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50화 (50/375)

〈 50화 〉 2계층 #7

* * *

[050] 2계층 #7

“자, 그럼 어디 한 번 가볼까?”

드디어 날이 밝았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으나 그에 대비되어 내 얼굴엔 활기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게, 라디에게서 ‘이 정도면 움직여도 되겠네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젠 합법적으로 녀석의 귀를...!

“어휴... 그렇게 좋으세요?”

“그러엄! 그럼 어디...”

“지금은 안 돼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물론이지. ....그래도 살짝만...”

“안 돼요!”

“쳇, 쩨쩨하게 굴긴...”

닳는 것도 아니면서.

하는 수 없이 배낭을 짊어지고 동굴 깊숙이 나아갔다.

단단한 암석으로 뒤덮였던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습기 어린 석회질로 바뀌었고, 천장에서 찬 기운을 흠뻑 머금은 물방울이 떨어져 목덜미를 적시고 흘러내렸다.

라디가 등유 랜턴을 낮게 드리우며 중얼거렸다.

“첫날 대충 둘러보긴 했지만 여기까지 들어오는 건 처음인데... 엄청 음산하네요...”

“그렇군, 지금 당장에라도 원령이 뛰쳐나올 듯한 분위기일세.”

“도란님, 말씀하신 곳까지는 멀었어요?”

“조금 더 가야 해. 여기서부턴 내가 앞장설게.”

횃불을 치켜들고 앞서나갔다.

이 앞에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발길에 거침이 없다.

미끄러운 바닥에도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나아가다 보니 얼마 안 가 목표했던 장소에 도달했다. 어두컴컴한 동굴 한구석에 자리 잡은 바위틈은 여전히 오싹한 한기를 물씬 풍겨댔다.

“도착했어, 여기야.”

“네...? 아무것도 없는데요?”

“없기는, 잘 봐봐.”

두 녀석을 뒤로 물리고 입구를 세게 걷어차자 석순이 바스러지며 성인 한 명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통로가 드러났다.

“어때?”

““......””

라디와 말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쳐다봐왔다.

“도란님.” “도란.”

“으, 응?”

“솔직히 불어요! 여기 어떻게 찾았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제대로 대답하기 전까진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날 줄 아세요!!”

“.....”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는 수 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물론 그림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내용은 적당히 각색해서.

라디는 점점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난폭하게 옷깃을 잡아당겼다.

“도란님!! 제가 누누이 말...!”

“미안해,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사실대로 말하면 너희가 걱정할 거 아냐.”

“그야 당연하죠!! 그럴 걸 뻔히 알면서도 숨기신 거예요?! 저희가 어떤 심정일지 잘 알고 있으면서...!”

“정말 미안해.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면 밝히려고 했어. 그전까지만 비밀로 하려 했으니까 이번만 봐주라.”

“.....”

라디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이내 크게 심호흡한 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두 번은 없어요.”

“그래, ...고마워.”

“...으휴 진짜.. 도란님이 맨날 그렇게 나오니까 저 혼자 겁쟁이가 된 기분이잖아요! 항상 걱정만 시키고! 자기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빠져나가고!”

“미안하다.”

“나중에 잔뜩 혼내줄 테니 그렇게 아세요!”

...응?

어떻게?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네만 뭐, 자네도 자네 생각이 있으니 그랬을 테지... 이번엔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네. 하지만 다음번부터 그런 일이 있으면 조금 더 빨리 말해줬으면 하는군.”

“그래, 고맙다.”

“자, 그럼 그 문제는 제쳐두고... 지금은 여길 들어갈지 말지 결정해야 할 터인데...”

“....도란님은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아니... 전혀 짐작도 안 가.”

그림자 마물을 해치우고 얻은 능력이니 그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허나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 한정된 정보로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생각해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도란님을 데리고 던전을 나가고 싶지만... 어쩌면 이 안에 그 괴물에 대한 단서가 숨어있을지도 몰라요. 도란님에게 벌어지는 괴현상에 관한 것도요.”

“녀석을 쓰러뜨리고 난 뒤로 느끼게 된 감각이라면...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군. 혹 모르니 만전의 준비를 다 하고 들어서도록 하지.”

