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던전
* * *
[043] 던전 #19
“도, 도란님... 어, 어디 가세요....”
떨리는 시선. 라디가 내 소매 끝자락을 잡으며 초조하게 올려다봤다.
그 눈길에는 나에 대한 걱정, 불안과 다분한 동요가 묻어나왔다.
“지... 지금 가면 죽어요... 어떻게든 기회를 보다가 도망...”
“꼬맹아.”
두 손으로 라디의 뺨을 붙잡아 눈을 맞추었다.
“너는 가서 말톤을 찾아. 찾아서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그, 그러면 도라...!”
“난 다 계획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는 살아남을 생각만 해. 그거면 충분해.”
“도란님을 두고 갈 순 없어요!!”
“말했잖아, 계획이 있다고.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살아서 다시 만나자.”
“그, 그럼 이걸 가져가세요..!”
내가 웃으며 고하자 녀석이 파우치에서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제가 가진 것 중 제일 강한 맹독이에요... 아까 드렸던 것보다도 훨씬... 이걸 저 괴물의 몸속에 넣을 수만 있다면... 있다면....”
“..그래, 고맙다! 그럼 밖에서 보자.”
라디의 어깨를 다독이고 유리병을 품 안에 넣으며 뛰쳐나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마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마수를 뻗치고 있다.
이를 악다물며 놈에게 다가가자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모험가들이 보였다. 그들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돌바닥을 긁어댔지만 침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손톱이 깨지고 뽑혀나가며 튄 피가 바닥을 얼룩졌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그, 그림자 속에 뭔가가 있다!!!”
“.....”
기회.
만약 모험가들이 시선을 끄는 틈을 타 놈에게 기습을 먹일 수만 있다면...
나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 기민하게 마물의 후방으로 접근했으나
“하하...”
놈은 전부 알고 있었다.
녀석의 등 뒤에 걸터앉은 토끼 모양의 검은 형체가 무감각한 시선으로 나를 관조했다.
그 어울리지 않는 깜찍한 외견에 혐오감이 배가되었다.
놈이 거체가 서서히 이쪽으로 향한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계획이 있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시간을 끌거나 이 한 몸 바쳐 희생하려는 것도 아니다.
헌신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 나는 승산이 없는 싸움에 몸을 던질 정도로 이타적이지 않다. 그럴 바에야 필사적으로 라디와 말톤을 업고 도망쳤겠지. 허나 그러지 않았던 건
[.....]
웃음.
놈은 뭐가 그리도 반가운지 나를 보며 웃었다.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모험가를 열 명도 넘게 해치운 괴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미소.
그래, 그 발치에 가라앉아가는 사람들만 없었어도 꽤나 따뜻한 장면이었을 텐데 말이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
놈은 대답 대신 칼날을 들어올려 날 가리켰다.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증명하라]
내게 살아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내게 이 앞으로 나아갈 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래, 그럼 바라는 대로.”
후회하게 해주마.
칼자루를 거머쥐었다.
*
날카로운 공기가 팽배했다. 자칫 스쳤다간 베이고 만다. 살갗을 저미는 긴장감 속,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연스레 맞잡은 검 손잡이에 힘이 실리고, 적막이 흐르고, 랜턴의 불꽃이 크게 흔들린 순간
투확!!!
지면에 고인 물웅덩이를 박차며 뛰쳐나갔다.
낮은 검. 쏜살같이 치달아 종아리에 실선을 내리그었다. 놈은 하체를 비틀어 깔끔하게 흘려내고 곧바로 응수해왔다. 휘몰아치는 손톱. 열 개의 칼날이 사방에서 쇄도한다.
검으로는 다 막아낼 수 없다. 나는 칼날을 내리그은 자세 그대로 어깨부터 바닥을 굴렀다. 반전되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다리 사이를 지나 수직으로 도약한다. 세상을 발밑에 둘 것처럼. 높게.
[.....]
콰르르르륵!!
허나 놈은 다 예측하였다는 듯 수십 다발의 그림자를 뻗어왔다. 촉수처럼 일렁이는 그림자 줄기.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솟구쳐 사지를 묶을 기세로 치달아왔다. 나는 즉각 검을 크게 휘둘러 찢어냈지만, 잘려나간 단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순식간에 재생해오는 까닭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제길!!”
돌출된 바위를 딛고 다시금 공격을 이어나갔다.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손톱을 웅덩이 위로 미끄러져 회피했다. 이어서 지면에 손바닥을 대어 중심을 잡는 것과 동시에 장검을 휘두른다. 칼날은 불똥을 튀기며 가로막혔지만 굴하지 않았다. 마물의 발등을 즈려밟고 튀어올라 검끝을 내질렀으나 이 역시 막혔다.
