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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69화 (69/375)

〈 69화 〉 길한 예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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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길한 예감 #3

말톤이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오른손을 슬그머니 메이스에 얹었다.

나 또한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서 라디를 내 반신 뒤로 가렸다.

어미에 묻어나오는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낮게 읊조렸다.

“...왜 우리가 싸우는 걸 훔쳐보고 있었지?”

“아 그거? 나쁜 의도는 없었어. 그냥 이 근처를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라고. 당연히 호기심이 동하지 않겠어? 몰래 지켜본 건 미안하지만 구경만 할 생각이었으니 너무 경계하지는...”

“지랄하네. 칼자루에 땀이 흥건한데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이 씹새끼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무기를 거머쥐고 있다가 우리가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지 급습해올 계획이었겠지.

날카롭게 일축하자 사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워워 진정해 친구, 전장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쪽이 우릴 공격할 수도 있잖아? 그나저나 정말 잘 싸우던데 그 무기는 뭐야, 플래시 골렘을 간단하게 토막 내는 단검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어. 어디 나도 구경 좀 할 수...”

“꺼져.”

“...어이 형씨. 가만히 지켜보려 했는데 거 말에 가시가 좀 있네. 혹시 고슴도치야? 이렇게나 친절하게 묻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같은 모험가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누가 보면 우리가 도적이라도 된 줄 알겠어.”

험상궂게 생긴 대머리 모험가가 비릿한 미소를 자아내자 놈들 사이에 천박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 꼴이 우스워 나는 아예 쐐기를 박았다.

“아니라고? 씨발 웃기는 새끼들이네. 늬들 하는 꼬락서니를 봐. 요즘 모험가들은 검집 대신 천을 감고 다니는 게 유행이냐, 패션이야?”

내가 놈들을 도적이라 확신했던 이유.

놈들의 허리춤에는 어두운 색 계열 천으로 날을 동여맨 단검이 묶여있었다. 분명 야심한 밤에 모험가들을 기습할 시 칼날이 불빛에 반사되는 걸 방지하고자 둘러둔 거겠지. 날의 예리함은 기대할 수 없지만, 첨단으로 찌르는 공격은 여전히 위력적일 터다.

도적들이나 떠올릴 만한 수법.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하는 놈은 드물지만.

“호오... 눈썰미가 제법인데? 근데 틀렸어 탐정 씨. 이건 어젯밤 킬러 보어를 상대하고 와서 그런 거거든. 걔네 밤눈이 워낙 밝잖아? 그래, 그리고 만약 우리가 도적이라고 해도... 뭐 어쩔건데?”

“어쩔건데? 그래, 어떻게 해 줄까? 이 좆만한 새끼들아.”

지금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으깨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다.

허나, 그러기엔 놈들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상대는 별로 강하지 않다. 기껏해야 E, 잘 쳐줘야 D등급이 고작.

녀석들은 우리가 플래시 골렘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수준 차이를 명확하게 깨달았을 터. 기습에 실패한 시점에서 재빨리 뒤돌아 도망치거나, 굽신거리며 완만히 해결하고자 시도했어야 정상이다.

하면, 이 삼류 양아치 같은 처세는 뭐란 말인가. 얼굴 낯짝에 대놓고 도적이라 광고하는 꼴이라니.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

“도란님... 기척이 느껴져요. 한둘이 아닌 데다가... 전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그 직감은 라디의 경고와 함께 현실이 되었다.

저 멀리 안개 너머 산비탈에서 어렴풋한 형체가 꾸물거리는 걸로 보아 이 공터까지 도달하려면 조금 걸릴 테지만, 전투를 벌이기엔 한없이 촉박한 시간이다. 놈들도 그걸 바라고 있을 테고.

말톤이 한숨을 내쉬더니 발끝을 돌렸다.

“...물러나지. 지금은 저들에게 놀아나 봤자 득 될 게 없네.”

