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길한 예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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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 길한 예감 #5
콰르르르!!
쿠드드드득!!
“....정말 보면 볼수록 기가 차네.. 무슨 무기가 그래요?”
“흐흐... 이게 다 욕심 없이 청렴하게 사니까 복도 오고 그러는 거지 뭐.”
“청렴하기는 개뿔... 매일 밤이면 텐트 중앙선을 넘어서 어떻게든 붙어 보려고 별 짓거리 다 하는 주제에...”
“....흠흠.”
어깨에 묻은 돌가루를 털어내자 플래시 골렘의 잔해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
능숙한 손길로 이마에 박힌 핵을 파냈다. 이 짓도 열두 번 넘게 반복하고 있으니 나름대로 요령도 생겼다.
“도란, 이것도 맡아 줄 수 있겠나?”
말톤이 사지가 분해된 채 누워있는 플래시 골렘을 가리켰다. 어찌나 메이스에 흠씬 두들겨 맞았는지 성한 곳을 찾기가 힘들 지경.
“그래, 잠깐만... 됐다! 오, 이놈은 꽤 큰데?”
적출해낸 핵을 파우치에 넣은 뒤 녀석이 쓰러뜨린 골렘에게 다가갔다. 화강암 계열 석재로 이루어진 몸체는 상당히 견고했으나, 단도의 날끝을 가져다 대자 수술용 메스처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단도만 빌려주어도 됐을 테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처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도란, 내 다시 한번 시도해보겠네.”
“또? 나야 뭐 상관없긴 하지만... 자.”
“고맙네.”
조심히 단도의 날 끝을 잡고 건네주자 말톤이 크게 심호흡하더니 칼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어서
파지직!!
“....!!!”
그가 뜨거운 화로에 덴 것처럼 난폭하게 단도를 내팽개쳤다.
“거 봐.”
“...어처구니가 없군... 도란, 자네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겐가?”
“그래, 몇 번이나 물어봐도 똑같다니까. ...꼬맹아, 너도 한 번 해볼래?”
“....전 사양할게요.”
검은 단도.
이 녀석은 어째서인지 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까다로운 명마가 기수를 가리듯 타인의 손이 닿으면 검은 스파크를 피워올렸다.
말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가 잔뜩 난 전기 뱀장어 유체를 피부에 비볐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하니. 어째서 녀석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봐. 너는 다를 수도 있잖아.”
“...그럼 살짝만, 아주 살짝만 만져 볼게요.”
라디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쭈뼛쭈뼛 다가와 검지를 뻗었다.
“꺄앗!!”
하지만 곧바로 감전된 참새처럼 화들짝 뛰쳐오르며 물러났다.
뻣뻣하게 솟아오른 꼬리라니... 엄청 귀엽다.
“정말...! 도란님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 거예요?”
“참고 자시고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라디가 바들바들 떨며 물어왔지만, 나는 태연하게 손가락 사이로 단도를 빙글빙글 돌려보였다.
정말 아무런 통증도 없다.
오히려 이 단도를 쥐고 전투에 임할 때면 평소보다 감각이 예리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참... 신묘한 일이로군. 사용자를 가리는 무기라... 상당히 드문 경우일세.”
“...어쨌든 이걸로 이 단검에도 뭔가가 있다는 건 확실해졌네요. 유적에서 발견했으니 여왕이 쓰던 무기일까요? 고대 아티팩트를 두 개나 찾아내다니... 복에 겨웠어요 아주...”
“뭐, 대신 팔지 못한다는 게 흠이지만 말야.”
사용자가 한정된 무기일 경우 아무리 고대 유물이라 하더라도 제값을 받고 팔기 어렵다. 상인이 터무니없게 가격을 후려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보자니 차라리 내가 쓰고 말지.
잘 찾아보면 착용 제한을 해제하는 방법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큰 도시의 감정사한테라도 가져가기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알 도리가 없다.
지금은 그저 저주받은 물건이 아니기만을 빌 뿐.
적당한 나무토막 두 개를 가죽끈으로 동여매어 만든 임시 칼집에 단검을 갈무리하자, 라디가 까치발을 딛고 내 어깨에 배낭을 얹어주며 읊조렸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야영 준비할 때 되지 않았어요?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 같은데...”
“마침 그 얘길 하려고 했네. 조금만 더 걸으면 커다란 골짜기가 나온다고 적혀 있군. 오늘은 거기서 노숙하도록 하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한 장소에 거처를 마련하는 게 좋겠어요. 전멸시키는 걸 전제로 함정을 설치하긴 했지만, 아직 잔당이 한둘쯤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도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물론, 말톤이 그 점을 안배하지 않았을 리 없다.
