날아갈 듯 작은 몸.
“꼬맹... 아?”
“도란님... 제발...”
“갑자기 왜 끌어안고...”
암전되었던 시야가 차차 되돌아왔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지독한 연무에 둘러싸인 동굴 내부의 풍경과 경악한 얼굴로 쳐다보는 모험가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신을 단조질했던 흥분이 식어감에 따라 참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어느새 피투성이로 변해버린 몸뚱어리를 웅크리며 콧잔등을 찡그리자 라디가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주었다.
“저, 정신이 좀 드세요...? 대체 왜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잠깐만 기다려 봐요!! 연고...! 연고가 어디있더라...”
“윽...!”
라디가 연고를 도포하자 환부가 첨예하게 욱신거렸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가물거렸지만 이를 악물어 버텨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아있었으니까.
“그림자는...?”
“많이 해치웠어요. 다 도란님 덕이에요. 토벌대가 진형을 갖추고 착실히 쓰러뜨리고 있으니 이제 곧...”
아니.
“...아니야.”
“도란님...?”
떨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점 짙어지고 있다.
아귀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감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가 온다.
“도란님...? 아니라니 대체 뭐가...”
찰나, 라디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아연실색했다.
내 얼굴에서도 표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찾았다.]
무심코 내려다본 발치에, 내 그림자가 소름끼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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