사람을 상대로 싸울 땐 변수가 너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개개인의 실력 편차가 워낙 크고, 혹 아티팩트나 마법사라도 섞여 있다간 상당히 곤란해진다.

더군다나 쉽게 소리가 새어나갈 수 있는 비늘 갑옷 사이사이에 송진과 아교를 발라 방음 처리를 하고, 신발 밑창에 부드러운 가죽을 덧댔을 정도의 신중함과 전문성을 겸비한 사내들이다.

그런 놈들이 아무런 대비 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리도 만무한 노릇이라서, 그들은 시간을 끄는 데 특화된 별동대일 가능성이 높다.

결정적으로, 눈앞의 사내들을 죽여봤자 장비를 노획할 시간이 없으니 리스크에 비해 리턴이 압도적으로 적다.

라디의 배낭 안에 들었을 술단지를 의식하며 뒤돌아서자, 끈적한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어딜 가시나..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았는데.”

“그래, 우리도 쓸데없이 도적으로 몰려서 기분이 조금 안 좋거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얻고 싶은데... 기왕이면 그쪽...”

“끝났어 병신아.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봐. 쌧바닥을 뽑아버릴 테니까.”

“...형씨 말이 좀 짧다? 혹시 겁먹은 거야? 그 이상한 투구라도 좀 벗... 윽?!”

“.....”

살의(??).

뒤틀린 인과. 그로 인해 상실한 감정. 공허.

투구 눈구멍 속, 무덤덤하게 정제된 살기를 목도한 사내가 섬짓 숨을 들이켜며 물러났다.

모험가로 신분을 세탁하기 전. 반년. 지상에 현현한 지옥을 전전하며 짊어진 업의 무게는 일개 도적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는 내 눈빛에 얽힌 심연의 편린을 엿보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름. 너 이름이 뭐냐.”

“.....”

“쳇...! 기억해둬라, 내 이름은 자켄. 푸른 독사...”

“좆까.”

“날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모험가.”

독살스러운 시선이 찐득하게 늘어졌다.

나는 공터를 뒤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아오 그 개씨발 빌어처먹을 도적 새끼들. 고깃국에 끓여 죽여도 모자랄 씹년들...!”

“.....”

“부모 짝수의 자식새끼들. 진짜 다 뒤졌으면! 씨발! 좆!!”

“....양친은 원래 짝수 아닌가요...? 엄마 아빠 이렇게 둘...”

“각각을 말한 거야. 게다가 꼭 두 명이라는 보장도 없고.”

“....?”

라디가 내 말을 곱씹으며 곰곰이 고민하는 사이 말톤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도란, 자네가 화난 건 알겠지만...”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도적.

그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골렘을 쓰러뜨리고도 핵을 회수하지 못했다. 놈을 잡고자 장검 날도 상했을뿐더러 발로도 차보고 짱돌로 내려찍기도 하며 별 지랄을 다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말톤이 처치한 두 마리의 핵은 건졌다는 점이지만.

“씨부랄!!”

지금쯤 쓰러진 골렘의 유해를 들여다보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을 놈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애먼 돌멩이를 걷어차 화풀이하자 라디가 머뭇거리며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아니 그... 혹시 귀 만지실래요...?”

“....지금은 됐어. 이동 중이잖아. 언제 다시 놈들과 마주칠지 모르고.”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자각은 있다.

하지만 라디는 그런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인면어를 마주한 원숭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말톤 뒤로 숨었다.

“마, 말톤 님...! 큰일이에요! 도란님이 귀 만지는 걸 마다했어요! 대체 얼마나 상심이 심하면... 중증 같은데 어떡하죠...?”

“그러게... 큰일이군. 내 도란이 이러는 건 리자드 떼에게 쫓기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이후로 처음 본다네... 그때도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었지...”