녀석을 따라 한 시간 남짓을 더 나아가자 깊은 협곡 바닥에 도달했다.
아니, 이걸 '협곡'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었다.
좌우로 높게 솟은 절벽 간의 거리가 적어도 수 킬로미터는 넘어 보였으니까.
“....절경이네. 꼭 거인들의 세계에 흘러든 것만 같아.”
“그러게요... 인간이 파 놓은 해자를 걷는 개미의 심정이 이러지 않을까요?”
“비유 한번 잘했다. 딱 그거네.”
노쇠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아로새겨진 상흔과도 닮았지만, 대지의 거대한 균열 밑바닥에 위치한 대협곡은 시야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만큼 웅장했다.
“이 장소라면 도적들이 습격해와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걸세.”
“확실히... 여기라면 안심해도 되겠네.”
말이 협곡이지, 인간의 식견을 기준으론 평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건너편에 보이는 절벽이 그저 배경으로만 보일 정도니.
물론 이곳 역시 도적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었으나, 좁은 바위산 중턱에서 위아래로 협공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유리창에 낀 손자국처럼 시야를 좀먹던 안개가 없으니 놈들의 접근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절벽 아래에 난 적당한 바위굴을 찾아 들어갔다.
“오, 안쪽은 꽤 넓은데?”
“그러게요. 이 정도면 나름 쾌적하게 잘 수 있겠어요. 마물이 이용한 흔적도 없는 것 같고요.”
“너무 늦어지기 전에 괜찮은 장소를 찾아서 다행이군. 그럼 나는 모닥불을 피울 땔감을 구해 올 테니 자네들은 텐트라도 치고 있게.”
“잠깐만, 모닥불 피워도 되는 거 맞아? 위험하지 않을까?”
불빛을 보고 도적이 몰려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하지만 말톤은 시원스레 웃으며 턱짓했다.
“괜찮을 걸세. 밖을 보게나.”
고개를 빼꼼 내밀어 살펴보자 어둑어둑해진 협곡 곳곳에서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옛 조선 시대 어부들이 초롱에 불을 지펴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공명하듯 저마다 불씨를 피워올리는 사람들.
저 자그마한 불빛 하나에 얼마나 많은 웃음, 안도, 애환이 담겨있을까.
“전부 모험가들일세. 다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겠지. 던전을 횡단하려면 필시 이 협곡을 가로질러야 하니 말이네.”
“그러면 다행이고, 우리 하나쯤은 티도 안 나겠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말톤. 어디 이상한 몬스터에 정신 팔려서 딴 길로 새지 말고.”
“자네들이야말로 사고 치지 말게나. 아무리 인간들의 정사에 관심이 없는 나라고 한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 그것도 자네들을 직관하는 건... 조금 민망하니 말일세.”
“알고 있으면 최대한 천천히 와. 기왕 가는 거 멱도 감고, 한숨 쉬고, 수통에 물도 좀 채우고. 보니까 근처에 작은 개울이 있던데 가능한 한 느긋하게... 아얏!”
“으이구, 그래도 거기선 부정해야죠! 진짜 요즘 기고만장해져가지곤... 말톤님도 걱정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말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메이스를 짊어지고 바위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둘만 남은 우리는 동굴 한구석에 등불을 피우고 텐트를 펼칠 자리를 선정했다. 아무리 천장이 막혀있다고 하더라도 벌레들과 동침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천막은 필수인바, 지지대에 끈을 묶다 문뜩 고개를 드니 다갈색 방수포 너머로 꼼꼼하게 손을 놀리는 라디가 눈에 들어왔다.
“...꼬맹아.”
“안 돼요.”
“.....”
“안 돼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항상 레퍼토리가 너무 뻔하잖아요. 어디 들어나 보죠. 악어 기름도 미궁에서 다 소진했고, 털 빚어준다는 핑계도 저번에 써먹었는데.”
“.....”
그 말대로, 이젠 무슨 구실을 대서 접근할지 감도 안 잡힌다.
레더아머도 혼자서 갈아입을 수 있다고 하고, 실수를 빙자해 스킨쉽을 하는 것도 막혔고, 아예 ‘거 나도 가슴 좀 만져 보자!’ 전략도 이미 수차례 써먹었으니.
