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2계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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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2계층 #1
이상한 꿈을 꿨다.
희뿌연 연기. 피로 물든 대리석. 불타오르는 신전.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 것 같기도 한데.
어쩌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
기억나지 않는다.
지근지근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얼음송곳으로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듯한 느낌.
이를 꽉 깨물어 신음을 틀어막고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공간.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인데...
화악!
“...일어났는가.”
찰나, 천이 펄럭이더니 눈부신 빛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자리를 뒤척이며 외쳤다.
“...말톤! 여긴 어디야!! 꼬맹이는 어떻게 된 거고...! 난 분명...!!”
“진정하게 도란.”
말톤이 단단한 무언가를 내 입술에 들이밀었다.
“뭐, 뭐야...!”
“그냥 물일세. 천천히 들이마시게나.”
그제야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진 입술로 수통을 물고 한 모금 들이켜자 식도가 격렬하게 화끈거렸다.
“쿨럭! 커헉!!”
“...천천히 마시라고 하지 않았는가.”
물조차 제대로 넘기기 힘들다.
“그보다 꼬맹이는...! 라디 어딨어?!!!”
“나도 그녀도 안전하니 안심하게나. 지금은 무엇보다 자네가...”
“라디 어딨어!!!”
“...잠시 장작을 구하러 갔네. 그러니 제발 안정 좀 하게. 그대 빼고 다 멀쩡하니. 자칫 흥분해서 자네가 몸을 망치기라도 했다간 그녀가 날 죽이러 들 걸세.”
“아... 그러냐...”
꼬맹이가 무사하다.
그거면 됐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몸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북받쳤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긴 어디야...? 그 괴물은 어떻게 됐고. 내가 얼마나 잠든 거지...”
“자네는 꼬박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네. 마물도 자네가 물리쳤고. ...여기가 어딘지는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래, 부축 좀 해줄 수 있을까?”
“알겠네.”
말톤이 내 팔뚝을 잡아당겨 어깨에 짊어지자 첨예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수준.
그의 부축을 받으며 텐트 밖으로 나오자 경이로운 전경이 펼쳐졌다.
“....아.”
나는 깎아지르는 듯한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사방에는 첨탑처럼 높게 솟아오른 바위산이 끝도 없이 늘어섰고, 온 세상이 자욱한 구름으로 뒤덮여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베라스틴 근처에 이런 지형이 있을 리 없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자 뿌옇게 보일 정도로 까마득히 떨어진 저 너머에 어렴풋한 바위 표면이 보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던전 안...?”
“바로 맞혔네, 우리가 그토록 오고 싶었던 던전의 2층일세.”
“여기가 2층.... 어떻게 된 거야 이 규모는...”
불가능하다.
몸이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 또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정도 규모가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됐다는 건 일단 제쳐두더라도, 어째서 무너져내리지 않은 걸까. 이렇게나 큰 공간이 지하에 있다면 당장 이 위의 모든 구조물과 생명체가 땅으로 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멍하니 절벽 아래를 응시하고 있자니 말톤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한 번 설명했는데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던전만큼 공간이 왜곡된 곳도 드물 걸세. 우리가 느끼는 넓이와 실제 면적엔 적잖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네. ...자세히 알고 싶나?”
“....아니, 지금은 그보다 ...그 괴물은 어떻게 됐어...? 내가 해치웠다고...?”
“그 건에 대해서는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지. 자네는 좀 더 쉬어야 하네.”
말톤이 날 모닥불 근처로 데려가 앉혔다. 커다란 바위가 가로막고 선 장소. 덕분에 벼랑 끝 특유의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없어서 한결 나았다. 슬슬 추워지던 차였으니까.
새삼 온몸에 칭칭 둘러진 붕대를 제외하면 거의 반라 상태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자 말톤이 따뜻한 차를 건네왔다.
“아, 고마워.... 그럼 이제 설명해줄 수 있겠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흠... 그렇다곤 해도 막상 내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네. 오히려 자네한테 묻고 싶군. 그래도 일단 아는 선에서 말해주겠네.”
그가 모닥불에 땔감을 툭 집어넣자 새빨간 불똥이 튀어올렀다.
점차 거뭇거뭇하게 타들어 가는 장작을 망연하게 응시하며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말톤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대게 사후보고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건질 내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갇혀 있었다니...?”
“믿긴 힘들겠지만 사실이네. 마법사가 광 속성 마법을 쓰기 전에 대폭발이 일어났다지 않나? 모험가들 여럿의 목숨을 앗아갔을 정도로 강대한 공격이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직전, 괴물이 기를 모을 때 나는 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별개의 공간에 격리되어 있었다네.”
“...모험가들이 땅속으로 가라앉는 건 나도 봤어. 아마 그 마물의 능력 중 하나일 텐데...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 그건 꼭...”