“시끄러, 나도 이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거든? 그리고 그건 말톤 네가 전부 리자드 여왕을 꼬셔보겠다고 나섰다가 근위병한테 들켜서 그런 거잖아. 그때 산을 두 봉우리나 넘어서 도망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밥을 못 먹었던 것도 지갑이 없어져서 그랬던 거고.”

“흠... 그랬던가?”

“그래 이 새끼야.”

귀 만지는 것 조금 거부했다고 이런 반응이라니... 대체 내 평판은 어떻게 된 걸까.

...지금까지의 행태를 생각해 보면 아예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꼬맹아, 네가 보기엔 어때.”

“네? 아니, 그야... 푹 쉬고 배도 채우면 아마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뭣하면 제가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 테니... 힘내세요!”

“...아니 그거 말고 도적 말이야. 한 번 기습에 실패했다고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

라디가 머쓱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등 뒤를 돌아보며 읊조렸다.

“...일단 쫓아오는 낌세는 없긴 한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풍향도 하필 맞바람이라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만약 추격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멀리서도 뒤쫓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그 사내의 말과 표정을 봤을 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쯤 추적대가 따라붙었을지도 모르겠네. 말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어?”

“물론이네, 조금 엇나가긴 했어도 길을 찾는 데에는 무리가 없으니 걱정 말게. 그래서 일부러 미행이 어려운 지역으로 우회하며 이동하고 있으니.”

“뾰족한 수가 없을까? 대인전은 네 전문이잖아.”

“흠... 그렇긴 하네만...”

녀석이 힐끗 내 얼굴을 곁눈질하더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 자네... 성장했군. 내가 알던 도란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전투를 벌일 생각부터 했을 텐데 말일세.”

“뭐... 그렇지.”

부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겐 라디가 있으니.

언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던 시절과는 다르다.

말톤은 날 흡족하게 바라보고는 손등으로 지도를툭툭 치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 보면 커다란 벼랑이 나온다네. 원래라면 돌아서 가야 하는 지형이지만, 여기 발텐 길드 측에서 간이 다리를 건설 중이라고 적혀있으니 지금쯤이면 완공됐을 테지. 지리상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간이니 많은 모험가가 모일 테고...”

“도적들도 그곳까진 추격해오진 못할 거라는 말이죠? ...하지만 거긴 너무 먼데...”

“어디 나도 좀 보여줘.”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자 던전 중앙 부근, 지진이 휩쓸고 간 보도블록처럼 깊게 팬 골짜기가 다수 보였다. 하지만 개중 압도적으로 시선을 끄는 건 따로 있었으니­

“...협곡에서 이어지는 이 새까만 공간은 뭐야? 미답사 구역인가...? 아니면 잉크라도 엎질렀거나...”

“미답사 구역이 아니라 폭포일세. 우리는 유적을 통해 지형을 가로질러 와 볼 기회가 없었네만, 던전 2계층은 이 원형 폭포를 중심으로 협곡이 뻗어나간 구조를 취하고 있네. 이 밑은 물이 고여있는 게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검은색으로 표시해둔 걸세.”

“무슨...”

말도 안 된다. 지도에 그려진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름이 최소 수 킬로미터는 된다는 얘긴데...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지구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압살한다.

이쯤 되면 그냥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어째 갈수록 스케일이 점점 커지네. 이 던전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그나저나 꼬맹이 말대로 좀 먼데, 여기까지 도착하기 전에 한번 수를 써야 할 것 같아.”

“아, 도란님. 이 지형... 잘하면 저희가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디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거의 맞닿다시피 한 두 절벽 사이로 난 좁은 협곡.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장소다.

“그래, 여기라면 적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겠네. 말톤, 넌 어떻게 생각해?”

“좋은 의견이군. 계획을 도모하기엔 최적일 테지.”

“그럼... 꼬맹아, 함정 남은 거 있어?”

“네, 철사가 조금 남아있긴 한데... 잠시만요.”

정면돌파만이 능사는 아니다.

감히 내 사냥감을 뺏어가?

투구 아래 드러난 입가에 한없이 비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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