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고대 유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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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고대 유적 #7
“....정말 괜찮을까요? 어제 지하 공간에서 나온 뒤로 계속 저 상태인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그토록 기운차던 놈이... 안쓰럽구먼, 쯧...”
“......”
라디와 말톤이 소곤거렸지만, 그 무엇도 내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아 외면하고자 했다.
망자(?者).
유적에 당도하고 나서부터 날 이끌던 목소리는 편리한 도구 따위가 아니었다.
호의에서 비롯된 도움은 더더욱 아니었다.
작은 속삭임 안에 담긴 무수한 비명. 광소.
원한, 분노, 오열, 비통, 참담, 맹신, 복수.
지금 이 순간에도 낯선 군중들이 목청을 놓아 울부짖고, 또 실성하여 웃었다.
하나의 운율이 되어 악착스럽게 늘어지는 곡조 앞에 나는 무력했고, 발길을 멈추었다.
이제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간 이정표 삼았던 북극성이 사실은 전부 파멸로 가는 항로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는데 어련할까.
혼자였다면 모를까, 내 부주의로 인하여 라디와 말톤까지 위험에 말려들게 했다고 생각하자 밀려드는 죄책감에 압사되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려온다.
그토록 증오하던 투구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미궁 벽에 기대어 앉아있자니 지척에서 어렴풋한 기척이 느껴졌다.
“.....”
라디가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도란님... 잠시 좀 괜찮을까요...?”
“.....”
“고개 드세요... 어떤 심정인지 알겠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딱히 도란님 잘못인 것도 아니잖아요.”
“.....”
“오늘이라면 얼마든지 귀도 내어드릴 테니까...”
“.....”
“....가슴 만지실래요?”
“뭐...?”
고개를 들자 라디가 발그레한 뺨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방금까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런 건 또 귀신같이 반응해가지고...”
“아니 네가 방금...”
“기운 좀 차려요. 언제까지 인생 다 산 사람마냥 이러고 있을 거예요. 아직 갈 길이 먼데.”
“하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
“도란.”
낯익은 금발 사내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말톤이 낮은 음색으로 읊조렸다.
“....꼴불견이군. 한심해서 눈이 썩어버릴 지경일세. 내가 알던 도란은 이런 겁쟁이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 당차고 포부 어린 청년은 어디 가고 웬 겁쟁이가 내 앞에 앉아있으니.”
“.....”
“궁상은 그만 떨고 이제 일어나지 않겠나?”
“하지만...”
나 때문에 너희까지 말려들었다.
그런 의중을 담아 올려다보자 녀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기분 나쁜 낯짝이군. 자네가 이 파티의 리더라도 되는 줄 아나? 우리가 이 유적에 발을 들인 건 오롯이 본연의 선택이었네. 자네가 아무리 앵무새처럼 떠들었어도 우리의 성에 안 찼다면 얼마든지 거절했을 거란 말일세.”
“.....”
“게다가 그 목소리... 라고 했나? 어쨌든 그것 덕분에 지금까지 쉬이 온 건 사실이지 않나. 자네가 목격했던 벽화대로 이 미궁에 언데드가 그렇게 많다고 한들, 대부분은 각지각처에 흩어져 있을 테니 포위만 안 당하면 우리의 실력으로 충분히 대적할 수 있네.”
“.....”
“...그러니 이빨 빠진 고블린처럼 청승맞은 짓거리 그만하고 이제 일어나게. 내 더는 못 봐주겠으니.”
“윽...!”
말톤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올렸다. 이어 등짝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정신이 얼얼하다.
불시에 수면 위로 올려진 광어처럼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자 포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꼬맹아....”
“.....”
천천히 손을 뻗어 날 끌어안은 라디의 등에 팔을 두르자 녀석이 내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여왔다.
“...도란님, 그거 아세요? 누군가가 슬퍼할 때 포옹해주는 진짜 이유 말이에요.”
“.....”
“이렇게 서로의 심장을 맞대고 서른까지 숫자를 세면 심장 박동이 같아진대요... 함께 체온을 공유하고, 서로의 향기를 맡고... 아픔을 덜어내며 행복을 나누는 거래요...”
