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58화 (58/375)

〈 58화 〉 고대 유적 #8

* * *

[058] 고대 유적 #8

“이상하네...”

“이상하군...”

“....”

“야 말톤, 이거 좀 이상하지 않냐?”

“그렇군, 매우 이상하네.”

“.....”

“우리가 틀렸을 리도 없는데 말이야.”

“확실히 그러하군. 그 말이 옳네.”

“저기....”

라디가 지근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끼어들었다.

“이제 두 분 다 인정 좀 하세요!! 벌써 몇 번째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잖아요!!”

막다른 골목.

정면을 높게 가로막은 장벽, 그 중심에는 선인장 줄기를 짓이겨 그린 X자 표시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표식을 보는 것도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다.

“아니 근데 어쩔 수 없지... 계속 목소리가 이곳이 맞다고 하는데 어떡하냐.”

“이 근방은 이미 샅샅이 뒤졌다네. 분명 이쯤이면 올바른 길을 찾을 때도 됐건만... 쉽지 않군.”

“그러니까 말이야.”

근처에서 가물거리는 바위산의 형상으로 미루어 미로가 정말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건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일 뿐. 하는 수 없이 목소리에도 의존해 보고 두어 번 라디를 공중에 던져보기도 했으나 중심지로 가는 경로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통탄할 노릇.

“...뭐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다른 길을 찾아보도록 하지.”

“그래, 그럼 이번엔 저쪽으로 가보자.”

“잠깐만요!! 거긴 아까 갔던 데잖아요!!”

“그래?”

“그렇네, 저쪽이 맞는 길이라네.”

“거기도 갔었던 길이에요!!”

“...그런가?”

“그럼 저기로...”

“저쪽 길이라네.”

“그냥 두 분 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발!!!”

라디가 악을 써가며 소리쳤다.

무서움도 꾹 참고 여러 번 허공에 던져져서 희생했는데 벌써 몇 시간 째 같은 장소만 맴돌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조용히 제 뒤나 따라오세요!! 정신 산만하게 만들지 말고!”

“오... 자기만 따라오래.. 멋져.”

“과연... 이 정도 카리스마는 있어야 도란을 꼬실 수 있다는 건가.”

“내가 보는 눈 하나는...”

“둘 다 닥쳐요! 제발!!”

라디가 배낭끈을 부여잡고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나와 말톤은 실실 웃으며 그 뒤를 쫓았다. 이미 수차례 길을 잘못 든 터라 몸은 피로했지만, 농담을 나눌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머리 위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는 바위산이 당장에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기에.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인공 구조물을 구경하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어찌 됐건 오늘 안에는 거주지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겠지.

거주지라... 그러고 보니...

“...꼬맹아, 너는 집이 어디냐? 너도 던전 때문에 여기 왔다면서. 그러면 이곳 사람은 아닐 거 아냐.”

“...저요? 전 빌헴 마을 출신이에요.”

“빌헴?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는데... 모험가 길드에서 들었나?”

“아마 그럴 거예요. 도란님은 말톤님하고 같은 베라스틴 출신이라고 했죠? 베라스틴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중 하나가 빌헴이거든요.”

“그랬구나 어쩐지...”

생각났다. 가끔 적당한 일거리를 물색하러 의뢰 게시판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퀘스트 발주 지역에 빌헴이라는 지역명이 등장하곤 했다. 아마 중소규모 마을이라 일손이 모자란 거겠지. 말이 좋아 모험가지 사실상 잡일꾼이나 다름없는 우리는 수요가 많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언젠가 이별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뜻인데...

“...도란님은 베라스틴을 떠나는 게 힘드시죠?”

“뭐... 아무래도 그렇지... 지금 있는 곳도 간신히 정착했는데 새로운 도시에서 통행권을 발급받으려면 머리에 대한 것도 밝혀야 할 테니까... 들여보내 준다는 보장도 없고.”

자비? 자비는 먹고 살 만할 때나 베푸는 것이다.

후한 시골 민심 따위는 허구일 뿐. 오히려 작은 마을일수록 폐쇄적이란 걸 나는 이미 몸소 체득했다. 가뜩이나 흑발 탓에 흉조 취급받는 내가 방문 의사를 표명한다고 한들 입구에서 거부당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걸 라디가 모를 리 없고.

“그래요? 그러면 뭐, 가끔은 거처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마침 촌동네 생활에도 질리려던 참인데.”

