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망자들의 유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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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 망자들의 유산 #2
라디가 새침하게 단추를 풀었다.
그 손동작엔 거침이 없었고, 곧 포도주처럼 짙은 천 조각이 스르륵 땅에 떨어졌다.
그녀가 마저 레더아머를 벗으려다 말고 잠시 멈칫하더니 도란 쪽을 돌아보며 덤덤하게 쏘아붙였다.
“뭐해요? 어서 그쪽도 벗지 않고.”
“..그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재촉하는 듯하다.
도란은 신묘한 시선에 홀리듯이 바지를 움켜쥐고...
“왜, 왜...?”
“...아니, 보통은 탈의할 때 상의부터 벗지 않나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바지부터 벗으려고 하길래...”
“그런가...?”
“....몰라요, 저도.”
“....”
‘어쩔 수 없지.’
이게 다 군대에서 전투복 하의부터 탈의하는 습관을 거친 탓이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은 전장이나 다름없으니까 꼭 틀린 행동도 아니다. 그가 어떤 수를 두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전황이 갈릴 테니.
도란은 전란을 목전에 둔 병사의 마음으로 임했다.
이내 비장하게 상의까지 탈의하고 나자 그에게는 국부를 가리는 얇은 반바지 한 벌만이 남았다. 말이 반바지지 사실상 속옷과 다를 바가 없다.
“도란님, 이것 좀 풀어 주실래요? 너무 꽉 조여서 꼼짝도 안 해요.”
라디가 등을 내보이며 레더아머 끈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도 기세를 탔는지 평소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도란을 대했다.
라디가 꼬리 끝으로 매듭을 톡톡 두드리며 은근히 재촉했다.
“...너 지금까지는 혼자서도 잘 갈아입었잖아.”
“그래서, 싫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란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키 높이 탓에 자연히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가 되었지만 위화감은 없다. 조바심을 억누르며 천천히 매듭을 풀자 도란의 귓가에 물기 어린 속삭임이 들려온다.
“네, 그렇게... 살살... 조금 더 섬세하게...”
“.....”
살살은 개뿔. 처음부터 꽉 묶여있지도 않았으면서.
아무리 봐도 노린 듯한 음색을 들으며 도란이 레더아머의 매듭을 풀어내기까지는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혼자서도 수월하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고안된 디자인이다. 등 쪽에 나 있는 매듭을 제외하고는 굳이 타인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다.
그마저도 벗기기 쉽게 라디가 슬쩍 풀어놓은 걸 도란이 알 턱이 없었지만.
‘...귀여워.’
잔뜩 혈안이 되어 집중하는 도란의 얼굴을 보자 입꼬리가 움찔거렸지만, 라디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보단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감추고 태연한 척 읊조리는 게 고작이었다.
“옳지 옳지... 잘하셨어요 도란님... 이제 완전히 벗겨 주실레요...?”
이렇게 말이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마주 봤다간 그에게 붉게 달아오른 뺨이 다 들통났을 테니.
하지만 도란은 그런 라디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실소했다. 설마 들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 건가? 목소리는 어찌어찌 잘 숨긴 모양이다만, 수줍음에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정작 본인도 부끄러워하긴 마찬가지니 쌤쌤이었지만.
도란이 한참을 사투 끝에 꽉 달라붙는 레더아머를 벗겨내자 라디가 막혔던 숨을 몰아내쉬었다.
“흐아... 이제야 좀 살겠네요. 레더아머를 입으면 항상 가슴 쪽이 낑겨서...”
“.....”
“...변태. 어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예요? 그러다 닳겠어요.”
“...어쩔 수 없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다.
이미 한두 차례 목격한 적이 있지만, 얇은 셔츠 차림의 라디는 도무지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잡티 하나 없이 드러난 맨살 하며, 최고급 백자처럼 들어간 허리 곡선 하며...
심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크게 들썩이는 가슴은 봉긋 아름답게 솟아 확실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마른 체형임에도 이런 비율이 나오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던가?
화가 잔뜩 난 라디의 몸매에 도란은 저도 모르는 사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수인은 다 이런가.
“도란님?”
