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42화 (42/375)

〈 42화 〉 던전

* * *

[042] 던전 #18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그림자.

발등과 맞닿은 수면, 낡은 방풍 랜턴이 삐걱거리며 드리운 내 음영에 어떤 존재가 담겨 있었다.

그 형체는 초승달처럼 찢어진 눈꼬리와 입매로 웃고 있었다.

짙은 연무로 뒤덮여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으나.

그래, 웃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피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물러나세요!!!”

“도란 이쪽으로 오게!!”

라디가 날 과격하게 잡아끌자 말톤이 이어받았다.

말톤이 메이스를 치켜들며 경계하는 사이 라디가 쇠뇌를 격발했지만, 은빛 대못은 웅덩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을 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주변 모험가들도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수면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 잠깐...! 저기 뭔가 있다!!!”

“저건...?! 지금까지랑은 달라!!”

“긴장을 놓지 마!!!”

­츠츠츠츠츳...

놈이 심연으로부터 천천히 기어올라왔다.

부글부글 웅덩이가 끓어오르더니 기다란 한쪽 팔을 솟구쳐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몸뚱어리를 끄집어올린다.

다만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시뻘건 두 눈만큼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서 스파이더 무리와 조우한 뒤부터 내내 끈적하게 따라오던 바로 그 시선.

“윽...!”

이치에 맞지 않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미지에서 오는 근원적인 공포가 팔다리를 옭아맸다.

그 흉체(??)에 시선이 못박혀 꼼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칼자루를 움켜쥔 순간­

“안 돼요!!!”

“꼬맹... 아?”

“도란님은 다쳤어요!! 지금 갔다간 죽는다고요!!!”

가느다란 팔이 내 허리를 필사적으로 휘감아왔다.

벌어져 고통스러운 상처를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놈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꼭 본인이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도란님은.. 이제 빠져요!! 이미 충분히 제 할 몫을 다 하셨다고요!!!”

“그래도...!”

직감이 들었다. 저 존재는 절대로 놔둬선 안 된다. 저건 위험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로 되돌아올 것이다.

저 놈을 불사를 수만 있다면 약간의 희생쯤은 감내할 수 있ㅡ

“도란!!!”

“....!!”

애절한 목소리.

라디가 내 옷깃을 난폭하게 잡아당겨 자신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그제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이 붉어진 쪽빛 눈동자를.

이를 악물어 보지만 참다못해 흘러나오는 눈물 한 방울을.

그 아래 일그러진 입술로부터 번져나오는 먹먹한 감정을.

“도란... 제발 부탁할게... 너 죽는단 말이야....”

내 옷깃을 붙잡던 힘이 느슨해지며 피투성이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라디의 가녀린 턱선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수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동시에, 내 온몸을 적시고 진하게 퍼져나가는 핏줄기가 보인다.

“응...? 제발.... 이렇게 빌 테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녀석은 끝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중간하게 손가락을 구부린 채 머뭇거리고 있자니 한 사내가 다가왔다.

“도란, 물러나게.”

“말톤...?”

“자네는 충분히 할 만큼 했네. 물러나서 회복에 전념하게나.”

“그래, 나머진 우리한테 맡기라고.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멋진 무위였네.”

그의 뒤로는 모험가들이 각자 무기를 뽐내며 걸어나왔다.

“이제 우리 차례일세.”

* * *

모험가들이 진형을 갖추고 섰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그림자를 뚫고 나타난 마물을 처치하는 것. 놈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시점부터 잔챙이 몬스터들은 형체를 잃고 땅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모든 게 이 순간을 위한 여흥이었다는 듯이.

“젠장... 무슨 저런 무지막지한 놈이...”

그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이었을까.

이상야릇한 생김새였다.

‘그 생명체’는 어림잡아도 성인 키를 한참 웃도는 장신이었다. 부대 내에서 제일 신장이 큰 사람이 선봉 기수 역할을 맡는다고 했던가. 눈앞의 존재는 출정식 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그들을 훨씬 상회했다.

더욱이 두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그 끝에는 가위처럼 길쭉하고 뾰족한 손톱이 자라나 있다. 가느다란 육신에서는 이전의 몬스터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흑색 아지랑이와 핏빛 안광이 뿜어나왔다.

모종의 수인이 저주를 받아 썩어 문드러진다면 저런 느낌일까.

놈이 몸을 웅크리며 돌진해올 전조를 보였다.

“모두! 공격에 대비하라!!”

“전사들은 앞으로!!”

“방패를 세워라!!”

갈색 머리의 리더가 검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전열이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놈이 쇄도했다.

허나 그 위력이 예상을 턱없이 웃돌았다.

­카가가가가각!!!!

