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고대 유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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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고대 유적 #3
눈앞에 놓인 항아리. 예사롭지 않다. 표주박 서너 개에 간신히 옮겨 담는 게 고작일 정도로 작은 크기에 표면에는 정체불명의 쐐기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뚜껑은 샛노란 부적들로 밀봉되어 있다.
조심스레 부적을 떼자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숱하게 봐왔던 항아리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직감하며 조심스럽게 뚜껑을 들어올리자, 그 안에 있던 건
“이, 이건...!”
“회, 횡재다...!”
술(?).
독 안에 찰랑이는 수면. 코끝을 맴도는 풍성하고 농밀한 향기. 잘 숙성된 알코올 특유의 향취가 폐가를 짙게 물들였다.
그 강렬한 취훈(??)은 미궁에 들이치는 열풍도 선선하게 바꾸어놓았다.
술.
술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길가의 거렁뱅이도, 테라스의 대귀족도, 선상 위의 뱃사람도 술 앞에선 한낱 취객에 지나지 않는다.
술.
술은 전쟁보다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오크통 안의 넘실거리는 붉은 액체엔 얼마나 많은 광기와 폭력의 역사가 점철되어있는지 오싹할 정도다.
하물며 그 적색 과실즙을 사탄의 창조물로 명시한 경전마저 있으니.
술.
빛을 목격한 맹인처럼 홀린 듯이 눈앞의 단지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포도주인가 싶었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선홍빛 물결엔 더 큰 비밀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검지 끝을 찍어 맛보았다.
차박...
“....!”
와인...?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이국적인 맛과 향. 이건 포도가 아니라...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아쉬움에 또 한 방울.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무화과...’
그래, 역사 속 실존했던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먹었다는 무화과를 발효시킨 맛이 났다. 거기에 더불어 은은하게 풍기는 이 풍미는 사막 오아시스 인근에서 재배한 대추야자가 틀림없으리라.
그뿐만이 아니다.
‘...달아.’
농염하게 늘어지는 단맛. 한 해 숙성을 거쳐 채밀한 최고급 벌꿀의 뒷맛이 끈적하게 늘어졌다. 이는 필시 오랫동안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터, 혀끝이 아릴 정도의 높은 도수는, 추후 희석을 위해 고농도로 농축한 탓일 테고.
평범한 양조장에서 이 정도의 술을 빚어내는 건 단연코 불가능하다.
무성한 이파리 속 햇살을 잔뜩 머금고 무르익은 무화과가 절로 떠오르는 경치.
엄선된 재료들과 노련한 장인만이 빚어낼 수 있는 경지.
이는 수많은 지배자와 귀족이 번뜩이는 금화와 맞바꾸어서라도 저녁 만찬에 올려 마지않을 정도로 값진 물건이었다.
전율이, 오싹할 정도의 떨림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도란님... 괜찮으세요? 혹시 위험하신 건 아니죠..? 설마 이것도 함정이었다던가...”
내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라디가 허둥지둥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 도란님...? 저, 정말로 괜찮으신 거 맞아요..?!”
“아.. 그래... 이거 어마어마하네.”
술 그 자체에 홀린 적은 처음이다.
눈을 껌벅거려 현실로 돌아오고 난 뒤 단지를 들이밀자 녀석이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아, 아니 그야...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됐어, 너도 맛은 봐야지. ...팔 아파.”
“....네, 그럼 살짝만...”
사양하긴 했지만 역시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라디는 조신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기고는 약지 끝에 방울을 묻혀 술을 맛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벌어진다.
“무, 무슨...! 이건 대체...! 세상에 이런 술이 존재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럼 지금까지 제가 먹어온 것들은...”
“...장난 아니지?”
“네...! 엄청 달고 진해요!! 고작 한 방울로도 이 정도... 향도 무지 진해서 창고 안의 악취를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에요!”
라디가 어울리지 않게 흥분하며 눈을 빛냈다. 독극물 이외에 녀석이 이렇게나 열을 올리는 화제가 있었던가. 만인을 현혹하는 무시무시한 마력.
“이거... 얼마에 팔릴까?”
“아... 그러네요... 깜빡 잊고 있었어요. 음... 이렇게나 희귀한 술에 더불어 유적에서 출토된 물건이니... 못해도 금화 한 닢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저희가 좋은 매입처를 찾을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라디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찢겨나간 부적을 주워들며 말을 이었다.