“.....”
“...조금 나아지셨어요?”
“....”
그래.
마주 안은 팔에 힘을 실어 화답하자 라디가 맑은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그럼 주접 그만 떠세요. 이러다 날 저물겠어요.”
“.....”
떨떠름한 뒷맛을 삼키며 두 다리로 지면을 딛고 서자 다시금 삭막한 미궁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광경을 시야에 담자 속으로부터 부끄러움이 치밀었다.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석연치 않긴 하지만 어쨌든 망령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온 건 사실이다. 덕분에 값비싼 유물을 찾을 수 있었고, 함정에도 걸리지 않았으며, 착실하게 미궁 중앙으로 다가서고 있다.
그 종국에서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뭐가 나타나든 전부 박살 내면 되는 일이다.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내 소중한 것을 뺏어가려는 이들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투구 속, 새까만 두 눈동자가 날카롭게 각오를 다졌다.
사납게 입꼬리를 들어 흉소하자 라디가 반 발자국 물러났다.
“어휴... 또 나왔다 그 음흉한 미소.”
“....”
커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읊조렸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꼬맹아.”
“천만에요 도란님.”
“...야, 말톤! ...고맙다.”
“....”
미궁 중심에 의연하게 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상록수처럼 늘 한결같은 모습에 위안을 얻으며 라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저 도란님?”
“응? 왜?”
“손이 점점 내려가는 건... 기분 탓이겠죠?”
“실리는 챙겨야지. 약속했잖아.”
“....”
라디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슬쩍 내 손가락을 밀어내며 귓속말했다.
“...할 거면 적어도 이따가 밤에 단둘이...”
“도란! 라디!”
“어 왜 말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긴... 한시바삐 이동을 재개해야 하지 않나. 어디로 가면 될 것 같나.”
“그게... 일단 여기서 왼쪽으로 가라고는 하는데... 영 믿을 수가 있어야지.”
목소리들의 실체를 알고 나니 영 꺼림칙하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운전하다가 도착해보니 벼랑 꼭대기더라 하는 괴담을 몸소 체험한 느낌.
한데 말톤은 영문 모를 미소를 자아내더니 메이스를 등에 걸치며 읊조렸다.
“그럴 줄 알고 방도를 생각해 놓았네. 잠깐 이리 와보겠는가?”
“.....?”
라디와 함께 다가서려는 찰나, 그가 손을 들어올리며 제지했다.
“아, 라디 자네는 잠시 거기 있게나.”
“네...?”
“잠시 도란하고 먼저 얘기를 나눠보겠네. 걱정하지 말게. 잠깐이면 되니.”
“......”
라디가 의심 어린 시선을 무럭무럭 피워올렸지만, 말톤은 능청스럽게 흘려넘기며 내 어깨를 붙잡고 미궁 구석으로 데려갔다.
“...야, 어쩌자는 거야.. 저러다가 혹시 삐지기라도 하면...”
“흐흐... 내게 좋은 방안이 하나 있는데 어떤가? 아마 자네도 만족할 거라네.”
“....일단 들어보고.”
말톤이 라디가 있는 방향을 힐끗 돌아보고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모종의 계획을 속삭였다.
그 내용을 들은 내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
“....정말로 꼭 저한테 이래야만 하겠어요?”
“물론이지.”
“...이전처럼 목소리가 가르쳐주는 길로 가면 되잖아요.”
“이제 그걸 믿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냐. 네 운명을 받아들여.”
“정말로. 꼭. 이래야만 하겠어요?”
“그래.”“그렇네.”
“.....”
라디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날카롭게 쳐다보았으나 박력이라곤 전무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녀석은 나와 말톤이 손을 겹쳐 만든 받침대 위에 올라탄 상태니까.
말톤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라디, 혹시 몰라서 다시 설명하네만... 우리가 자네를 공중으로 띄워 올리면...”
“네네... 미궁 벽 너머로 현재 위치를 가늠하라는 거죠? 귀에 피딱지가 일겠어요.”
“잘 이해했다니 다행이군. 혹여나 실수했다간 다시 한번 해야 할 테니 말일세.”
“.....”