결국, 처음부터 외면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배낭을 먼저 밀어 넣은 뒤, 비좁은 입구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오자 곧게 뻗은 통로가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라디를 부축해 일으켜주자 녀석이 로브에 묻은 물기를 털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요즘 계속 야외랑은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늘 어둡고 협소한 장소만 골라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게... 빨리 비가 멎었으면 좋겠다.”

“흐흐... 암시장이 있는 3층은 탁 트인 평야와 호수로 가득하다더군. 위험한 몬스터도 별로 없는 모양이니 잠시나마나 풍류를 즐길 수도 있을 걸세.”

“저, 정말...?!”

반색하며 묻자 말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단 하나, 그거야 당연히...

“어휴...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도란님.”

“...내가 뭐.”

“보나 마나 또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었겠죠. ...아무래도 상관없긴 한데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주세요. 참나... 주의를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네...”

라디가 따끔하게 내 팔뚝을 꼬집었다.

그래, 지금 이곳은 던전 한복판.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라디, 함정으로 보이는 건 없는가?”

“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없어.”

발소리가 멎었다.

“지금 이 길은 안전해. 다만 앞으로 오백 보 정도 나아가다 보면 갈림길이 하나 나올 거야. 거기선 오른쪽으로 가야 돼. 왼쪽은 중간이 막혀 있어.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함정이 있을 수도 있겠네.”

두 녀석이 날 빤히 쳐다봐왔다. 어스름한 등불에 비친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 그런 느낌이 든다고.”

사방에 가득한 음영과 그림자들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으니까.

물론 전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내 말대로 통로를 나아간 지 얼마 머지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그러자 라디가 한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왔고, 말톤에 이르러서는 난감하게 관자놀이를 쓸어내리며 주변을 살폈다.

“...라디, 어느 길이 맞는 것 같나?”

“....솔직히 둘 다 의심스럽긴 한데... 왼쪽에서 미약한 기름 냄새가 느껴져요. 아마 기계장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난처하구먼...”

말톤이 날 생판 처음 마주한 사람 보듯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도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조심하게. 어떤 재주를 손에 넣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썩 달가운 느낌은 아닐세.”

“그래, 근데 어차피 일시적일 거야.”

동굴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속삭임이 커지고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면 완전히 그치지 않을까?

다만, 그 말은 즉 이 앞에 있는 분명한 무언가가 내 발걸음을 유도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그럼 도란이 처음에 주장했던 오른쪽 길로 나아가도록 하지. 왼쪽의 함정이 무슨 종류인지는 알겠나?”

“아니... 그것까진 모르겠어. 그냥 좀... 날카로운 무언가...? 톱날?”

“....그럼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요.”

“뭐가?”

라디가 말을 이었다.

“이 공간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탄생했다는 거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곧게 뻗은 통로도 그렇고... 함정이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대체 누가 이렇게 외진 장소에 기거할 생각을 했을까? 가뜩이나 우리 같은 모험가들이 아니면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야.”

횃불을 곳곳에 드리우며 살피고 있자니 말톤이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읊조렸다.

“...그야 뻔하지 않나. 던전이 발견된 게 고작 며칠 전 일이네. 그사이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없겠지. 만일 있다면 그건...”

“잠깐, 그렇다면 설마...”

녀석의 말대로 채 몇 걸음도 가지 않아 새로운 지형이 나타났다.

눈앞의 변화를 목도하자 미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이건.”

“이로써 명백해졌군.”

“네, 이건... 고대 유적이에요.”

석회질 성분의 암반으로 구성되어 있던 동굴 벽면이 어느 순간부터 네모반듯한 바위로 바뀌었다. 붉은빛이 도는 거대한 바위의 단면은 날카로운 도구로 다듬은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명백하게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

찌르르 울리던 떨림이 전율이 되고, 전율이 외침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꼬, 꼬맹아 우리가 정말로 고대 유적을 찾았어!! 고대 유적이라고!!!”

대박이다.

꿈에서조차 어렴풋이 상상만 하던 고대 유적을 정말로 찾아낼 줄이야.

여기서 쓸만한 물건 한두 개만 건져도 떼돈을 벌 수 있겠지.

그간 빈곤 탓에 겪었던 서러움을 떠올리자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 진정하세요..!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단순한 건축물일 수도 있으으윽...!”