“크어억!!!”

“뭐, 뭐 이리 묵직해!!”

“당황하지 말고 대열을 유지하라!!!”

돌격을 저지해낸 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허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놈이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방패 사이에 손톱을 밀어넣고 잡아당기자 단단한 철판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터무니없다.

“으, 으아악!! 누, 누가 좀 떨어뜨려 줘!!!”

“제길..!!”

­콰직...!! 콰지지지직!!!!

즉각 사내들이 단창을 내찔러 반격했지만 놈은 신속하게 뒤로 뛰어 회피했다. 마치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듯 가벼운 몸놀림. 녀석이 손아귀의 감촉을 만끽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위손을 살랑이자 치찰음이 울려퍼진다.

“어, 엄청난 힘이다...!”

“게.. 게다가 빨라...”

“겁먹지 마라!! 중위, 공격해!!”

모험가들이 술렁이며 머뭇거렸지만 곧바로 전의를 가다듬었다.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 궁사들이 팽팽하게 시위를 잡아당겨 첨예하게 연마된 화살을 발사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나아간 편전.

놈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사선에서 벗어나더니 그대로 통로 벽을 내달리며 질주해왔다.

“옆으로 온다! 준비해!!”

“궁수들을 지켜라!!”

전사들이 재빨리 중위를 감싸고 섰지만, 그 행동이 무색하게도 마물은 방향을 틀어 앞에 있던 모험가들을 노렸다.

“크아아아악!!!”

“커허어어어억!!!!”

선혈.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 붉은 얼룩이 생겨났다. 손톱 칼날에 꿰뚫린 두 사내가 피를 쏟아낸 까닭. 한 명은 철제 흉갑 이음매로 울컥울컥 핏물을 게워냈고, 다른 한 명은 숨통에 바람구멍이 나 미약한 파열음을 터트리며 경련했다.

이내 실이 끊긴 목각인형처럼 툭 쓰러진 모험가들의 주둥이에서 차마 언어를 이루지 못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무, 무슨...!”

지척에 있던 모험가가 식겁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놈은 다시금 훌쩍 뒤로 뛰어넘어 거리를 벌렸다.

­.....

녀석이 손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가지고 놀며 즐거운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명백한 도발. 그 어린아이 같은 동작에서 오는 괴리감이 공포를 부추긴다.

“거, 겁먹지 마라!! 상대는 한 마리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놈이 지칠 때까지 버텨라!! 궁수! 화살을 아끼지 마!!!”

즉각 사수들이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놈을 겨냥했지만, 마물은 곧바로 바위 뒤로 엄폐했다. 치고 빠지는 전략. 속도의 이점을 살릴 줄 알뿐더러 인간 병기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지능적인 놈이다.

­휘익!!

돌연 놈이 숨어있던 바위 뒤에서 검은 형체가 어둠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자연히 그에 이끌린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지만,

“아, 안 돼...!”

도란을 간호하며 그 상황을 빠짐없이 주시하던 라디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함정.

무수한 화살이 검은 형체에 빨려 들어가듯 적중했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맥없이 튕겨나왔다.

“뭐, 뭐야...?!!”

“저건.. 바위...?”

한낱 돌덩어리. 모험가들을 급습할 때 터져나갔던 바위 파편이 볼품없게 지면을 굴렀다. 이어 함정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반대 방향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사, 살려...!”

“끄아아아악!!!”

“뭣들 하는 거야!! 저쪽이다!!!”

전사들이 곧바로 대처하려 했지만,

“아, 안 돼!!!”

“공격하지마!!!”

녀석이 살아 있는 모험가의 모가지를 붙잡아 방패처럼 가로막자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내가 뼈를 끊는 심정으로 질끈 눈을 감으며 외쳤다.

“어쩔 수 없다!! 놈에게 붙들리는 순간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라!!”

“미안하다...!! 미안해!!!”

“사, 살려... 크아악!!!”

한 전사가 내찌른 칼날에 모험가가 꿰뚫렸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동굴 바닥을 끌려다녔다.

“제, 제발.... 살려... 줘..”

[.....]

간절한 애원. 하지만 마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모험가는 이용가치를 잃자 가차 없이 돌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머리통이 사라지며 시뻘건 뇌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아, 아아...”

일말의 자비도 없는 모습. 그 가혹한 광경에 모두가 신음했다.

대체 저 마물은 뭐란 말인가.

그들이 여지껏 봐왔던 몬스터 중 그 어떤 존재도 저렇게 흉측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마물도 저리 가학적이지 않았다.

완력과 속도는 물론이고 지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좌중이, 압도되었다.

[.....]

마물은 얼빠진 모험가들의 면면을 내려다보며 흉소했다.

