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2계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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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2계층 #2
“도란님...?”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던가.
지금 내 상황이 그러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뒤이어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고, 고장 난 괘종시계처럼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내 터져 나오는 닿소리. 귓가를 맴도는 이명과 알 수 없는 사고가 공회전을 거듭했다. 하여 주저앉고 말았다.
열기에 노출된 싸구려 합성수지처럼 일그러져가는 시야 귀퉁이로 붉은 로브가 일렁거렸다.
“도란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
소리와 색채가 빠져나간다. 소름 끼치게 점멸하는 불빛. 지난날의 기억이 망자처럼 보랏빛 늪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과거.
검은 머리라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에게 배척당했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배신당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물건처럼 팔려나갔고,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
한 소녀가 떠올랐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가던 내게 빵을 건네주었던 갈색 머리 소녀. 그 애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어야 했다.
어두운 생각이 스멀스멀 심장을 좀먹었다.
느닷없는 공황에 숨이 막혀오던 찰나ㅡ
“도란님!!”
미온한 온기가 느껴졌다.
라디가 날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진정해요 도란님.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크게 심호흡하세요.”
“윽...! 너, 넌...!”
“전 도란님을 버리지 않아요. 떠나가지 않을게요.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제 눈을 똑바로 마주 보세요.”
“......”
“자... 숫자를 셀 테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거예요. 하나... 둘... 셋....”
“.....”
호흡을 가라앉혔다. 구겨졌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고, 떨리던 손끝이 진정된다.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자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많은 역경을 헤쳐 왔다.
생사가 걸린 시련 속에서 서로를 의지해왔다. 비록 정체가 들켰을지언정 우리가 쌓아왔던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껏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았는가.
라디가 당장 날 내칠 리 없다. 우리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구했다. 사흘 동안 기절해 있을 때, 녀석은 이미 내 머리에 대해서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날 떠나지 않았다. 내 몸을 감싼 붕대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이 그 방증이다.
그녀의 체온에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좀 진정되셨어요?”
“.....”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고작 이것 때문에 여태껏 꽁꽁 숨기고 다녔던 거예요?”
“......”
“정말... 어린애 같은 표정이나 짓고... 전 처음부터 이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다구요.”
라디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천천히 올라가 머리칼에 닿았다.
그녀가 내 흑발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제가 도란님을 등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저랑 있을 때는 투구 벗고 계셔도 돼요. 모처럼 잘생긴 얼굴인데 아깝잖아요.”
아.
그 연연한 미소를 보고 깨달았다.
내가 보낸 삶
지켜온 것들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충분히 보답받았다는 것을.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저... 도란님?”
얼음장에서 나온 몸에 혈색이 도는 것처럼, 온몸에 묘한 열감이 깃들었다. 맞닿은 라디의 피부 탓인지 가슴의 붕대가 답답하기만 하다.
덥다.
숨결에 뜨거운 열기가 섞여나온다.
라디의 짙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이 색채를 어디서 봤더라. 그래, 옛적에 아버지와 함께 포류했던 푸른 바람이 부는 섬. 그 섬의 연안이 대충 이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녀석의 눈동자 속을 포류하는 지금 내 표정은 어떠할까.
“도란...?”
녀석을 껴안은 그대로 서서히 상체를 기울였다. 작은 소음과 함께 야트막하게 자라난 목초가 들썩였다. 확고하고 강력한 감정, 순수한 열망이 타오른다.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소유욕.
두 어깨를 가볍게 짓눌렀다.
“아...”
날 향한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살짝 입술이 벌어졌다.
라디는 당황한 듯 몸에 힘을 줘 보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온유하게 손가락으로 뺨에 난 문양을 훑자 녀석은 곧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새침하게 쳐다봐왔다.
그 목울대가 자그맣게 위아래로 왕복하더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라디의 두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밀어넣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라디 또한 살며시 공간을 마련해주더니 발등으로 내 다리를 옭아맸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자, 그녀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손등에 배시시 뺨을 비벼온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시선, 그 애간장 들끓는 눈빛에 손끝이 저려온다.
손가락을 점점 아래로 향했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쇄골로 향했다. 옷깃이 걸리적거리자 조금은 거칠게 앞섶의 단추를 풀었다. 산뜻한 체취가 물씬 풍기고 몸에 긴장이 맴돈다. 녀석이 나를 조금 세게 쥐자 옷주름이 졌다.
“......”
“.....”
잠시 눈을 마주했다. 혹 나 혼자 너무 앞서나가는 건 아닌가 걱정됐기에. 하지만 곧바로 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젖은, 해진 물살에 지는 노을처럼 놀라운 이채가 반짝이는 눈망울에 실려있었으니.
이윽고 숨결에 달콤한 향기가 담겼다. 뺨에 달라붙은 잿빛 머리칼이 고았다. 그녀가 살며시 지은 사르르 녹을듯한 미소에 그만 아찔했다. 좀 더 체온을 느끼고 싶다.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 새하얀 살결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조바심.
