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망자들의 유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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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망자들의 유산 #3
라디가 날 뭍으로 잡아끌었다. 대체 뭘 해 준다는 걸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대하기도 잠시, 녀석은 배낭을 뒤지더니 그 안에서 푸른색 약초를 꺼내들었다.
라디가 약초 줄기를 뭉개자 청량한 향이 감도는 점액질이 흘러나왔다.
“그건... 멘테 약초잖아? 이 닦을 때나 쓰는 걸 왜...”
“후훗... 잠시만 거기 앉아서 기다려 봐요. 이걸 이렇게 문지르면...”
라디가 손바닥에 진액을 펴 바르고 맨질거리자 연청색 거품이 생겨났다. 그 오묘한 색채에 빠져든 것도 잠시, 녀석은 내 뒤로 다가와 머리에 거품을 묻혀나갔다.
사박사박.
“...이렇게 멘테 잎을 짓이겨서 머리를 감으면 좋은 향이 나고 때도 잘 빠져요. 너무 자주 하면 머릿결이 상하니 가끔가다 한 번밖에 못 하지만요.”
“그래...? 멘테 이파리에 그런 효능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많이들 모르더라고요. 다들 치약 대용이나 향신료로 쓸 줄만 알지.”
“.....”
나도 그럴 줄만 알았는데...
입맞춤하기 전 양치를 하려는 용도이거나, 고기의 밑간을 하는 것처럼 날 맛있게 구워삶겠다는 모종의 암시일 거라 예상했었다.
사박사박...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칼에 골고루 거품을 묻혀나갔다. 두피에 와닿는 상냥한 감촉이 기분 좋다. 등 뒤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열심히 쭈물거리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저주가 옮는다며 내 머리를 만지는 건 고사하고 말을 섞는 것조차 기피했는데 말이지.
라디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나른한 부유감을 만끽하고 있자니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와닿았다.
“...아프진 않아요?”
“최고야.”
“.....”
방금 대답이 녀석을 기쁘게 한 걸까.
라디는 살며시 거리를 좁히더니 정성스레 두피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마치 소중한 아기를 다루듯 온유하고, 섬세하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뭐가.”
“...제가 정말 어릴 때,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에는 가끔 이렇게 머리를 감겨주시곤 했거든요... 항상 자부심을 잊지 말라면서... 사낭 쥐 수인으로 태어난 걸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면서... 그래서 언젠가 저도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꼭 이렇게.. 제 어머니가 저한테 해 주셨던 것처럼 머리를 감겨주고 싶었어요...”
손길이 잠시 멎었다.
뒤에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내 머리를 감겨주고자 말을 꺼낸 건지.
또 내 어깨 위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있는지도.
지난 며칠간 그녀와 동고동락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눈 나라면 알 수 있었다.
“......”
뒤돌아서 위로해주고자 싶었으나, 그녀의 완강한 손길은 그 어떤 대답도 거부했다.
대신 바가지로 물을 떠 내 머리 위에 끼얹는 걸 택했다.
“...자, 이걸로 머리 감는 건 다 끝났어요. 그럼 이제 바닥에 엎드려 보실래요?”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에이... 약속했잖아요. 굉장한 걸 해드리겠다고. 설마 고작 이 정도로 끝낼 줄 알았어요?”
“그야...”
솔직히 처음엔 미온한 감상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엄청 기대했는데 해 준다는 게 기껏 머리 감겨주기라니.
물론 라디가 내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비록 예상하던 바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애정 어린 손길은 내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또한 라디가 어떠한 마음으로 날 대하는지가 여실히 느껴져 정서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나 보다.
라디는 지면이 고른 지점을 찾아 수건을 깔고 날 눕히더니 천천히 제 옷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단추가 풀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올려다보려던 차, 그녀가 내 고개를 붙잡아 보지 못하게 막았다.
“대, 대체 뭘...”
“아, 돌아보지 마세요. 저 지금 옷 벗고 있으니까요.”
“....”
방금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보지 말라는 걸까, 아니면 봐달라고 은근히 돌려 말하는 걸까.
