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67화 (67/375)

〈 67화 〉 길한 예감 #1

* * *

[067] 길한 예감 #1

­스윽...

“.....”

­스으윽... 스윽..

“....”

­스스슥...!

“...저기요.”

라디가 게스츠름한 눈빛으로 쳐다봐왔다.

“다 보이거든요?! 은근슬쩍 만지려 하지 마세요!”

“히잉... 닳는 것도 아니면서...”

“안 돼요!”

유적을 나오고 꼬박 이틀. 지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뻗어버렸다.

불침번을 서는 내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충분히 쉰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무엇보다 미궁의 찌는 듯한 더위에서 해방된 게 컸고.

하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니­.

“땍! 어제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더니 다섯 시간 내내 제 귀만 붙들고 계셨잖아요! 그 뒤로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세요?!”

“윽... 그, 그래도 너무 좋은 걸 어떡해. 게다가 하루 종일 검 손질만 해서 심심하단 말야...! 마땅히 할 만한 것도 없고!”

“....잠깐만이에요. 지금부터 딱 말톤님이 돌아올 때까지만 내어드릴 테니... 자, 잠깐... 어휴....”

“히히...”

유적을 떠나 길고 긴 통로를 빠져나오자 숨겨진 출구에 도달했다.

입구를 가로막은 결계를 지나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성탑처럼 높게 솟은 암반들과 그 아래 짙게 깔린 구름의 향연이었다.

이곳이 던전의 2층 어딘가라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따라서 말톤이 현 위치를 알아보겠다고 지도를 들고 나선 것이 오늘.

이번엔 소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손아귀에 착착 감기는 귀의 촉감을 만끽하며 힐링하고 있자니 라디도 저 나름대로 유리병 안에 담긴 독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헤실거렸다.

“...그렇게 좋아?”

“물론이죠. 갑자기 이런 소득을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도란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행복한 일만 연달아 생겨나네요.”

“나야말로. ...근데 그러면 좀 더 받아오지 그랬어. 흔하지 않은 기회일 텐데.”

“음... 저도 그러고는 싶었지만, 키메라의 독은 워낙 변칙성이 강해 금방 상하거든요. 그만큼 해독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면 특징이지만... 반면 히드라의 경우에는 고온에 오랫동안 놔두어도 쉽게 변질하지 않는 대신, 독성이 너무 강해서 특수 처리가 된 용기가 아니면 담을 수조차 없고요. 이거 보세요.”

라디가 병 입구를 기울여 안에 든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자, 그에 맞닿은 바위가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녹아내렸다.

“어때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게 겁나 무서운 맹독이란 건 아주 잘 알겠다.”

라디와 함께 살게 되면 밤에는 늘 조심해야지.

혹여나 마실 거로 착각하고 들이키기라도 하면...

빈 콜라병이 간장 그릇으로 탈바꿈하는 건 이세계도 마찬가지인지, 라디 또한 다 쓴 병을 재활용하는 탓에 와인이나 향신료 따위로 착각하기 딱 좋다.

“..그러고 보니 그 병들은 다 어디서 난 거야? 네가 제 돈 주고 샀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운데...”

“....제가 짠돌이라는 걸 돌려 말하는 건가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유리 제품은 워낙 비싸잖아! 잡상인들은 잘 취급하지 않기도 하고...”

“됐네요. 뭐, 사실 저도 자각은 있으니까요... 이건 다 의뢰 도중 구한 거예요. 도적을 처리하면 그 소지품은 보통 처치한 사람 몫이잖아요? 놈들의 은신처에 보면 이런 병들이 바닥에 한둘씩 굴러다니고 있거든요.”

“그렇구나. ...도적은 많이 잡아봤어?”

“음... 그냥 보통 정도로요. 좋은 조건의 의뢰가 있으면 마다하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상대로 일을 벌이다 보면 어떤 뒤탈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앙심을 품은 동료가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고.”

“그렇긴 하지... 근데 그러면 너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거야? 라고 물어보려던 차, 익숙한 사내의 등장에 대화가 끊겼다.

말톤이 한 손에는 메이스를, 다른 한 손에는 지도 뭉치를 펄럭거리며 천막으로 다가왔다.

“...뭐, 좀 알아냈어 말톤?”