이쯤은 예상했던 바.
지면을 단단히 딛고 다시 돌진. 촉수가 뻗어온다. 신속하게 왼손으로 단검을 거머쥐었다. 칼날을 교차하며 휘두르고, 선회하며 베었다.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자 잘려나간 수십 다발의 그림자가 허공을 수놓는다.
이어 날카로운 첨단으로 마물의 허벅지를 옅게 베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
‘어째서...’
공격이 적중할수록 놈이 기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어둠 너머로부터 환희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검신에 맞닿은 칼날이 희미하게 떨려온다. 곧바로 촉수가 육박해 오른손의 장검으로 틀어막고 왼손 단검으로 쳐냈다. 이어지는 돌려차기.
슈확!
녀석은 뒤로 뛰어 흘려넘겼다. 그림자가 늘어지듯 어떠한 사전 동작도 없는 회피. 물리법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모습. 놈은 그대로 공간을 가로지르더니 일순간 내 앞에 도착해 손톱을 내려찍었다.
까앙!!!!
“크윽!!”
간신히 막아내긴 했으나 너무 묵직하다. 일격 하나하나가 코볼트 킹의 돌진과 맞먹는다.
녀석이 칼날을 크게 횡으로 휘두른 순간 그 힘에 반하지 않고 튕겨나와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혈흔이 방울방울 공기중에 흩어졌다. 완벽하게 막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생겨난 레더아머의 실선 사이로 스멀스멀 핏물이 흘러나왔다.
“...윽.”
짧은 시간 동안 주고받은 수십 합의 공방. 짧은 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B등급 몬스터?
개소리.
놈은 언제든지 우리 전원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다.
이 동굴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모두 죽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말톤이, 라디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오롯이 녀석의 변덕 때문.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기 때문.
“이 새끼가...”
도대체 뭘, 무엇을 원하는 거지.
‘증명하라.’
녀석이 칼날을 맞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자아냈다.
생각할 시간 따윈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 네놈이 내게서 뭘 보았는지는 모르겠다만.
만만치는 않을 거다.
곧바로 도약했다.
장검은 버렸다. 허리춤의 검집도 풀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다란 리치도, 묵직한 한 방도 아닌
속력(?力).
질주한다. 발끝으로 지면에 널브러진 날붙이를 차올렸다. 떨리는 칼날이 검명음을 자아낸다. 주인 모를 붉은 대거를 공중에서 낚아채 오른손에 쥐었다. 잠시 빌릴 뿐.
수십 다발의 촉수들이 뻗쳐온다. 모두가 치명적인 위력을 내포했다. 더욱 가속해 빗겨낸다. 몇몇은 내 얼굴과 목덜미를 노리고 들이닥쳤지만, 단검과 대거를 휘둘러 찢어발겼다.
마침내 따라잡아 단검을 내찌른다. 놈이 손톱으로 가로막고 곧장 반격해와 허리를 비틀어 피했다. 이어 대거로 응수. 옆으로 뛰어넘어 촉수 다발을 면하고 녀석이 발로 걷어차려는 순간 허벅지에 대거를 내려찍었다.
마물이 손톱을 내밀어 방어하고자 했지만 그 손등에 단검을 박아넣고 길게 찢었다.
슈와아악!!!
오래된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시커먼 증기가 치솟았다. 녀석은 크게 뒤로 물러서서 잠시 제 손등을 바라보더니 내게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얼마든지 부응해주마.
전투의 긴장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간신히 지혈했던 상처들이 터져 피가 새어 나왔으나 상관없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아드레날린에 통증이 둔탁해지고, 붕 떠오르는 듯한 고양감이 빈자리를 채웠다.
[......]
까득.
이번엔 녀석이 먼저 덤벼들었다. 뒤틀리는 손톱. 열 자루의 칼날이 한 점에 모이고, 흩어진다.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다가오는 치명적인 살수(?手). 저걸 뽑아다 검을 만들면 길이 남을 걸작이 탄생하겠지.
차분하게 호흡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젖혀 피하고, 왼발에 체중을 실어 흘려낸다. 최소한의 동작. 구태여 막아낼 필요도 없다. 장검의 제약을 벗어던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동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속도의 이점을 살려 공격한다.