날비린내가 뚝 뚝 떨어지는 입가가 그들을 만모했다.

천천히, 자근자근 짓밟히는 모험가의 사체가,

생명을 경시하는 그 시선이,

의지를 꺾었다.

실의에 빠진 참격이 허공을 가르고 간헐적으로 화살촉이 번뜩였으나 그뿐이었다.

모험가들이 몇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전부 무위로 되돌아갔다.

발치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농락당했다.

그렇게 패색 짙은 면면들이 하나둘씩 차차 절망으로 물들어가던 중ㅡ

“...장난은 끝났나?”

[.....!!]

­투확!!!!

터져나오는 음영. 치솟는 연무.

그림자 마물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최초로 발발한 유효타. 한 사내가 찬란한 금발을 번뜩이며 나타나 마물의 옆구리에 일격을 박아넣었다

그는 도란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엘프...?”

“.....”

모험가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가운데, 말톤은 담담하게 둔중한 철덩어리를 어깨에 짊어지며 마물을 노려보았다.

“...그렇군. 불쌍한 것.”

그리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 흉악한 둔기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어두운 통로 내부에 흑철색 궤적이 생겨났다.

­콰드드드득!!!

[.....!!]

올려치고, 내려찍고. 횡으로 크게 한 번. 아래에서 강하게 부여잡으며 측면으로 파고든다.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발밑에서 솟구치는 음영을 피해내고 손목을 꺾어 상단으로. 무릎으로 돌려참과 동시에 손잡이를 짧게 쥐고 손톱을 튕겨내었다.

도란이 짧디짧은 동작을 이어 역동적이고 격정적인 검술을 펼치는 데에 반해 말톤의 둔기술은 물 흐르듯 모든 동작이 하나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는 작은 거동조차 깊은 묘리가 담겨 있었고, 같은 시냇물도 물길에 따라 유속이 다르듯이 너무나도 변칙적이어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슈화아아악!!!

마물이 난폭하게 손톱을 휘둘렀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험가 여럿을 도륙했던 공격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를 스칠 수 없었다. 마치 권법을 구사하는 승려처럼, 왈츠를 추는 댄서처럼 몸을 놀리는 그의 무위는 너무나도 독보적이었고, 보는 사람의 혼을 빼놓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림자가 당황하며 그에게서 거리를 두려 했지만,

“어딜 가시나.”

말톤이 과감하게 신발 밑창으로 관절을 내려찍어 방해했다. 허를 찌르는 한 수. 마물은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와중에도 손톱을 휘둘렀다. 허나 말톤은 이 또한 예측해 막아내고 반격을 이어나갔다.

능청스럽고, 압도적이다.

“저, 저 엘프 좀 봐...!!”

“우리가 쩔쩔매던 녀석을 혼자...”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저 엘프를 도와라!!!”

“상위 광속성 마법을 준비할게요!! 시간을 벌어주세요!!!”

말톤의 무위를 목도한 모험가들이 전의를 다지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전선에서 단신으로 마물을 상대하는 말톤의 뒷모습에 전율하며 그를 중심으로 진형을 새로 갖춰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그 미려한 외관은 필시 용사처럼 보였으리라.

“전사들은 언제라도 저 엘프를 보조할 수 있게 준비하라!!! 꼭 유효타를 줄 필요는 없다!! 엘프가 공격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해주는 걸로 충분하다!!!”

“궁수들은 산개하여 표적을 맞힐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 생존은 각자 알아서 생각해!!!”

“마법사가 영창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자!! 광속성 마법이면 녀석을 끝장낼 수 있어!!!”

단 한 명이 전장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모험가들이 드높게 고무하며 그를 뒤따랐지만 말톤은 묵묵히 메이스를 휘두르는 데 열중했다.

“마, 말톤님이...! 이대로만 가면...!!”

묵직한 타격에 그림자가 비틀거리자 라디가 도란의 손을 꽉 붙잡으며 기도했지만­

“.....”

아니다.

도란의 입매는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말톤과 동고동락을 해오며 여러 고비를 넘어온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건 녀석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뜻.

[.....]

­콰드드드득!!!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괴물이 높게 뛰쳐올랐다. 식물의 줄기처럼 늘어나는 그림자 다발. 놈은 가느다란 눈매로 전황을 쓱 훑어보더니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체류했다. 뒤이어 동굴 안 모든 음영이 놈에게 빨려 들어가듯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길한 전조.

궁수들이 재빨리 활을 발사했지만, 화살들은 검은 기운에 가로막혀 튕겨나왔다.

“뭔가 큰 게 온다!! 다들 대비해!!!”

“방패를 세워라!! 전사들이 앞에 나서!!!”