“그래, 마치 보호하려는 것 같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로군. 의도야 어찌 됐건 실제로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말일세. 만일 최전선에서 싸우던 내가 정통으로 폭발에 휘말렸더라면 지금쯤 형체도 없이 소멸했겠지. ...여타 모험가들처럼 말이네.”
“그 공간이란 건...”
“아무것도 없었네. 마치 시커먼 밤바다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동굴 바닥에 누워 있었고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네.”
부끄럽지만 말이지. 말톤이 미간을 구기며 뇌까렸다. 녀석도 영 탐탁지 않은 모양.
“...그럼 라디는? 걘 뭐라고 했어?”
“그녀하고도 얘기를 해 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네.”
“...정말로 무사한 거 맞아? 계속 안 보이니까 불안한데...”
“정말로 괜찮으니 걱정 말게나. 이젠 아예 연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군. 자네가 잘 지켜준 덕분에 상처 없이 멀쩡하다네.”
“그렇다면 다행이고...”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벼랑 위에는 천막을 펄럭이는 거센 돌풍과 장작이 타들어 가는 희미한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올 뿐, 모닥불이 피워올린 연기가 바람에 맞닿기 무섭게 부서져 멀리 퍼져나갔다.
말톤이 잔에 차를 채워주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네의 얘기를 듣고 싶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그 마물은 어째서 자취를 감춘 거고... 솔직히 자네가 그 괴물을 쓰러뜨렸을 거라고는 믿기 어렵네.”
날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녀석은 너무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거기 있던 모험가 중 그 마물의 저력을 깨달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 힘을 전부 발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 죽임을 당하는 길을 택했다.
“...젠장.”
말톤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녀석은 담담하게 내 말을 경청했지만 그 진녹색 눈동자만큼은 유래 없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자네에게 말을 건넸단 말인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물이라니... 솔직히 믿기 어렵군...”
“정말이야. 내가 똑똑히 들었어.”
“자네를 의심하는 게 아닐세. 분명 사실일 테지. 다만, 말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얘기일세. 워낙... 희귀한 경우지 않나.”
“그렇긴 하지...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몬스터는... 엄청 드물겠지?”
고블린이나 리자드 따위가 저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건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실로 개나 고양이 따위도 그러하지 않은가?
놈이 보여주었던 지능을 고려하면 간단한 단어 한두 개쯤 학습하는 거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만...
이번 사태는 그와 궤를 달리한다.
그 마물은 명백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내게 접근했다.
확고한 감정으로 날 대했다.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물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대표적으로 인어나 세이렌 등이 있으니 말일세. 몬스터로 분류하기는 조금 모호하지만 정령도 중급 이상 개체면 대부분 학습을 통해 깨우칠 수 있다고 하더군. 그 외에도 몇몇 있긴 있네, 어디까지나 흔하지 않을 뿐이지.”
‘일전에 봤던 그 마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이란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내 이름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알아낸 거라고 쳐도... 대체 왜 마지막에 그런 말을 건넨 걸까? 아니면 단순히 지금까지 해치운 모험가들의 유언을 짜깁기해서 우연히 조합해낸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건 알고 있다.
말톤 또한 냉정하게 일축했다.
“그렇다면 자네를 살려두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그 마물은 명백하게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들리는군. 라디가 준 맹독을 마셨다고 했던가.”
“...하지만 난 정말로 그런 존재 따위 본 적도 없는걸... 꼭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난...”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군.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나? 과거를 암시하는 내용이라던가...”
“......모르겠어. 기억이 흐릿해.”
어쩐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에 뿌연 안개가 들이차는 느낌이다. 마지막에 녀석이 변화했던 외형. 그림자. 등 뒤에 앉아있었던 토끼 모양의 인형. 단검 길이의 칼날. 라디보다 주먹 한 개 정도 작은 키. 선이 가늘었던 것으로 보아 여자 같기도 하고, 머리 위로 무언가가 가물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머리가 지근거린다. 애써 기억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두통만 심해질 뿐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먹먹하고 아련한 감정은 어째서일까.
“....사흘 내내 기절해 있다가 막 일어났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하네.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주게.”
“...그래. ....그러고 보니 다른 모험가들은 어떻게 됐어? 혹시 나 말고도 다른 목격자는...”
“워낙 어두워 제대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 폭발에 랜턴이 휘말려 대부분 박살 나버렸으니... 다만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송했네. 자네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펼쳤는지 말일세. 그들은 자네가 마물의 숨통을 끊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네.”
“...그런가.”
고개를 내리깔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모닥불을 쬐며 여러 얘기를 들었다.
쉰 명 가까이 됐던 토벌대가 절반 넘게 궤멸했다는 이야기나, 다른 모험가들을 미끼 삼아 동료들과 도망갈 계획을 도모 중이던 갈색 머리 리더, 한 남자가 사라진 자신의 대거를 애타게 찾았다거나, 정신을 잃은 나와 말톤을 거미들로부터 필사적으로 지켜낸 라디 이야기...
