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망자들의 유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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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망자들의 유산 #6
쿠웅!!
묵직한 석벽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라디가 문 너머로 뛰어들었다.
“후우... 큰일 날... 뻔했네요..”
녀석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나는 그 로브 끝자락에 들러붙은 미라의 팔을 떼어내며 지탱해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다행이네.... 말톤 너는...”
“무탈하다네. 마침 슬슬 버겁던 참인데 딱 좋은 시기에 해내주었군. 다 자네 덕일세.”
“.....”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거라곤 그저 퍼즐 좀 푼 게 전부다.
이는 오롯이 두 녀석이 목숨을 바쳐 시간을 끌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
그런 생각을 뇌까리며 시선을 내리자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라디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잡아왔다.
“잘하셨어요. 도란님이 대견스러워요.”
“.....”
그래, 그래도 이거면 된 거겠지.
우리는 동료다.
혼자서는 무리라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 이루어낼 수 있다.
맞잡은 손에 힘을 실어 화답하자 말톤이 배낭끈을 고쳐 메며 물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수를 쓴 겐가? 그토록 때려부숴도 끄떡없던 문이... 도저히 가늠이 안 가네만.”
“그 뱀 조각상 있잖아. 혹시나 해서 눈알을 만져봤는데 쑤욱 뽑히더라고. 진짜 살아있는 뱀 같아서 깜짝 놀랐다.”
“그래요...? 제가 건드렸을 땐 분명 평범했는데...”
“그래?”
“네, 당연히 제일 의심 가는 부분이니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보고, 충격을 줘보기도 하고 다 시도해봤거든요...”
“흠... 어쩌면 특정 조건에서만 발동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 아쉽게 됐네. 내 직접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일세.”
말톤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해 왔지. 이거 봐봐.”
“네? 뭐가 있... 이, 이건...?!”
말아쥐었던 손가락을 펴자 라디가 호들갑을 떨며 물러났다. 그 반응도 십분 이해가 간다. 내 손바닥 위에는 태양처럼 붉게 빛나는 구슬이 영롱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으니까.
홍옥(??).
뱀 조각상에서 갈취해 온 보석이다.
“흐흐... 그 고생을 했는데 빈손으로 올 순 없잖냐. 마지막에 힘 좀 썼지. 어때?”
뱀의 주둥이에서 뽑아낼 때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졌으니 원래는 못 가져오는 물건이 아니었을까?
만약 미궁 제작자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땅을 치며 오열하겠군.
조금 속이 후련해졌다.
“서, 설마... 이게 방금 말했던 그...”
“...어마어마하군. 무언가 마력이 내재되어 있는 건 분명하지만 평범한 마석은 아닐세. 그렇다고 루비나 루벨라이트 종류도 아닌 것 같네만... 혹시 이 구슬의 정체가 뭔지 알겠나 도란?”
“글쎄...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머뭇거리며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라디에게 보석을 쥐여주고 말을 이었다.
“아마 태양, 그러니까 불에 관련된 보석이 아닐까?”
“불... 말인가?”
“그래, 딱 봐도 시뻘건 게 그래 보이잖아. 어쩐지 조금 따끈따끈한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래?”
능청스럽게 대꾸했지만, 나름의 근거는 있다.
이집트 역사에서 아펩과 라의 관계가 어떠했던가.
태양신 라가 날마다 아펩을 물리친 후 힘을 소진되었을 때는, 아펩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체력을 회복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은 밤이 찾아온다고 생각했으며, 조금 전 이 보석을 뱀의 입안에 끼워 넣었던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 상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의 눈은 혹독한 열기와 태양, 수호의 힘을 상징한다.
또 여기에는 추가로 한 가지 의미가 더 깃들어 있는데ㅡ
‘파라오.’
“음...? 도란, 방금 뭐라 했는가?”
“아무것도 아니야.”
여러 신이 동일시되는 이집트 역사의 특성상, 태양신 라는 호루스와 같은 신으로도 등장하곤 했다. 이 때문에 라의 눈은 호루스의 눈으로도 불리며, 파라오의 왕권을 보호하는 희미를 지닌다.
즉, 이 보석은 이집트 상형문자라고 하면 제일 먼저들 떠올리는 우제트(Wedjat)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귀한 물건이 왜 그런 곳에 박혀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내용을 그대로 라디와 말톤에게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말톤이 난처하게 뺨을 긁으며 읊조렸다.
“도란 자네도 정말...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보석을 빼내 올 생각을 하다니...”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래서 어때?”
“솔직히 잘 모르겠네. 영문 모를 마력이 대량으로 내재되어 있는 거로 미루어 아티팩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네만... 자세한 건 감정을 받아봐야 알 테지.”
“아, 아티팩트?! 정말로!?!”
대박.
평범한 보석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설마 아티팩트란 말이 나올 줄이야.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아티팩트는 사소한 것조차 금화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 효과가 독특하거나 빼어날수록 천문학적인 금액이 붙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 보석의 경우 심미적으로도 상당히 뛰어나니 그만큼 높은 가격이 책정될 테지.
전율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꼬맹아앗! 우, 우리가 해냈어!! 아티팩트래! 이제 우린 부자야!! 우선 집부터 사는 게 어때?! 아니면 아예 별장을 사버릴까?! 아예 섬을 통째로 사버리는 것도...!!”
“이,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할 수 있겠냐?! 고대 유물이라고! 고대 유물!! 으하하하하핫!!! 씨발 나는 이제 부자다!!!”
미궁이 떠나가라 외쳤다.
라디가 내 허리춤에 달라붙어 말려도 소용없다.
