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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47화 (47/375)

〈 47화 〉 2계층 #4

* * *

[047] 2계층 #4

“흠... 비가 쏟아지겠구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비가 온다니.”

“삭신이 쑤시는 거로 보아 오늘 저녁쯤부터 내릴 것 같네.”

“던전인데...?”

“내린다네.”

“그렇군.”

라디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거처를 정비하다 보니 금세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난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오겠네. 아무래도 비가 오면 대비해야 할 게 많으니 말이야.”

“그래, 조심히 다녀오고.”

“고맙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지르게. 곧장 달려올 테니.”

말톤이 메이스를 짊어지고 터벅터벅 떠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아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천장에 응어리진 먹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비라...”

난 비가 싫다.

어릴 적,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집 앞 낡은 책방에서 만화책을 한 아름 싸들고 오곤 했다. 그땐 빗소리를 배경 삼아 따뜻한 우유를 들이켜며 고즈넉하게 책을 읽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었다.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비를 맞을 때마다 울적한 기분이 든다.

매일 아침 숲속에서 눈을 뜨던 시절, 비가 오면 모든 산짐승이 제각각 굴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럴 때면 외톨이가 된 듯한 심정에 가슴 한구석이 시려왔다. 얼기설기 엮인 나뭇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뒤집어쓸 때마다 적잖이 외로웠다.

만약 감기라도 걸리는 날에는 사무치는 옛 기억에 열병을 앓았다.

그래서 난 비가 싫다.

돌이켜 보면, 이 세계에 오고 나서는 싫어하는 것만 늘어갔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게 된 거라곤...

“뭘 그렇게 지지리 궁상떨고 있어요?”

“...왔어?”

“말톤님은 어디 갔어요?”

“비온다고 뭐 좀 확인하러 간다더라. 산사태라도 걱정하나 보지.”

“그래요? 그럴까 봐 일부러 안전한 데로 고른 건데...”

라디가 다가오더니 내 곁에 앉았다.

살짝만 기울여도 피부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도란님.”

“그래.”

“투구 안 벗으시나요?”

눈동자가 마주쳤다.

해질녘 하늘이 담긴 듯 짙푸른 눈동자와.

“...투구는 왜.”

“그냥... 이제 다 아는 데 숨길 필요 없잖아요...”

“...네가 아까 말하려다 만 거 얘기하면 벗을게.”

“치사하게...”

라디는 고개를 돌리더니 지긋이 모닥불을 응시했다.

하지만 잠시 뒤, 후드로 가려진 옆얼굴에서 낙엽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옷 벗어요..”

“뭐, 뭐라고?”

“네? 못 들으셨나요?”

“진심이야...?”

“네? 네... 갑자기 분위기는 왜 잡고 그러시는...”

“......”

미처 몰랐다.

설마.

꼬맹이가.

이렇게까지 밝힐 줄이야...!

이런저런 짓을 벌이려다 말톤에게 들킨 게 바로 어제 일이다. 그때로부터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동안은 잠자코 있을 생각이었는데...

설마 둘만 남게 되자마자 바로 일을 속행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나 적극적일 줄이야! 순딩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밝히는 꼬맹이다...!

“도란님...? 그 조금... 가까운데요...?”

“꼬맹아.”

“네, 네...”

“상처 도지면 안 되니까 살살 하자. 너무 난폭하지는 않게... 난 여기 기대고 있을 테니까...”

“씨, 씨발 뭔 개소리에요!!! 연고!! 연고 다시 발라야 하니까 옷 벗으라고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난 다 받아줄 수 있으니까. 아니면 그런 취향? 그럼... 크흠...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세 치 혀로 구슬린 다음 방심한 틈을 타, 그 몸뚱어리로 날 유혹... 끄허헉!!”

“...자업자득이에요.”

“으, 으으... 아, 아니 그래도 이건...!”

“가만히 있어 봐요.”