두 자루 칼날이 엇갈렸다. 놈이 크게 팔을 휘둘러 떨쳐내지만, 소용없다. 디딤발을 밟고 솟아올라 가슴팍에 대거를 꽂는다. 뿜어나오는 연무. 칼자루에 힘을 주고 깊게 밀어넣자 시야가 검게 물든다. 이어 측면에서 날카로운 가위손이 뻗어왔으나 놈의 어깨에 단검을 꽂고 넘어가 등 뒤로 이동했다.
“...잡았다.”
드디어 배후를 점했다. 요동치는 촉수 다발. 견갑골이 위치한 장소에서 검은 그림자 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곧바로 대거와 단검을 밀어넣고 살점을 도려낸다.
푸확!!
칼날이 파고들 때마다 탁무가 뿜어나왔다. 놈이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집요하게 들러붙어 헤집었다. 난폭하게. 악독하게. 덮쳐오는 촉수를 갈가리 찢고, 그걸로 모자라 상처를 뜯어발긴다.
아슬아슬한 묘기. 몸부림치는 거체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 때론 체중을 옮겨가며. 때로는 칼날을 박아가며. 춤추듯이 현란하고, 곡예처럼 아찔하게 눈앞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신체능력을 극한까지 다룰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한 신기의 경지.
그렇게 미친 듯이 칼날을 쑤셔 박던 도중, 이질감이 들었다.
별안간 마물이 행동을 멈추나 싶더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대거와 단검을 교차하며 사방을 경계하던 중, 저 멀리 바위에 불거진 짙은 음영 속에서 녀석이 피어났다. 보아하니 그림자 속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도 가능한 모양.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 쓰지 그랬냐.”
[.....]
‘...웃어?’
내 말에 녀석은 어깨를 작게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등 뒤에 올라타 살점을 찢어발겼는데도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눈치. 그 눈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크으윽...”
“무, 무슨...!”
모험가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미 몇몇은 숨죽인 채 전황을 살피고 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른 인간들에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나 외에 다른 존재들은 무가치하다는 듯이. 그리고...
.....
분위기가 일변했다.
녀석의 전신을 휘감은 흑색 오라가 짙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더니 동굴 안 불빛들이 불안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충격파를 내뿜을 때와 비슷한 전조. 하지만 조금 다르다.
긴장 어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자 돌풍이 서서히 멎어갔다. 위태위태하게 깜박이던 불꽃이 다시금 그을음을 피워올리고, 웅성거리던 바람 소리가 점차 잦아들며 마침내 어둠이 제 자리를 찾아가자ㅡ
마물이 보였다.
다만 그 외관이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작은 소년 정도 크기로 작아진 녀석.
하지만 더 이상 그림자로 일렁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 그 자체인 듯 모든 빛을 흡수해버릴 듯이 새까만
암흑 그 자체.
[......]
사람의 형상을 한 그것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리자 검은 칼날이 돋아났다.
매끄럽게 자라난 한 줄기 칼날. 단검 정도 길이.
놈이 그것을 내게 겨눴다.
작별을 고하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이 기뻐 보이면서도
조금 쓸쓸해 보였다.
녀석이 내게서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전해져왔다.
지금 이 이야기가 최종장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그래, 그렇다면.
나도 각오를 다지겠다.
투구 속 눈동자에 야성이 깃들었다.
날카로운 살의를 갈무리한다.
옛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꺼릴 것 없던 그 시절로.
깊이. 더 깊이.
시야가 암전되면서 과거의 기억이 비춰진다. 강렬한 빛이 점등하고, 묵직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짙은 안개가 흘러넘치고, 폐 속으로 스며든다.
깊게. 조금 더 깊숙하게.
현실과 감각이 격리되고, 분리된다.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수면이 발목을 찰랑이자 어둠 속 덩그러니 놓인 철창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눈을 뜬다. 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돌변해 쇠사슬에 묶인 팔다리를 난폭하게 잡아당겼다.
그래 착하지.
철창에 손을 대고 떠올린다. 숲에서 나오고 모험가가 되기 전 반년의 공백. 지금의 나를 만든 근간(??). 피로 물든 전장. 풀잎 대신 돋아난 칼날. 들끓는 파리떼와 시체 구덩이. 간헐적으로 쏟아지던 얼음창과 불타오르는 늪지. 그 아래서 손을 뻗는 망자들과 그리고 그 위에 선.
나.
장면이 뒤바뀌었다. 이젠 내가 철창 안에 갇혀 있다. 팔다리에 묶인 쇠사슬이 쩔그럭거린다. 고개를 들자 그것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묶여 있었던 그것이 방금ㅡ
풀려났다.
콰과과과과광!!!!!