“꼬맹아...!”

“떠, 떨어지세요!! 덥다고요! 그리고 전 어디까지나 그쪽으로 이주한다고만 했지 아직 같이 산다고는...!”

“그래그래, 잘 알고 있으니까. 귀엽기도 하지 우리 꼬맹이.”

“으윽...!”

라디가 발버둥 치며 저항했지만 곧 체념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더욱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고.

말로는 무심한 척하지만, 꼬리가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거로 보아 싫지만은 않은 모양. 어쩜 이렇게 귀엽지?

“아 더워요!! 이제 그만 떨어지세요! 익...!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흐흐... 더우면 로브라도 벗지 그러냐. 왜 이런 날씨에 로브를 고집하고 있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그야 몰라서 묻...! 잠깐, 저기 좀 봐요!!”

“말 돌리려 해봤자 소용없다.”

“정말이라구요!! 둘 다 멈춰요!!”

라디가 거칠게 소리치더니 배낭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녀석이 향한 곳에는­

“...다시 돌아왔네.”

오늘 하루만 수도 없이 보았던 X표시가 선연하게 그어져 있었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라디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말도 안 돼...”

“꼬맹아...?”

“이건 말도 안 돼요.”

획. 녀석이 내 쪽을 돌아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발걸음을 전부 더했거든요? 동쪽으로 이천 걸음, 서쪽으로 천 걸음, 남쪽으로 이백 보, 다시 북쪽으로 천 사백 보.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아무리 제 셈이 엇나갔다고 하더라도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는 건 불가능해요.”

“...그걸 다 세고 있었냐.”

“기본이에요, 게다가 지금 저희가 고른 게 마지막 갈림길이었다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갇혔다는 겐가?”

“...네, 아마 감각을 현혹하거나 공간을 왜곡하는 결계가 펼쳐져 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이대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저희는 계속 이곳을 맴돌게 될 거에요. 영원히.”

“.....”

후끈한 더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잠시간 삭막한 바람이 불어와 모랫바닥에 물결무늬를 그리고, 옷자락을 휘날렸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며 아무 말 없던 그때, 먼저 행동을 나선 건 말톤이었다.

“...아예 방법이 없지는 않을 거라네. 우리가 놓친 무언가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번거롭게 미궁을 세워두었을 이유가 없네.”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분명 우리가 무심코 지나왔던 어딘가에...”

“그럼 잘 둘러보자. 계속해서 이곳으로 되돌아왔으니까 이 주변에 해답이 있을 것 같기도오억?!!”

벽에 그려놓은 표식 쪽으로 다가가던 중, 부지불식간에 땅이 꺼지며 하반신이 아래로 쑥 빨려들어갔다.

지난 나흘간 질리도록 봐 왔던 함정.

“씨, 씨발!! 모래 수렁이다...!! 꼬맹아!!! 말톤!!!”

“도란님!!!”

“기다리게 라디!! 무턱대고 들이댔다간 함께 말려들 수 있네!!”

“그, 그러면 어떻게...!”

“일단 진정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패닉에 빠진 라디와는 달리, 말톤은 침착하게 배낭을 내려놓더니 그 안에서 로프를 꺼내 던졌다.

“밧줄을 붙잡게 도란!!”

“으허허허허헉!!!! 점점 빨려들고 있어...!!”

“...꽉 붙들고 있게나!!”

뚜두둑! 움켜쥔 로프에서 불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말톤과 라디가 안간힘을 써가며 줄을 잡아당겼지만, 그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모래 수렁은 먹잇감을 잡아챈 장어처럼 끈질기게 날 수면 아래로 끌고들어갔다.

말톤이 소리쳤다.

“도란!! 배낭을 벗게!!!”

“뭐?!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줄이 끊어질 걸세!! 어서!!!”

“.....제길!!!”

모험가에게 있어 배낭을 잃어버리는 것만큼의 수치가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잴 만한 상황이 아니다.

손목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가방끈을 풀자 점점 몸이 이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풀썩.

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채 씨근덕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내쉬니 라디가 다가와 내 안위를 살폈다.

“...괜찮아요 도란님?”

“....아니.”

어찌어찌 목숨은 건졌다지만 꼴이 영 말이 아니다. 가슴팍 아래 장비는 죄다 진흙에 젖어버렸고, 팔뚝에 잔뜩 생겨난 생채기에, 바짓단 아래로 들어간 모래 알갱이들이 내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만큼 통렬하지는 않았으니.

