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51화 (51/375)

〈 51화 〉 고대 유적 #1

* * *

[051] 고대 유적 #1

“이건... 하.”

“......”

“...압도적이군.”

끝이 보이질 않는다.

월드컵 경기장이 수 개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 그 압도적인 규모는 한낱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지러지다 못해 뒤틀려버린 원근감 앞에서는 저 멀리 암벽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몇 킬로미터 밖인지, 또는 몇십 킬로미터 밖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열기...”

뜨겁다.

후덥지근한 땀방울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적도의 태양열을 흠뻑 머금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암석.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미궁벽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 붉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낮의 열기에 잔뜩 달아오른 석재들은 분화구 깊은 곳에 자리한 대장간의 주춧돌처럼 뜨거운 적열을 자근자근 내뿜었다.

불가사의한 힘.

이 마경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던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봐도 이 미궁이 던전 한 층이랑 맞먹는 규모인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허... 이런 상황은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네. 이거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이런 미궁에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로...”

­쿠구구구구궁ㅡ!!

말톤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등 뒤 통로가 바위로 가로막혔다. 지면에 흩어졌던 돌조각이 스스로 엉겨붙더니 아무런 흠결 없이 멀쩡했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아마추어 제작사의 필름처럼 비현실적인 풍경.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겐가..?”

말톤이 어울리지 않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지.”

“이곳을 벗어나려면... 이 미궁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겠.. 죠...?”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네... 그나저나 탈출구는 대체 어딘데?”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장소는 가파른 경사로 위. 까치발을 들어 간신히 미로의 벽 너머를 엿볼 수 있는 높이였지만, 그 어디에도 딱히 출구라고 부를 만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꼽자면 저 멀리 미궁 정중앙, 높게 솟아오른 바위 첨탑에 얹힌 범선 정도일까. 던전 한복판, 그것도 깊은 지하에 선박이라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너무 먼 탓에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확실히 배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역시 이 미로를 돌파해야 하나....”

“일단 여기서 내려가도록 하지. 불길한 예감이 드네.”

아니나 다를까, 매끄러운 경사면에 발을 디디자마자 머리 위에서 묵직한 돌무더기들이 쏟아졌다.

“꼬맹아!!”

­콰르르륵!!!

라디를 끌어안고 비탈을 굴렀다. 빠르게 뒤바뀌는 시야 속, 옆구리를 스치는 무지막지한 질량에 등골이 서늘하다.

이윽고 단단한 지면에 부딪혀 간신히 회전을 멈추자, 나는 후들거리는 팔로 땅을 짚으며 내 아래 깔린 라디의 안위를 살폈다.

“콜록..! 콜록...! 괜찮냐 꼬맹아..?”

“콜록.! 네 고마... 콜록..! 워요...”

“..말톤...!! 살아있냐!!”

“난 멀쩡하다네...!”

“제길...”

비틀거리며 일어나 라디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추가로 바위가 굴러올 것을 대비해 신속히 배낭을 떨쳐내고 주변을 살폈지만, 뿌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가 가라앉자 내 망막에 비친 건 다소 정적인 세계였다.

“.....”

압도적이다.

이런 걸 어디서 봤더라.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었던 서적 속 삽화에 나온 크레타의 미궁이 이러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했다.

단언컨대 다이달로스가 실존했더라도 눈앞의 미궁을 건설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미로의 존재 의의는 사람을 가두는 것에 있는 만큼, 급작스럽게 그 안에 내던져지고 난 뒤에야 오만하게 위에서 좌시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공포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 가혹한 풍경에 신음하며 20미터가 넘는 장벽을 올려다보자니 어느새 다가온 말톤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읊조렸다.

“급작스럽게 봉변을 당할 줄이야... 괜찮나 도란? 라디 자네도 다친 덴 없는가?”

“네, 저는 도란님이 지켜줘서... 고마워요 도란님..”

“별거 아냐, 그보다... 이건 대체...”

천천히 다가가 벽에 손을 짚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 거대한 위용에도 불구하고 작은 틈새 하나 없는 자태는 손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불가사의함을 가중했다.

“...이러니까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그렇게나 비싼 걸세. 확실히 그 이름값을 하지 않나?”

“아니... 너희는 대체 뭘 어떻게 한거야...? 이런 기술력을 지니고도 멸망하다니... 게다가 이런 문명이 한둘이 아니라면서.”