발밑의 지면이 폭사했다. 시커먼 탁류가 용솟음친다. 일순간, 나는 이미 놈의 등 뒤에 있었다.
피로 물든 대거를 내지른다. 내게서 흘러나온 혈흔이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놈이 칼날을 들어 가로막자 텅 빈 몸통에 코볼트 단검을 쑤셔박는다. 휘몰아치는 검광. 산란하는 불빛.
다가오는 그림자 칼날을 회피한다. 사정없이 몰아친다. 왼손에 단검, 오른손에 대거. 두 줄기 은적색 궤적이 동굴을 수놓고 흩어진다. 차마 눈에 담지 못할 정도의 쾌속. 가속한다. 더 빨리.
촤학!!
손바닥에 고인 핏물을 안구에 흩뿌렸다. 시야를 차단하고 옆구리로 파고든다. 목덜미에 단검을 내려찍고. 대도로 복부를 헤집는다. 녀석이 거리를 벌리자 순식간에 쫓아간다. 지척으로 들러붙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증속한다. 거친 물살을 거스르듯 피와 연무가 뒤섞인 공동을 헤집자 시간의 흐름이 끈적하게 늘어진다. 정지된 세계 속, 놈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격렬히 부대낀다.
빠르게. 더 빠르게. 베고. 찌르고. 돌리고. 내리긋고. 다시 벤다. 이어서 크게 선회한다. 허공에 머물렀던 물방울이 터져나간다. 다시 공격을 연계해나간다. 강하게 돌려차고. 내려찍고. 쳐올리고. 밑날베기. 능숙하게 칼자루를 돌려 역수로 움켜쥔다.
빛의 궤적이 춤추고, 어둠과 선혈이 나부낀다. 더 빨리. 더 신속하게. 미친 듯 박동하는 심장.
보폭을 좁게. 현란하게. 온몸을 불사른다. 후환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적을 벨 뿐. 서로의 숨결이 오가는 초근접전.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 두 자루의 단검으로 무게중심을 잡는다.
공기의 흐름. 난폭하게 베어낸다. 도약. 공간을 주파하고. 이빨 삼아 목덜미에 칼날을 꽂는다. 이어지는 질주.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쿨럭ㅡ!
심장이 너무나 급격하게 맥동한다. 터져나가는 모세혈관. 뿜어져 나오는 피. 뜨겁게 달아오른 혈류와 체열이 몸을 망가뜨렸다. 고장 난 펌프에서 공급하는 혈액이 한계에 달했다. 허나 상관없다. 피를 쏟아내 체온을 식혔으니.
의식이 흐려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가속했다. 이것은 결투. 생존. 잡아먹거나 잡아먹히거나 둘 중 하나.
더더욱 증속. 잔상만이 남아버린 세계 속에서 몸을 놀린다. 각혈. 몸이 점차 식어온다. 그럼 속도를 더 올린다. 가속. 아슬아슬할 정도로 치닫는다. 폭풍우 앞의 등불처럼 제 몸을 심지 삼아 그 누구보다도, 밝게 타오른다.
곡기(??)를 끊고 산 채로 장작불에 몸을 던져 열반에 이르렀다는 고승처럼,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는 모습은 동굴에서 이 전투를 훔쳐보고 있던 모두로 하여금 전율케 하기 충분했으리라.
허나 한낱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현이 끊긴 피아노처럼 심장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점차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관절 마디마디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머리가 뜨거워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고, 손발이 차가워 떨려온다.
놈을 베어야 하는데...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불규칙한 호흡에 핏물이 울컥 게워나왔다.
어느새 무릎은 땅에 꿇고 있었다.
원망스런 눈길이 툭 떨어졌다.
그때였다ㅡ
[.....]
따스한 손길이 내 투구에 닿은 건.
예상치 못한 온기에 부서질 것만 같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녀석도 나를 바라봤다.
마주 보는 두 괴물. 그 눈에 서린 미증유의 감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녀석이 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놈이 자그마한 손을 뻗어왔고,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새까만 손끝은 내 뺨을 타고 목, 쇄골, 가슴팍을 따라 미끄러져 이내 품으로 향했다.
뒤이어 내게서 멀어져가는 작은 손. 그 손에는 자그마한 병이 들려 있었다.
라디가 내게 주었던, 맹독.
녀석은 엄지로 병의 입구를 돌려, 뚜껑을 열고,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너, 누구야.”
핏물 가득 섞인 물음에.
[.........]
[.......]
[.....]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란님... 그럼 안녕히...]
너무나도 애틋한 한줄기 눈물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