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길한 예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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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 길한 예감 #2
“....!!”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불시에 멈춰섰다.
기척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바위 뒤에 엄폐했다.
라디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슬쩍 암반 너머를 엿보았다.
녀석을 따라 고개를 들자 자욱하게 구름 깔린 시야 너머, 좁은 바위틈을 헤집는 살바람 사이로 일렁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안개에 비친 거대한 음영은 마치 수면에 드리운 거인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플래시 골렘.
소리 죽여 속닥였다.
“자, 잠깐...! 뭐가 저렇게 커...? 내 두 배는 되어 보이는데...”
“단순히 역광 때문에 크게 보이는 걸세. 실제 덩치는 자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정도일 테지.”
“세 마리 정도...? 들려오는 소리로 판단하건대 한두 마리는 아닌 것 같아요.. 곤란하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질 않으니 답답하다.
두꺼운 안개벽 너머로 들려오는 영문 모를 소음은 불필요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라디가 펄럭이는 로브 자락을 억누르며 분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제가 가진 공격 수단으로는 놈들에게 유효타를 먹이기가 어려워요. 히드라 독을 쓰면 처리할 수야 있겠지만...”
“...그거 귀한 거라며. 그건 위급한 상황일 때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두자. 여기선 나랑 말톤이 어떻게든 해볼게.”
“네, 재빠르지는 않은 녀석들이니 협공당하지만 않게 조심하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한 놈을 마크하고 있을 테니...”
“각자 한 마리씩 담당하도록 하지. 그리고 놈들과 상성이 나쁜 건 도란 자네도 마찬가지이니 무리해서 해치울 생각 말고 대치만 하게. 내가 선두에 서겠네.”
말톤이 메이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앞으로 나섰다.
녀석을 뒤따라 돌부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위산 중턱 개활지로 나오자...
끼이익.. 끼익...
예고 없이 불어온 바람에 안개가 걷히며 무감각한 두 눈이 나를 관조했다.
무기물 생명체.
모순된 두 개념이 공존하는 모습. 지금까지 봐왔던 몬스터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
전신은 우둘투둘한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이음매를 움직일 때마다 녹슨 쇠파이프로 아스팔트를 긁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덩치에 반해 확연히 작은 두 눈동자에선 피조물의 하찮은 감정 따위 찾을 수 없었고, 갈라진 바위틈 사이로 물기 어린 이끼와 자잘한 벌레들이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 이마에 박힌 구슬 크기의 광물이었는데, 벼락을 맞은 수정처럼 내부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
...관절은 어떻게 되어 먹은 거지?
본능적인 탐구심을 자극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일단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다.
“그래, 네가 그렇게도 귀한 몸이라며? 반갑다.”
어떤 몬스터라도 칼밥 앞엔 장사 없지.
“자, 잠깐...!”
안개 너머로 라디가 소리쳤을 땐, 이미 검을 내려찍은 뒤였다.
녀석은 그대로 파편이 되어 흩...
째앵!!!
...응?
한 번 더.
까앙!!!
“이, 이럴 수가...”
너무 단단하다.
지나칠 정도로.
삽시간에 열 합이 넘는 검격을 박아넣었지만 바위 몸체엔 작은 불똥이 튀어 올랐을 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럼 이건 어떠냐!!”
퍼억!
“끄어어어어억!!!”
내 발가락...! 발가락이!!
온 힘을 다해 발로 후려갈겼지만, 이 역시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발모가지를 부여잡고 동동 뛰어다니자, 놈이 고개를 180도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끼이익...
“어... 안녕하세요...?”
끼기긱...!
아이고...
좃됐네.
*
콰르르르!!
“히이이익...!”
쿠우웅!!
“끄앗!!”
드드드득...!
“끼요옷!!!”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지면에 내리꽂히는 거대한 팔뚝. 흙더미와 박살 난 초목이 투구에 튀었다. 훌쩍 뒤로 뛰어넘어 사선에서 물러났지만, 커다란 주먹이 바닥을 강타할 때마다 흔들리는 지축 탓에 도통 접근할 수가 없다.
한 대라도 맞으면 치명상. 저 육중한 공격에 적중하면 뼈도 못 추리겠지.
드르르륵...!
“싯팔..! 이런 새끼를 어떻게 잡으라고...!”
눈동자를 노리고 장검을 내질렀지만, 안구 또한 광물의 일종인지 불똥과 함께 튕겨나왔다.
“어... 힘내세요.”
“속 편하게 그런 소리 하기냐?!!”
“제가 경고하기도 전에 뛰쳐나가셨으면서... 말했잖아요.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녀석이 멀찍이 물러서서 바라봤다. 느긋하게.
