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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70화 (70/375)

〈 70화 〉 길한 예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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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 길한 예감 #4

“이봐,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 새끼들을 쫓아야 해? 추격을 시작한 지도 벌써 두 시간은 지났다고.”

­타각.. 타각...

우든이 대검 모서리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고작 세 놈 잡자고 우리를 불러모으다니... 난 또 무슨 대규모 파티라도 터는 줄 알았네. 천하의 자켄도 이젠 별거 아닌가 봐? 푸른 독사라는 이명이 울겠...”

“입 닥쳐 우든. 다물고 걷기나 해.”

자켄이 덩칫값을 못 하고 꺼드럭대는 동료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누가 도적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성미가 급한 새끼들밖에 없다.

“시발, 이래 놓고 허탕이기만 해. 그땐 네가 미르 선술집에서 쏘는 거다. 여기 전원!”

“...그러던가.”

술값 따위야 얼마든지.

굳이 단원들을 대거 불러모으면서까지 놈들을 추격해야 했냐고? 당연하지.

놈도 그 광경을 직접 봤어야 했다.

칠흑의 단도.

플래시 골렘의 단단한 육체를 무 썰듯이 베어낼 수 있는 무기.

초고열 용광로에 강철을 단야하고 나온 침전물처럼 시꺼먼 무기.

그때는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잘려나간 골렘의 단면이, 내가 목격했던 장면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전까진.

그 사내의 손에서 들통 안의 용수(??)처럼 잔잔하게, 때로는 야공이 불어넣는 숨결처럼 거칠게 변모했던 그 기이한 물성을 지닌 단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비록 낡았을지언정, 흔한 잡철 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광채를 내둘렀던 그 단검을 내가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

자켄은 주먹을 거머쥐며 눈꺼풀 뒤로 아른거리는 그때의 전율을 되뇌었다.

지금은 한낱 도적 신세로 전락했지만, 한때는 날마다 갈탄 공기를 들이마시며 대장일을 수학했던 덕에 금속이 자아내는 철성(??)에는 일가견이 있다.

그런 그이기에 투구의 사내가 지녔던 단검의 정체가 단순한 날붙이가 아닌, 아티팩트라 확신했다.

그믐달 밤하늘처럼 새까만 도신. 심혼을 울리는 검명음. 그걸 아티팩트라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 불러야 하는가?

더욱이 그 투구를 쓴 놈. 눈빛이 심상치 않긴 했지만,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D랭크 모험가쯤 되겠지. 그런 풋내기한텐 과분한 무기다.

반드시 빼앗고야 말겠다.

대규모 도적단 산하, 특수 별동대의 행동대장을 맡은 자켄이 거칠어진 입술을 핥자 그의 동료 우든이 따분한 목소리로 산통을 깼다.

“이봐 자켄, 근데 그 세 놈이 뭐... 인간이라고 했었나?”

“인간 검사랑 메이스를 든 엘프, 로브를 뒤집어쓴 놈은 짐꾼이나 단검잡이쯤 되겠지. ...너도 명색이 대장이면 적어도 표적의 신상 정도는...”

“엘프? 엘프가 메이스를 쓴다고? 그런 소린 처음 듣는데. 걔네는 고귀한 혈통 어쩌구 뺀질거리는 샌님밖에 없어서 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직접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건 원칙에 위반된다나, 화살은 자기의 손을 떠났으니 상관없고.”

“몰라. 애초에 인간하고 같이 다니는 엘프란 것부터 별종이지. 걔넨 어지간해서는 대수림에서 안 나오잖아. 그리고 엘프 중엔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미친놈들이 많다니까 조심해.”

“행! 아무리 엘프님이라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는 한주먹거리지.”

녀석이 보란 듯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힘자랑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식한 놈.

“...방심하지 마. 그 엘프 좀 이상해. 여간내기가 아니야.”

그 귀쟁이 새끼. 수인 여자가 외치기도 전에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었다. 분명 완벽하게 기척을 감췄는데도.

그놈의 서슬 퍼런 녹안이 지켜보지만 않았어도, 투구 사내와 수인 계집이 플래시 골렘에 정신 팔린 틈을 타 순식간에 해치웠을 텐데.

대체 정체가 뭐지?

“야 자켄, 근데 그 엘프... 어때?”

“뭐?”

“흐흐... 엘프라고 하면 죄다 예쁘장한 년들밖에 없잖아. 죽이기 전에 조금은 즐겨도 괜찮지 않겠어? 앞뒤로 잔뜩 가지고 논 뒤에는 노예로 만들어서 암시장에 파는 것도...”

