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46화 (46/375)

〈 46화 〉 2계층 #3

* * *

[046] 2계층 #3

“.....”

“저... 꼬맹아...?”

“변태.”

“꼬맹아 그건...”

“말 걸지 마세요.”

“.....”

한숨을 내쉬며 앞길을 나아갔다.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휑한 바람에 옆구리가 시려왔다.

원래대로라면 내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이동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어제 말톤이 불침번을 서다 배회하는 몬스터 무리를 발견한 탓에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부득이하게 내 짐도 말톤과 라디가 나눠 들게 되었고.

짊어진 건 없지만 가벼운 어깨에 반비례해서 발길이 무겁다.

“꼬맹아... 내가 짐 좀 거들어...”

“얌전히 걷기나 하세요, 변태.”

“.....”

라디는 단단히 토라졌다.

재빨리 말톤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야...! 너가 어떻게 좀 해봐...!”

“...뭘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 두손 두발 들고 무력하게 당하는 걸 자네도 봤잖은가!”

말톤이 식겁하며 물러났다.

녀석은 어제 두 차례나 모진 고문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환자라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나도 비슷한 꼴을 면치 못했을 테고.

“게다가... 내가 보기에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네. 그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으로 보인다만...”

“거기.”

“네, 넵!!” “부, 불렀는가..!”

“쫑알쫑알 떠들지 말고 따라오기나 하시죠.”

““알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라디가 갑이 되었다.

분명히 계약서를 쥐고 있는 건 말톤인데... 지금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어딜 가든 대우받을 수 있는 재걸임에도 단점이 장점을 완전히 덮어버린단 말이지...

영 김빠지는 녀석이다.

“저... 꼬맹아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이전에 도란님을 업고 올 때 봐 둔 동굴이 있어요. 당분간은 거기서 지낼 예정이에요. 근처에 냇가가 있는 걸 확인했으니 물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사냥감도 풍부할 테니까요.”

“...하나부터 열까지 고마워, 정말로...”

“알면 잘 하세요, 남의 속옷이나 훔쳐보지 말고.”

“.....”

“어휴 진짜... 전투할 때는 듬직한데, 왜 평소에는 그렇게 애 같은 거예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전투할 때마저도 어딘가 불안불안한데...”

“...내가 좀 더 잘할게...”

“정말... 저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여자 같았...”

“잠깐.”

전방 돌무더기 사이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라디가 손바닥을 뻗으며 만류했다.

“도란님은 물러나 계세요. 제가 확인해볼게요.”

“난 괜찮...”

“물러나 계세요.”

라디가 배낭을 털썩 내려놓더니 크로스보우를 전면으로 내세운 채 눈초리를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변화가 있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애꿎은 소맷자락만 바람에 휘날렸다.

“...도란님, 정말 뭐가 있는 거 맞아요? 저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잠깐 기다려봐.”

곧바로 발치의 자갈을 주워들고 소리가 들려왔던 장소를 향해 내던졌다. 돌멩이는 암석에 부딪히자 맥없이 튕겨났지만, 그와 동시에 새까만 형체가 바위틈을 가로지르며 뛰쳐나왔다.

“앗!!”

­철컥!

라디가 섬짓 숨을 들이켜며 격철을 당겼다. 이내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자그마한 뿔이 두 개 달린 검은색 토끼가 볼트에 적중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몬스터.

“이건... 섀도우 래빗이네요...”

“...섀도우 래빗이로군.”

“섀도우 래빗? 그게 뭔데.”

라디와 말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기에 내 목소리 톤 또한 자연히 낮아졌다.

“...위험한 거야?”

“아니요... 위험한 건 아니지만...”

“굉장히 희귀한 몬스터라네. 개체 수가 적은 데다가 워낙 빠르고 은밀해서 도통 잡기 힘든 녀석이지.”

“...그럼 좋은 거 아냐? 털가죽도 보들보들해서 나름 비싸게 팔릴 것 같은데?”

“흠... 그렇긴 하다만...”

두 녀석이 내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더니 라디가 마지못해 총대를 멨다.

“...도란님, 섀도우 래빗이 여기 숨어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저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응? 그거야... 어?”

그러고 보니...

육안으로 직접 목격한 건 아니다. 청각, 특히 후각이라면 라디가 훨씬 예민하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지 않아 홀가분한 덕에 평소보다 감각이 날카로워졌을 수는 있으나, 녀석들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겠지.

“도란님... 동굴 안에서 그 괴물하고 싸울 때... 마지막에 어떻게 해치우셨죠...?”

“놈을 쓰러뜨리는 건 너도 봤지 않아?”