“조금만 버텨요. 곧 말톤님이 도와주러 오실 테니까요.”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말톤은 꽤 힘들이지 않고 놈들을 대적하는 모양이다. 라디가 상대하던 플래시 골렘도 어느새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유인해 갔으니. 녀석의 메이스라면 단단한 바윗덩어리라도 착실히 데미지를 누적시킬 수 있겠지.
반면 나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끼요오오오옷!!!”
깡!
일단 칼날이 들어가야 뭘 하든지 하지!
굳건한 성채가 외침을 용납하지 않듯, 놈의 육체 또한 칼날이 맞닿는 즉시 튕겨냈다.
아니, 암만 그래도 생명체니까 몇 대 때리다 보면 어느 정도 먹힐 줄 알았는데...!
“젠장!! 꼬맹아! 얘 공략법이 뭐야?!”
“공략법이요? 그런 거 없는데요?”
“뭐?!”
“아까 말했잖아요. 핵이 약점이라고요.”
“핵을 부수면 돈이 안 되잖아!!”
“네, 맞아요. 게다가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절대로 부수지 마세요.”
“이런 싯팔!!!”
라디는 마치 제 일 아니라는 듯 평온하게 지껄였다. 내가 다칠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 너무 신뢰를 줘도 문제다.
“참고로, 핵을 끄집어내면 거동을 멈춰요. 대신 엄청 깊숙이 박혀있어서 뽑아내려면 그 주변을 발파해야 하지만요.”
“결국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못 뽑아낸단 소리잖아?!!”
“네 맞아요.”
“옘벼...!!”
콰아아앙!!
욕지거리를 내뱉던 도중, 젖은 흙더미가 입가에 한 움큼 튀었다.
에퉤퉤. 얼굴 가득 인상을 쓰며 내뱉었지만, 물이끼의 톡 쏘는 맛이 그악하게 입안을 맴돈다.
‘제길...!’
어떻게 해야 이 새끼를 조질 수 있지...?
내가 가진 수단으로는 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녀석과 대항하는 사이 굳건했던 지면은 어느새 진창으로 바뀌었고, 묵사발 난 그루터기가 사방에 산재했다. 끔찍한 자연 파괴의 현장.
민첩한 놈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차라리 나도 메이스 같은 둔기가 있었더라면...!
둔기?
“이 개자식아 넌 뒤졌어!”
바위와 바위가 부딪히면 바위가 부서진다. 당연한 논리.
재빨리 짱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 짱돌은 지금 이 순간 훌륭한 무기로 변모했다.
“뒈져랏!!!!”
어마어마한 위력!
짱돌은 삽시간에 육박해 아예 아작을 내놓았다.
내 주먹을!
“끄아아아앗!!!”
“정말... 뭐 하는 건지...”
녀석.. 상당히 터프하다. 설마 짱돌 쪽이 박살 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슬슬 나한테 맡기는 게 어떻겠나.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하고는 상성이 안 좋은 녀석일세.”
놈과 대치하던 중 말톤이 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새 플래시 골렘을 쓰러뜨렸는지 녀석의 손아귀에는 빛나는 광석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오기가 치밀었다.
“...안 돼, 끼어들지 마.”
이건 자존심 문제다.
짱돌을 쥐었던 오른손이 얼얼하지만, 검을 못 쥘 정도는 아니다.
분명히 방법이 있다.
떠오르지 않을 뿐.
내겐 저 바윗덩어리를 잘라버릴 수단이 있다.
이미 바위를 벤 적이 있다.
달그락.
아.
오른손에 쥔 장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래, 잘 생각했네 도란. 이건 저 녀석들이 너무 단단한 탓...”
“잘 보기나 해.”
“도란...?”
말톤이 다가오다 멈칫했다.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골렘에게 걸어갔으니까.
저벅저벅.
기기긱...
놈이 날 돌아보았다.
무감각한 시선. 그 눈길만큼이나 덤덤한 살의.
투박한 주먹이 나를 뭉개고자 높게 치솟았다. 저 공격에 당했다간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터져 나가겠지.
“도란님!!!”
이제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라디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 순간
푸각!
“....둔해 인마.”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허리춤의 칼집을 놈의 어깨 관절에 박아넣었다!
허를 찌르는 일격.
기기... 기.. 긱...!!
플래시 골렘은 마디 틈새가 단단한 검집으로 틀어막혀 옴짝달싹 못 했다.
이어서 놈의 움직임이 봉쇄된 사이
서걱ㅡ!!
“어, 어어...?!”
“흠...?”
뭉텅이로 썰려나가는 바위. 허공으로 비산하는 파편. 무미건조한 두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경악.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단, 나를 제외하고.
내 손에는 왕의 묘실에서 발견했던 정체불명의 단도가,
왕의 석관 따위 두부처럼 잘라버렸던 그 무기가,
그것이 시커먼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넌 이제 뒤졌어.”