라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체구가 작다지만 드높은 장벽 위로 성인 여성을 던져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허나 운 좋게 툭 불거진 바위를 발견한 덕에 생각으로만 담아두었던 계획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셋 세고 던져올릴 테니...”
“자, 자깜만요!!”
막상 때가 되자 라디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멈춰 세웠다.
“그... 꼭 제가 아니어도 괜찮잖아요?! 예, 예컨대 도란 님이라던가...!!”
“무슨 소리야 당연히 체중이 가장 가벼운 네가 해야지. 너 나 제대로 들어 올릴 수는 있냐.”
“그, 그럼 말톤님은?!! 저번에 보여주셨던 것처럼 벽을 박차고 뛰어오르면...!!”
“아무리 나라고 한들 수직 절벽을 뛰쳐 오를 순 없네.”
“우으.. 그럼... 그럼....”
“포기해.”“포기하게.”
“.....”
라디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귀에 대고 말했다.
“자, 그럼 간다 하나 둘...”
“자, 잠깐만요!! 저, 정말 마지막으로...!!!”
“.....”
잠깐 말미를 주자 녀석이 우물쭈물했다. 막상 멈춰 세우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모습.
이내 푸른 눈을 치뜨며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표정으로 간절히 애원해왔다.
“도란님... 제발... 어떻게 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응, 없어.”
“....이따가 뒤졌...”
“이때다 말톤!! 하나 둘 셋!!!”
“흐랴아압!!!!”
“꺄아아아아아아ㅡ!!!!!”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것과 함께 로켓 발사체처럼 라디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과연 말톤의 무시무시한 완력.
처절한 라디의 비명도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한 지점에서 체공하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ㅡ아아아아아아악!!!”
“어어...! 점마 저쪽으로 간다! 말톤!!”
“어서 달리게!!!”
풀썩!
말톤과 함께 가까스로 받아내자 모래 먼지가 들썩였다.
라디는 잠시간 말이 없더니 나와 말톤의 손길을 뿌리치고 통로 구석으로 가 쪼그렸다.
나는 말톤과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는 멋쩍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냐 꼬맹아...?”
“....말.. 걸지.. 마세.. 요.”
“넌 쥐 수인이라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멀쩡하다면서... 그런 주제에 고소공포증이 웬 말이냐...”
“.....”
정말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개구리가 수영을 못하는 격이니 원...
살짝 품에 끌어안으며 위로해주자 라디가 코맹맹이 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운.. 훌쩍.. 걸... 어떡하라... 윽... 고요...”
“그래그래 알겠다. 두 번 다시는 안 시킬 테니까 안심해라.”
“.....”
녀석이 살며시 내게 체중을 실었다. 말톤에게 라디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얘길 듣고 한 번쯤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지.
그래도 귀엽긴 했지만.
“...절대로 다시는 안 할 거예요. 이번만... 도란님을 위해서니까...”
“그래, 알겠어.”
“.....”
내게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지, 녀석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일어나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 옷소매가 살짝 젖은 건 어른답게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겠어?”
“.....”
라디가 손가락으로 왼쪽 통로를 가리켰다.
“...저쪽 길로 가면 돼요. 미로도 거의 다 끝나가요.”
“그래? 무서운 와중에도 제대로 봐줬구나. 고마워.”
“....”
머리를 쓸어주자 녀석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머리를 만지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걸어가자 말톤이 중얼거렸다.
“...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잘들 노는구먼.”
““.....””
멋쩍게 손을 놓으며 배낭을 어깨에 들쳐멨다.
“...야, 말톤 들었지? 왼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아. 미로도 얼마 안 남았대.”
“그런가? 다행일세. 어여 가도록 하지.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났으면 좋겠구먼.”
“그러게... 미궁 중심지에 뭐가 있을까...?”
“일단 거주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만... 마력 장벽이라도 펼쳐져 있는지 영 시야가 가물가물하군. 마치 신기루를 보는 느낌일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사선을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공동 천장에 닿을 정도로 드높게 솟은 바위산과 알 수 없는 건물들, 미궁 입구에서 어렴풋하게 목도했던 거대한 범선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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