“이 봉인... 이것 덕분에 몇백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도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만약 이게 없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품질이 떨어지겠네. ...값어치도 덩달아 하락할 테고 말이야.”
“네, 맞아요. 물론 하루아침 만에 급격하게 열화하지는 않을 테지만, 한 푼이라도 더 비싸게 매각하려면 현재 품질을 최대한 유지해야 해요.”
“...계획을 수정하자. 이 미궁을 돌파하면 바로 던전을 나가야겠어. 암시장에선 제값을 받기가 어려울 거야.”
“동감이에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요.”
천재일우의 기회.
설마 이렇게 허름한 창고에서 이런 행운을 마주할 줄이야.
하지만 그토록 바라 못지않던 고대 유물을 발견했음에도 내 머리는 여느 때보다 차갑게 식었다.
흥분은 사고를 혼란시킬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기에.
“....아니, 과실주는 그렇게까지 쉽게 변질하지 않아. 이건 꿀이 섞였으니 더더욱. 게다가 제값을 받고 팔려면 유적에서 출토된 거란 걸 증명해야 하는데, 그럼 필연적으로 이 미궁에 대한 것도 밝혀야 할 테고 조사관을 파견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거야.”
경매에 부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가능한 한 커다란 도시에서 신용할 수 있는 거래소를 찾고, 품질을 보증받은 뒤 장일까지 기다리다 보면 못해도 한 달은 넘게 걸린다. 즉, 서둘러서 기한을 하루 이틀 앞당길 바에 만전을 가해 안전히 운반하는 게 훨씬 낫다.
“그러니까 그렇게 급할 건 없어. 물론 도중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미적거려선 안 되겠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는 선에서 나아가자. 실수로 단지를 깨트리기라도 했다간 본말전도니까. ...듣고 있어?”
“......”
옆을 돌아보자 라디는 입을 헤 벌린 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아, 아니 그냥... 조끔 낯설어서요... 이렇게 냉철하게 사고하는 모습은 처음 봤는데 평소에도 이렇게 좀 하시지...”
“...난 항상 냉철하거든? 티를 안 내는 것뿐이지. ...그나저나 말톤한테도 이걸 알려야 할 텐데 우리 그전에 한 모금씩만 마셔볼까?”
“네? 아, 안 돼요! 얼마나 비싼 건지 잘 알고 있으면서...”
“에이, 그 정도는 티도 안 나. 제대로 맛만이라도 좀 보자. 살면서 언제 이런 술을 마셔보겠어, 어차피 한두 모금 정도로 돈 받을 거 덜 받고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렇지만...”
말은 싫다고 하지만 몸은 정직하다. 시선이 술독으로 힐끔힐끔 돌아가는 걸로 보아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는 눈치.
남몰래 실소하며 녀석이 완전히 마음을 다잡기 전에 파우치에서 꺼낸 목제 스푼으로 한 숟갈 떠 들이밀었다.
“자, 아 해봐.”
“.....”
“아, 해봐. 나 팔 아파.”
“....”
라디가 조심스레 입술을 벌렸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가 떠오르는 광경. 왠지 모를 근질근질함을 느끼며 과실주를 떠먹여 주자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이며 입꼬리가 사르르 풀렸다.
“우음.... 진짜 맛있어요...! 꿀이 잔뜩 들어가서 꼭 술이 아니라 과실 음료를 먹는 것 같아요! 도란님도 어서 한 모금 마셔봐요!!”
“괜찮아, 난 조금 뒤에 맛볼게. 뭣하면 한 숟갈 더 먹어볼래?”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독에 얼굴을 처박고 죄다 마셔버리고 싶었으나 녀석이 원한다면 내 몫까지 양보할 의향도 있다.
하지만 라디는 생긋 웃으며 사근사근 읊조렸다.
“음... 아쉽지만 괜찮아요. 그랬다간 더 마시고 싶어질 것 같거든요. 게다가 이거, 달달해서 만만하게 봤는데 생각보다 도수가 엄청 높네요. 자칫하다간 취하겠어요.”
“아.”
그래.
그렇다.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
그 사실을 이제야 눈치채다니 난 빡대가리다.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꼬맹아.”
“....네? 왜요? 갑자기 목소리는 왜 깔고...”