내가 라디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자 녀석의 고개 또한 덩달아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무렴 어떠냐!! 나아가다 보면 뭐라도 있겠지! 하다못해 금 쪼가리라도...!”

“으으... 대신 그만큼 위험하다고요! 그때 그 괴물 같은 녀석이 떼거리로 있으면 어떡해요!”

“뭐, 그럼 그냥 나오면 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강력한 몬스터가 여럿 존재할 리가.

잔뜩 들떠서 라디를 얼싸안고 있자니 말톤이 난처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도란, 찬물을 끼얹는 건 미안하네만... 그리 낙관적인 상황만은 아닐세.”

“응? 뭐가?”

“자네도 알다시피 이게 정말 고대 유적이 맞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네. 게다가 함정이 있는 거로 보아 외부인을 반기는 것 같지는 않군. 조심해야 할 걸세.”

“그야 그렇겠지... 미안, 조금 흥분했네. 주의해서 나아가자.”

벅차오르는 가슴을 조금 가라앉힌 뒤, 신중하게 석재 통로를 거닐다 보니 얼마 안 가 난관에 봉착했다.

“어휴... 옘병, 그럼 그렇지.”

쉽게 들여보내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이번에는 열두 갈래나 되는 갈림길이다. 시커먼 아가리를 드러낸 굴길들은 전부 우리가 방금 빠져나온 통로와 같은 아치형 구조를 띠고 있었다.

단 한 곳만 빼고.

나머지 열한 개의 통로와는 다르게 정면은 거대한 바위로 막혀 있다.

“음... 아무래도 유적으로 들어가려면 이 바위를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다만... 어떻게 생각하나 도란? 혹 뭐 느껴지는 게 없는가?”

“글쎄다... 잠깐만 기다려봐.”

눈앞의 바위를 들여다봤다. 모험가 평균 신장을 한참 웃도는 내가 손을 뻗어도 끄트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 재질은 주변 석재와 동일하게 붉은 암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매끄러운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애매하네.”

“애매하다니, 도란 그게 무슨 뜻...”

“일단 저 통로들, 두 개는 함정이지만 나머지는 다른 공간으로 이어져 있어. 바깥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아마 이 던전 어딘가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 입구와 연결되어 있을 거야.”

“...그럼 우리가 들어왔던 바위틈이 유일한 입구는 아니라는 말이네요?”

“그래, 아마 이곳뿐만 아니라 던전 곳곳에 그런 입구들이 여럿 분포되어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 바위는... 여길 통과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방법을 모르겠어.”

하다못해 이음매라도 있으면 모를까, 미세한 균열조차 없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통짜 암석을 그대로 깎아 만든 모양인데 통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서 있지만 않았더라면 단순한 벽으로 여기고 지나쳤을 거다.

­깡!

“....단단하군, 부숴서 돌파할 수는 없겠어.”

말톤이 메이스를 내려치자 새빨간 불똥과 함께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그럼 이 문양들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요?”

라디가 랜턴을 비추며 바위에 가득한 부조를 해석하려고 애썼지만, 별다른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문양들이 너무 불규칙한 데다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쓰여있었기에.

“...말톤님, 말톤님은 저희보다 훨씬 오래 사셨으니 지식도 많잖아요. 혹시 이런 문자를 사용하던 문명을 알고 있나요?”

“아쉽게도... 없군.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대전쟁 이후로는 이 인근에 이러한 상형문자를 사용하던 종족이 없다는 것일세.”

“그런... 그렇다면 뜻을 유추해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말톤이 단언하자 라디의 얼굴에 수심이 졌다.

녀석은 한참 동안 턱을 짚고 고민하더니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어요. 도란님, 무슨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요?”

“....모르겠어.”

눈을 감고 그림자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봤으나 헛수고였다.

대다수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지껄였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의지가 담긴 전언이라기보단 자아를 잃어버린 망자들의 중얼거림에 가까웠기에.

망연한 눈길로 정면의 바위를 올려다봤다.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빠진 그때­

“저, 저기... 도, 도란님...?”

“왜?”

“아, 아래를 보세요...!”

“허미 씹탱!!”

내 발밑의 음영이 흘러넘치기 직전 스프처럼 맹렬히 요동치고 있었다.

“도란!!”