칼자루를 역수로 쥐었다. 수직. 리버스 그립.
거석 파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세를 낮춘다. 땅을 기듯 낮게 굴렀다. 이어 돌부리를 딛고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놈의 배후로 쇄도했다. 내 오랜 전우가 으레 하는 것처럼.
탁!
일순간, 나는 이미 놈 뒤에 있었다.
기기기... 긱...!
골렘의 두 눈이 흑발의 사나이를 찾아 방황했다. 나는 단도 끝에 투기를 실으며 잠시 기다렸다. 놈이 나를 찾도록. 약점을 드러내도록. 이내 묵직한 고개가 후방을 돌아보고 투구 틈새로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한 번의 호흡에 몸을 맡겨 도약했다.
신속(??).
콰과과과과과광!!!!
바위 조각이 터져나왔다. 시꺼먼 잔상이 곳곳으로 흩날렸다. 나는 바위틈 깊숙이 뿌리내린 칼집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역수로 쥔 칼날을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푸카카카카칵!!
섬뜩한 손맛. 솟구치는 파편. 밤하늘처럼 검은 궤적이 휘몰아치는 소소리바람을 가를 때마다 무수한 돌조각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어 커다란 주먹이 발악이라고 하듯 나를 노리고 짓쳐들지만, 나는 놈의 등에서 뛰어내려 회피했다. 이후 크게 뛰어넘어, 후방으로.
텅 빈 종아리를 절단하고. 이어서 상단베기. 짧게 허공에서 몸을 비틀고. 약진. 2연격.
드드드드득...!!!
마지막으로 칼집을 뽑으며 머리통을 절단하자 핵으로부터 전해지던 동력이 끊겼는지, 놈은 맷돌이 갈려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볼품없게 변한 몸체에는 깊게 패인 상흔이 가득했다.
“...이거 물건이네.”
참았던 호흡과 함께 감탄을 내뱉으며 단도를 들여다봤다. 아무리 강도가 높다고 한들 단단한 암석 덩어리에 수십 번이나 맞부딪쳤음에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대체 뭐로 만들어졌길래.
“그, 그 무기는...? 도란님.. 이게 어떻게 된...”
“허... 이거 참...”
두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라디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한 게 몹시 놀란 눈치였고, 말톤은 어이가 찬 모양인지 김빠진 한숨만 내쉬었다.
암실을 연상케 하는 도신이 안개마저도 갈라놓았는지, 자우룩했던 연무가 가시자 뿌리째 뽑혀버린 나뭇등걸, 잘게 바스라진 암석 파편, 진흙과 뒤섞여 더 이상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는 이끼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디가 플래시 골렘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꼬리를 둥글게 말았다
“..말톤님 여기 절단면 좀 보세요. 이렇게 매끄러운 단면은 처음 봐요...”
“...아무래도 도란이 유적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을 가져왔나 보군... 예사롭지 않아. 그 평범해 보이던 단검에 이런 위력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두 녀석이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지금 내겐 아무래도 좋았다.
“아오 씹...!”
칼집에서 롱소드를 뽑아 살펴보니 날이 꽤 상했다. 무식하게 휘두르는 게 아니었는데...
이걸 다 갈아내려면 반나절은 꼼짝없이 숫돌과 씨름해야 할 터. 그리고 그건 그만큼 라디의 귀를 쪼물딱거릴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고.
“...괜히 폼 잡는 게 아니었는데..”
한숨을 내쉬며 검을 갈무리하던 중
“....?! 도란님 이쪽으로!!”
“뭐, 뭐야...!”
“말톤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돌연 라디가 긴박하게 뒷덜미를 잡아끌더니 쇠뇌를 치켜들고 공터 한쪽을 겨냥했다.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꼬리털을 응시하고 있자니 그녀의 입에서 들어본 적 없는 서늘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나와.”
“꼬맹아...?”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
적막.
고조되어가는 긴장감 속, 라디의 푸른 눈동자에 맺힌 살기가 한층 명도를 더했다.
이내 그녀의 고운 눈썹 라인이 치켜올라가며 방아쇠에 무게가 실린 순간
“잠깐...! 잠깐만!! 알았어! 나갈 테니까 진정해..!”
공터 너머, 뿌연 안개가 도로 시작되는 부근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이어서 돌부스러기가 흘러내리더니 한 남성이 바위 뒤에서 나타났다.
“정말... 너무 살벌...”
“혼자가 아닐 텐데요? 나머지 일행도 나오라고 하세요.”
“......”
사내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사선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두 남성이 잇달아 걸어 나왔다.
평범한 모험가 복장을 한 세 사람. 선술집에 들어가면 벌꿀주를 들이키고 있을 듯 평범한 얼굴.
하지만 나는 이 순간 확신했다.
“도란...”
“...그래.”
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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