“너희... 말이에요?”

“...실언이야. 아무튼 대단하네. 세계 최고의 암벽 등반가를 데리고 와도 여기는 엄두조차 못 내겠다. 붙잡을 데가 있어야 기어오르든 말든 하지.”

두려움 반, 경외 반 섞인 시선으로 장벽을 훑고 있자니 말톤이 내 등을 두드렸다.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바닥에 놓인 배낭을 주워드는데 놈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이 압도적인 유적 앞에선 녀석도 갓 태어난 아이와 다름없겠구나 싶어 웃음을 흘리던 차, 놈은 내 기대를 아득히 벗어나는 발언을 내뱉었다.

“흐흐... 이 안에 날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마물을 떠올리자니 가슴이 벅차오르는군! 개인적으론 털이 북슬북슬한 게 좋다만 이 기온이라면 장모종 몬스터는 드물 테지. 그게 조금 아쉽다면 아쉽구먼...”

“......”

역시 이 녀석은 그냥 썩어빠진 속물이다. 베라스틴의 하수구 찌꺼기보다 더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데 어째선지 옆에서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도란님도 똑같거든요?”

“...내가 뭘.”

“평소에 생각하는 거 다 얼굴로 드러나요, 아주 훤하게­.”

라디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설마 녀석도 말톤처럼 내 표정만 보고도 생각을 읽는 경지에 도달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심히 곤란해진다.

그야 녀석을 볼 때면 항상...

“어휴, 정말 어떻게 머릿속에 음흉한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애도 아니고... 조금만 참아요!”

...네?

“어휴... 그 얘긴 됐고, 빨리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나 찾아봐요! 저흰 지금 미로 한복판에 떨어졌다고요. 탈출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건 걱정 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아. ...야 말톤! 안 따라오면 두고 간다!”

배낭을 고쳐 메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당장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내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들의 속삭임이.

“도란님... 설마 여기도...?”

“그래, 길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문제없을 거야. 아무래도 규모가 규모인지라 하루 만에 다 통과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런... 정말 터무니없는 능력이네요. 마치 이 미로를 돌파하기 위해 안배된 것처럼... 그 괴물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요...?”

“글쎄다... 그래도 지금은 뭐 잘됐지. 덕분에 빠져나갈 수 있으니.”

물과 식량도 문제없다. 다행히 이전에 구해주었던 모험가 파티에게서 양도받은 비축분이 꽤 남아있고, 갈라진 돌바닥 사이로 자그마한 도마뱀이 지나가는 걸 목격했으니 간단하게나마 사냥도 할 수 있겠지.

짐승이 살 수 있는 환경이라면 인간도 살아남을 수 있다.

몸소 오지에서 숱하게 뒹굴어오며 깨달은 자연의 이치.

나는 묘연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궁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 첫 번째 위기에 봉착했다.

“.....”

“덥군...”

“...그러네요.”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사방에서 찌는 듯한 열기가 뿜어나오는 탓에 살이 익을 지경이다.

심지어 내 경우에는 낡아서 헤진 샌들 밑창 사이로 뜨거운 모래가 사박사박 파고들어 여간 고역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동상에 걸리는 것보단 낫겠다고 자위했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울 지경.

슬쩍 뒤를 돌아보니 두 녀석도 군말 없이 따라오고는 있지만 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중 특히 라디가 힘들어 보이길래 수통을 따서 건네줬지만, 녀석은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라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란님, 이대로 가면 며칠 버티지 못하고 식수가 떨어질 거에요. 그 전에 어서 수원을 찾아야 하는데... 이곳에도 물이 있을까요?”

“괜찮아, 저기 도마뱀이랑 딱정벌레 보이지? 분명 물을 구할 수 있을 거야.”

흐르는 물은 아닐지라도 분명 수분을 공급할 방법이 있겠지.

내 말대로 조금 더 나아가자 갈라진 돌바닥 사이로 조그마한 선인장이 드문드문 자라나 있었다. 통통하고 가시가 잔뜩 돋아난 다육식물. 저거면 충분히 식수 대용으로 쓸 수 있겠지.