움푹 들어간 두 눈을 부여잡고 발버둥치자 라디가 강제로 옷을 벗겨냈다.

“아, 아니 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그랬다간 또 헛소리할 거잖아요.”

“저, 정말로 내가 벗을게!!”

눈물을 머금으며 재빨리 상의를 내던지고 돌아봤지만 라디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뭐해요, 마저 안 벗고.”

“서, 설마 밑에까지 벗게 만들 셈이야..?”

“...어차피 기절해 있는 동안 볼 거 다 봤어요.”

“윽...!”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털 나고 나서부터는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데. 더욱이 내 스스로의 의지였다면 모를까, 무방비하게 당했다는 점이 부끄러움에 박차를 가했다.

막 이리저리 들춰보고 그랬을 거 아냐...!

“...농담이에요. 얼굴 새빨개진 게 투구를 뚫고 나오네,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도란님 나이대면 슬슬 결혼할 때잖아요.”

“.....”

이곳의 결혼 적령기는 중세와 엇비슷한 정도. 남자가 스무 살 중반 즈음, 여자는 이십 대 초반에 보통 많이들 혼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쉽게 죽어 나가는 만큼 일찍 대를 이으려는 이유 때문이겠지.

물론 열다섯 살부터 성년으로 치니 조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내가 있던 곳은 더 늦게 결혼하거든. 그러는 너는?”

“...연애하고 자시고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라디가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리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찾아오나 했더니, 녀석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고 쏘아붙였다.

“아니, 또 말 돌리고 있네! 빨리 마저 안 벗어요?! 붕대도 새로 갈아야 한다고요!”

“아니... 글킨 한데... 생각해 보니까 나 혼자서 해도 되는 거 아냐?”

너무 당당하게 주장해서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연고를 바르는 것쯤이야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허나 꼬맹이는 당황한 기색 없이 맞받아쳤다.

“그야 당연하죠! 그럼 제가 거기까지 해드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기절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그거야...”

너무 강건하게 주장하길래 당연히 손수 발라줄 줄 알았지...

“...해줬으면 좋겠어요?”

끄덕끄덕!

몸은 솔직하다.

지나치게 솔직하다. 이게 아닌데...

“....등만 발라드릴게요. 어차피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고.”

“...고마워.”

괜스레 또 어색해질 뻔했는데 잘 받아줘서 다행이다.

헌데 내가 붕대를 풀기 시작하자 곧바로 다분한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면을 바라보고는 있는데... 다 티 난다 얌마.

“...뭘 그렇게 빤히 봐.”

“아, 안 쳐다봤거든요!”

“안 쳐다보긴 무슨... 옆구리가 다 화끈거릴 정도인데.”

“생사람 잡지 마세요.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 정말...”

라디가 홱 고개를 틀더니 동굴로 오는 도중 핏물을 빼 두었던 섀도우 래빗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잠깐,

“...야, 너 왜 잘하냐.”

“네?”

“손질 왤케 잘하냐고.”

토끼를 해체해 나가는 손놀림이 썩 능숙하다. 나와 비등비등한 정도. 아니,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세심히 막을 절개해 나가는 솜씨가 나보다도 뛰어나다. 소재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하지 않으면 저런 속도는 나올 수 없을 텐데.

“그야 모험가로 밥 벌어 먹고산 지 오 년이 넘었는데 당연하죠.”

“....너 멧돼지 손질할 때는 손 벌벌 떨었잖아.”

“윽...! 그건...”

저번에만 하더라도 엄청 서툴렀는데 그때부터 일주일도 안 지났다. 서당개도 풍월을 읊으려면 삼 년이나 걸린다! 이 요망한 꼬맹아!!

“그, 그야..”

“그야 뭐 인마. 이제 보니까 이거 완전 요물이었구만? 괜히 서투른 척 해서 어떻게든...”

“아니, 그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거 아녜요?!! 게다가 그때 일은 잊으라고 했죠!!”

