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전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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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전조 #2
“....잘들 놀다 왔나?”
한차례 추격전이 끝난 뒤, 모험가들이 노면에 늘여놓은 마물 소재를 잔뜩 구경하고 돌아가니 말톤이 텐트에 앉아 맞이해왔다.
“그래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다. 고마워.”
“고마워요 말톤님.”
녀석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그래서 뭐 좀 재밌는 거라도 찾았는가?”
“이것저것 팔고 있더라고. 힐링 포션에 포이즌 엔트 분말, 코볼트 이빨 뭐 그런 거. 지상까지 들고 가기 힘드니까 여기서 팔 수 있는 건 죄다 처분하려나 봐. ...사려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짐을 맡고 있을 테니까 말톤님도 다녀오실래요?”
“흠... 나는 이따가 구경하도록 하겠네. 일단 야영 준비를 미리 해 놓기로 하지.
“그래, 알았어.”
아직 해가 질 때까지는 조금 남았지만, 미리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이 장소에서 최소 하루 이틀은 꼼짝없이 머물러야 할 터, 밤에 지필 땔감뿐만 아니라 식량도 구해놔야 한다. 보존식이 남아있긴 하지만, 해일이와 메라에게 반절 떼어주고 온 탓에 최대한 아껴 먹어야 하고.
라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와요.”
“빨리 돌아오면... 뭐라도 해 줄 거야?”
“....하는 거 봐서요.”
녀석이 새침하게 내 뺨을 쿡 찔렀다. 마음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지만, 최소한 한 명은 거처에 남아서 짐을 지켜야 하니까.
나는 아쉬운 마음을 머금고 잡목림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심코 옆을 쳐다보니 말톤이 쇠똥구리라도 씹은 것마냥 눈살을 팍 찌푸리고 있었다.
“왜.”
“...아주 깨가 쏟아지는군.”
“....내가 뭐 어땠는데.”
“마치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두루미를 보는 듯했네. 나야 뭐, 자네들이 사이좋게 지낸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그 살벌하던 도란이 이렇게나 바뀌다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녀석이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많이 변했냐?”
“그렇네, 처음 만났을 때 자네는.... 막 벼려낸 칼날 같았지. 가까이 다가갔다간 베이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 말일세. 그랬던 도란이 지금은 애처가가 되어 있으니 당연히 우습지 않겠나?”
“그러게... 난들 알았겠냐.”
말톤과 만나기 직전. 그 당시의 기억은 물에 젖은 한지처럼 흐릿하다.
육체나 정신이나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상황이라서 그렇겠지.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굶주린 아귀처럼 온기를 갈구했지만, 텅 빈 뱃속에서 공허한 메아리만 울려댈 뿐.
그때 내게 손을 내밀어 준 몇 안 되는 사람들, 한 손안에 들어가는 그 사람들 덕에 지금 내가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별거 아냐. 우선 저 잡목림부터 둘러보면 되려나?”
“그렇네. 장작은 나중에 구하고 우선 사냥감이 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지.”
“그래, 안 그래도 입이 질리던 참인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 좀 해보자. 어디 눈먼 사슴이라도 안 돌아다니려나.”
숲에 발을 들이자 청량한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조금 전까지는 습도가 높아 숨쉬기조차 불편했는데, 이곳은 나무들이 많으니 훨씬 낫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을 맞으니 시들었던 감각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기분.
천천히 심호흡하며 기지개를 켜자 말톤이 아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숲을 좋아했지.”
“그래. 내게는 반쯤 고향 같은 장소니까. 한때는 고생도 했지만, 나름 여러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런가... 자네의 무용담은 몇 번이나 들었네만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군. 한 해 동안 아무런 조력자도 없이 마물이 우글거리는 숲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니.”
“그러게... 운이 좋았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못할 거야, 아마.”
“...허허.”
말톤이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우뚱하며 읊조렸다.
“한데... 그 이후에 어찌했는지는 내 들어본 바 없군. 여러모로 모자란 부분이 있지 않나? 자네가 숲에서 나온 뒤 모험가가 되기 전까지 뭘 했는지, 또 언어는 어디서 배웠는지 말이네. 자네가 나와 만났을 땐 이미 비스마르크 어를 유창하게 구사...”