“아, 그... 그, 미안하다. 나머지도 벗겨줄 테니 이리 와.”
도란이 짐짓 헛기침하며 손짓했다.
레더아머와는 달리, 셔츠는 혼자서도 탈의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본인이 나서겠다는 건 무의식중 욕망의 발로와도 같았으리라.
그리고 그걸 약삭빠른 라디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라디가 슬몃슬몃 다가오자 도란이 손을 뻗었고, 마침내 그의 손끝이 몹쓸 부위에 닿으려던 순간ㅡ
툭.
“어...?”
첨벙!!
도란은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오아시스 속으로 빠져들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당황한 그는, 가까스로 수면 위로 기어올라 자신을 자빠뜨린 원흉을 쳐다보았다.
“너 이게 무슨...!!”
“뭐가 '벗겨줄 테니 이리 와'에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그, 그럼 안 벗을 거야...?!”
“네, 안 벗을 건데요? 그랬다간 도란님께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줄 알고.”
“크윽...!”
이를 갈며 원통해하는 도란을 라디는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키득키득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를 놀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노림대로 이끌리다간 오늘 일선을 넘고 말 게 분명했기에 먼저 수를 쓴 것이다.
물론 그녀도 한창일 나이고, 악착같이 모험가 의뢰를 하며 돈을 버는 데만 집중하던 와중 처음으로 맺은 이성과의 연분이다. 솔직히 그런 행위에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시기가 나빠도 너무 나쁘다.
그야 이곳은 던전 아닌가.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몬스터면 다행이지, 도적이나 모험가 무리가 앞길에 덫을 파 놓고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순간에 만약 몸 상태라도 나빠져 파티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면 말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아니, 분명 그녀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일부러 장난을 빙자해 주도권을 가져온 것인데...
덥석!!
“어... 도란님...?”
“....남자의 순정을 짓밟은 죄.”
“자, 잠깐만...! 제가 너무 기어올랐...!”
“문답 무용!!!”
“꺄아앗...!”
첨버어어어엉!!!
도란이 물귀신처럼 라디의 발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수면에 내다꽂았다.
도란이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흐흐... 누구도 나를 얕보면 이렇게...”
.....
“꼬, 꼬맹아...? 서, 설마...! 미안! 내가 지금 바로...!”
한참이 지나도 라디가 올라오지 않자 아연실색하던 중, 수면 아래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더니 익숙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확!!!
“...정말! 갑자기 잡아당겨서 놀랐잖아요!!”
“후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수영 못하는 줄 알았잖아.”
“그렇게 걱정하실 거면 장난치지 말지 그러셨어요.”
“아니... 장난은 네가 먼저 걸었잖아. 갑자기 자빠뜨려놓고선...”
“...그건 그러네요. 그럼 비겼다는 걸로.”
라디가 씨익 웃더니 참방참방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호들갑을 떨었던 게 무색할 정도. 그러고 보니 쥐는 헤엄을 잘 쳤지.
“...좋아?”
“그럼요, 요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잖아요. 게다가 이렇게나 더운데... 도란님은 싫어요?”
“그럴 리가 있냐. 엄청 기쁘다.”
‘혼자였으면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이란 뒷말은 삼켰다.
그래도 빈말은 아닌 게, 온몸 구석구석 생명이 깃드는 감각이 이런 거구나 싶다. 건조한 모래바람에 생겨났던 미세한 생채기들이 서늘한 물살에 씻겨나가는 기분. 미궁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바짝 동여매었던 긴장의 끈도 그와 함께 사르르 풀려갔다.
“...꼬맹아, 물 한 번 마셔봐. 달다.”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도란이 손바닥으로 물을 뜨자 라디가 연려한 손길로 머리칼을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종달새가 목을 축이듯 가련한 몸동작. 그 무방비한 태도가 도란으로 하여금 애욕에 불을 지피고, 흑심을 들끓게 했다.
