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78화 (78/375)

〈 78화 〉 전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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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전조 #3

“와, 이제 더는 못 먹겠다.”

“배 터지게 먹었네요... 정말 오래간만에 포식했어요.”

“유적에 들어가고 난 뒤로부터는 매번 건량으로 끼니를 때웠으니... 잘 먹었네 도란, 참말로 훌륭했네.”

“그냥 밑간 좀 한 게 단데 뭐. 이럴 때 술이 있으면 딱인데... 한 모금 정도는 남겨 둘 걸 그랬나...?”

불이 꺼진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어두워져 검은 추위가 내리깔린 벼랑 위에는 밝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거나하게 취해 돌아다니는 인영들로 왁자했다.

한겨울 축제를 연상케 하는 모습.

은근한 한숨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로 별일 없네. 수면제라도 타 놓은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하긴, 모험가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기우였던 걸까요? 어쩌면 저희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걸지도...”

“뭐... 아직 한두 시간밖에 안 지났으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말일세.”

마음만 같아서는 거처를 옮기고 싶지만, 이곳을 벗어나 어중간하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야영했다간 되려 위험해질 수도 있다.

도적이나 마물에게 손쉬운 표적이 될뿐더러 한밤중에 습격받아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조차 없으니까.

“제발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장비를 벗을 수도 없으니 갑갑해 미치겠네. 야 말톤, 가방에 멘테 이파리 넣어둔 거 있지? 이따가 그거나 좀 꺼내줘. 씹으면서 졸음이나 쫓게.”

“아, 그러면 오늘 밤은 두 명씩 불침번을 서는 게 어때요? 다음날 조금 피곤하기야 하겠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는 훨씬 수월하니까요. 어차피 내일도 별다른 일정 없이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것 같고...”

“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다만...”

말톤이 수심 짙은 얼굴로 턱을 짚으며 고민했다. 제 딴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엘프 특유의 잘생긴 외모에 일렁이는 모닥불의 잔상이 더해지자 제법 멋들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내 눈길은 그 아래 불길하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포착하고 있었지만.

“두 명씩 불침번이라... 라디, 혹 내가 잠든 사이에 도란이랑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가?”

“이상한 짓이라니... 뭘 말씀하시는 거죠?”

“뭐 남녀가 야밤에 할 만한 일이라는 게 딱히 있나, 자네와 도란 둘 다 성인이니 조금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도 놀랍지 않다는 소리일세.”

“....말씀하시는 의도를 모르겠는데요.”

말톤이 능글맞은 웃음을 자아내며 떠보았지만, 라디는 태연하게 흘러넘겼다.

꿈틀한 꼬리로 하여금 살짝 긴장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말톤이 말을 이었다.

“너무 경계하지 말게나.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음심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조금쯤은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고 한들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걸세.”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이곳은 던전이잖아요. 하물며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도 모자랄 시기에 경계를 게을리한다는 건 완전히 어불성설이죠.”

“단 한 순간도 말인가?”

“네.”

라디가 완고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 화제를 나누어봤자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했겠지.

하지만 말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놈의 미간이 쌜룩쌜룩 파도를 타더니 슬슬 시동을 걸었다.

“흠... 그래서 어젯밤 그런 사단을 벌였던 겐가?”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정말 그랬나? 내가 알기로는 도란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네만.”

“...네, 그 말이 맞아요. 그냥 잠이 안 와서 대화 좀 한 게 전부예요. 말톤님이 상상하시는 일은 전혀, 요~만큼도 없었다고요.”

아.

“흠... 도저히 못 믿겠군... 단둘이 야밤을 같이 지새웠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겐가?”

“정말이라니까요.”

라디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자약하게 시치미를 땠지만­

“그럼... 오늘 밤도 별일 없겠군. ‘어제처럼’ 말일세.”

“네, 당연하죠. 어제처럼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너 그거 외통수야.

말톤이 이 정도면 만족했다는 듯 껄껄 배를 잡고 웃어젖히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라디는 의아한 듯 눈을 살짝 치뜨더니 이내 뜨악하며 나를 쳐다봤고.

말톤의 폭소가 한층 더 커졌다.

“도, 도란님 호, 호.. 혹시...”

“....뭐, 그렇게 됐다.”

“....!!!”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오르더니 내 등짝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아...! 아악! 아파!! 아프다고!!”

“미, 미쳤어요...?!! 그걸 왜 쳐 말하고 자빠졌어요!?!!”

푸른 눈동자에 찔끔 눈물이 고였다.

“고, 고의는 아니었어...! 그냥...!”

“그냥...! 그냥 뭐요..?!!”

라디에게 떠밀려 잔디밭 위로 엎어졌다.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며 저항하다 보니 상의가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손톱 자국으로 가득한 등짝이 드러났고.

말톤의 웃음소리가 더더욱 요란해졌다.

“아악!! 악!! 이러다 나 진짜 죽어!!”

“죽어!! 나가 죽으세요!! 접싯물에 코 박고 죽으세요!!! 아니, 접싯물도 아까워요!! 어떻게 그걸 말톤님한테 말할 수가 있어요?!!”

“아흑...! 마, 말했잖아! 고의는 아니었다고!! 쟤가 지 혼자서 눈치깠단 말이야...!”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그걸 들켜요!?!”