“이거 그냥 다 너 마실래?”
“...네?”
“오늘 계속 걸어오느라 힘들었지? 목도 마르고 말이야. 이 탐스러운 선홍빛을 봐, 어때? 아니면 아예 수통에 담아줄까?”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또 병이 도지신 거예요?”
“병이라니... 난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행복은 무슨 얼어 죽을...!! 저를 취하게 만들어서 야한 짓을 할 속셈이잖아요!!”
제기랄!
역시 들켰나 그렇다면...!
“크헉!!”
정강이에 통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왜...! 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손 움직이는 거 다 봤거든요?!!”
“크흑...!!”
원통하다.
뼈저린 다리를 부여잡으며 통한의 눈물을 삼키자 머리 위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이 화상.. 금화 몇 닢짜리랑 바꿔가면서도 그러고 싶으세요?”
“그야 당연하지!!”
“어떻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너무 당당해서 할 말도 없네요...”
라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배낭에서 천막을 꺼내며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말했잖아요, 기다리라고. 던전 안인데. ....지만 참는 줄 아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었다. 그 마지막 말에 무심코 녀석을 껴안고 말았다.
“떨어지세요! 한가하면 잠자리 준비하는 거나 돕든가! 아님 가서 말톤님이라도 불러와요!”
“알겠습니닷!!”
하늘로 치솟은 입꼬리를 수습할 새도 없이 창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느새 어둑해진 돌하늘 아래, 아직도 일일이 항아리를 열어보며 감탄하는 말톤의 목덜미를 붙잡고 돌아오자 예상대로 녀석은 술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오! 이게 바로 그 과실주인가?”
“그래, 꼬맹이는 이미 한 모금 마셨으니까 너도 맛이나 좀 봐라.”
“고맙네, 근데 저기 저 다른 도자기들은 뭔가?”
“아... 그러고 보니...”
술단지에 정신이 팔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온전한 항아리가 한두 개 더 있었는데...
아차 싶어 돌아보자 라디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방금 확인해 봤는데 전부 꿀이였어요.”
“꿀?”
“네, 아마 아카시아 종류인 것 같은데... 조금 딱딱하게 굳었긴 하지만 열을 가하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꿀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이건 팔아도 엄청 큰돈이 되지는 않을 테니 먹는 데에도 부담이 없고요.”
“그래? 마침 잘됐네. 빵에다 발라 먹으면 되겠다. 그럼 이제 늦었으니 잠은 이 건물 안에서 자기로 하고...”
창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적당히 모래를 치우고 방수포를 깔면 오늘은 텐트 없이도 쾌적하게 잘 수 있겠지. 낡은 목제 선반을 뜯어내 장작 대용으로 쓸 수도 있을 거다.
라디가 배낭에서 오늘 먹을 분의 식량을 덜어내는 사이 말톤이 땔감에 불을 지폈다. 나는 녀석의 메이스를 빌려 선반을 부순 뒤 적당하게 조각내는 역할을 맡았고. 누가 한 파티 아니랄까 봐 이제는 한 몸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다.
모든 야영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미궁산 꿀을 맛보았다.
“오..! 이건 일품이로군! 이렇게 고농도의 꿀은 정말 오랜만일세.”
“도란님! 꿀을 바른 빵에 육포를 넣어서 먹으며 훨씬 맛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아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 테니...”
“고마워. ...너 근데 오늘따라 진짜 잘 먹네. 많이 배고팠나 봐?”
“배고픈 것보단, 단 걸 좋아하니까요! 꿀을 마다할 괴짜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워낙 비싸서 평소에는 먹을 기회도 별로 없으니까요.”
“하긴... 그럼 이참에 마음껏 먹자. 많이 있으니까.”
“네!”
라디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왁자한 대화가 오가면 오갈수록 미궁의 밤이 무르익어갔다.
*
“.....”
야심한 밤.
야심찬 내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
...
...
...
“꼬맹아.... 자냐...?”
“.....”
“....”
대답은 없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로 미루어 깊게 잠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스윽... 스으윽...
“.....”
하나둘씩 나와 녀석 사이를 가로막은 장애물들을 치워나갔다. 야영 장비가 든 배낭부터 각종 취사 용품까지. 밤새 뒤척이다 상대의 잠자리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구분지어둔 경계선.