“다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두 녀석을 멈춰 세우고는 선인장을 향해 걸어갔다. 발치에서 뽑은 단검으로 줄기 밑부분을 베자 미끈거리는 점액질이 묻어나온다. 가시가 조금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배낭에서 꺼낸 외투를 손에 둘둘 말아 어찌어찌 해결했다.

이후 시험차 과육을 한입 베어물려 하자 라디가 질겁하더니 쪼르르 달려와 내 손에 든 선인장을 채갔다.

“도란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하냐니... 그야 당연히...

“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애도 아니고 손에 닿는다고 아무거나 입에 집어넣으시면 안 돼요! 지지라고요!!”

“아니... 이런 건 보통 먹어도 괜찮...”

“그래도 안 돼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한번 확인해 볼게요.”

녀석이 내게서 뺏은 선인장 과육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입에...

“야.”

냉큼 붙잡았다.

“야, 넌 방금까지 나더러 위험하다면서 너는 괜찮냐? 네 말마따나 독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완전히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잘못 먹고 탈이라도 나면 어떡해.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자 녀석이 태연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괜찮다니 뭐가...”

“사낭 쥐 일족은 어느 정도 독에 면역을 갖추고 있거든요. 너무 강한 극독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그래?”

“네 그러니까 손 좀 치워주세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라디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 투명한 웃음에 나는 다시 한번 실감하고 말았다. 녀석이 점점 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걸.

괜스레 체온이 상승하는 걸 느끼며 손목을 놓아주자 말톤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커험, 험... 자네들은 이 더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군. 설원 한가운데 던져놔도 얼어 죽을 일은 없겠어. 이거 외톨이는 서러워서 살겠...”

“시끄러. ...꼬맹아, 정말로 괜찮겠어? 아무리 그래도...”

“...방금 전 자기가 하려던 행동을 되돌아보세요. 이렇게 걱정할 거면 드시는 시늉이라도 하지 말지... 걱정 마요.”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뱉어야 한다? ....아니 그냥 내가 먼저 먹는 게 나을...”

“어휴...”

내가 채 말리기도 전에 녀석이 선인장을 입에 머금었다.

입가를 오물거리는 라디의 얼굴은 태평했지만, 그에 반해 내 안색은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야, 야! 말도 없이...! 꼬맹아, 지금 당장 뱉어!! 뱉... 읍?!”

­씨익.

내가 당황하며 허둥대던 찰나, 녀석이 샐쭉 입꼬리를 올리더니 중지에 과육을 묻혀 그대로 내 입속에 찔러넣었다.

불의의 일격!

입안 가득 선인장의 수액이 느껴졌다. 살짝 시큼하면서도 새콤한 맛. 거기에 조금 까슬까슬한 라디의 손가락이 더해지자 뒷덜미가 쭈뼛 섰다.

녀석은 손끝으로 내 혓바닥을 장난스럽게 건드리고는 손가락을 뺐다.

“....뭘 그리 아쉬워해요?”

쿡쿡. 슬며시 웃음을 삼킨 라디가 새침하게 눈꼬리를 찢고는 로브 자락에 중지를 문질렀다.

“.....”

나에 이르러서는 벙찐 채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안에 고인 시큼한 수액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간 뒤에야 퍼뜩 제정신을 되찾았다.

한발 늦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저... 꼬맹아....”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

당했다.

이런 기습은 생각도 못 했다. 나의 완패.

“이거나 드세요.”

라디가 단검으로 네모나게 썬 과육을 입안에 넣어주었다. 마지못해 턱을 움직이자 녀석은 보란 듯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열심히 입가를 오물거렸다.

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좀전의 묘한 감촉이 느껴져 이상야릇한 충동이 들끓었다.

“으휴... 또 그러네, 이러니 제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조금만 여지를 줘도 바로 우쭐대는데. ...오늘은 이걸로 참으세요. 자, 아.”

녀석이 과육을 하나 더 집어 직접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얌전히 녀석이 주는 대로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했다간 나도 모르게 큰일을 벌일 것 같았기에.

애꿎은 주먹만 쥐락펴락했다.

“흐흐... 어쨌든 이걸로 식수 문제는 해결됐군. 다음은 식량 문제인데... 선인장만으로 배를 채울 수도 없고 말이지.”

“뱀이나 도마뱀이라도 사냥해 먹어야겠네요. 정 안되면 벌레라도 잡아야 할 텐데... 그건 최후에 보루로 남겨두자고요.”