진지하게 내적 갈등을 하고 있자니 라디가 쿡쿡 소박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안 돼요. 사실 저도 지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거든요. 만약 도란님이 돌아봤다간 기절할지도 몰라요.”
“.....”
“...그러니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주세요.”
그녀가 돌연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더니 천천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맨손 마사지. 살결과 살결이 맞닿자 따스한 온기와 함께 보드라운 촉감이 전해져왔다.
사락사락 등을 스치는 셔츠 끝자락과 반바지의 감촉으로 완전히 옷을 벗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윽...”
“.....”
불시에 라디가 상체를 굽히자 포개어진 살의 표면적이 늘어났다. 그녀의 굴곡진 골반, 매끄러운 복부, 오목하게 파인 배꼽이 살갗에 밀착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두 덩어리의 질량이 등 뒤로 느껴졌다.
심장 소리는 어째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의 호소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꼬맹...”
“우, 움직이지 마요!”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녀의 입에서.
제법 당돌한 계획을 꾸미긴 했지만, 내가 움직이는 상황까진 상정하지 못한 듯하다. 무엇 때문에 당황했는지는 자명하다. 살짝 등을 제쳤을 뿐인데도 피부가 비벼지는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까.
즉, 특정 부위의 특정 감촉이 제대로 느껴진다는 거다.
“꺄읏...♡?!”
...이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그, 그래도 분명 약속...”
“괜찮아. 그냥 마사지만 해줘도.”
솔직히 이대로 즐기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랬다간 도중에 못 참고 덮칠 것만 같았다. 라디가 오늘 어떤 마음가짐으로 내게 봉사하고자 했는지 알게 된 이상 최대한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라디도 이대로 가다간 마사지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란 걸 깨달았는지, 서서히 상체를 떼고는 무안한 손길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프진 않아요..?”
“그래, 엄청 시원하다. ...조금 더 세게 해도 될 것 같아.”
“.....”
꾹꾹. 라디가 체중을 실어 견갑골 사이를 압박했다. 타인을 안마해 준 경험은 전무한지 솔직히 말해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으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왔기에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부끄러움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조금 미숙할 수도 있어요.. 누군가의 등을 이런 식으로 매만지는 건 처음이거든요...”
처음이라...
“...너 저번에 나 간호할 때 해줬었잖아. 사흘 동안 기절해 있을 때 이미 잔뜩 만지지 않았어? 연고도 발라주고 그랬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때는 의료 행위였고 이건...”
“이건 뭔데?”
“.....”
슬쩍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자 라디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팔을 뻗어 지긋이 내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그나저나 상처도 그새 다 나았네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말 돌리는 거야?”
“됐거든요... 얌전히 안마나 받으세요.”
라디가 마사지를 이어나갔다.
녀석은 어깨부터 시작해 목, 척추, 허리, 골반, 그리고 종아리까지 그간 미궁을 전전하며 뭉쳤던 근육을 빠짐없이 풀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색 사암으로 둘러싸인 오아시스에 검푸른 어스름이 드리우고, 라디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을 무렵.
“자, 이제 다 끝났어요.”
녀석이 내 등에 물을 뿌리는 걸로 마사지는 끝이 났다.
아쉬움을 떨쳐내고 그대로 일어나려던 찰나,
“자, 잠깐만요...! 아직 일어나지는 마세요!! 잠깐이면 되니까...!!”
“.....”
라디가 날 도로 눕히더니 허겁지겁 옷자락을 여미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그거 의미가 있는 거야?
알다시피 녀석은 내게 안마를 해 주느라 온몸이 죄다 젖은 상태다. 애당초 물에 한 번 빠지기도 했었고.
봐라, 지금도 투명한 셔츠 너머로 회색 속옷이 그대로 비쳐 보이지 않는가?
그 무방비한 모습이 선정적이라기보다 귀엽다는 감상이 먼저 들어 피식 웃자 라디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이며 가슴께를 가렸다. 처음의 각오는 어디 갔는지...
“왜, 왜 웃어요...?!”
“...그냥 귀여워서. 그보다 너도 여기 한번 앉아봐.”
