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망자들의 유산 #8
* * *
[065] 망자들의 유산 #8
“으음... 곤란하구먼.”
결국, 여왕의 안치실로 들어가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너넨 뭐 아는 거 없냐?”
핑...
끵...
히드라와 키메라가 주눅이라도 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자기들도 방도가 없는 모양. 내 말을 알아듣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위기로 봐서는 대충 어떤 맥락인지 파악한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가 이 장면을 봤다면 기절초풍하겠지.
“...말도 안 돼요.”
내 뒤엔 라디와 말톤이 있고.
“아니, 이게 무슨 S랭크 마물이에요?! 똥개라고 해도 믿겠네!!”
“듣지 마렴.”
끼잉...
히드라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재빨리 귀를 막아주고자 했지만, 머리가 아홉 개라 어딜 가려주어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참나, 나중에는 아예 이름까지 붙여주겠어요.”
“이름...? 오 그거 괜찮은데.. 해일은 어때? 해일 히드라.”
프릉!
머리가 요동칠 때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게, 나름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풀네임으로 부르자니 조금 불순한 사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뭐... 본인이 좋아하면 장땡이지.
히드라가 꼬리를 탁탁 바닥에 부딪히자 회반죽 덩어리들이 잘게 으스러졌다.
킁!!
“...왜, 너도 이름 가지고 싶어?”
케릉!
키메라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얼굴은 사자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하는 짓이 조금 큰 고양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녀석의 갈기에 들러붙은 돌조각이 피부에 쓸려 따가웠기에 나는 적당히 ‘메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느긋한 태도가 라디의 심기를 자극한 것 같지만.
“정말로 대체... 정신 좀 차려요 제발...! 상대는 S급 마수라고요!! 이 녀석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물어 죽일 수도 있어요!”
“에이... 설마 이제 와서 공격하겠어? 그렇지 메라야?”
케르릉....
키메라가 순식간에 뛰쳐나가 라디의 배후를 점하더니 그녀의 뒷덜미를 쓰윽 핥았다.
쫄지에 천연 왁스를 뒤집어쓴 녀석은 꼬리를 쭈뼛 세우며 질겁했고.
“거 봐, 걔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으, 으으...”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실소했다. 작은 친구를 발견했다는 듯 흥미롭게 눈을 빛내는 키메라와 고양이 앞에 선 생쥐 꼴인 라디가 우스웠기 때문.
그리고 아무리 S급 마물이라고는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앳된 구석이 드문드문 보이는 게 아직 어린 개체가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지금은 봉인에서 풀린지 얼마 안 된 상태라 원래만큼의 박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현재는 잘 쳐줘야 B랭크 상위 정도가 아닐까?
그래도 작은 마을 한두 개쯤은 무리 없이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녀석들이지만.
“저, 저기 그럼 나는...! 나는 어떤가...?!”
크르르..!
안전하다는 걸 깨닫자 말톤이 욕망에 충실한 얼굴을 한 채 다가갔지만, 두 녀석은 훌쩍 뒤로 물러나 외면했다.
어째선지 말톤만은 꺼리는 모습. 아니, 그 이유는 대충 예상이 가지만.
“어, 어째서...!”
“쟤네들도 알아보는 거지. 네 추잡한 욕망을.”
“그, 그럴 리가 나는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휙!
“크흑...!!”
“....확실히 이 두 마물은 지능이 뛰어난 것 같네요... 강한 데다가 머리도 좋은 몬스터라니... 모험가로서 상대하기는 최악이에요.”
“누가 아니래. 물론 어디까지나 적으로 돌렸을 때 말이지만.”
프르릉...
히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이 눈을 감고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다른 머리들이 질투해오는 까닭에 조금씩 번갈아 가며 골고루 매만져줄 수밖에 없었다.
라디가 마지못해 키메라의 턱을 긁어주며 읊조렸다.
“그건 그렇고... 결국, 여왕의 묘실로 들어가는 방법은 못 찾았네요...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쯤 구경하고 싶었는데.. 다른 조건이 있는 걸까요?”
“글쎄...”
문에 그려진 부조를 살펴봤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까 돌파했던 기믹처럼 뱀 조각상이 튀어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랜턴을 비추어 봐도 딱히 변화가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내용이랄 것도 여왕의 묘실을 장식해둔 벽화라기엔 너무 평범해서
“이건... 그냥 일상을 묘사해놓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
엘프와 늑대가 들판을 달리는 모습, 천사와 쥐 수인이 요리하는 모습, 춤을 추는 고양이와 인간 등 영문을 알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그 외에도 날개를 지닌 마족이나 새끼 히드라 등 다채로운 종족이 등장했으며, 사막이나 호숫가 등 장소 또한 규칙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라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그래.”