“...남자다.”

“시불, 좋다 말았네.”

우든이 큼지막한 주먹으로 나무둥치를 후려치자 박살 난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크큭... 우든님, 그렇게까지 아쉬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자켄의 부하 한 명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까 대치할 때 얼핏 훔쳐봤는데, 그 로브를 걸친 모험가... 말이 아까울 정도의 미인이었습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키프리테 신전의 사제들이 평범해 보일 정도로요! 우든님의 취향에 비하면 조금 어려 보이긴 하지만 아마 오백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미녀가 아닐지...”

“...그게 정말이야?”

“넵, 물론입죠! 제가 또 안목 하나만큼은 뛰어나잖습니까! 그 저번에 우든님께 달빛 창관 소개해드린 것도 저였고 말이죠. 게다가 며칠 전, 귀족 파티 털었을 때 칼자루에 박혀있던 큼지막한 보석 기억하십니까?”

“아 그거? 그 보석 이름이 사파이어였나 사팔뜨기였나...”

“넵!! 바로 그겁니다!! 눈동자가 파아랗고 감미로운 게 꼭 그 보석을 닮았더라고요!! 아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 그래? 흐흐... 네가 뭘 좀 아네! 자켄, 그런 고오급 정보가 있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설마 혼자서만 즐기려고 한 거 아니야? 그래도 제일 먼저 맛보는 건 나다!”

‘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할 때까지 괴롭히는 게 좋단 말이지’ 우든이 불쾌한 소리를 지껄이며 두꺼운 손바닥을 맞비볐다. 언뜻 올려다본 그의 눈동자는 추잡한 육욕에 점철된 색채로 번들거렸다.

아무렴. 자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담담하게 읊조렸다.

“정신 차려 우든. 두목이 저번에 한 말 못 들었어? 곧 거사가 코앞인데 여자 때문에 일을 망쳤다간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발. 두목 얘긴 꺼내지도 마. 그 인간이 했던 짓거리를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끼쳐. 어떻게 사람이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우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그분은 어중이떠중이들하곤 차원이 다르니까.

그 남자가 누군가한테 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두려움과 값싼 색욕을 저울질하던 우든의 천칭은 끝끝내 오른쪽으로 기울고 말았는지, 그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야, 자켄. 그래도 조금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살짝만.. 살짝 맛만 보자. 요 며칠간 너무 조용히 지냈잖아. 갖고 놀던 장난감도 진작에 망가져서 버렸고...”

“....마음대로 하든가.”

“좋았어!!”

우든이 대검을 풍차처럼 돌리며 반색했다.

뭐,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겐 여자 따위 알 바 아니니까.

나는 그 단검만 찾으면 된다. 어쩌면 우든이 그 남자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놈이 계집에 정신 팔린 사이 단검을 빼돌리면 몫을 나눌 필요도 없어지니까. 바라 못지않은 상황.

우든에게 귀띔했던 부하도 그 점을 노렸는지 은근슬쩍 내게 눈짓해왔다. 기특한 새끼.

“...자켄님, 한데 놈들을 따라잡기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 슬슬 보일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래, 이제 코앞이야. 곧 협곡이 나온다.”

멍청한 새끼들.

설마 우리에게 추적 아티팩트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겠지?

지금쯤이면 지친 다리를 주무르며 아무것도 모르고 담소나 나누고 있을 게 틀림없다.

절호의 기회.

사냥할 시간이다.

“좋아! 여기선 이 우든님이 선두에 나서서 놈들의 모가지를 썰어오마!! 여자는 내가 먼저 가지고 놀 테니 탐나거든 내 뒤로 줄 서!”

““옙!!””

“가자아!! 똘추 새끼들아­!!!”

“얼마만의 약탈이냐!!”

우든이 대검을 탕탕 두드리며 앞으로 나서자 그의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뒤탈 따윈 걱정도 하지 않는 모습. 기척을 숨기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우든의 저열한 욕망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팽!

“커어억?!!”

“우, 우, 우든님!?!”

“우... 우든 대장이 당했다!!!”

치솟는 피보라. 천천히 낙하하는 머리통. 역병처럼 번져나가는 동요.

우든의 목이 거짓말처럼 떨어져나갔다.

실처럼 가느다란 철사를 타고 흘러내린 그의 핏방울이 진주알처럼 반짝인다.