“그건 안 돼.”
뒷말을 틀어막았다.
그때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라디조차도.
틀림없이 환멸하고 말 테니.
“....알겠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말톤이 입을 다물었고, 그대로 대화가 끊겼다.
나와 녀석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끈덕지게 늘어졌고, 어색한 기류가 빈자리를 대체했다.
참지 못한 내가 화제를 돌렸다.
“...야, 말톤.”
“듣고 있네.”
“그... 수인에게 꼬리란 게 혹시... 신체 부위 말고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야?”
“자네... 설마 했더니....”
말톤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 녹안에는 명백히 나와 라디를 견주어보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니...! 우린 얘기는 아니고 아까 한 수인 모험가가 꼬리를 만지네 마네 그러면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더라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어본 거야!”
나름 순발력 있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입매만 보고도 생각을 유추할 수 있는 녀석을 속이는 건 무리였나 보다.
“흠... 자네들의 태도가 어젯밤 이후로 묘하게 바뀌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제야 알겠네.”
“아니, 내 일 아니라니까? 방금 말했잖아. 모험가...”
“차라리 라디가 남자라고 하는 편이 그럴싸하겠군. 막 걸음마를 뗀 아기도 자네의 거짓말엔 속지 않을걸세.”
“....”
꽤나 신랄한 어조였지만, 말톤이 말을 잇기 시작하자 나는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흠... 수인한테 꼬리 말인가? 그야 종족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은...”
“대부분은...?”
“...자네라면 이제 알 테지만 성적 흥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위지. 타인에게 꼬리를 내준다는 건 몸을 허락한다는 뜻이네. 앞으로도 계속 말일세. ...복에 겨웠군 도란.”
“....말톤.”
“안 되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중에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할 셈 아니었나?”
“맞아.”
“안 되네.”
“거 참 친구끼리 매정하게...”
어젯밤 라디의 반응으로 성감대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그런 속뜻이 담겨있었을 줄이야.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였으나 말톤에게 확언을 받으니 내심 기뻤다.
“....그 얼굴로는 이제 변명도 못 하겠군. 지금은 그보다 눈앞에 집중하세. 라디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먹을 사냥감을 잡아야 하지 않나.”
“그렇지... 이쯤 걸어왔으면 슬슬 흔적이 보일 만도 한데...”
걸리적거리는 검집을 손에 거머쥐고 시야를 낮춰 걸었다. 야생동물들을 추적할 땐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살피는 게 도움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머잖아 짐승의 흔적을 발견했다.
“...찾았어. 멧돼지 발자국이야. 크기로 봐선... 딱 네 덩치 정도 되겠는데?”
“그렇군. 발톱 끝이 말발굽처럼 휘어져 있으니 아마 아이언 보어가 아닐까 하네. 쉽지 않은 놈들일세.”
“아이언 보어? 아 그 은회색 멧돼지들 말이지? 큰일이네... 걔네 엄청 똑똑하잖아. 덫을 파놔도 보란 듯이 미끼만 빼먹고 가던데.”
멧돼지라고 하면 허구한 날 판타지에서 한 끼 식량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은 무시할 게 못 된다.
놈들은 영악하고, 저돌적이다.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낙엽 위로 다니기도 하고, 매우 뛰어난 청각과 후각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험 많은 개체의 경우 얼음물에 들어가 스스로 상처를 지혈할 정도의 지능을 갖췄다.
엄니로 들이받는 맹진에는 든직한 그루터기가 넘어갈 정도.
하지만 이런 미온한 감상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흔적을 발견했으니...
“말톤...”
“...보고 있네.”
멧돼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중 커다란 족적을 발견했다.
나와 말톤이 드러눕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발자국.
“제길... 이 정도면....”
“집 한 채 크기에 맞먹겠군... 우리로선 손쓸 방도가 없네.”
말톤이 고개를 저으며 침음했다.
초대형 몬스터.