“그, 그건...!”

“도란이 꼬리에 대해 묻더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하다면서.”

“그럼 들키는 게 당연하잖아!!”

“끄헉?!”

라디가 전력으로 스파이크를 때리자 등에 시뻘건 손자국이 생겨났다.

그 얼룩이 등판에 가득한 성애의 흔적과 맞물려 묘하게 색정적이었던지라, 녀석은 끝끝내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도 좋았나 보군. 도란의 등을 이토록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면.”

“.....”

후드 아래서 쥐가 의사소통하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얼얼한 등을 쓸어내리며 일어나 말톤을 쏘아봤다.

“아으... 쪼그마한 게 진짜 맵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잠자코 있기로 했잖아.”

“흐흐... 서라는 불침번은 안 서고 야음을 틈타 정을 나눈 자네들의 잘못 아닌가? 그냥 심술 좀 부리고 싶었네. 자신만만한 라디의 표정을 보니 내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더군.”

“.....”

그야 가끔 라디에게선 가학심을 들끓게 하는 분위기가 뿜뿜 뿜어나오긴 하지만...

“...이번엔 네가 잘못했어.”

“부정하진 않겠네.”

말톤이 실없는 웃음을 자아내며 빈 수통을 건넸다.

“물이 다 떨어졌군, 다녀와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사과도 할 겸 야영 준비를 하고 있겠네.”

“....그래, 식기들도 설거지해올 테니까 이리 줘.”

아까 수통을 비워낸 탓에 나도 물을 채워야 한다.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

야영지를 등지고 걸었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더부룩하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입김은 맺히지 않는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떠들썩한 웃음소리.

해가 지고 난 후의 벼랑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투명한 물안개를 피어올렸다. 발광 이끼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아이처럼 황금색 잔상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검푸른 버들가지를 살랑이는 국지풍은 이에 역동감을 더했다.

노란색 물감으로 덧칠한,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연상케 하는 풍경.

금빛으로 산란하는 물안개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 풍경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빨리 마치고 돌아가야지.”

벌써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밤공기에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끔은 그 때문에 심울해 지기도 하지만, 외톨이 신세를 벗어난 지금은 그 기분이 싫지만은 않다.

이제 내 곁에는 든든한 동료들이 함께할 거란 걸 알기에.

이대로 돌아가 불시에 놀래킨다면 라디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톤은 또 어떤 웃음을 피워올리며 분위기를 따스하게 돋울까.

밖으로 꺼내놓기엔 조금 낯부끄러운 생각을 뇌까리며 털래털래 강가로 향하자 머잖아 탁한 물거품이 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살이 조금 가라앉은 강변은 구슬피 우는 풀벌레와 개구리로 시끄럽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수통에 물을 퍼담았다.

비좁은 입구에서 새어나온 공기 방울이 수면에 닿자 보글보글 터져나간다.

차가운 강물에 손이 시려왔지만, 나는 일련의 행동을 반복하며 수통을 확실하게 헹구었다. 혹시나 술에 들어있었을지도 모르는 약품을 씻어내기 위해.

“...이 짓거리도 이제 당분간 안녕이네.”

수세가 진정된 정도로 보아 내일 오후쯤이면 강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는 끊임없이 걸으며 던전을 빠져나가는 데 총력을 기울일 테고, 이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일도 없어질 거다. 이미 한 번 지나와 익숙한 길이기도 하고, 던전 1층은 워낙 인구 밀집도가 높아 도적이나 마물이 활개를 치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즉,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소리다.

이제 앞으로 한동안은 술단지를 팔 매입처를 알아보고, 라디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고,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 맞이하는 연휴를 만끽해야지.

카렌의 귀띔이 있었으니 이번엔 E랭크로 승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곧 지상으로 복귀할 생각에 희망찬 계획을 속으로 되뇌었다.

볼일을 마치고 다시 야영지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어, 도란 씨 아니에요?”

서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지인이 이런 곳에? 도란이란 이름을 아는 자는 베라스틴 전역을 뒤져보아도 한 손에 꼽을 텐데.

의아하게 돌아보자 검은 인영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음엔 역광 탓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란스인가? 코볼트 트라우마 때문에 상인으로 전향하긴 했어도 이전엔 모험가였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아무리 상념에 빠져있었다고 한들, 이토록 가까이 타인의 접근을 허락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느끼며 살갑게 인사하려던 참이었다.

놈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읏...?!”

바람을 타고 온 불씨 하나가 그의 창백한 뺨을 비추었다.

이어서 처형장에 흐르는 혈류처럼 붉은 적발과 퇴폐하게 빛나는 적안을 조명한다.

그 입가에 내려앉은 나른한 미소를 보자 강렬한 기억이 점등했다.

분명 내 기억 속에 있는,

하지만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ㅡ

“...안 되죠.”

칼자루에 손을 얹기도 전에 칼날이 드리워졌다.

이어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내게 고했다.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어쩐지 오늘은 '길한 예감'이 든다더니.”

“별이 아름다운 밤이에요.”

“정말 그렇죠?”

“도란 씨.”

붉은 머리의 사내.

냇가에서 마주쳤던 도적단의 리더.

내 팔뚝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남겼던 바로 그­

최소 A랭크 괴물.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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