“나도 그건 별로 달갑지 않군. 그래도 도란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테지. 바퀴벌레처럼 생존력 하나만큼은 끈질긴 사내니 말일세.”

“그러게요, 평소에는 칠칠맞아도 이럴 때는 우리 도란님이 참 든든하네요?”

라디가 허리를 숙이고는 장난기 다분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폈다.

이 꼬맹이가 진짜.

“...갈길이 멀다. 빨리 가자.”

“뭐야, 도란님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말톤님, 여기 좀 봐봐요. 도란님 얼굴이 시뻘게졌는데요? 주변 풍경이랑 똑같아졌어요! 혹시 카멜레온 수인이라던가...”

“내가 많이 봐서 아는데, 저건 수줍어할 때 나오는 표정이라네. 저저 입술 끄트머리 파르르 떨리는 거 보이는가? 귀엽구먼.”

“오호... 과연...”

“말톤 입 다물어. 꼬맹이 너도... 아니다, 그냥 잘 따라오기나 해.”

부지런히 앞서나갔다.

목을 축이면서 잠시 휴식한 덕에 타는 듯한 더위도 한풀 가신 기분. 아니, 어쩌면 기분 탓이 아닐 수도 있겠다. 태양처럼 창공에서 이글이글 쏟아지던 광량도 현저하게 줄어든 게 체감될 정도니.

이 정도라면 밤에는 꽤 쌀쌀할지도 모르겠는데.

“...야, 근데 아까 지진 말야.. 그 정도 규모면 이 위에 있던 다른 모험가들도 눈치채지 않았을까?”

“미궁에 들어올 때 말이에요? 하긴... 땅이 다 울릴 정도였으니 던전 안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엄청 큰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아마도 그럴 테지. 한창 던전의 동태에 집중할 때니 말일세. 설마하니 우리가 원흉이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을 테지만, 흐흐...”

“...새삼스럽지만 대단하네. 다들 고대 유적을 찾으러 혈안이 되어있었을 거 아냐. 우리는 그중에서도... 잠깐.”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귓가에 와닿는 속삭임에 묘한 격조가 배어나왔으니.

“...이 앞에 함정이 있는 것 같아. 꼬맹아, 혹시 뭐 알겠어?”

“잠시만요...”

라디는 열심히 코를 쫑긋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리에요. 아까부터 이상한 악취가 미궁 전역에 퍼져 있어요. 정말 가까이서 맡지 않는 이상 냄새만으로 함정을 식별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악취? 무슨 악취?”

“음... 마취약..? 보존제...? 잘 모르겠어요... 심하게 역한 건 아닌데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요.”

“그래? 알겠어, 그럼...”

­툭!

발치의 돌멩이를 걷어차자 수십 발의 화살이 양쪽 벽에서 쏟아져나왔다.

“...화살 트랩이었네. 무게에 반응하는 구조인 것 같은데...”

일련의 행위를 몇 번 반복하니 어느 시점부터는 화살이 다 떨어졌는지 잠잠해졌다.

“교묘하게도 숨겨놓았군...”

“그러게.”

말톤과 함께 장벽 가까이 다가가 살피자 은폐 실력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화살 구멍은 점토로 틀어막아 티가 안 나게 꾸며놓았고, 트리거가 되었던 바닥 타일도 주변과 동화되어 전혀 손색이 없다.

“도란, 자네가 사전에 알아채고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큰 사달이 날 뻔했군.”

“솔직히 나도 조금 놀랐어.”

“...이 앞에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건 명백하네요.”

보통 몬스터나 짐승을 대상으로 한 함정은 실수로라도 애먼 사람이 걸리지 않도록 표시를 해두기 마련인 데 반해, 이 트랩은 어떤 경고문이나 표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것은 명백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함정. 단순히 접근을 막는 정도를 벗어선 지독한 악의가 느껴진다.

“....화살에 독이 발라져 있어요. 오랜 기간에도 전혀 변질하지 않은 걸 보니 어마어마한 맹독일 게 분명해요.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호흡계를 마비시키겠죠... 무섭네요.”

라디가 화살촉을 주워들고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미궁이 시작되려는 조짐이구먼...”

말톤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모래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고대 유적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저들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길 염원하네.”

그곳엔 수십이 넘는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