“시발...”

배낭. 그간 던전에서 모아온 마물 소재며, 물자, 여분 옷까지 한순간에 싸그리 다 날려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라디가 보관한 덕에 술이 담긴 항아리는 멀쩡하다는 점이지만.

“정말... 그러니까 누가 애처럼 아무 데나 싸돌아다니랬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만약 말톤님이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미안...”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당장 목을 축일 선인장부터 다시 찾게 생겼으니...

“...이젠 갈아입을 옷도 없겠네.”

안 그래도 찝찝해 죽겠는데.

그때였다­

­털썩!

““.....””

갯벌처럼 수복되는 모래 수렁의 구멍 너머로부터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맞다면...

“...아래에 뭔가 있나 본데...?”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는데... 설마 그 배낭이...?”

“...검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군.”

““.....””

“....잠깐, 왜 날 쳐다보는 거야...?”

““....””

라디와 말톤이 잠시간 시선을 교환했다.

다시 내 쪽을 쓱 돌아보는 녀석들의 입가엔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

“....야, 이거 맞냐?”

“네.”

“...다른 방법도 있을 거 아냐.”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발이 묶인 것도 벌써 몇 시간째에요.”

“정말로. 꼭. 이럴 거야?”

“그래.” “그렇네.”

“.....”

배신감으로 말미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춤에 묶인 밧줄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자니 라디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약을 올렸다.

“우와! 도란님도 이제 꼬리가 생겼네요! 색깔도 짙고 거칠거칠한 게 도란님이랑 잘 어울려요!! 물론 제 것보단 못하지만.”

­살랑살랑..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누구는 진지한데...”

“아까 절 놀린 데에 대한 복수에요. 다 자업자득이라고요.”

“.....”

고개를 푹 떨구자 마치 노예라도 부리듯 말톤이 내게서 이어진 로프를 위아래로 잡아당기며 읊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도란. 반대편 밧줄은 내가 꽉 붙잡고 있을 테니.”

“아니... 그래도 너무 무모한 거 아냐? 직접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들다니...”

“설마 인제 와서 두려운 겐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자네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거쳤으니 괜찮네.”

“....”

물론 그 말이 맞긴 하다만...

눈앞의 모래 수렁을 내려다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진창.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우연히 이 함정이 다른 공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몇 번 바위들을 실험 삼아 넣어본 결과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단단한 표면에 부딪히는 소음이 들려왔다. 이 함정이 정말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불가능한 현상이다.

“...그렇게 심려 말게. 이 모래 입자들을 보게나. 지금까지 보아왔던 유사와는 달리 농도가 훨씬 묽지 않은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가 끌어올려 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네. 자네는 그저 마음 놓고 이 수렁 밑바닥을 조사하기만 하면 되는 게지.”

“.....시발. 안 겪어봤으니 쉽게 말하는 거지, 아깐 시멘트 사이에 압착 당하는 줄 알았단 말야.”

“나도 과거 늪에 빠진 전적이 있으니 대충 알고 있네. 그나저나 시멘트라... 거참 일리 있는 말이군.”

“...뭐가.”

“과거, 한창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기에는 흑발 노예들을 모조리 선박에 실어다가 바다 한가운데 수장시켰다더군. 시멘트로 손발을 굳혀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말이네. 어쩌면 자네가 조금 전 겪었던 건 전생의 기억이 플래시백...”

“지랄.”

녀석의 종아리를 한대 걷어찼다.

이내 눈앞의 수렁을 들여다봤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용기가 안 난다.

생명줄을 묶고 들어간다고 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유체처럼 흐르는 모래가 날 천천히 가라앉히며 콘크리트처럼 짓누르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숨이 차오르고, 고운 세사들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으로 죄다 파고들 거다.

밧줄이 도중에 끊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금까지 봐 왔던 미라들처럼 온몸의 수분을 전부 빼앗긴 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테고.

주먹을 움켜쥐며 망설이고 있노라니 라디가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겁나세요?”

“...그럼 당연히 무섭지, 안 그러겠냐?”

“절 던질 때는 그렇게 신나셨던 주제에.”

“......”

유구무언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럼, 도란님.”

마지못해 옷을 벗으며 준비하자 라디가 내 귓전에 속삭여왔다. 정말 드물게 들려주는 예의 그 달콤한 목소리로.

