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59화 (59/375)

〈 59화 〉 망자들의 유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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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망자들의 유산 #1

“...어마어마한 규모일세... 적어도 수천, 아니 만 명은 족히 살았겠군... 이런 대도시를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을 줄이야...”

“이래서 빙빙 돌았던 거네요... 누가 이런 방법으로 넘어올 거라 생각했겠어요.. 정석 루트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신비한 건물. 예외 없이 붉은 암석 위에 지어진 문명은, 잘 정돈된 구역과 수로를 통해 철저하게 계산된 계획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며 주위를 둘러보자 접시 위에 뿌려진 모래 알갱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네모난 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중 단연코 시선을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도란님 저거...”

“...그래.”

산의 정상 부근, 어렴풋이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던 배가 거주지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하단에서 올려다본 선박의 용골은 대체 어디서 저렇게 거대한 원목을 구할 수 있었는지 절로 의문이 들 정도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자니 라디가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저희가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착각...?”

“네, 저희는 도중부터 마법에 현혹된 게 아니었어요. 처음 이 미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아니 애초부터 이 유적 전체가 대규모 술식에 얽매여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거대한 도시를 옆에 두고도 단순한 바위산 정도로 착각했을 리 없잖아요?”

“그런가...”

하기야, 장벽 너머로 봤을 땐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사이로 작은 건물이 언뜻언뜻 보이는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또 있다.

“내가 그 분야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렇게나 거대한 규모의 마법이 가능한 거야? 몇백 년간 유지될 정도로?”

“당연히 일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죠.”

“그럼...”

“그러니까 고대 유적인 걸세.”

“......”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마법과 문명이 쇠퇴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비록 지금은 많이 낙후되어 단편밖에 찾아볼 수 없지만, 과거에 이 도시는 눈부신 발전을 이륙했을 게 분명하다. 건물 사이사이 골목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휴일이 되면 활기 넘치는 행인들과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광장을 노랗게 물들였겠지.

복잡한 심경을 갈무리하며 오르막길을 따라 걸었다.

길가를 따라 늘어선 난간 아래, 쩍쩍 갈라져 메말라버린 수로와 부서진 채 방지된 나무 보트, 무너진 교각 따위를 구경하고 있자니 말톤이 턱을 매만지며 눈꼬리를 추켜세웠다.

“기이하군...”

“...뭐가?”

“저, 수로를 보게나. 하나는 평범하지만, 다른 하나는 물결 자국이 반대로 나 있네.”

“...진짜네, 그러면 물이 산꼭대기로 역류했다는 거야?”

“아마 그럴 걸세. 아까 중력을 거스르고 허공에 떠 있는 모래 수렁을 봤잖은가? 그와 비슷한 종류의 마법이 아닐까 하네만.”

“대체 왜 그런 짓을...”

“그야 물자를 효율적으로 운반하려는 목적 아니겠는가. 또한 이 운하를 타고 도시 곳곳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을 테지. 상당히 편리했겠군.”

“굉장하네...”

“도란님, 말톤님! 이리 와 보세요!”

말톤과 주위를 둘러보던 중, 라디가 허름한 가옥 2층에서 손짓해왔다.

조심조심 낙후된 계단을 올라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단출한 실내 풍경이 보였다.

“여기는 가정집 같은데요? 저거 화덕 맞죠?”

“...그런가 보네. 난방 기구 겸 조리 용도로 썼나 봐.”

방 한켠에 난 그을음. 녀석을 따라 들어간 가옥에는 화덕뿐만 아니라 깨진 도자기 파편과 먼지 쌓인 양탄자 등 생활감 물씬 풍기는 정경이 자리했다.

“이건... 달력인가...?”

벽면에 걸린 종이를 떼어냈다. 손끝에 느껴지는 거칠거칠한 감촉. 양피지인 줄 알았는데 파피루스의 일종이었나 보다. 표면에는 먹으로 그린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양이 일정한 규칙을 따라 나열되어 있었다.

