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72화 (72/375)

〈 72화 〉 길한 예감 #6

* * *

[072] 길한 예감 #6

불이 꺼진 텐트 안은 몹시도 어두웠다.

홍채에 아른거리는 별하늘의 잔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관람객들이 떠나고 커튼이 드리운 공연장처럼.

그랬기에 더욱 현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막 안에 가득한 그녀의 체취를. 코끝에 선연한 달콤한 향기를. 귓가에 와닿는 눅진한 음성을.

“늦었네요.”

등 뒤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보라고 한 건데 왜 안 보고 있어요.”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 노골적인 속뜻.

그 요염한 음색에 나는­

“...참을 수가 있어야지.”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라디는 쿡쿡 웃음을 흘리고는 날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제가 원망스럽지는 않으세요?”

“....뭐가.”

“그냥... 전부 다. 도란님도 저한테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을 텐데 꾹 참고 있잖아요.”

“.....”

솔직히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라니. 하물며 그녀 역시 날 사랑하는데.

던전이 아니라 베라스틴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냥 충동에 몸을 맡겨 덮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를 아껴주고 싶었다.

라디 또한 어떤 심정인지 알기에. 다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몸을 배려했기에.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소중한 첫 경험을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에서 맞이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니, 적어도 지붕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기한을 미뤄왔었다.

“난 괜찮아. 너랑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 더 바랄 것도 없어.”

“그래요...?”

“그래, 그러니 조급해서 배려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고작 며칠이다. 던전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다정한 미소를 머금으며 라디의 팔뚝을 쓸어내리려던 차­

“...근데 그러면 여기는 왜 이렇게 잔뜩 화나셨어요.”

“윽...?!”

그녀의 손이 불쑥 미끄러졌다. 웃옷 위를 빠르게 훑으며 내려가는 손.

그 불청객은 내 물건 직전에서야 아슬아슬하게 멈춰섰다. 당장에라도 문을 두드릴 듯이.

“너, 너...! 이게 보여?”

“조금은요. 쥐 수인은 밤눈이 밝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인간족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적어도 지금 도란님이 엄청나게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

어쩐지.

야밤에 수작을 부릴 때면 귀신같이 알아챘었지.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깨닫고 나자 머리를 강타당한 기분이다. 또 쿡쿡 장난기 다분한 웃음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네? 아랫도리를 이렇게 꼿꼿이 세워놓고선... 말이랑 행동이랑 너무 다르잖아요. 멋진 대사를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생리 현상이야.”

텐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옅은 땀에 뒤섞인 그녀의 녹진한 체취를 맡았을 때부터 이미 포화 상태였다.

라디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슬그머니 내 옷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꼬맹아?”

“잠시 이대로 있어 봐요.”

살랑.

“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살짝 벌어진 상의 아래로 무언가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부드러운 감촉이 배에 와닿았다.

그 물체는 마치 연인의 입속을 탐닉하는 설근처럼 서서히 허리로 향해 그 표면적을 늘려나갔다.

“꼬맹... 아?”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안 해 줄 거예요.”

라디가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두워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눈매가 명백한 호선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에 그치지 않고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연인처럼, 뜨겁게.

나는 그제야 그 말캉말캉한 촉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꼬리.

사실, 그녀의 꼬리가 휘감은 복부는 성감대가 아니거니와 민감한 부위조차 아니다.

감각에는 개인차가 있는 만큼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난 아니다.

아무리 배를 문질러봤자 간지러울 뿐이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가.

소위 모범생처럼 음행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그녀다.

아니, 지금까지 아예 여지를 내주지 않은 건 아니었고, 라디의 내면에도 따끔한 성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지만, 던전 안이라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도 이제껏 과격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거고.

한데 지금 이 순간 녀석이 먼저 울타리를 걷어찬 것이다.

그것도 그토록 건드리는 것조차 불허하던 꼬리로.

어떠한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노골적인 태도가 욕정에 불을 지폈다. 이어 쿡 쿡 야릇하게 배를 찔러오는 첨단, 자칫 취할 정도로 공기 중에 팽배한 그녀의 향기와 솜털을 간질이는 숨결. 또한ㅡ

“더 굉장한 것도 해 드릴 수 있어요.”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는 부추김은 내 자제력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꺄앗...♡”

“감히 건드렸겠다... 각오는 돼 있겠지?”

“가, 간지러워요..!”

불시에 뒤돌아 그녀를 깔아눕혔다. 콧등을 간질이던 체취가 명백한 형태와 질감을 갖추어 배 아래 꿈틀거렸다. 손을 더듬어 라디를 끌어안자 맑은 웃음이 터져나왔고, 녀석 또한 내 뒤통수를 잡아당겨 가슴께에 묻었다.

한 손으로 바닥을 받쳤다. 나머지 팔을 거칠게 움직였다. 스륵.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그녀의 옷자락 사이로 사라졌다. 라디는 저항하지 않았다. 되려 제 발등을 내 종아리 얽어오며 화답했다. 암묵적 동의로 받아들인 나는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한 팔 안에 담길 정도로 작은 몸.