하나같이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어쩌면 여왕이 바라던 이상을 그려놓은 걸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그 그림자가 여왕이 맞다는 가정하에... 언데드로 변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백성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글쎄다...”
시선을 내려봤지만, 어느새 평범하게 돌아온 내 그림자에선 어떠한 낌새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휴경기에 들어선 논밭이 으레 그러하듯 쓸쓸한 적막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
“뭐, 그건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 없겠지, 그나저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녀석들도 시선을 맞춰온다. 이내 갸우뚱거리는 두 마물.
“늬들 보물 가진 거 있냐?”
*
그래봤자 짐승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 결국, 나는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마물들을 상대로 경제 관념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잘 봐, 이 자그마한 게 동화고 이 번뜩번뜩한 게 은화야. 그리고 너희가 찾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은화고. 이제 좀 알겠어?”
....?
....킁.
“야 말톤, 금화 좀 빌려줄 수 있냐?”
“...여기 있다네.”
“고마워, 자 그럼 다시 간다! 이게 동화고, 요건 은화. 그리고 이 번쩍거리는 게 바로 금화! 혹시 이 근방에서 이런 거 본 적 없어?”
프릉...
끵...
두 녀석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힘없이 머리를 늘어뜨렸다. 이해를 못 한 건지...
“자, 다시 한번 간다. 이게 바로 금...”
“저... 도란님...?”
“왜?”
“...아무리 더 물어봐도 보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저거 아무리 봐도 난처해하는 기색이잖아요...”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 잘 봐, 이게 금화...”
킁...?
프릉...!!
놈들이 무언가 내뱉기 전까지 교육이란 명목의 세뇌를 하려던 차, 문뜩 히드라가 콧김을 내뿜는가 싶더니 키메라가 그에 호응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히드라가 슬쩍 뒤로 물러나 길을 터주자, 녀석의 동상 아래 위치했던 통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 드디어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푸릉...!
“크흐흐... 잘했다 인마!”
역시 교육만큼 중요한 건 없다.
녀석의 등을 팡팡 쳐주자 라디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봐왔다.
“...들어가시게요?”
“그래,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확인은 해 봐야지.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탈출구로 추정되는 두 통로 중 하나니 어차피 확인해봐야 할 장소였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
“흐흐... 보물아 기다려라... 내가 싹 쓸어가 줄 테니.”
아무 거리낌 없이 허리를 숙이고 구멍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중,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니 두 녀석이 꼬리를 교차해 말톤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 어...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겐가...?!”
“평소에 마음을 곱게 쓰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금화를 들고 다니면서 지금까지 밥 한번 안 쐈잖아.”
“그,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가...! 라, 라디 자네도 한번 통과해 보게!”
“제가 왜...”
라디가 마지못해 다가왔지만, 키메라와 히드라는 그녀 또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어째서...?
끼잉...
픵...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두 녀석이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나만 들어갈 수 있나 본데? 아니면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던가. 그럼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너희는 잠시 얘들이랑 놀고 있어.”
“...도란님이 없어지면 갑자기 난폭하게 변하는 건 아니겠죠...? 고삐를 쥘 사람이 사라지면...”
“...그럴 거야?”
도리도리!
“그렇다는데?”
“....”
입을 벌린 채 황당해하는 라디를 내버려 둔 채, 벽에 걸린 횃불을 하나 떼 움켜쥐고 통로 안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아래를 향해 완만하게 굽은 통로는 어떠한 특색도 없었으나, 이 앞에 보물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레드카펫 깔린 연회장이 부럽지 않았다.
“흐흐... 고대 유물도 좋지만... 금덩어리도 좋겠어.”
희소성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당장 현금화를 하기엔 그쪽이 훨씬 유리할 테지. 나름 명색이 히드라가 지키는 곳인데 어마어마한 보물이 잠들어 있지 않을까? 어쩌면 너무 양이 많아 혼자서 다 들고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간이 수레를 만들어봐야 하나...? 유적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든 재료를 공수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몸체는 나무를 엮어서 만들면 되고, 바퀴는 마물 소재로 대충 때우고... 그러고 보니 아까 탔던 배에 남는 밧줄이 있었지.”