즉각 말톤이 내 목덜미를 붙들어 건너편 통로로 내동댕이쳤다.

등 뒤로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다.

“크헉!! 말톤...! 이게 무슨...”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게.”

녀석이 황급히 달려와 내게 횃불을 비췄다.

다만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내 그림자는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도란, 잠시 이리로 와보게.”

말톤이 날 부축해 일으킨 뒤 바위 앞으로 잡아끌자 다시금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란님의 그림자가 문에 반응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도란님, 잠시 주변을 돌아다녀 보실래요? 혹시 모르니 배낭은 벗고요.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잡아당겨 드릴게요.”

“....그래.”

털썩 배낭을 내려놓았다. 두 녀석이 긴장 어린 눈빛으로 쳐다봐오는 가운데 이리저리 홀 내부를 거닐자 그림자가 쉴새 없이 꿈틀거렸다. 마치 명확한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던 도중­

­.....

“...도란님.”

“....그래, 나도 알아.”

어느 한 지점에서 그림자가 돌연 잠잠해졌다. 문에서 약 네 걸음 정도 떨어진 장소.

“도란님 혹시 뭔가...”

“잠깐.”

“.....”

보인다.

이 위치에서 바라보니 뭔가 어렴풋이 보일 듯도 하다.

“....랜턴.”

말톤이 즉시 랜턴을 건네주었다.

“.....”

­끼릭.

등유 랜턴을 거머쥐고 들어올리자 바위에 양각된 부조에서 기울어진 그림자가 복잡한 문양을 자아냈다. 그래 그런 거였냐.

내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리자 라디가 불안하게 손짓했다.

“말톤님, 저거 상태가 좀 이상한데... 혹시 뭐에 홀린 거 아녜요?”

“....미안하네 도란, 다 자네를 위한 걸세.”

말톤이 메이스를 움켜쥐고 내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봐왔다.

녀석이 수를 쓰기 전에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제지했다.

“난 멀쩡하니까 안심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낸 것 같아. 너희는 잠시 뒤로 물러나 줘. 아니면 멀찌감치 구석에 횃불을 두고 오던가.”

““.....””

두 녀석이 통로 너머에 횃불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지금 이 홀을 비추는 광원이라곤 낡은 방풍 랜턴 하나. 그 랜턴을 요리조리 기울이다 보니 어느 순간 바위 표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딱 하나로 맞아떨어졌다.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 그게 이 문양들의 정체였다.

라디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탄복했다.

“이건... 상상도 못 했어요... 그림자를 퍼즐처럼 맞출 생각을 하다니... 대체 어떻게 이런 발상을...?”

“흐흐...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냐, 나 제법 똑똑하다고. 안 그래?”

“...방금 그 소리만 안 했으면 제법 멋있었을 텐데 말이죠.”

“사실인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실제로는 어릴 때 가족들과 갔던 미술관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지만.

고철 덩어리들을 뭉쳐놨을 뿐인데 전등이 켜지니 사람 얼굴 형태의 그림자가 뻗어나와 적잖이 놀랐었다. 그 뒤로는 작품 앞에서 동생과 손가락 그림자 놀이를 하며 놀았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으며 상념을 떨쳐내자 말톤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어왔다.

“흐... 믿고 있었다네 도란! 역시 자네는 종종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단 말이지...”

“...방금까지 뒤통수 후리려고 한 주제에 말은 잘해요. 그나저나 꼬맹아, 어쨌든 나 덕에 비밀을 알아냈는데 조금은 포상을 받아도...”

“꼬리는 안 돼요!”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딱 한 번만...!”

“안 돼요! 절대로 안 돼요! 왜 그렇게 못 만져서 안달...!”

그때였다.

­___________!!!

고막이 찢겨나갈 듯, 어마무시한 굉음이 귓전을 희롱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리고, 제대로 발을 딛고 있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지면이 뒤흔들렸다.

“으윽...! 꼬맹아!!!”

“라디, 도란...! 꽉 붙잡게!!”

“윽... 도란님!!”

우리는 간신히 홀 중앙으로 모여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진동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진동이 한풀 가시자 천천히 고개를 든 말톤이 신음했다.

“......내 살면서 이런 건 처음 보는군.”

가로막혔던 통로 너머엔 끝도 보이지 않는 미로가 펼쳐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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