녀석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자리를 박차더니 성큼성큼 동굴 입구로 향했다.

“야, 어디 가냐.”

“내장 버리러 가요!”

그리곤 나가버렸다.

“쌀쌀맞기는...”

귀여운 자식. 여전히 놀리는 맛이 쏠쏠하다. 그러고 보니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내가 휘둘리는 듯한 느낌이 강했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연고를 바르고 있자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녀석이 돌아왔다.

“어 왔냐, 조금 오래 걸렸네.”

“냇가에서 손 닦고 왔어요. 피 묻은 손으로 상처를 만질 수는 없으니까요.”

“정말로?”

“그럼 뭐겠어요... 등이나 돌려 봐요. 연고 발라드릴 테니까.”

뒤돌아서 앉자 라디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깡통 뚜껑이 비틀리는 소음이 나더니 등 뒤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윽...!”

“...아파도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

자그마한 손이 피부에 맞닿을 때마다 오소소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솔직히 상처가 따끔거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 정서적인 안정감이 더 컸다.

그렇게 차박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짐짓 태연하게 허리를 펴고 있자니 라디가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어차피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이 봤어요.”

“하,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거짓말을 할 거면 좀 더 능숙하게 하시지... 저까지 덩달아 어색해지잖아요.”

“...아니 근데 그럼 말톤은 그동안 대체 뭐한 거야? 왜 걔가 안 하고...”

“남정네 몸 만지기는 싫다고 하던데요?”

“그 등신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헌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고를 바르던 손길이 멎어들었다.

“...왜 그래.”

“.....”

“고민하지 말고 털어놔, 들어줄 테니까.”

“....이거, 저 지키려다 다친 거죠...?”

라디가 조심스레 한 지점을 어루만졌다. 움푹 패인 상흔이 자리한 곳. 대규모 폭발이 발발했었을 때 녀석을 감싸다가 생긴 상처다.

“....아니.”

“거짓말. 레더아머에 남은 자국을 봤어요. 바위에 찍혀서 난 상처잖아요 이거... 도란님이 그 괴물과 싸우다가 돌에 얻어맞은 적은 그때밖에 없는데...”

“....너 분명히 도망가라고 했는데 내 말은 안 듣고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었냐, 내 희생을 뭘로...”

“도란님..”

너스레를 떨며 넘어가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짙은 슬픔이 껴 있었던 까닭에.

물기 어린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왜... 왜 그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만약 제가 도란님을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러게.”

“도란님...! 전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꼬맹아.”

투구를 벗었다.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하자 녀석이 흠칫했지만, 아랑곳 않고 그 어깨를 붙잡아 말을 이어나갔다.

“너도 알지? 내가 지금까지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

“그야...”

라디의 짙푸른 두 눈동자가 천천히 내 흑발로 향했다. 이내 녀석이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이 눈썹을 늘어뜨렸기에 그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지었다.

“그래, 그래서 난 내가 있을 장소를 찾아왔어. 너라면 나를 알고도 받아줄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널 구하고 있었어. 그저 그뿐이야.”

그 말을 뒤로 등을 돌렸다.

듣기 좋은 감언이설을 속삭일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전해졌겠지.

그리고,

“야 말톤 이 새끼야!!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동굴 입구를 향해 외쳤다.

­바스락!

그러자 즉시 커다란 형체가 튀어나왔다.

­뀌이익!! 뀌이이익!!!

금발 새끼 멧돼지가.

““......””

한 박자 늦은 쪽팔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귀를 어떻게든 숨겨보고자 고개 숙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끅끅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에요 그게... 괜히 어설프게 폼이나 잡고... 분위기 날아간 거 어떻게 할 거예요.”

“.....”

굳게 입을 다물며 침묵하자 라디가 내 귓전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아래쪽도 제가 연고 발라드릴까요..?”

­끄덕끄덕!!!!

썅!