점점 기대에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로를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기다려 마지않은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엔...!
“...시발 뭔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작고 초라한 빈 석관 하나가 딸랑 놓여있었을 뿐, 텅텅 비어 있었다.
어안이 벙벙할 따름.
“...이게 뭐야.”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고작해야 원룸 크기의 네모난 방 안에는 금싸라기 한 톨도, 깨진 도자기 파편도, 하다못해 그 흔한 부조조차 전무했다. 그저 먼지 쌓인 거미줄만 켜켜이 방구석을 장식했으니.
마치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풍경.
“도굴당했을 리는 없는데...”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일행 말고 이 미궁을 끝까지 돌파한 사람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애초에 그랬더라면 두 마물의 봉인이 풀려 있었을 터, 이 공간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런 공간을 건설한 목적이 있을 텐데.
“함정...? 아니, 그런 것치고는 이 방까지 오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S랭크 마물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가 바로 눈앞의 여왕의 묘실이 버젓하게 있으니 도굴꾼을 눈을 속이려는 목적도 아닐 테고...”
대체 뭘까?
석관이 있는 걸로 미루어 묘실 용도로 쓰였다고 보는 게 적절했으나, 그림이나 부장품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시체가 없다.
“아니... 보통 여왕 바로 옆 공간에 안치된 거면 왕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초라한데... 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무려 히드라가 지키고 있던 방이다. 그것도 미궁의 마지막 종착지에.
금은보화가 기다려도 모자랄 판에 애꿎은 궁금증만 얻어가게 생겼으니 갑자기 속에서 옹졸한 원망심이 샘솟았다.
“이 자식들은 반짝이는 게 있는 곳으로 안내하랬더니...”
그럼 그렇지. 내 팔자가 어디 이렇게 쉽게 필 팔자던가.
잔뜩 실망하고 돌아서려는 찰나ㅡ
.....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
재빨리 허리춤의 칼을 뽑아 뒤돌았지만,
아무도 없다.
“.....”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이 목덜미를 훑는 듯한...
검은 도포의 사신이 명부를 읊는 듯한...
벼랑 끝 시쳇더미에 파묻혀 살았던 나다.
직감 하나만큼은 정확하다고 자부했다.
첨예하게 연마된 감각이 경고했다.
이 방에 나 혼자가 아님을.
착각 따위가 아님을.
“......”
타각.
손아귀에 들었던 횃대를 놓자 그림자가 위로 솟구친다.
지면에 충돌한 횃불의 불씨가 사방으로 퉁기며 금빛 파문을 형성했다.
나는 양손으로 칼자루를 거머쥐며 검 끝에 모든 긴장을 실었다.
서늘한 땀방울 맺힌 피부로 공기의 흐름을 읽고,
귀를 열어 모든 상황에 대비했다.
이어서 메케하게 타오르는 도롱뇽 기름의 잔향이 코끝을 간질이자
“......!!!”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 거지.
짐승의 날숨과도 같은 불쾌한 기척이 관에서 흘러나왔다.
살짝 접촉하기만 해도 살갗이 얼어붙을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삐걱거리는 심장이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했지만,
발꿈치에 녹슨 못이 박힌 것처럼 물러날 수 없었다.
불가사의한 힘이 날 관으로 잡아끌었다.
‘안... 돼...!’
관을 엿보는 순간 죽는다.
왕의 미라가 날 덮칠 것이다.
텅 빈 동공으로 나를 탐할 것이다.
‘젠장!!!’
도축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애처롭게 저항했지만 몸이 이끌리는 건 막을 수 없었고, 이내 손끝이 관짝에 닿고 고개가 넘어간 순간
“허억...! 헉...!”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관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왕의 미라가 있을 리도 만무하고, 정체 모를 누군가가 나를 잡아끄는 일은 더더욱 없다.
팽배했던 긴장감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모두 내 착각이었을 뿐.
“....피곤한가..”
한밤중이다.
평소라면 자고 있어야 할 야심한 밤이다. 느닷없이 미라에게 쫓기기도 했었고, 여러 일이 있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전신에 쌓인 피로를 자각하자 검의 무게가 한층 무거워졌다.
“...혼자서 뭐 하는 건지...”
돌아가자.
방을 나가려는 순간,
달그락.
들었다.
이번에는 똑똑히 들었다.
곧바로 발을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자
단도(??).
석관 한구석에 새까만 단검 하나가 놓여있었다.
