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76화 (76/375)

〈 76화 〉 전조 #1

* * *

[076] 전조 #1

“.....”

“....”

“......”

말톤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왔다.

“....자네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

뜨끔!

“아, 아니...! 가,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생뚱맞게....”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왜 그렇게 긴장하나 도란? 정말로 무슨...”

“...아무 일도 없었어.”

­정적.

““......””

불편한 공기가 이어졌다.

사실 무슨 일이 좀 있긴 했다.

어젯밤 나와 라디는 함께 있었으니까.

그녀의 아픈 과거사를 듣고,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손을 맞잡고 있었다.

....손만 잡고 있었냐고?

“...자고 일어나니 자네들의 옷이 바뀌어있더군. 내 담요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라디는 아까부터 묘하게 꼼지락거리는 눈치에.. 도란 자네는 간밤에 배낭에서 뭘 꺼내 간 겐가...?”

“......”

“뭐라고 말 좀 해보시게. 아니면 혹시... 싸우기라도 했나? 괜찮네, 본디 함께 지내다 보면 다툴 수도 있고 그런 법이니.”

“...그런 거 아니야.”

라디와 내가 다툰다니.. 당치도 않다.

아니, 어쩌면 살짝 비슷한 걸 하긴 했지만.

“...야, 너도 좀 뭐라 말 좀 해봐!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쟤가 오해하잖아.”

라디에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녀석은 얼굴을 붉힌 채 침묵으로 일관할 뿐, 도무지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나 종용해봐도 마찬가지. 그녀가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갔다.

“설마... 강제로 덮친 겐가...? 내 누누이 경고했거늘!! 도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이렇게.

“그럴 리가 있겠냐?!! 내가 왜 그딴 짓을 해!?!”

“...실언이었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뭔가?”

“그러니까 그게...”

변명을 하더라도 당사자가 입을 열어야 말을 맞추던가 하지...

갑갑하게 쳐다보아도 애꿎은 라디의 배낭끈만 베베 꼬일 뿐, 결국 마지못해 말톤에게 털어놓으려던 차, 툭툭 허리춤에 미약한 감촉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그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왜, 목말라?”

­도리도리.

“잠깐 쉬었다 가자고?”

­도리도리...!

“그렇다면... 말하지 말라고...?”

­끄덕.

“......”

푹 눌러쓴 후드 탓에 표정을 살필 수는 없지만... 잔뜩 말려올라간 꼬리를 보니 대충 예상이 갔다.

새삼스럽지만, 이젠 꼬리만 보고도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는 사이가 됐구나.

“....자네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그래,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불침번 때 잠깐 이야기 좀 나눈 게 전부야. ...그보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어? 오늘 안에 도착한다고 했지?”

“흐음...”

말톤은 영 찝찝한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끝내 머리를 긁적이며 지도를 펼쳤다.

“...저번에 말했던 폭포 기억하는가? 던전 2층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원형 폭포 말일세. 지도에 의하면 이 협곡과 이어져 있다고 하더군. 이대로 순조롭게 이동한다면 점심 즈음에는 당도할 수 있을 걸세.”

“그래? 그럼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네. 골렘의 핵도 얻었겠다, 이제 당분간 이 근처로는 얼씬도 말아야지.”

폭포를 건너면 이 계층을 벗어날 수 있다. 그 뒤로는 왔던 길을 거슬러 던전을 빠져나가면 되겠지. 유적에서 발견했던 술단지를 경매에 부치면 베라스틴 외각에 작은 집 하나 정돈 마련할 수 있을 터.

그때가 되면 라디와 함께 살 수 있다.

“...꼬맹아.”

“.....”

“손 이리 줘.”

“....”

감파란 두 눈동자가 날 마주 보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살짝 망설이더니 수줍게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곤 눈길로 내게 고했다.

‘책임지세요.’ 라고.

“.....”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겠다는 뜻을 담아 움켜쥐자 그녀가 배시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상기된 뺨. 윤기가 흐르는 피부. 시냇물이 반짝이는 눈동자.

부끄러우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좋아?”

­끄덕.

라디가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며 발그레 웃어보였다.

이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은근슬쩍 깍지를 끼고 제 혼자 헤실헤실 풀어졌다.

이 작은 녀석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붉은 후드 아래서 새어나오는 허밍을 들은 말톤이 표정을 한결 누그러뜨렸다.

“이거 원... 걱정해서 손해 봤군.”

*

“....물비린내가 나요.”

장엄한 협곡 밑바닥을 거닐던 도중, 라디가 콧등을 문지르며 읊조렸다. 부지런히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황폐하던 대지에는 크고 작은 식생들이 돋아났으며, 메마른 내기바람은 점차 습기를 머금어 묵직하게 밀도를 높였다.

대규모 수원지가 얼마 머지않았다는 증거.

희미하게 들려오던 잡음이 점점 부풀어 귓전이 아플 지경이 되자, 곧 굉음의 진원지가 나타났다.

“....미쳤네.”

광활한 대지 한가운데 팽대한 구멍. 타르타로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낭떠러지가 눈앞에 도래했다. 그 직경은 얼마나 큰지 반대편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전방위에서 도시 수 개를 침수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수량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을 자극하는 광경.

“도.. 란....!”

“일단.. 여기서...! 벗어... 나야..!!”

“알았.. 어..!!”

텔레비전의 흑백 노이즈를 수만 배 늘린 듯한 굉음 탓에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우리는 말톤의 뒤를 쫓아 서둘러 폭포를 빠져나왔다.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정말 압도적인 광경이었네.”

“으으...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어요...”

이명 때문에 괴로운지 라디가 귀를 탁탁 두드리며 신음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물었다.