“...도란님, 만약 도란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면.... 좋은 거.. 해드릴게요...”

“뭐, 뭐라고...?!”

황급히 돌아보자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꼬, 꼬리...?”

“음... 하는 거 봐서...? 그래도 꼬리는 아직 이른 것 같지만...”

그녀가 내 가슴팍을 야릇하게 어루만지며­

“...굉장한 거... 해드릴게요.”

이, 이.. 요망한...!

“대신 무사히 돌아오기로 약속해요.”

“물론이지! 다 꺼져!! 다이빙 들어간다!!!”

“간단하구먼.” “간단하네요.”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어쩌라고.

나는 곧바로 프로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선수처럼 자세를 갖췄다.

“도란 잊지 말게, 구조요청을 할 땐 두 번, 뭔가를 발견하면 세번....”

“그래, 내가 간다! 끼요옷!!!”

화톳불에 투신하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다. 다리가 사면에 닿자 무게추라도 매단 듯 몸이 무거워졌다. 그 힘에 순응하자 수렁은 놀라우리만치 강한 기세로 날 아래로 잡아끌었고, 게걸스럽게 신체를 집어삼켜갔다.

이내 머리가 파묻히기 직전, 호흡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암흑(??).

튜브 하나에 의지해 강물 바닥을 잠수하는 사금 채취부의 심정이 이러할까.

사박거리는 알갱이들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모래 유사가 폐 속의 공기를 가두었다. 세상과 감각이 단절되고, 시야가 어두워지자 해질녘 밀물이 몰려드는 해안가에 홀로 방치된 것처럼 두려움이 일었다.

공포.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모래를 헤집었다. 무아지경으로. 살고 싶다는 본능이 육체를 움직였다. 이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상충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커헉...!!”

영겁과도 같던 시간이 지나고 폐부에 들이차는 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쿨럭! 쿨럭...!”

바닥을 구르며 목구멍까지 들이찬 모래를 토해냈다. 입안이 쓰고, 먹먹한 귀울림이 귓바퀴를 회전했다. 까끌까끌한 입자가 살갗에 자국을 남긴다.

억센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리춤의 로프에서 팽팽한 장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로프를 세 번 잡아당기고 머리 위를 올려다봤지만, 동시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금사(?).

그곳에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모래 수면이 중력을 거스른 채 요동치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모래 알갱이는 작은 파문과 길게 늘어진 밧줄만을 남긴 채 내가 빠져나왔던 구멍을 메꿔나갔다. 환상적인 광경.

“이곳은 대체...”

생전 처음 보는 현상에 당황한 것도 잠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주변을 둘러보자 진흙에 잔뜩 덮인 배낭이 보였다. 짐을 되찾았음에 안도하며 배낭에 묻은 모래를 털고 어깨에 짊어지니 모래벽 너머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란...! 들리는가...!”

“도란님..! 들리세요...?!”

“난 괜찮아!!! 다들 건너와!!”

잠시 후, 말톤과 라디가 차례로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커허억...!”

“콜록..! 콜록!!”

“...괜찮아?”

“고, 고마워요... 콜록..!”

라디의 등을 토닥여주며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주었다. 비록 귀와 꼬리에 모래가 잔뜩 들러붙어 너절한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미모를 감출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녀석이 푸른 눈동자를 깜박여 괜찮음을 알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으... 마지막엔 정말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어요... 중력을 거스르는 모래라니.. 함정 아래 이런 마법이 걸려 있었을 줄이야...”

“...그렇군. 매우 놀랍네... 결계 마법을 응용한 것 같다만 아직까지도 효력이 유지되다니... 역시 고대인의 기술력은 대단하군.”

“그러게요...”

라디와 말톤이 감탄하며 머리 위 일렁이는 황금 장막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조차 신기할 정도인데 두 녀석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입을 헤 벌리며 탄복하는 라디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녀석이 아차 싶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죠...? 지금까지랑은 분위기가 좀 다른데...”

“글쎄다... 금방 알게 되겠지.”

그 말대로, 라디의 물음에 대한 답은 곧 자연스레 찾아왔다.

건조한 바람이 자욱한 황사를 휩쓸고 지나가자 신기루처럼 일렁거리던 형상이 뚜렷한 윤곽을 갖추었다.

그곳에는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적색의 도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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