“그럴세, 근데 이거 참...”

“왜?”

“직접 보게나.”

말톤이 지도를 펼치자 현재 위치를 표시한 X자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한데 그 장소가 좀 낯이 익다.

“여긴... 플래시 골렘이 나온다던 곳 아니에요?”

“맞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던전을 가로질러 온 모양일세.”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처음 우리가 목표했던 지점이 플래시 골렘의 서식지다. 험준하고 외딴곳에 있어 찾아오기는 힘들지만, 놈들을 사냥할 수만 있다면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현재 라디의 배낭에는 고대 유적에서 나온 술단지가 실려 있다. 금화 몇 닢은 족히 나올 이 물건을 등에 지고 던전에서 미적거리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도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디가 고심하며 묻자,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두 마리는 잡고 가자.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말고 어디까지나 일정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기왕 가는 거 돈도 좀 더 벌어가면 좋잖아? 게다가 고놈, 플래시 골렘의 핵이 또 유용하게 쓰인다며.”

하루 이틀 더 걸리는 것쯤이야 상관없다.

이렇게 외진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조우할 가능성도 낮을 거다. 더군다나 마물의 수도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고 하니 조금만 신중을 가한다면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더욱이 술단지를 경매에 부치고 던전으로 돌아오면 그사이 분명 누군가가 플래시 골렘을 싹쓸이하고 난 뒤일 터, 이런 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선점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충분히 쉬었다.

몸이 근질거린다.

*

우리는 텐트를 정리하고 다시금 이동을 개시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산.

까마득히 먼 과거로부터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왔을 거석, 그 위에 신비하게 드리워진 하얀 장막. 굴곡진 산맥을 넘으며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암석과 뿌연 구름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정이 듬뿍 들어간 엽서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직접 목도하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간 아버지와 온갖 벽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경관을 봐왔지만, 이 장소는 정말 손에 꼽을 만한 절경이었다.

어쩌면 둘도 없는 동료들과 함께라서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곳이 지하라는 게 아직도 믿기질 않네... 꼬맹아, 근데 그 골렘은 어떻게 생긴 마물이야? 직접 상대하기 전에 간단한 대처법 정도든 알아두고 싶은데.”

“음... 굳이 묘사하자면... 움직이는 바윗덩어리? 몸 전체가 암석으로 되어있어요. 크기는 천차만별이긴 한데... 작은 아이 덩치부터 어떤 건 도란님보다 큰 것도 있고요.”

“강해?”

“음... 단적으로 말해 그렇죠? 단단한 데다가 딱히 약점이라고 할 만한 부위도 없으니까요. 이마에 있는 핵을 공격하면 쉽게 해치울 수 있긴 한데... 그러면 굳이 고생해가며 플래시 골렘을 잡는 이유가 없죠. 그 핵 때문에 사냥하는 거니까요.”

라디가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녀석은 아는 게 많아서 이럴 때 정말 편리하다. 나름 이 세계에서 살아오며 여러 모험가를 보았지만, 그녀만큼 마물에 대해 해박한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그 앳된 외견에도 불구하고.

“...꼬맹아, 그러고 보니 넌 모험가가 되기 전에는 뭐 했어?”

“네? 갑자기요...?”

“응, 별 건 아니고 그냥 조금 궁금해서.”

“아, 음... 딱히 재밌는 이야기는 아닌데... 듣고 싶으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라디가 잠시 망설이더니 단어를 골라가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제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사별했다는 건 전에도 말했죠?”

“잠깐... 혹시 억지로 털어놓는 거면...”

“괜찮아요. 저도 언젠가 말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갈 데도 없어서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는데, 감사하게도 한 수도원장 노부부께서 절 거두어주셨어요.”

“...고마운 분들이네.”

“네, 그 은혜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이 골자인데...”

읏차. 갈라진 바위틈을 뛰어넘은 라디가 말을 이었다.

“저 말고도 수도원에 다른 고아들이 많았거든요? 전쟁이나 마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좀 돼서...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가 그 애들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꼬마의 대장을 맡게 됐어요.”

“대장? 어떻게?”

아무리 어릴 때라지만 내가 아는 그녀라면 적극적으로 누구 앞에 나설 성격은 아닌데...