달그락!
‘이크...!’
실수로 냄비를 건드리자 큰 소음이 발생했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기척을 살폈지만 여전히 라디가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들킨 줄 알았네.’
소리 없이 안도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찬스는 단 한 번뿐. 말톤이 건물 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지금을 노려야 한다. 이 순간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내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야...
‘꼬리... 꼬리잇...’
꼬리!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울림인가!
자기 전 장비를 벗을 때, 살짝 땀에 젖어 언뜻언뜻 내비치는 블라우스 아래로 목격한 꼬리가 뇌리에서 잊히질 않는다. 게다가 이 녀석, 내가 문틈으로 훔쳐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눈매를 가늘게 뜨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도발했었단 말이지...!
요망한 뇬!
단 오 분, 아니 딱 오 초라도 좋으니 그 감촉을 내 친히 감상해야겠다! 분명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황홀함의 극치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목표하는 게 있으면 직접 쟁취해야 하는 법이다.
그 누구보다 은밀하고, 위대하게.
이걸로 내 앞길을 가로막던 방해물들은 전부 사라졌다. 이제 나는 무적이다.
꼬리는 신이고.
‘자, 그럼 어디...’
꿀꺽.
타오르는 긴장감에 손끝이 찌릿했다. 이윽고 내 손가락이 탐스러운 골반을 덮은 로브에 맞닿은 순간...!
펄럭!
“......”
“어... 깼니...?”
짙푸른 눈동자가 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 손목을 강하게 움켜쥔 채.
“...처음부터 깨어있었거든요? 말톤님한테 술 사는 조건으로 불침번 순서를 바꿨을 때부터 알아봤죠. 도란님이 한밤중에 개수작을 부려올 거란 걸.”
“크윽...!”
설마 거기까지 간파하고 있었을 줄이야...!
주먹을 움켜쥐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오늘은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걸로 내 꼬리 비비적비비적문질문질대만족 작전은 물 건너갔다. 덤으로 말톤에게 약속한 맥줏값 3페니도.
“그렇게까지 제 꼬리가 탐나세요?”
끄덕.
“...도란님이라면 아예 못 만지게 해줄 건 없는데...”
라디가 스리슬쩍 상의 아래서 꼬리를 꺼내더니 보란 듯이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새침하게 올려다봐왔다.
“저, 정말...?!”
“네.”
“....!!”
드디어!
드디어 나의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건가! 옛말에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거늘, 나는 노력가에다 천재이기까지 하니 나를 막을 자는 없다! 이제 즐기는 일만 남았다!!
“그, 그럼...!”
한데 녀석이 검지로 내 코끝을 밀어냈다.
“...오늘은 안 내줄 거에요.”
“뭐...?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아침에 말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미궁에 들어오기 전, 그렇게나 누누이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란님이 제게 거짓말을 하셨으니 나중에 혼내준다고 했던 거. 그러니 이건 그 벌충이에요.”
“아, 아...”
시발!!!
그때의 업보가 이렇게 부풀어서 되돌아올 줄이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한순간에 추락한 기분이다.
한없이 절망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던 찰나ㅡ
“그래서... 오늘은 그냥 자려고 했는데.... 꽤나 재밌는 짓을 벌여주셨네요?”
녀석이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확 덮쳐왔다!
“어, 어어...?”
“나이도 더 많은 주제에, 항상 애처럼 굴고...”
어, 어...??
“...던전 안이라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확 그냥 저도 선 넘어버릴까요..?”
라디가 내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았다. 맹금류의 눈빛처럼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엔 뇌쇄적인 미소가 감돌고, 날숨에는 뜨거운 열기가 섞여나왔다.
진심이다.
“....살살 부탁드립니다..”
“...변태. ..큰소리 내지 마세요. 들키면 안 되니까.”
그녀가 점점 상체를 숙여오는 그때ㅡ
쾅!!
“크, 큰일 났네!!”
시발.
“...말톤, 삼 초 줄 테니 그 안에 날 납득 시켜.”
“자, 자네들 뭐하고 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밖을 보게나!”
“대체 뭔데 이 야밤에...”
“어서!!”
“....”
하는 수 없이 흐트러진 앞섶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서자 그곳엔...
“....거 봐, 내가 이럴 거라고 했지...”
수십 구의 시체들이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