종이를 말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야, 네가 이거 한 번 해독해 봐.”

“내가 말인가...?”

“그래, 너 원래 이런 거 잘하잖아. 혹시 알아? 귀중한 정보가 담겨있을지.”

“음... 아무리 봐도 이 종이에 대단한 정보가 담겨있을 것 같지는 않네만... 일단 알겠네. 나중에 다른 문서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녀석이 마지못해 종이를 받아들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야 쉽지는 않겠지.

이제는 텅 비어버린 가옥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왔다. 그 많던 사람은 어디 가고 발자취만 남아버렸는지.. 분명 이 도시의 주민들에게도 과거의 영광과 삶, 추억이 있었을 터인데.

소규모 채석장부터, 파피루스 양식장, 빈 터만 외로이 잔존한 유아용 놀이 시설까지...

시야 저편으로 보이는 한물간 문명의 잔재에 덧없다는 감상을 품은 것도 잠시, 라디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읊조렸다.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요...? 이렇게나 대단한 마법을 부렸던 이들이...”

“그러게...”

도시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빈 건물들이나 가구들은 그대로 남아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치 모두가 한낱 한시에 마음을 먹고 어디론가 떠난 것처럼.

“....재앙이 닥친 것만 같아요.”

라디가 금 간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혼잣말했다. 녀석도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그 뒷모습에 적적한 쓸쓸함이 배어있었다.

말톤이 종이에서 눈을 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뭐, 원래 다 그런 게 아니겠나. 인간이나, 그 인간들이 빚어낸 문명이나 몰락하는 건 한순간인 법이지. 기왕 고대 도시를 찾았으니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있나 샅샅이 흩어보고 가세.”

“그래, 그러자. 좀 낡았어도 괜찮은 물건 하나쯤은 건질 수 있겠지. 아마 저 위쪽에 뭐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혹시 알아? 금덩어리가 무더기로 쌓여있을지, 흐흐...”

도둑질을 해도 머리 좋은 놈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훔치는 법이다.

배낭에 넣을 수 있는 짐이 한정된 이상 일반 평민 가구 열 채를 터는 것보다 부잣집 하나를 둘러보는 편이 훨 낫다.

그리고 부자들은 어떤 주거 환경을 선호하는가?

당연히 최상층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한강뷰, 고층 건물의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시티뷰.

예로부터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는 하늘에 닿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자리했다.

그래서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바벨탑을 쌓고, 비싼 돈을 들여서까지 스카이라운지에서 애인과 야경을 감상하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후자는 다른 욕망도 가세되어 있겠지만은.

이 문명의 사회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아버지와 함께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의 경험으로 비추어 부자들은 보통 한 곳으로 뭉쳐서 저들만의 사회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문명에선 미궁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그런 구역이 몰려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렇다면 과연 저기엔 대체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을까.

저 멀리 아득하게 솟은 범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자니 불현듯 근처에서 말톤의 외침이 들려왔다.

“도란, 라디!! 이쪽으로 한번 와 보게!”

“....?”

잠시 라디와 의아하게 눈을 마주하고 곧장 달려가자,

“흐흐... 내가 좋은 걸 발견했지 뭔가.”

투명한 물이 흐르는 폭포가 우리를 마중해왔다.

*

사막의 오아시스란 말을 들어 봤는가?

대부분은 맑고 청량한 이미지를 떠올리겠지.

하얗고 고운 모래와 푸른 야자나무. 그 잔잔한 수면에 이는 파문은 더위에 지친 유랑민에게 한 줄기 광명과도 같다.

그 서늘한 물살에 몸을 맡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틀 굶은 낙타, 잔뜩 독이 오른 사막뿔 살무사, 방금 막 사냥을 마쳐 이빨에 선홍빛 살점이 가득한 줄무늬하이에나까지...

오아시스는 그들에게도 오아시스다.

각종 미세한 기생충과 병원균이 들끓는다는 소리다.