멈추었던 손을 다시금 놀리려는 찰나,
우드득!
인기척이 들려왔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자 말톤이 고목 위에 올라탄 채 몰래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교묘하게도 얼굴엔 위장크림마저 발라놓았다.
정적.
“...아이고, 들켜버렸군...”
““......””
“음...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일세...”
““.....””
“각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오면... 도라! 도라는 어떤가! 아들도 좋지만 난 딸이 더 마음에 들...”
푸슉!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말톤이 나가떨어졌다.
“......”
재빨리 로브 앞섶을 여미는 라디의 얼굴이 잘 익은 홍씨만큼이나 붉었다.
*
“붕대도 전부 새로 감았으니까 얌전히 계셔야 해요. 조금 이따가 약 먹는 거 잊지 마시구요. 그럼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게...”
“환자 주제에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도란님은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함정에 걸린 동물이 있는지만 확인해보고 오는 거니까 금방 돌아올게요. ...말톤님도 잘 봐주시고요.”
“....저거 괜찮을까?”
바위 뒤편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말톤을 곁눈질했다. 녀석은 온몸이 쫄딱 젖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부끄러움을 못 이긴 라디는 말톤의 머리채를 붙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구절을 외치며 무시무시한 짓을 행했고, 기억을 완전 소거 · 박멸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여파로 일시적 사고장애가 온 것 같지만 뭐... 조금 지나면 나아지겠지.
다 자업자득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라디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한 뒤, 녀석이 능선 아래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자 말톤에게 말을 걸었다.
“...야, 괜찮냐..?”
“.....”
“야, 말톤!”
“.....”
“...꼬맹이 갔다.”
“커허허헉!! 저 망할 기지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누가 훔쳐보랬냐. 위장크림은 대체 또 어디서 난 거야.”
“그냥 등유 찌꺼기에다가 황토랑 풀잎을 짓이긴 게 전부일세. 눈썰미 좋은 마물을 추격할 일을 대비해 만들어두었지. 그보다 도란 자네도 제법이군. 여태 여낙에는 관심도 없이 목석처럼 굴더니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닥쳐. 나도 부끄러우니까.”
달아오려는 뺨을 애써 무시하며 짐짓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래도 저번 멧돼지 손질 직후처럼 어색해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게 다 말톤 덕뿐이다. 녀석을 물고문할 때 나도 한몫 거들며 의기투합했으니까.
...뒤끝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슬쩍 말톤을 쳐다보자 녀석은 젖은 외투를 펼쳐 고목에 널고 있었다.
“...야, 말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흠... 앞으로 말인가? ...생각해 보니 대부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헛소리하지 말고, 던전 말이야.”
“아, 그 얘기였나. 애석하지만 자네 회복이 최우선일세. 그대가 낫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가네. 그다음에서야 플래시 골렘의 서식지를 찾아가든 할 테지.”
“난 지금도 사냥할 수 있...”
“도란!”
“.....!”
어깨를 움찔했다. 설마 말톤이 큰 소리를 낼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늘상 여유를 잃지 않던 녀석이지 않은가.
말톤은 그에 그치지 않고 살짝 격양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쓰러져 있는 사흘 동안 라디가 많이 걱정했네. 그대 앞에서는 태연하게 행동하려는 모양이지만, 그간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 먹어서 몸이 망가지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네.”
“....”
“그 아해 마음도 헤아려야지, 지금 자네의 걸레짝 같은 몸으론 짐만 될 뿐이네. 더욱이 그대에게 큰 하자가 있다는 건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알지 않나?”
“......”
굳게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럴 도리가 없다. 놈의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나는 동급의 모험가들보다 훨씬 강할뿐더러 순간적으로 랭크 이상의 힘을 발휘할 때가 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제어할 수가 없다.
전투에 몰입하다 보면 불쾌한 살의가 서서히 치밀어오른다. 그렇게 점점 충동에 잠식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턴 나도 모르게 그 파랑(??)에 몸을 맡기고 있다.
내가 다치는 것도,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지어 실수라고는 하나 말톤에게 칼을 들이민 적도 있을 정도니.
그와 행동을 같이 하고 난 뒤로부터는 증상이 제법 호전됐다고는 하나 완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그간 내가 저질러온 악행과 풍파의 잔재와도 같았으니까.
“...그 몸뚱이로 싸우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수록 더욱 위험하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 ...난 그대를 잃기 싫네. 내 손으로 해치우기는 더더욱 싫고.”
“...그래, 그리고 내가 만약...”
“자네가 라디한테 검 끝을 들이민다면 말인가? 알겠네, 최대한 깔끔하게 보내주겠네.”
“....고마워.”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네.”
말톤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서늘한 음색을 듣고 있자니 찬물을 바가지째로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다.
주먹이 새하얘질 정도로 움켜쥐며 고개를 축 늘어뜨리자 보다못한 녀석이 덧붙였다.