인간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은 외진 숲속을 걷다 보면, 드물게 상식을 벗어난 덩치의 짐승을 목격하곤 했다.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 게시판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면, 마차만 한 늑대를 봤다던가 옆 마을에서 구렁이가 황소를 집어삼켰다든가 하는 풍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를 단순 허황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그러한 생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숲에서 생존하던 시절, 내 덩치와 엇비슷한 토끼에게 쫓긴 경험이 있다. 꽁지 길이만 사람 크기를 웃도는 새에게 낚아채인 적도 있었고, 15미터 암벽 위에 선명히 찍혀있는 곰 발톱 흔적을 보고 겁에 질려 일주일간 굴속에 틀어박혔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짐승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
육식 동물만 골라 사냥하는 대형 사마귀라던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탐하는 사슴이라던가.
내가 일전에 쓰러뜨렸던 코볼트 킹도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겠지.
“...오랫동안 미발견된 던전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일세.”
“이렇게 되면 사냥이고 뭐고 최대한 빨리 여길 뜨자. 발자국에 이끼가 껴 있는 걸로 봐서 꽤 오래전에 찍힌 모양이지만...”
나와 말톤은 도망치듯 숲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던 도중 사냥한 토끼로 만족하며.
*
“아, 왔어요 도란님?”
“그래, 토끼 잡아 왔다.”
“우와...! 살이 엄청 통통하게 올랐는데요? 오늘 하루는 배불리 먹겠어요!”
어느새 어스름해진 하늘을 등지고 텐트로 돌아오자 라디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별일 없었지?”
“네, 모험가들이 잠깐 다녀간 것 말고는 없었어요.”
“모험가? 걔네들이 왜.”
“이따가 바비큐 파티를 연다네요. 술도 넉넉하게 있으니 놀러 오라던데요?”
술이라...
“...넌 관심 있어?”
“음... 저는 딱히... 음주를 꺼리는 건 아닌데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싫어해서요. 저는 남아있을 테니 말톤님하고 둘이서 다녀오실래요?”
“나도 별로야. 그냥 우리끼리 고기나 구워 먹자.”
사람이 많은 곳은 거북하다.
만에 하나 투구가 벗겨지면 큰일이니까.
나는 라디와 나란히 앉아 장작에 불을 지폈다.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식사에 설레던 차, 잔디가 밟히는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이쪽으로 다가오는 젊은 남녀 두 명이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귀찮음을 무릅쓰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세요 형제님! 옆 텐트에서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곧 바비큐 파티를 열 예정이라 세 분도 초대할까 하는데... 저희가 숲에서 엄청나게 큰 사슴을 잡았거든요! 혹시 같이 드시지 않을래요?”
”.....“
방금 말한 사람들인가.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라디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희는 사양할게요.”
“아, 혹시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일절 받지 않으니 그냥 오셔서 즐기다 가시면 됩니다. 아마 이 벼랑 위 모험가들은 거의 다 모일걸요?”
“...저희는 정말 괜찮...”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맥주도 잔뜩 있어요!”
슬쩍. 여자 모험가가 내게 팔짱을 껴 가슴을 강조하자 라디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불똥을 털듯 재빨리 뿌리치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정말로 관심 없습니다. 더 용건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 그럼 여기 여분 맥주를 드릴 테니 맛이라도 좀 보세요! 던전 안에서 팔려고 가져왔는데 너무 많이 남아서 처치하기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남자가 허리춤에 매달아둔 나무통에서 김빠진 맥주를 한 바가지 퍼 올렸다.
라디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제지하려던 찰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공짜 술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죠. 다만 지금은 속이 좀 더부룩한 상태라 조금 이따가 마셔도 될까요?”
수통 안에 담긴 물을 바닥에 버리고 사내가 건넨 맥주를 대신 그 안에 따랐다.
찰나, 두 남녀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곧바로 웃는 낯짝으로 되돌아왔다.
“네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놀러와요!!”
“.....”
두 사람이 떠나간 뒤, 고개를 내리자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라디가 보였다.
“...도란님,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거예요! 아무리 공짜가 좋아도 남이 주는 걸 함부로 받으면...”
“나도 알아 인마.”
대가 없는 호의가 제일 비싼 법이다.
나는 수통에 든 맥주를 땅에 쏟아부으며 읊조렸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불침번 때는 졸지 말자,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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