그 특유의 빛깔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유혹했던 라듐처럼, 오아시스 또한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마셔서도, 몸에 끼얹어도 안 된다.

하물며 뜨거운 열기까지 더해져 미생물이 번식하기에 최적인 환경이니, 목이 마르면 차라리 그 근처에 자라난 대추야자를 먹고 말지.

하지만 눈앞의 골짜기도 과연 그럴까?

­쏴아아아....

작은 빌라 높이 정도의 폭포에서는 청청하고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으며, 구석에 난 물길을 통해 도시 하부로 흘러갔다.

세찬 비류가 수면에 부딪혀 물보라를 피워올릴 때마다 우리들의 얼굴에 묶은 피로의 때를 벗겨주었다.

바닥의 암반이 그대로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담수에선 자그마한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쳤으며, 개중에는 생소한 어종도 더러 있었으나­

“도란님 저기 보세요! 맑은 물 송사리예요!!”

라디가 붉은색 송사리들을 손짓하며 외쳤다. 지난번 냇가에서 보았던 물고기와 동일한 어종. 일급수의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하는 어류다. 물론 그렇다고 기생충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으나 이곳이라면 괜찮겠지.

몇백 년간 고대 유적에 고립되어 사람과 동물의 발길이 닿지 않은 폭포는 자연 그대로의 청결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꿀걱.

속에서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환상적인 색채가 가슴을 물들였다.

그도 그럴 게, 찌는 듯한 미궁의 더위 속에서 나흘 내리 강행군을 밀어붙였지 않은가.

씻는 건 고사하고, 물도 마음껏 마시지 못했다. 수분을 공급할 방법이라곤 아껴 먹은 선인장의 시큼한 과육뿐.

풋내기 모험가였다면 진작에 탈수로 사경을 헤매었을 터, 느닷없이 앞길을 가로막는 함정과 밤이면 찾아오는 언데드에 정신도 육체도 서서히 마모되었다.

그런 와중에 오아시스다.

청량한 물소리, 투명한 물거품, 코끝을 스치는 물바람.

일렁이는 푸른빛이 유혹해온다.

“어쩐지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느껴진다더니...”

라디가 쪼그리고 앉아 수면을 찰팍거리자 나는 그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음...? 왜요 도란님?”

“...꼬맹아, 덥지 않냐?”

“....변태.”

나름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한 건데 다 들통났나 보다.

녀석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고 쳐다보더니 불현듯 눈꼬리를 가늘게 휘었다.

이내 슬쩍 올라간 입꼬리엔 묘한 꾐이 아른거렸다.

“...뭘 기대하는 거예요.”

라디가 검지 끝으로 내 코를 찔렀다.

“그야... 아까 했던 약속도 있고...”

“아, 모래 수렁을 지날 때 했던 약속 말이죠? 음... 원래 계획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네,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 그럼 정말로...!”

“네, 마침 저도 온갖 구멍이란 구멍에 모래가 들어가서... 찝찝하던 참이었으니까요.”

라디가 모래 범벅이 된 후드를 젖히다가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개변태.”

“...아니, 난 아직 아무 말도...”

“됐거든요? 그나저나 말톤님은...”

“나는 나중에 씻도록 하겠네. 지금 당장은 이 유적에 더 관심이 가는군. 주위를 둘러보고 올 터이니 때가 되면 부르게나.

”....고마워요.“

“.....”

말톤이 피식 웃고는 손을 내저으며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우리를 위해 배려해줬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다만, 유적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빈말은 아닌지, 녀석의 진녹색 눈동자에 눈부신 색채가 맴돌았다.

거뭇거뭇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 아래, 나와 라디 둘만 남았다는 걸 자각하자 가슴이 떨려왔다.

“...뭘 그렇게 긴장했어요? 미리 말해두지만, 일단은 씻는 게 목적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뭐, 도란님 하기 나름이겠지만.”

“....뭐라고?”

라디는 내 표정이 웃겼는지 쿡쿡 실소하고는 달그레 뺨을 붉혔다.

이내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로브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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