“뭐, 그래도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 전에 말릴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니 지지리 궁상떨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하게. 그래야 사냥을 나서던 할 테니 말이네.”
녀석이 씩 웃어 보였다.
몇 번이나 위안받은 바로 그 미소.
“...그나저나 식은 언제 올릴 생각인가? 내 친히 사회를 봐 줄 생각도 있는데 말이야. 뭣하면 내 지인들까지 전부 불러모아 하객으로...”
이내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몇 번이나 봐도 짜증 나는 바로 그 미소.
“...너 자꾸 긁을래?”
“서, 설마 그녀 하나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 건가...?! 이런! 인간들은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군! 자네가 동료 동료 거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네. 처자식만으로 길드를 꾸릴 생각인가?”
“...아까 괴롭힌 거 사과할 테니까 이제 그만 해라. 없던 병도 생겨나겠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땔감을 던져넣자 놈의 입꼬리가 요란하게 씰룩거렸다.
“흐흐... 이런 즐거운 소재를 놓칠 수가 있나. 남의 연애사만큼 흥미로운 게 없는 법이지. 게다가 어떻게 보면 내가 맺어준 인연 아닌가? 나이를 들다 보면 단 걸 싫어하게 된다지만, 가끔은 이렇게 달달한 것도 나쁘지 않군.”
말톤이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근데 너 엘프치곤 어리다며.
더욱이 녀석의 외모는 끽해야 이십 대 초반. 정신은 육체를 따라간다는 말이 있듯 평소의 행실을 살펴보면 비슷한 나이대의 인간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나와도 죽이 잘 맞는 거고.
...놈의 성벽을 생각해 보면 완전히 그렇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곱게 늙을 것이지.”
“흐... 솔직히 고백하자면 서로를 소개시켜줄 때부터 이런 일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건 아니네. 둘 다 한창일 때가 아닌가? 더군다나 자네도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알아챘을 테지만 그 아해 또한 아픈 상처가 있다네. 그대와 비슷한...”
“그쯤 해둬. 걔도 자기가 직접 말하고 싶을 테니까.”
뭐, 대충은 눈치챘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못 알아채는 것도 이상하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수통을 기울였다.
헌데 말톤은 여전히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또 할 말이 남았어?”
“그야 물론이지. ...자네, 라디의 어떤 점에 반한 겐가.”
“...갑자기?”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머리를 굴려 봤으나 대체 언제부터 그녀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는지 도통 생각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예 동성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빠져들었다고 할 수밖에.
행동 하나하나에 배려가 녹아 들어가 있는 점이 좋고, 그 잿빛 머리칼 하며 푸르른 눈, 내겐 없는 상냥함과 가끔 방심할 때마다 내비치는 순진무구한 표정까지 전부 좋다.
내 머리를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어 마음에 불을 지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 해악의 굴레와도 같은 흑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남아주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안받는 기분이다.
...사실 나는 정말 쉬운 남자가 아니였을까.
입가에 씁쓰름한 희소를 머금으며 읊조렸다.
“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랬지. 이유랄 게 있나.”
“...그런 것치고는 자네 꽤 최근까지 그녀를 오해하고 있지 않았나? 헌데 그때도 제법 사이가 좋았던 거로 기억하네만.”
“....그 얘긴 하지 마라. 그리고 그때는 동료로서 좋아했던 거지 별다른 마음은 없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땐 왜 그랬는지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알아챌 기회도 은근 많았는데 말이야...”
“알아챌 기회? 혹시 내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는가?”
“음... 아마도...? 그야 그렇잖아. 우리끼리야 환복할 때도 서슴없이 하지만 녀석이 옷 갈아입는 건 한 번도 못 본 것도 그렇고, 씻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따로 가고. ...배낭을 뒤지다가 여성용 속옷을 발견한 적도 있었지.”
“....자네 그러고도 눈치 못 챘던 겐가.”
“나도 왜 그랬는가 싶다. 그간 사회성이 아예 결핍되어 있어서 그런 건지... 그나저나 얘는 언제오...”
뿌드득!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그곳엔 라디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목뼈가 부러져 덜렁거리는 토끼를 손아귀에 움켜쥔 채.
아.
“...아? 지금 ‘아’라고 하셨나요? 말톤님은 기억을 지웠던 것 같은데 언제 정신 차린 거고, 속옷? 제 가방에서 속옷을 봤었나요 도란님?”
아아.
“그게 무슨 말일까요. 제가 알기로 도란님한테 남의 물건을 뒤지는 취미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제가 오해했었나요? 도란님도 말톤님처럼 그런 특이한 행동을 하면서 흥분하는 타입인가요?”
아.
“셋 셀 테니 제가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내놓으세요. 셋... 둘.. 하나....”
“....”
“.....”
“.....살살 부탁해.”
“네, 둘 다 뒤졌어요 오늘.”
라디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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