“저, 적습이다!! 모두 습격에 대비해!!!”

“씨팔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제기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적의 기척을 놓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모두 자리에 멈...! 크아아악!!”

“꺼흐흑?!!”

이번엔 느닷없이 후방에서 단말마가 터져나왔다.

“씨발 뭣들 하는 거야!! 다들 섣불리 움직이지 마!!! 진형을 유지해!!!”

“소용없습니다 자켄님!!! 바위틈에서 무언가가... 끄어어어억!!!”

“사방에서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희 다 죽어요!!!”

“뭐라고!?!”

설마 이곳에 숨어서 매복하고 있었던 건가?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이미 수십 번도 더 확인했단 말이다!!

재빨리 허리춤에서 나침반을 꺼내 보았지만, 화살표는 여전히 전방을 향하고 있다. 흔들어도 마찬가지. 추적 아티팩트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하면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눈앞의 사태를 부정해 봐도, 실상은 가혹한 참사가 되어 두 안구에 현실을 때려박았다.

“자켄님...! 어서 여기서 벗어나...!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

처절한 비명,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 철사가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

부하 한 놈이 달려오다 말고 눈알에 볼트가 박혔다. 유리체가 쪼개지며 난 섬뜩한 소음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죽을 만큼 아플지언정 치명상은 아닐 텐데도, 놈은 고통스레 제 안구를 후벼 파다가 이내 피거품을 내뿜으며 절명했다.

“씨발!!!”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다. 물이 끓어올라 넘치는 주전자처럼,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걸 거부했다.

어떻게 고작 세 명이 이런 맹공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추가 일행이 있던 건가. 우리들이 공격해올 걸 알고 있었나.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찢겨나가는 이 은실은 또 뭐고. 게다가 아티팩트는 왜 작동을...

­타라락!

“미친!!!”

아티팩트에는 문제가 없다.

연거푸 나침반을 확인한 자켄이 볼트가 튀어나왔던 바위틈을 미친 듯이 헤집기 시작했다. 필시 이 안에 그 간악한 사내가 숨어있으리라.

하지만 곧 마주한 광경은 그의 사고를 두터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이, 이건...”

나무줄기. 넝쿨 쪼가리. 동물의 힘줄.

볼품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원시적인 트랩.

이딴 쓰레기 같은 소재로 이렇게나 정교한 장치를...?

쫓기는 와중,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 트랩을 설계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개소리.

직접 겪지 못했더라면 술자리의 지독한 농담쯤으로나 여겼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참사가, 지금까지 이륙한 자켄의 상식을 송두리째 배신했다.

일시에 돋아오른 소름이 전신을 희롱했다.

“투구!! 설마 네 놈 짓이냐?!! .....다닐?”

“자켄님!!! 크읏...!”

부하 한 놈이 급하게 달려오다 철실에 허벅지를 베였다. 그것이 방아쇠였는지 도처에서 금속성이 공명하듯 터져나왔다. 무수하게 번뜩이는 은빛 실선. 날카로운 은사(??)가 시야를 종횡무진으로 가로질렀다.

도적들이 제각각 무기를 들어올려 막아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한낱 인간의 동체 시력으로는 똬리를 뜬 뱀처럼 웅크렸던 철사의 탄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들은 종아리나 옆구리, 허벅지 따위가 꿰뚫려 고통을 호소했다.

이어 철실에 스친 사내들이 픽픽 쓰러져나갔다.

독.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다닐!! 조금만 기다려!! 당장 해독제를...!!”

“끄루르륵...! 끅..! 끄륵..”

“다, 다닐...?”

자켄이 황급히 부하의 안색을 살폈지만, 그의 호흡은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멎어있었다. 이어 신체 내부가 녹아내렸는지 죽처럼 되직한 액체가 칠공에서 흘러내려 그에 맞닿은 바위를 부글부글 융해시켰다.

“이, 이건 대체...!”

화들짝 손을 떼었다. 이만큼 끔찍한 맹독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동시에 절망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런 변고라니. 욕심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공포에 몸서리친 자켄이 부하의 시신을 내려놓고 뒷걸음질쳤다. 허나 그는 등 뒤 미늘 갑옷에 느껴지는 팽팽한 장력으로 하여금 이미 철사가 빼곡하게 주위를 뒤덮은 후라는 걸 깨달았다.

우든이 부주의해서 함정에 걸린 게 아니다.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 협곡 전체가 덫이었던 것이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우리는 자근자근 씹어먹힐 운명이었다.