“야 말톤, 저걸 건너겠다고? 아무리 봐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혹시 길을 잘못 든 거 아냐?”

“전에 말했지 않은가, 상류 쪽으로 가면 비교적 폭이 좁은 물줄기가 나온다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군?”

“아니, 기억은 하고 있는데 저런 걸 봐서야... 건널 엄두가 나야 말이지.”

“하긴... 그도 그렇군. 더군다나 내가 듣기로도 이렇게까지 수량이 많았던 건 아닌 거로 기억하네만...”

말톤이 턱을 짚으며 생각을 곱씹었다.

지도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조금 더 나아가자 우리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폭우라도 내린 모양이네요. 다리가 끊겨 있어요.”

삼십 미터쯤 되는 골짜기를 목전에 두고 발이 묶인 모험가들. 길드에서 건설한 밧줄 다리는 볼품없이 늘어져 있었고, 그 아래 계곡은 혼탁한 급류가

뿌리째 뽑힌 통나무를 등에 이고 난폭하게 요동쳤다.

흙탕물은 협곡이 끝나는 부분에서 벼랑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강물이 불어나 오도 가도 못 하는 모양이로군. 던전 밖에 폭우라도 내리는 모양일세. 아니, 이 정도 물살이면 분명 다른 수원지가...”

“...뭐야, 그럼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못 돌아간다는 소리야?”

“흠... 수세가 진정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할 테지. 그래봤자 고작 하루 이틀만 더 기다리면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수위만 낮아진다면야 끊어진 다리를 고치는 것쯤 일도 아니니 말일세.”

“젠장...”

쯧. 혀를 찼다.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없으니 영 답답하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하는 수 없이 야영지 구석, 모험가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거처를 마련하려던 차, 말톤이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여기선 내가 텐트를 칠 테니 자네들은 주변이라도 둘러보다 오게나.”

“갑자기...? 굳이 그런 배려는 필요 없는데...”

“배려랄 것도 없네, 천막 하나 세우는데 무슨.. 아까부터 라디가 무서워하고 있지 않나.”

“아...”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라디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어쩐지 뭔가 빠뜨리고 있는 기분이더니.

“...그래도 되겠어?”

“안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너무 늦기 전에만 돌아오게.”

말톤이 시원스런 웃음을 자아내더니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결국, 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라디의 손을 꼭 붙잡고 절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녹음이 우거진 장소까지 도달하자, 그녀가 힐끗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재빨리 도로 푹 숙였다.

...참 바쁜 녀석이네.

“갑자기 또 왜 그래. 아까 이후로 괜찮아진 거 아니었어?”

“그, 그게...”

“뭔데, 말해봐.”

“....”

라디가 갈팡질팡 주위를 곁눈질하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야한 건 안 돼요! 지, 지금은 아직 낮이기도 하고.. 그... 사람도 많으니까.. 적어도 밤에...”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설마 지금 일을 벌일 거라 생각한 건가.

내가 짐승도 아니고 그 정도로 절제가 없진 않다.

“그럼 왜 이,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네가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 일부러 멀리 온 거잖아.”

“아...! 그, 그렇죠...!”

“.....”

반응이 느리다.

게다가 아까부터 묘하게 호흡이 거칠고 다리를 비비 꼬는 게...

“...기대했어?”

“그럴 리가요!! 제, 제가 그런...”

“.....”

귀여운 짜식.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다음번에 하자. 말톤도 그러라고 우릴 보내준 건 아닐 테니까. ...아니면 숲속에서 후딱 해치우고 올래?”

“....!!!”

일부러 짓궂게 묻자 라디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격하게 흔들었으면 후드가 벗겨질 정도. 덕분에 홍당무처럼 변한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둘이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가자. 아까 보니까 모험가들이 물건을 팔고 있던데... 너만 괜찮다면 구경이라도 하러 갈까?”

“아 네... 절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가자.”

라디의 손을 맞잡고 푸른 잔디 위를 거닐었다. 오랜만에 우거진 잡목림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던전 2층은 대개가 황량한 바위로 이루어진 데 반해, 이 단애절벽엔 물이 풍부한 탓인지 다채로운 식생이 곳곳에 자라있었다.

한데 점점 라디의 걸음걸이에 망설임이 실리기 시작했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녀석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근데... 도란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어려운 질문이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라디가 한참을 뜸 들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제가 어젯밤 도중부터 기억이 없어서...! 근데 일어났을 땐 옷도 제대로 입고 있었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해서...”

아 그거, 왜 안 물어보나 했다.

“별일 없었어. 네가 기절해버려서 그대로 재운 것밖에. ....뒷처리하느라 애먹었다.”

“아 그.. 그... 죄송해요...!”

“뭐 딱히.”

솔직히 조금 심통이 나긴 했지만, 나중에 그대로 되갚아 주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라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쭈뼛거리며 재차 질문해왔다.

“그, 그럼... 혹시 제가 잠든 틈을 타 이상한 짓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 죠...?”

“.....”

“도, 도란님...? 왜 대답이 없으...”

“....이야, 저기 좀 봐봐! 하급 포션이야!! 저 귀한 걸 여기서 보네! 우리 같이 구경하러 가자!”

“마, 말 돌리지 마세요!! 무슨 일 있었죠!? 네?! 대체 제 몸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나 먼저 가 있는다!!”

“도란님!!!”

재빨리 팔을 뿌리치고 내달리자 녀석이 바짝 뒤쫓아왔다.

어느새 내 입가에는 옛날에 잃어버렸던 미소가 피어있었다.

이토록 즐거운 일상을 맞이하는 게 얼마 만일까?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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