이걸 처분할 수만 있다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해방될 터. 더는 길바닥에서 노숙할 필요도, 주변 모험가의 눈치를 봐가며 퀘스트를 수주할 필요도, 접시 밑바닥에 남은 야채 건더기에 목숨을 걸 필요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런 내게 말톤이 찬물을 끼얹어왔다.
“도란, 초 치는 것 같이 미안하네만... 그걸 당장 팔 수는 없네.”
“...그게 무슨 소리야.”
“알다시피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네. 마법사의 탐욕에 불을 지피고, 성직자의 눈을 흐릴 정도로 말일세.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
“...자네가 만일 대형 파티의 일원이었다면 모를까, 아무 뒷배가 없는 현시점으로선 표적이 되기에 십상일세.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서 정당하게 아티팩트를 구매하기보단 자객을 고용해 강탈하는 편이 그들에게 훨씬 매력적일 거라는 말이네.”
“...시발.”
하기야... 일리 있는 말이다. 누구나 이런 물건을 보면 흑심이 동할 테고, 연줄도 없는 F급 모험가 한 명쯤 처리하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그러면 어쩌자는 건데.”
말톤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 세 가지 방법이 있네. 하나는 이 물건을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연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네가 암살자에게 대항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묵혀두는 걸세. 필연적으로 시간은 오래 걸릴 테지만 말이지.”
“...마지막은.”
“그거야 간단하지 않나. 자네가 그 유물을 쓰면 되는 걸세.”
“...유물을 써? 내가...?”
녀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아티팩트 중에는 효율 좋은 보구가 많지. 모험가 중에도 전투를 보조하는 용도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자가 적지 않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걸세. 라디의 쇠뇌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겠군. 그 보옥이 소모품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자네가 적당히 쓰다가 팔아치워도 될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귀한 물건을 사용해도 될까.
고대 유물을 발견하면 당연히 경매장에 부칠 생각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내게 아티팩트 따위 사치에 불과했으니까. 애초에 정말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허나 말톤의 주장을 듣고 보니 조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섣부르게 이 보석을 처분했다가 귀족들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간 그거만큼 큰일이 없다. 술 단지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이 홍옥에는 마성의 마력이 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밝힌다고 한들, 누군가에게 쫓기는 신세는 이제 지긋지긋할뿐더러, 지금 나는 홑몸이 아니다.
고개를 돌리자 의아하게 날 올려다보는 라디와 시선이 마주쳤다.
“...일단 이 보석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그런 건 이 유적을 탈출하고 나서 이야기해도 충분하니까.”
그래, 지금은 한눈팔 때가 아니다.
당장 이 순간에도 등 뒤에는 언데드 무리가, 앞에는 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실정이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등유 랜턴을 내세우며 완만하게 위로 뻗은 회랑을 나아가던 중, 어느덧 길이 끊기고 커다란 중문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건... 또 다른 문이로군. 이번에도 속임수가 숨겨져 있는 겐가?”
“특별한 부조가 없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는데요...”
“이상한 냄새는 안 나?”
“음... 문틈 사이로 미약하게 부패한 악취가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아까 언데드랑 싸울 때부터 후각이 마비된 상태라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딱히 기척이 느껴지거나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면 직접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자. 꼬맹아, 넌 뒤에서 경계해줘.”
“네, 알겠어요.”
오른손에 쥐었던 장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문을 젖혔다. 돌쩌귀에 녹이 슬었는지 말톤과 힘을 합쳐도 조금 버거웠으나,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석문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서서히 밀려났다.
이후, 배낭에 넣어두었던 도마뱀 소재를 던져 함정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문턱 너머로 발걸음을 옮기자 일자로 뻗은 광활한 공간이 드러났다.
다만 그곳에는 우리만 있던 게 아니었다.
“이건...”
“...넓군.”
새카만 암흑이 짙게 내리깔린 공간. 랜턴의 불빛이 차마 어둠을 다 걷어낼 수 없을 정도로 폭넓은 석제 보도블록의 양옆으로는 시꺼먼 형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건... 석상일까요? 어쩐지 좀 불길한데...”
등신대 비율의 몬스터 조각상.
흔하디흔한 숲고블린이나 코볼트를 묘사한 석상부터, 고대에만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소한 몬스터의 조각상까지.
개중에는 작은 들짐승 크기만 한 것도 있었지만, 어떤 건 어림잡아도 건물 한 채 크기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것도 있다.
그리고 라디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녀석이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도, 도란님... 이거...”
“...그래.”
이제는 이 조각상들의 진짜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손을 뻗어 석상을 어루만지자 얄팍한 회반죽의 감촉 너머로 천천히 맥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전부 살아있는 마물이다.
“...지금은 봉인된 것 같네. 특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까지는 잠들어 있는 모양일세. ...고대의 마물들이라.. 상당히 흥미롭군.”
“천만다행이네요... 만약 이 괴물들이 일시에 풀려날 상상을 하니... 끔찍해요. 대체 어떤 의도로 이런 걸 만들었을까요?”
“뭐... 군대로 쓰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군대요...?”
나는 검치호랑이를 빼다 박은 마물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그 왜 뭐냐, 아까 말톤이 그랬잖아. 여왕이 돌아오는 날을 기약하며 주민들이 스스로를 언데드로 만들었다고. 아마 그때를 대비해서 병사로 쓸 몬스터 군단을 준비해 둔 게 아닐까 싶은데.”
“일리 있는 말이네요... 대체 그 여왕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걸까요...? 게다가 그런 그녀를 위해 이 미궁을 만들었다던 수수께끼의 인물도...”
“뭐, 곧 알게 되겠지”
어느새 그 길던 통로에도 끝이 보였다.
뒤이어 들어온 광경.
시야를 전부 메꿀 정도로 커다란 배.
이걸 타고 여왕의 안식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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