그렇다고 모처럼 둘만 남은 이 기회를 쌩으로 날려버리긴 너무 아쉬운데...
“그럼 전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엿보지 마세요.”
“...엿보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요? 어떻게 될까요?”
키득. 의미심장한 웃음 조각을 흘린 라디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쫄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아쉬운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지만...
‘미친...!’
녀석이 등불을 가지고 들어간 탓에 천막 너머로 가녀린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비쳐 보였다.
곧이어 들려오는ㅡ
“....!!”
나는 모든 청력을 쏟아부었다. 전투할 때보다도 더. 한없이 눈을 크게 떴다.
사르륵 사르륵. 천이 스치는 소리. 한 풀 한 풀 벗겨지는 윤곽.
라디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두꺼운 레더아머를 내려놓더니,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 광경을 목도하자 메마른 목구멍 아래로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얄팍한 천 한 장 뒤에서 펼쳐지고 있을 광경을 상상하니 애간장이 타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나체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 한구석이 끓어올랐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완연하게 피어나는 웃음은 또 얼마나 오롯한가.
천막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허리에 손을 짚었다. 풀썩 발목에 흘러내린 옷가지가 미약한 연풍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동요를 머금은 호롱불은 자그마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여체를 전부 집어삼킬 듯 탐욕스럽게 날뛰기 시작한다.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윤곽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비추며 작은 매력 하나까지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더 이상 그 광경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기에. 이상을 좇다가 추락해버린 이카로스처럼 이 비상하는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푸르른 바다와도 같은 그 눈망울에 그만 곤두박질해버릴 것만 같아.
그만 고개를 돌렸다.
대신 한숨을 내쉬며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이 도래하자 별이 피어났다.
눈부신 광채를 쏟아내었던 이끼들이 쉴 때가 되면, 모험가들이 그들을 대신해 모닥불을 피워올렸다. 인간들이 반딧불이를 흉내 내어 구애의 불꽃을 쏘아 올리면 이끼도 그에 호응해 간직해두었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한다.
그게 던전에도 별이 뜨는 이유다.
그렇게 하늘에 떠오른 별을 세다 보면.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또 하루가 밝고, 사람들은 같은 일상을 준비한다.
흡사 이끼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상이나, 그들이나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하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뭐란 말인가.
나는 별빛들이 자아내는 향수에 잠겨 과거를 반추했다.
과거.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약 한 해 동안 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사냥하고, 살기 위해 잠을 청했다.
즐거움 없이 웃고, 본능대로 움직이고, 서글퍼서 생각을 죽였다.
진흙탕을 뒹굴고, 떨어지는 낙엽 위에 몸을 뉘고, 달을 염원하여 우는 삶.
웃다 울고 지쳐서 잠들고, 되는대로 뒤척이고, 서늘한 새벽녘 공기에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삶.
지구의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던 내가.
모자람 없이 살아가다 한낱 한순간에 괴물 한가운데 파묻힌 내가.
하지만 한번 거머쥐었던 사람의 온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내가 있었기에.
나는 피와 살점의 구렁텅이에서 애처롭게 부르짖으며 악착같이 기어올랐다.
다시 이전처럼 살기 위해.
패악의 고리로부터 잃어버린 망혼을 되찾기 위해.
허나, 소년을 기다리던 건, 따뜻한 환대가 아닌 차가운 멸시의 시선이었다.
어딜 가더라도 내 머리칼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어딜 가더라도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심장을 도려내었다.
어딜 가더라도 악마의 자식이라는 이명이 꼬리표처럼 뒤따랐다.
나는 절망했고, 앞으로 나아갈 의지, 이유를 잃었다.
뭍 위로 내던져진 금붕어처럼, 이미 마음 한구석은 닳을 대로 닳아버렸고, 뚫린 구멍에서 찐득한 체액을 흘리며 메말라갔다.
괴로웠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고, 쓸쓸했다.
하지만 그랬던 내게도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리엘, 말톤, 카렌 등.
그리고 비로소ㅡ
라디.
그녀와 만났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고 눈을 뜨자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은 동굴 내부가 보였다.
불이 꺼진 것에 의아해하며 몸을 돌리려던 차, 등 뒤에서 따스한 손바닥이 뻗어왔다.
익숙한 크기, 그녀의 체취, 사랑스러운 그녀의 온기.
눈을 덮어 내 모든 의식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라디가 그곳에 있었다.
“....꼬맹아..?”
“쉬잇...”
그랬던 그녀가 날 텐트 안으로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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