“...왜요? 빤히 쳐다보고..”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라디가 그러한 도란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들과 경쟁하며 홀로 자립해온 그녀다. 하루가 멀다고 사지를 전전하며 몬스터를 사냥했다. 종족 전반에 깔린 차별로 혼자서 모든 걸 짊어져야 했던 탓에 눈치 하나만큼은 뛰어나다고 자부하지만, 반대로 남성 경력은 전무한 그녀에게 도란의 속내를 파악하라는 건 단적으로 말해 무리였다.
라디에게 있어 남자란 기껏해야...
‘가슴과 엉덩이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정도에,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갈 곳 없던 자신을 거두어준 수도원장 노부부에게 들었던 간단한 성지식이 전부다.
그러니 귀와 꼬리에 열광하는 도란의 행태는 라디로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쪽을 선호하는 남성도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본인의 종족이 뭔가.
‘사낭 쥐 수인...’
지금에서야 고별한 부모님과의 연결고리로써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과거에는 이 가증스러운 귀와 꼬리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다. 나도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는 용인족으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하다못해 토끼 수인으로 태어났으면 범죄자처럼 귀와 꼬리를 숨기고 다닐 필요도 없을 텐데.
사낭 쥐.
과거 약 다섯 세기 전, 종족을 불문하고 발발했던 대전쟁 당시 한 멍청한 사낭 쥐 수인이 신들에게 반기를 든 반란군의 주요 일원으로 가담했다고 한다. 그 한 명 때문에 종족 전체에 배신자라는 오명이 찍혀버렸고. 이 세계에서 흔히들 쥐새끼라느니 시궁쥐라느니 하는 욕설이 통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체 어떤 새끼가...’
악의 날인과도 같은 귀와 꼬리를 뜯어버리고자 고민한 적을 열거하자면 매일 밤 올려다보았던 허름한 여관 천장에 붙은 얼룩을 다 세고도 남을 터. 하지만 그때마다 빈번히 좌절되었던 건, 통증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롯이 청력 저하로 인한 전투력 손실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런 귀와 꼬리를 기피하지 않는 걸로도 모자라서 환장하는 사람이라니.
물론, 세상 모두가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을 지닌 건 아닐뿐더러 그 모든 편견을 하찮게 만들 정도로 라디의 미색이 뛰어난 탓에, 길을 걷다 보면 종종 후드 아래로 사내들의 끈적한 시선이 꽂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런 이목은 징그러울 뿐, 축사의 쇠똥구리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이 남자만은 예외인 걸까. 그의 눈길이 몰래 내 몸을 훑을 때면 도리어 간질간질한 감각과 함께 자부심이 들 정도로.
물론 라디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이상한 사람...’
산골 마을 출신이라 했던가.
이 정도로 무지몽매하고 바보같이 순수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라디는 희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도란 오빠는 칠칠맞은 구석이 있으니까...’
내가 잘 해야지.
*
물속에 있어서 다행이다.
일렁이는 수면의 푸른 파장이 표정을 가려 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나 보다.
“어휴 변태.”
“.....”
라디가 팔뚝으로 가슴께를 가리며 새침한 눈길로 쏘아봤다.
오히려 그럴수록 살이 눌린 탓에 더 부각되어 보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내 시선에 한층 사심이 깃들었다는 건 알겠는지, 그녀가 엄지발가락을 뻗어 내 허벅지 안쪽을 꼬집었다.
“아얏...!”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다 보이거든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래.”
“가슴 만지고 싶죠?”
“.....”
명중이다.
아니, 근데 알고 있으면 거 한 번쯤 대줄 수도 있는 거 아니요.
만일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제공할 의향이 있는데.
“아얏!! 왜 또 꼬집어?!”
“...제 가슴이랑 도란님 가슴이랑 같아요?”
“아니 그래도... 잠깐이면...”
“잠깐으로 만족하세요?”
“.....”
“말했죠, 조급해하지 말라고...”
라디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내 뺨을 쓸어내렸다. 한번 끓어오른 애욕은 이 정도로 잠재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나, 그 다분한 눈길에 담긴 애정을 마주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얼굴을 가슴에 묻으며 속삭였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저희 잠시 물 밖으로 나갔다 올까요?”
“...물 밖? 갑자기 그건 왜...”
“약속했잖아요. 좋은 거 해드린다고.”
해사하게 웃으며, 라디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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