이가 맞부딪히는 소음이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두려움에 배어 나오는 눈물이 시계를 어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런 풍경 속에서도 산란하는 실의 빛무리는 너무나 잔인해서

그리고 너무나 덤덤하고 묵묵해서

그래서 아름다웠다.

야속할 정도로.

“자켄님...”

시야 저편에서 자켄이 아끼던 마지막 심복이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봐왔다. 푸욱. 불시에 날아든 볼트가 부하의 뺨에 박혔다. 그는 미약한 폐색음과 함께 허물어졌지만, 몇 번 호흡이 흙먼지를 들썩이기도 전에 그 경련 또한 자연히 멎어들었다.

종막.

지금 이 순간, 자켄은 상실로 말미암은 절규를 토해내며 절절히 실감했다.

스무 명이 넘는 대규모 도적단이 일개 파티에게 궤멸했다는 것을.

자신의 과욕이 이 모든 이들을 죽음 너머로 떠밀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 모든 원흉이 단 한 명의 수인 소녀와 흑발 사내의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자켄은 알 리 없었다.

*

“흐응...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함정이 제대로 먹혀들었나 봐요.”

“오 정말? 잘했다! 역시 우리 꼬맹이!! 대단한걸?”

나는 녀석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으며 화색했다.

좁은 길목으로 유인한 게 신의 한 수였지.

라디를 믿고 맡겨봤는데 녀석은 불과 이십 분도 안 돼서 보란 듯이 완벽하게 트랩을 설치해 보였다. 그야말로 모험가 선배로서의 관록이 느껴지는 모습.

실수로라도 함정을 발동시키면 안 된다는 연유로 나와 말톤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고작 도마뱀 힘줄을 불에 달구어 나뭇가지에 접착시킨 게 고작이었으니.

“좋았어! 진짜 진짜 잘했다 꼬맹아!! 상이라도 내줄까? 뭐든지 말만 해봐, 오늘은 내가 다 들어줄게!”

“정말요? 그럼 불침번 때 저 대신...”

“크흠흠... 아 말톤, 그러고 보니까.. 이전에...”

“말 돌리지 마세요.”

“아야야...!”

얼얼한 볼따구를 매만지며 쳐다보자 라디가 새치름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음... 그러면... 조금 생각해볼 테니까 이따가 말해도 돼요?”

“그래 알았어, 얼마든지. 근데 아까 그 함정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트랩을 완성하고 협곡을 떠나오기 전, 시험 삼아 라디가 함정 하나를 발동해봤었는데 철사랑 볼트 수십 발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급조한 결과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준.

“별거 아니에요. 트랩마다 연결 고리를 만들어서 하나가 발동되면 다른 덫도 순차적으로 발동되게 한 게 전부예요. 겸사겸사 독도 발라놓고요. 도마뱀의 부산물을 모아두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네요. 파충류 계열 소재가 탄력이 좋아서 이런 함정을 만들 때 유용하거든요.”

라디가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늘어놓았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가 모험가로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했을지 여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라디의 함정은 단연코 독보적인 수준이라네. 나도 꽤 오랜 세월 모험가를 했다고 자부하지만, 라디만큼 정교하고 은밀하게 덫을 설치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지.”

“오, 대단한데? 말톤이 저렇게까지 극찬할 정도면.. 근데 그럼 그 나머지 한 명은 누군데?”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네.”

“...뭔데 갑자기. 궁금해지게.”

“그러게요... 저도 관심이 가네요. 꼭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로.”

“궁금해하지 말게나. 어차피 볼 일 없을 테니.”

말톤이 이 화제는 여기까지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본성.

“꼬맹아! 저거 붙잡아! 사람이 말을 하다 말면 열 받는 거 몰라?! 조동아리 딱 대!”

“에잉! 쯧...! 알 필요 없다지 않은가! 이거 놓게!!”

“어어! 저, 점마 도망간다!!”

“반드시 불게 만들겠어요!”

창졸간 황량한 바위산에 때아닌 추격극이 펼쳐졌다.

하지만ㅡ

“...도란님? 무슨 일 있어요...?”

돌연 불시에 멈춰선 내게 라디가 의문을 표하자­

“...아무것도 아니야. 내 착각이었나 봐.”

나는 거짓을 고했다.

투구 속 흑안에는 하늘을 맴도는 까마귀 무리가 비치고 있었다.

원인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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