“대,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 부, 분명히 말하지만 던전 안에서는...!!”
“그래 그래, 나도 알아. 머리 감겨줄게.”
“네...?”
“뭐 반응이 그래,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입에서 그런 제안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걸까? 짙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애완 다람쥐를 보는 것 같아 나는 내심 실소하고는 다리 사이를 두드렸다.
라디는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허벅지 사이에 안착했다. 나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멘테 잎에서 나온 진액을 잘 문질러 녀석의 머릿결에 묻혀나갔다.
“아프면 말해.”
“....네.”
귀 근처를 어루만지자 라디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체중을 실었다. 덕분에 머리를 감기기엔 조금 불편했지만, 녀석이 좋다면 그걸로 됐다.
“...이거 귀에 거품 들어가도 괜찮아?”
“너무 깊게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그래.”
잿빛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문질렀다. 거품칠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으나 조금만 더 이 시간을 이어가고 싶었다. 녀석과 꼭 붙어 있는 게 좋았으니까.
그녀가 군말 없이 내게 몸을 맡겼다. 나는 그녀의 말랑말랑한 귀를 마음껏 만끽했다. 달금한 체취가 시원한 멘테 향에 섞여 은은하게 풍겨왔고, 잔잔한 미소가 살랑이는 꼬리에 어우러져 맑게 피어났다.
맞닿은 피부로부터 유대감이 전해져온다.
라디와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첫 만남은 크누트 길드의 선술집에서였지. 그땐 그저 당돌한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관계가 될 줄이야.
함께 꼬치구이를 먹기도 했고, 크고 작은 소란을 겪기도 했다.
힘을 합쳐 몬스터를 해치우고, 강을 건너고, 서로를 의지해왔지.
같이 밤을 지새운 날도 있었고, 웃고 울고, 종국엔 서로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녀석은
내 곁에 남아주었다.
“자, 됐다. 이제 씻자.”
씁쓸한 여운을 걷어내고 흐르는 물줄기로 거품을 닦았다. 푸르스름한 물결이 퍼져나가고 이내 녀석이 고개를 든다.
“고마워요.”
티 없이 맑은 웃음.
진한 행복을 머금은 미소에
“제 곁에 있어 주셔서.”
그녀는 태연한 목소리로
“아, 그리고 말하는 걸 잊었는데.”
“저 확실히 도란님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아.
이 나쁜 년.
너는 모르겠지.
네가 미소지을 때면 그 푸른 눈동자에 얼마나 많은 별이 담기는지.
네 무책임한 미소에 얼마나 많은 내 한숨이 담기는지.
너는 모른다.
미안.
더는 무리야.
불꽃이 피어올랐다.
가슴속에 뜨거운 충동이 일어
“..도란님...?”
그녀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떨리는 입술을 비집고 간신히 뱉었다.
“...시발, 도저히 못 참겠다.”
“도란님...?”
두 팔로 그녀의 오금과 등을 받치고 들어올렸다. 발걸음을 옮겼다. 두 눈을 강렬한 푸른빛에 고정한 채.
“도란... 우리 이러면....”
“상관없어.”
내가 다 책임지면 되니까.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절제는 무슨.
해볼 테면 해보라고 해.
뭐가 나타나든지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설령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품 안에 담긴 여자 하나쯤은 지켜보이겠다.
“.....”
라디도 내 눈에 담긴 결의를 읽었는지 얼굴을 붉혔다.
이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을 안아들고 폭포로 향했다.
폭포수 너머에 공간이 있는 걸 봤다.
거기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하늘을 뒤덮은 찬란한 별과 월광도, 남몰래 지상을 굽어살피고 있을 신들도, 이 유적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말톤도.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수를 뚫고 나아갔다.
어두컴컴한 동굴.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이제 우리를 방해할 존재는 없다.
그러나ㅡ
화르르륵!!
동굴에 발을 들이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화해졌다.
불길한 징조ㅡ.
“젠장...”
“아...”
“....빨리 말톤을 찾아야 해. 지금 당장.”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을 정도로 섬뜩한 광경.
눈앞에 즐비한 수백 수천의 석관.
곧 해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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