“마법사를 최우선으로 보호해!!!”

동굴 안, 일체의 빛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방치된 랜턴들의 불빛이 불안하게 깜빡거렸고, 몰려드는 검은 기운이 급류처럼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도란님!!!”

라디가 작은 몸으로 도란을 감싸안으려 들었지만, 그는 역으로 그녀의 등 뒤에 손을 둘러 몸 아래 짓눌렀다. 발치에 찰랑거렸던 지하수가 쓰나미의 전조현상처럼 마물이 위치한 동굴 중앙으로 빨려들어갔고, 투구 아래로 스며나온 땀방울이 허공으로 역류했다.

이윽고 무형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하자, 한차례 공동에 적막이 찾아왔고ㅡ

공간이 터져나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

태초의 땅을 뒤엎는 듯한 진동이 뱃거죽을 뒤엎고, 연옥 밑바닥에서나 볼 법한 어둠이 동굴을 가로질렀다.

시야가 흔들린다. 지면이 폭사했다. 잘게 터져나간 돌조각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두개골이 흔들리고 어금니가 깨져나가는 혼돈 속에서 도란은 필사적으로 라디를 끌어안았다.

마침내 영겁과도 같았던 찰나가 지나고 잔해에 파묻혔던 랜턴의 불빛이 깜빡깜빡 되돌아왔을 땐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툭.

­타닥... 탁...

동굴 내부는 폭약 저장고가 터진 듯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부서진 암석 파편과 타닥거리는 검은 잔재가 어지러이 흩어졌으며, 만신창이가 된 채 신음하는 모험가들이 즐비했다.

폭풍에 직격당한 사내들은 상반신이 통째로 소멸하거나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갈 곳 잃은 하반신이 털썩 쓰러진다.

“아, 아... 이 무슨....”

절망에 찬 비탄이 흘러나왔다.

고장 난 호흡이 허파를 망가뜨리고 잇새를 비집었다.

부딪히는 이가 맞물리지 않고 어긋났다.

하지만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Dios nos indagara...”

대방패를 든 전사들의 생명과 맞바꾸어 보전한 희망의 불씨. 그들이 숭고하게 버티고 선 자리의 중심에는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있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지켜내고자 했던ㅡ.

그녀가 캐스팅을 마쳤다.

“¡la luz estará aquí!!! 이걸로 끝이다 괴물!! 빛과 함께 사라져라!!!”

마법사가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영창의 마지막 구절을 읊는 것과 동시에 찬란한 광휘가 터져나왔다.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광채가 그대로 마물에게 직격했지만ㅡ

“.....”

한 가지 의문.

도란은 투구 속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사고에 잠겼다.

저렇게나 영리하고 교활한 녀석이,

마법사를 살려뒀다고?

활의 겉모습만 보고도 곧바로 원거리 무기인지 알아차렸던 놈이다.

녀석이라면 분명히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제일 위협적인 그녀를 최우선으로 제거하는 게 당연할 터.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왜?

전투 내내 민달팽이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던 불길함.

해저로부터 그물에 끌려 올라오는 송장처럼 섬뜩한.

어쩐지 녀석이 적당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정도 지능과 역량을 지닌 놈이 정말 평범한 마물이 맞는가?

녀석은 정말로 B급 몬스터가 맞는가?

설마 녀석은...

“......!!!”

순간,

보았다.

보고 말았다.

웃음.

모험가들에겐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놈이 웃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찰나의 순간에 눈부신 빛이 녀석에게 빨려 들어가듯 도달했고, 폭발했다. 잠시간 어두컴컴했던 터널이 대낮처럼 환하게 물들고 차츰차츰 조도가 낮아지자 시계가 되돌아온다.

그리고 마물이 있던 자리에는ㅡ

“아... 아 아...”

놈이 두 다리를 딛고 서 있었다.

이전보다 강력해진 모습으로.

날렵하던 거체는 두 배 이상 부풀어올랐고, 아지랑이는 시커멓게 불타올랐다. 붉은 안광은 더 짙은 혈향을 머금고 넘실거린다.

마물이 배를 부여잡고 웃어젖혔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광 속성 마법은 동굴의 그림자를 더 진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녀석의 힘을 증대시켰다.

어둠 속성 몬스터들은 빛에 약할 거라는 편견.

그 선입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츠츠츠츳....

이윽고 마물의 등 뒤에서 수십 다발의 그림자 줄기가 돋아났다.

촉수를 닮은 그것이 먹잇감을 고르듯 좌절한 모험가들의 살결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이젠.... 끝이야...”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모두가 절망한 그때­

“..도란님...?”

“......”

그래.

그럼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 지옥에서 돌아온 검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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