가녀린 쇄골에 얼굴을 묻자 그녀가 날 멈춰세웠다.

“잠깐...! 잠깐만요 도란님!”

“...왜.”

“그... 아직 안 씻었으니까 조금...”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냥 만지는 거라면 괜찮으으읏?!”

살풋. 목 아래를 핥자 격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오후 내내 땀을 흘린 걸 신경 쓰는 걸까? 꽃사슴의 목덜미를 무는 사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꾸밈없이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몸짓이 장작으로 변모해 애욕을 배가시켰다.

혀끝에 느껴지는 미약한 짠맛이 그 위에 성욕을 더했다. 예민해진 청각이 희미한 신음을 긁어모아 잔잔한 교황곡으로 바꾸었다. 뜨거운 체온으로 하여금 서로의 몸을 녹이고, 날 것 그대로의 뜬숨이 가식을 한 꺼풀 벗겨내면,

나와 너. 어둠 속에서 찬연히 펼쳐지는 오케스트라에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이 솔직한 웃음을 자아내고, 매끈한 피부가 코끝을 스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옷가지를 풀어내고,

망해(??)를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가까워져 가는 입술과 입술에 노를 저어

감파란 충동의 파랑(??)에 몸을 실어

흐르는 물결에 소리를 감추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려 하면ㅡ

­저벅... 저벅....

“......”

“.....”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나와, 벌겋게 상기된 뺨으로 아무 일 없었노라 전하는 거지.

*

­.....

단잠을 청하던 내 뺨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미약한 손길이 내 발목을 흔들어 깨웠다.

“...도란.”

“으... 말톤...?”

“도란, 일어나게. 자네 차례일세.”

“..벌써...? 알았어... 잠깐만....”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거뭇한 음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옆에서 곤히 잠든 라디를 한 번 바라본 다음,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천막 밖으로 나왔다.

말톤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특이사항이랄 건 없었네. 날씨가 추우니 감기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그럼 이만 교대하도록 하지.”

“....그래, 수고했어. 잘 자.”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선선한 공기가 폐부로 들이차자 잠기운이 조금 달아났다.

차가운 밤공기에 두어 번 재채기를 한 뒤, 바위굴 밖으로 나와 멍하니 협곡을 응시하자 요요한 전경이 눈동자에 내비쳤다.

“....멋있네.”

빛이 지고 난 후의 던전은 가슴이 먹먹할 만큼 아름답다.

비록 휘황한 광채는 인식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검은 암막이 드리운 하늘에서는 아련한 잔향이 간헐적으로 반짝인다.

이에 질세라 지상에서도 다채로운 발광 식물과 곤충이 기어나와 협곡을 예쁘게 수놓는다.

홀연히 불어온 산풍이 반딧불 섞인 취운을 퍼트리면, 야트막한 바위굴에 연옥빛 잔물결이 드리웠다.

나는 천천히 담요를 끌어안고 바위에 등을 기댔다.

느릿하게 상공으로 손을 뻗었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며 흔들거리는 형형색색의 불빛을 거머쥐고자.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붙잡고자.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푸른색 나비 한 마리가 손가락 위에 앉았다.

나비는 잠시 머물다가 쌀쌀한 밤공기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

모닥불을 위안 삼아 적적하게 수통을 기울이고 있자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라디가 동굴 입구에 기대고 서 있었다.

“.....깼어?”

“.....”

그녀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살짝 물러나 자리를 내어주자 녀석이 내 바로 옆에 앉았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는 거리. 나는 그녀와 담요를 나누어 덮었다.

장난기 다분한 별들이 고아한 옆얼굴에 수런수런 물결 무늬를 수놓았다.

얼음을 타고 흐르는 조명처럼, 신비로운 광채가 남실거리는 피부.

“...물 마실래?”

“.....”

“...조금 춥지?”

땔감을 조금 더 넣자 불길이 잔잔하게 타올랐다.

모닥불의 따스함 외에도 또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라디가 말없이 내 어깨에 기대있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희고 고운 뺨에 드리워진 잿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어주었다.

그녀는 그 손길이 그리웠던 것처럼 체중을 실었다.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라디가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슬픈... 이야기는 싫어하세요...?”

폭풍우가 치고 난 뒤의 바다처럼, 쪽빛 눈동자에는 서글픈 색채가 너울거렸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등을 상냥하게 쓸어내렸다.

라디는 부드럽게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천천히ㅡ.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때의 꿈을 꿨어요.”

“제가 다섯 살 생일이 되던 날이었어요.”

“잊은 날은 하루도 없지만, 떠올린 날도 없는 그 날.”

“제 부모님은 도적으로 분장한 기사들한테 돌아가셨어요.”

“...저를 지키려다가 죽었죠.”

“절대로 용서 못 해요.”

“절대로.”

뺨에 난 붉은 페인팅.

그 핏빛 가시밭길에 간직한 결의.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

모닥불조차 싸늘하게 얼려버린 차가운 증오.

청회색 먹구름이 일렁이는 두 눈에 드리웠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