라디도 내 눈빛에 섞인 의문을 읽고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저도 알아요, 저답지 않은 거. 여기에도 조금 헤프닝이 있었는데... 수도원이 있는 빌헴 마을은 정말 작은 곳이라 이따금씩 마물이 목책을 뛰어넘어서 뛰어들곤 하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집채만 한 멧돼지가 난입해서 밭이랑 우물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거예요! 근데 그 멧돼지가 얼마나 커다란지 마을 어른 모두가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어서 쓱 올라가는 입꼬리.

“그런데 그때 제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거든요. 이장님께 빌린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사람들이 죄다 대피해서 동네가 텅텅 빈 상태였어요. 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이상하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모퉁이를 도는데 그때 밭에서 호박을 훔쳐먹던 멧돼지와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어떻게 했는데?”

잔뜩 이야기에 몰입해 묻자 라디가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사과, 마을 이장님한테 받은 사과가 수중에 있었거든요. 거기다가 심술 두꺼비의 독을 잔뜩 묻히고 놈이 돌진해오길 기다렸어요. 녀석이 벽을 들이받고 잠시 동작을 멈춘 사이에는 그 입안에 사과를 던져넣었고요. 그때가 아마 아홉 살이었을 텐데... 그 뒤로 뒤늦게 달려온 마을 사람들한테 영웅 취급을 받았었죠.”

“아홉 살... 어릴 때부터 대단했네... 잠깐, 그런데 두꺼비 독은 어디서 난 거야? 아홉 살이면 모험가가 되기도 전이잖아.”

이 세계에서 모험가로 등록할 수 있는 적정 연령은 성인, 즉 열다섯 살부터다.

이는 상당히 예외적인 일. 이곳은 유아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 아동들은 그저 몸집이 작은 어른에 불과하고, 기술을 배워 노동력을 갖춰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영아 살해도 일반 살인에 비해 특별히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불과 300년 전 유럽이 그러했던 것처럼.

따라서 상인 조합이나 직공 · 제단사 조합 등 여타 길드를 가입할 때에도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으나, 모험가만큼은 예외이다.

치기 어린 마음에 만용을 부러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하는 소년 소녀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

치안이 불안정해 단검 정도야 누구나 하나씩 소지하고 다닌다지만 맹독을, 그것도 아홉 살 난 소녀가 들고 다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라디는 ‘이걸 말해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음... 모험가가 된 건 성인 때부터가 맞긴 한데 실은 그 이전부터 몰래 마물을 사냥해왔거든요. 사냥해 잡은 마물 소재를 침대 밑 공간에 숨겨두었다가 마을에 행상인이 방문하면 가져다 팔곤 했어요. 물론 수도원장 할아버지가 알면 걱정할 테니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요. 그 사실을 들킬 뻔해서 조마조마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은 다 추억이네요...”

라디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망울이 과거를 반추해낼 때마다 맑게 피어나는 미소는 어찌나 찬연한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눈이 멀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저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자아내는 향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살풋 반개한 웃음에 사고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난 뒤에야 심장이 맹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불시에 피어오른 뜨거운 충동에 당황하던 차, 그녀가 살며시 내 손을 들어올려 뺨에 비볐다.

끝끝내 참지 못하고 라디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자 등 뒤에서 성가신 목소리가 들렸다.

“험험... 자네들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요즘 따라 이 대사를 하는 빈도도 늘어난 느낌이네만...”

“아, 있었어요 말톤님? 몰랐네요. 눈치채고 도중부터 알아서 잘 빠졌어야죠.”

“거 참...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말톤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돌리며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한데... 나도 방금 얘기를 듣고 조금 궁금한 게 있네만... 라디, 자네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한 겐가? 혹, 수도원의 재정 상황이 어려웠다거나...”

“아, 그건 아니에요. 이상하게도 저희 수도원에는 해마다 대량의 기부금을 놓고 사라지는 익명의 후원자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늘 풍족했거든요. 덕분에 그 돈으로 가끔씩 옷도 사 입고 먹을 것도 작은 마을의 수도원치고는 상당히 넉넉한 편이었어요.”

“....그러면 대체 왜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돈을 벌고자 한 겐가.”

“아 그건 말이죠...”

라디가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던 찰나­

­끼리릭... 끼익...!

전방에서 녹슨 기계장치를 연상시키는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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