날휨이 없는 직도, 날받침도 없이 일체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조심스레 집어올렸다.
가볍다.
이질적인 촉감. 처음 보는 재질. 전체적으로 낡았지만 날만은 무척 예리하다.
서걱!
“.....!”
시험 삼아 석관 끄트머리에 검날을 가져다대자 단단한 화강암이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단출한 외관과는 달리 매우 뛰어난 성능이다.
더군다나 실밥이 바늘 찾아가듯 내 손에 딱 맞아떨어지는 게 제법 맘에 끌렸다.
“...나름 하나 건진 건가...?”
금은보화가 아닌 건 아쉽지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빈 석관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
“...이건 또 뭐야.”
“아, 오셨어요?”
통로 밖으로 나오자 내 예상을 아득히 웃도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톤은 어디 갔어.”
“어떻게든 키메라 뱃살을 만져보겠다고 아득바득 달려들다가 한 대 얻어맞았어요.”
녀석이 턱짓한 방향에는 웬 덩어리가 바닥에 처박힌 채 다리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너는.”
“독 채취하고 있어요!”
라디는 히드라의 송곳니를 병 입구에 박아넣고 능숙하게 독을 뽑아내고 있었다. 마치 소 젖을 짜는 것처럼 목가적인 태도. 아까 그 꺼리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게다가 키메라는 입가에 꿀을 한가득 묻힌 채 질펀하게 늘어져 있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조금 전만 해도 얘네 엄청 꺼렸었잖아.”
“보면 볼수록 하는 짓이 귀엽더라고요. 살짝 맹한 게 어쩐지 도란님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이렇게 귀한 독도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죠!”
라디의 푸른 눈동자가 천진난만하게 반짝거렸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아이처럼 눈부신 얼굴이다.
“...좋아?”
“네! 최고예요!! 히드라와 키메라의 독은 웃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매물이 없어서 못 구하는 희귀품이거든요! 그치 해일아? 메라야?”
푸르릉!
케르릉!
라디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긁어주자 두 녀석이 알기 쉽게 입가를 헤실거렸다. S랭크 마수의 위엄 따위는 진작 개나 줘버린 듯한 광경.
...이런 놈들과 내가 닮았다니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일로 와봐요.”
라디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저항... 저항....
“...좋아요?”
“헤으응....”
“거 봐요, 셋 다 하는 짓이 똑같잖아요. 하다못해 이젠 몬스터한테까지 질투하질 않나...”
“.....”
이대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잠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멀찌감치 쓰러져 있던 말톤이 비틀거리며 다가왔기에 노곤함을 떨치고 일어났다.
이후 두 녀석에게 통로 안쪽에서 마주했던 방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말톤과 라디 또한 그 공간에 대해 이렇다 할 추측을 내놓지는 못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배낭을 등에 짊어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이 미궁에서 나가자.”
“....헤어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지. 얘네들은 여길 지켜야 할 테니까. ...그렇지?”
푸르릉!
키릉!
두 마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들의 임무는 이 공간을 수호하는 것이었으니까. 봉인에서 풀려난 지금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겠지.
은근히 정이 많은 녀석답게 라디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쉬워요.”
“뭐,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안 그래?”
푸릉!
히드라가 콧김을 내뿜으며 꼬리로 내 그림자를 가리켰다.
“.....?”
뭐, 별거 아니겠지.
우리는 메라와 해일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키메라가 지키고 있었던 왼쪽 통로로 나아갔다. 녀석들도 우리와 떨어지기 싫은 눈치였으나, 인연이란 원래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법이다.
대신이랄 건 뭐하지만 작별 선물로 꿀이랑 육포를 조금 남겨두고 왔으니 이걸로 아쉬움을 달랬으면 한다. 해일이의 머리통이 서로 차지하겠다며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녀석들이라면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다.
곧 머잖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미궁에서 벗어나네.. 그래도 마지막엔 조금 재밌었어.”
“지금 시간대가 궁금하군... 아마 동틀녘 즈음이 아닐까 싶네만.”
“그건 몰라도 일단 하루 정도는 푹 쉬고 싶어요... 피곤해서 입에 단내가 날 지경이에요. 하음...”
라디가 하품을 내쉬며 슬그머니 내 팔에 체중을 실었다.
조금 쓸쓸하게 내려간 녀석의 눈꼬리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렇게 아쉬웠어?”
“....조금은요. 이제 막 친해졌는데.”
나는 말 없이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푸렴푸렴 저 멀리서 밝은 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