“아뇨, 워낙 어두운 데다가 저도 중간부터는 사라진 말톤님을 찾고자 필사적이었으니까요. 거기 있던 사람 중 놈의 최후를 직접 목격한 건 단 한 명밖에 없어요. ...도란님이요.”

“...그래?”

보아하니 말톤에게 전말을 전해 듣지 못한 모양. 어제는 여러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이 기회에 그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라디의 미간이 알기 쉽게 일그러졌다.

재빨리 사족을 덧붙였다.

“미안,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어젠 워낙 겨를도 없었고 네가 걱정할까 봐...”

“도란님.”

“...미안해, 좀 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도란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곧바로 말해주셨으면 좋았겠지만...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나요?”

“...어떤 거?”

“강한 마력을 지닌 마물이나 사람한테는 독이 잘 안 든다고요.”

“....그랬지.”

그게 독이 지닌 명확한 한계 중 하나니까.

라디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드린 독은 확실한 맹독이에요. 바늘 끝에 맺힌 한 방울만 있어도 건장한 성인 남성을 인사불성으로 만들고, 두 방울이 있으면 그 누구도 암살할 수 있죠.”

“......”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갈수록 효과가 급감해요. 그 괴물이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었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요. 놈이 보여주었던 지능, 파괴력과 미처 보여주지 않은 능력을 종합해 봤을 때 그 개체는 아마 A등급 이상이었을 거예요.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어요...?”

“.....”

몬스터의 등급은 모험가의 랭크와 조금 다르다.

토벌난이도 C등급인 코볼트 킹을 예로 들면, C랭크 모험가가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격퇴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리고 몬스터의 위계는 S등급까지가 끝이 아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몇몇 마물은 당대 최고의 모험가들이 떼거리로 달라붙어도 손도 못 댈 정도로 강력한 개체도 있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는 S등급을 넘어서 재앙 등급, 즉 앙재(?災) 적구(??) 화구(??) 등으로 특정할 수 있다.

줄이자면, 마물의 강함이 인간의 전력을 현저하게 웃돈다는 얘기다.

실제로 몇몇 마법사들이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단 한 몬스터에 의해 멸망한 문명도 수두룩하게 존재했다고 하니. 대전쟁이 벌어지기 이전 시대에는 지금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강력한 마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살얼음판 위에 지어진 얼음 왕국,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해변가의 모래성이 현재 인간 문명의 실정인 것이다.

즉 라디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터무니없는 괴물이... 단순 독 하나 마셨다고 죽었을까요? 물론 제가 도란님께 제공해 드린 거긴 하지만... 결정적인 돌파구가 되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어요.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독을 건넬 때 말끝을 흐렸던 거고요. 그 독은 B등급 마물에게서 추출한 거였으니까요.”

“...그렇다면 놈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야...?”

“....확답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도란님을 포함해 아무도 그 마물이 숨을 거두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론인데요...”

“.....”

라디가 잠시 뜸을 들이며 뒷말을 고르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 괴물이 마지막에 도란님께 모종의 힘을 양도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공방이 오고 가긴 했지만 도란님에게는 묘하게 유순했던 태도도 그렇고... 종국에 남긴 말도 신경 쓰여요. 물론 터무니없는 이야기란 건 저도 알지만...”

“.....”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아직 어떻다고 딱 짚어 말할 시기는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게 정말 가능한지도 모르니까요. ...상상하기도 싫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도란님의 몸속으로 숨어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

“...얘기가 좀 비약적인데... 솔직히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네. 어쩌다가 몬스터 하나 먼저 발견했다고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냐...?”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다. 바위틈 사이에 숨어있던 몬스터를 찾아냈다고 대뜸 마물의 힘을 이어받았다니...

내가 그런 괴물과 접점이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왜 나란 말인가. 그 흔하다는 마나 하나 쓸 줄 모르고 길바닥에서 배를 곯고 다니던 게 불과 며칠 전 일이다. 느닷없이 마물의 힘을 구사하게 되었다고 해서 아 그런갑다 하고 넘길 성정이었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나 스스로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

별 감흥 없이 팔다리를 기웃거리자 라디와 말톤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도란님... 이건 혹시 몰라서... 나중에, 그러니까 도란님의 몸이 다 나으면 말씀드리려고 했던 건데요...”

“말해봐.”

“....발치를 보세요.”

“발치...?”

라디의 말대로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낡아빠진 샌들에 우두커니 늘어선 그림자. 평소와 같다.

“뭐가 이상한데?”

“...저희 그림자하고 비교해 보세요.”

꼬맹이의 말대로 두 녀석의 발치를 살펴봤지만 딱히 다른 건... 어?