내 몸은 왜 이렇게 솔직한가!!

그래도 좋다!

기대감에 부풀어 두근거리던 찰나­

“...오늘은 불청객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요...”

푸슉! 라디가 왼팔을 들어올리나 싶더니 희미한 격철음이 들렸다.

동시에 동굴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고.

“뭐, 뭐야...?!”

재빨리 다가가 확인해보자 이번에야말로 말톤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녀석은 닌자처럼 온몸에 진흙을 덧발라 위장하고 있었고, 스턴건에 맞은 비둘기처럼 온몸을 경련하며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넌 무슨 도적 전직관이라도 되냐.

“음... 이걸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까지 경고를 해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인데... 물에게 답을 구할까요?”

“아니...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

내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마.

이 개자식아.

*

시간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던전에 비가 내리네.”

“그러게요, 저도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인데.”

“...난 비가 싫더라.”

“그래요? 왜요?”

“그냥... 어렸을 땐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어.”

“전 좋아하는데... 안타깝네요...”

“......”

옆을 돌아보자 녀석은 작은 손바닥으로 빗물을 담고 있었다.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잔잔한 수면에 비친 얼굴은 그 잔물결에 이는 물방울만큼이나 오롯하겠지.

어쩌면 다시 비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밥 먹을 준비하자. 내가 요리할게.”

“네! 기대되네요..”

‘.....란..!’

탐스러운 선홍빛 살코기를 꼬치에 끼웠다. 배낭에서 꺼낸 향신료도 듬뿍 뿌렸다. 내 형편에는 조금 비싼 물건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조금 사치를 부리고 싶었으니까.

“이게 엄청 맛있다며. 이름이 뭐더라... 섀도우 래빗?”

“네, 미식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고급 식재료로 통해요. 한 마리에 무려 30실링이나 한다고요.”

“헐... 30실링이면... 던전 안이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겠네.”

“그러니까요.”

‘도..란...! 라...디...! 내가 잘못...했...!’

“그럼 꼬치구이 말고 다른 방식이 좋았으려나...?”

“도란님이 하시면 뭐든지 맛있는데요, 뭐.”

“흐흐... 이제야 인정하는 거냐?”

“예전부터 맛있다고 그랬잖아요!”

‘도...란!! 미안하...네...!! 사...살려...주...!’

“이 정도면 먹어도 되겠는데?”

“그러네요, 그럼...”

“잠깐, 내가 먼저 먹어볼게. 혹시 모르니까.”

“무... 물이..! 차오른... 어푸...! 다네..! 사.. 살려...!”

“아씹 저거 딥따 시끄럽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해초처럼 머리칼을 늘어뜨린 말톤이 보였다.

머리만 쏙 내밀고 땅에 묻힌 채.

“도, 도란...! 와주었는가...! 내가 정말 미안하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아래쪽... 어푸..! 아래쪽....에! 푸핫..! 감각이 없다... 네..!”

“야, 말톤.”

“......?”

“킹콩이 왜 뒤졌는지 알아?”

“킹... 콩..? 그게 뭔가...?”

“너처럼 기어오르다 뒤진거야.”

“도라아아아아아안!!!”

가뿐하게 발을 돌렸다.

처절한 말톤의 절규를 사뿐히 즈려밟고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라디가 내 어깨에 묻은 물기를 털어주었다.

“뭐래요?”

“새 집이 아주 마음에 쏙 든대!”

“그럴 줄 알았어요!”

손뼉을 마주치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던전의 밤이 무르익어갔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여운에 잠겨있던 도중, 오전의 일이 떠올랐다.

“꼬맹아, 아까 네가 할 말이 있다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라디 또한 날 올려다봤다.

그 시선이 마주치자 숨이 멎었다.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잠시간 침묵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도란님... 하나만 약속해 주실 수 있어요...?”

“...그래.”

“아무 말 마세요.”

라디가 후드를 젖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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