따스한 차를 입안에 머금었다.
말톤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의식을 잃은 날 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업혀 오지 못했을 테고, 나는 그 차가운 동굴 안에서 서서히 죽어갔을 거다. 라디가 없었더라면 마물을 쓰러뜨린 직후 몰려든 거미에게 잡아먹혔을 테고,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 누구 하나 모자란 사람 없이, 서로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녀석은 자신의 공을 축소하고 나와 라디를 띄워주기에 여념이 없으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러니 미워할 수가 있나.
“...자네 듣고 있나? 왜 실없이 웃고...”
“고맙다 말톤.”
“무얼 말인가...?”
“그냥, 전부.”
“....”
말톤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장작불로 시선을 돌렸다.
간만에 둘이서 의뢰를 수행하던 때가 떠올라 추억에 젖어있자니, 불현듯 저 멀리 비탈길을 걸어 올라오는 작은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정체를 헤아릴 것도 없이 라디는 등에 장작을 한아름 지고 언덕을 올라오다 날 발견하고는 짐이 떠내려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내 이름을 연호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
“도란님!!!”
“야! 잠깐...!! 지금 달려들면... 커허허헉!!!”
몸통박치기!
코볼트 킹 못지않은 육탄 공세, 폐 속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하다.
절묘하게 환부를 빗겨 난 덕분에 상처가 터지는 일은 면했으나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 당돌한 녀석을 내려다보자 라디가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아 맞다...”
“야, 야... 너 인마...”
“.....”
“...괜찮냐?”
처음엔 따지려고 들었지만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녀석이 내 가슴팍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품에 안겨 온 까닭.
맞닿은 피부로부터 그녀의 박동, 조금은 뜨거운 체온과 미약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이제야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아래서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매번... 혼자서만 다... 떠안으려고 하시고... 이번에도...”
“.....”
따뜻하다.
라디는 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지 조막만 한 손으로 내 붕대를 부여잡으며 가쁜 숨을 쌕쌕거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아파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하나하나 배려심 넘치는 아이.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 끝까지 내 고집을 들어줘서... 곁에 있어줘서...”
“...제가 할 소리에요. ...고마워요, 도란님...”
라디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팔에 살포시 힘을 실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서로의 온기를 나눴ㅡ.
“험험... 자네들 설마 내가 있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재빨리 떨어졌다.
““......””
“...왜 그런 눈으로 노려보고 그러나. 보기 좋군. 더 하지들 그러...”
“말톤님!”
라디가 앙칼지게 외쳤지만 코맹맹이 소리라 전혀 박력이 없다.
말톤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읊조렸다.
“흐흐... 난 저기 굴러떨어진 장작들을 회수해 올 테니 둘이서 화포라도 풀고 있게. 아니면 아예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워줄...”
“말톤님.”
라디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지만, 이 역시 코를 훌쩍거리는 중이라 전혀 박력이 없다.
“느긋하게 다녀오도록 하지...”
말톤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비우자 야영지에는 나와 라디만 남게 되었다. 좀전의 온기가 떠올라 짐짓 헛기침하던 찰나, 라디가 내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짙은 청색 눈동자에는 사뭇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도란님.”
“...그래.”
“저랑 약속 하나만 해요.”
“...무슨 약속?”
“앞으로 다시는 혼자서 무리하지 않기로. 절대 저를 버려두고 혼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잠시 숨을 삼키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떻게 보면 자칫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발언.
하지만 그녀의 저변에 깔린 저의는 그게 아니겠지.
차분히 응시하자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지만, 그간 내 안위를 걱정하며 잠을 설쳤는지 눈가에는 옅은 눈그늘마저 껴 있다.
어지간히도 마음을 태웠을까.
“...그래 알았다.”
“....또 말로만 그러실 거죠.”
“아니야, 약속할게. 자.”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라디가 빤히 쳐다봐왔다.
의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에요?”
“내가 있던 곳에서는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하는 풍습이 있거든, 자 손가락 줘봐.”
라디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렸다.
“....도란님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약속이 아니라 복종을 강요할 때 쓰는 손동작인데요? 주인이 노예를 거두어들였을 때나 하는 표현이에요.”
“뭐...? 잠깐...! 난 그런 의미는....”
그간 이곳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문화 차이를 잊고 있었다.
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자 녀석이 씨익 웃더니 내 손가락 위에 새끼손가락을 걸치며 속삭였다.
“뭐, 좋아요. 하나같이 바보 같네요. 도란님은...”
“....피차 마찬가지다 인마.”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하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하다.
언제까지나 이런 온기가 계속됐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이 또한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되찾은 것 중에 하나겠지.
지난 고생이 조금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줄기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선선히 흩날렸다.
응...?
황급히 머리를 매만졌다.
투구.
없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틀어 바라보자
“왜요? 도란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