위화감.

“눈치채셨어요...?”

“...그래.”

이곳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산비탈, 더욱이 발광 이끼로부터 고루 빛이 뿜어져 나오는 던전 특성상 그림자가 흐릿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선명하네.”

내 발아래 늘어진 그림자 하나만 유독 뚜렷하다.

두 녀석의 옆으로 가서 비교해봐도 마찬가지.

명백한 이상 징후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몇몇 샤먼들이 사용하는 주문 중에는 어둠을 강하게 만드는 주술도 있다고 하니 완전히 생소한 현상은 아닐세, 다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걱정되는 게 사실이죠. 도란님, 앞으로 당분간은 전위에 나서지 마세요.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경과를 살펴봐요.”

“.....”

“도란님의 마음은 알지만... 자칫하다간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요. 불의 정령과 뭣도 모르고 계약했다가 타죽은 모험가 얘기는 들어보셨죠? 게다가 최악의 경우 그 마물이 선보였던 능력 중엔...”

“녀석이 내 그림자에 숨어있고, 내가 약해진 틈을 타서 목숨을 노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네. 자네 말대로라면 그 마물은 그림자 속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모양이니까.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태도로 미루어 자네에게 해악을 끼칠 의도는 적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네.”

“...알겠어. 당분간은 조심할게.”

“네, 부탁드릴게요.”

몬스터의 힘을 구사하는 인간이 실존한다는 전승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있긴 하다.

고블린만 수백 수천 마리를 학살한 결과, 그들이 쓰는 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모험가 이야기나, 고대 마물과 계약해 기존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마법을 구현할 수 있게 된 마법사나...

하지만 그런 소문들은 대개 끝말이 좋지 않다.

제 힘에 도취해 무모한 짓을 벌이다가 객사하거나, 도리어 자기 능력에 잡아먹혀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아직 위험하다고 확정 난 건 아니니 지레 겁먹을 일도 아니긴 하지만.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법과 몬스터가 판치는 세계인 만큼, 외부인인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나중에 던전을 나가면 아리엘한테 한 번 상태를 봐달라고 부탁해봐야지.

“...다 왔어요, 바로 저 동굴이에요.”

곰곰이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표했던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다만 기분 탓인지 분위기가 조금 음산하다.

“...안전한 거 맞아?”

“아마 괜찮을 거예요. 입구에 몬스터 발자국이나 털 같은 흔적들이 없으니까요. 꽤 오랫동안 버려진 공간 같아요.”

“일주일쯤 지나면 자네도 어느 정도 나을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네. 그 기간 동안 머무르기에는 모자람 없어 보이는군.”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던전에 들어오고 이미 한 주나 흘렀다. 여기서 또 지체하면 계약 만료 기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소재를 챙겨 돌아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하니 암시장에 들리는 건 꿈도 못 꾸겠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라디와도...

“으이구... 또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죠?”

라디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팔뚝을 꼬집었다.

“나? 내가 뭘...”

“무슨 생각 하셨어요? 말해봐요.”

“...일주일이나 지체하면 파티 해산까지도 얼마...”

“거 봐, 어휴...”

라디가 다가오더니 내 가슴팍을 검지로 툭 찔렀다.

“환자는 낫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제가 계약 때문에 도란님한테 붙어 있는 것 같아요?”

“.....”

“....말했잖아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괜찮은 파티 찾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계약이 끝나도, 제발 놓아달라고 부탁해도 앞으로 쭉 부려먹을 테니 그런 줄 아세요.”

라디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제 속내까지 감출 수는 없었는지 후드 아래로 엿보이는 두 뺨이 살짝 붉다.

“흐흐... 이거 원... 낯뜨거워서 어디 있겠...”

“그럼 시원하게 물맛 좀 보여드릴까요? 말톤님.”

“....미안하네.”

“코로 숨 쉬고 싶으시면 입방정 떨지 마세요.”

“알겠네...”

말톤이 쭈굴하게 물러서자 라디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전 정찰 겸 주변에 함정 설치하고 올 테니 도란님은 불 좀 피워주세요. 말톤님은 동굴 안쪽에 거처를 마련해주시고요. 그리고 혹시 제가 없는 사이에 또 속옷을 훔쳐봤다간...”

“안 할게!! 정말로!! 그때 왜 그랬는지 너도 알잖아!”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편이 낫겠네요. ....그리고 도란님께 말씀드릴 하나 더 있는데...”

“...뭔데?”

“......이따가 오늘 밤에 말씀드릴게요. 그럼 이만...”

라디가 우물쭈물하더니 휙 하고 가버렸다.

“.......”

또 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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