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전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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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전조 #4
갈라진 바위틈, 얕게 웅덩이진 수면, 수양버들 나뭇가지 위.
도처에 내려앉은 까마귀 떼가 요사스럽게 울어댔다.
텅 빈 잔향이 허무하게 메아리친다.
피를 머금은 홍관조처럼, 새빨간 적색 일체의 사내.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자, 세상을 등진 자 특유의 차가운 비소가 나를 조롱했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와 닮은ㅡ
“긴장하셨네요.”
“호흡이 빨라졌어요.”
“입술은 마르고, 땀을 많이 흘리네요.”
“저 때문인가요?”
“......”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맞서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상대는 일말의 기척도 흘리지 않고 접근해올 정도의 실력자.
이 근처 모험가 전원을 어린애 손목 뒤틀듯 학살할 수도 있는 강자다.
맞섰다간 단 한 합도 막아내지 못하고 비명횡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긴장하며 놈의 추이를 살피기도 전, 내 목에 겨누어진 첨단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살가죽을 예리하게 찢어발기며 파고드는 예검.
하지만 나는 붉은 핏방울이 망울져 흘러내림에도 가만히 서서 사내를 노려보았다.
내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자 핏빛 적안에 이채가 서렸다.
더 이상 파고들었다간 위험했을 때 즈음,
“...호오.”
그가 감탄하며 칼을 거뒀다.
예식 무늬가 가미된 고풍스러운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춤에 늘어진 톱날 단검이 번뜩거렸다.
“...무슨 짓거리지.”
당장에라도 죽일 듯 행동했으면서 돌연 검을 물리다니.
“글쎄요?”
허나 놈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
경박한 행동거지에선 더 이상 적의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살갗을 따갑게 짓누르는 존재감이 방심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니까.
그가 입을 열자 공동에 물결치는 반향과도 같은 울림이 퍼져나갔다.
“저는 도란 씨와 싸울 의향이 없는걸요?”
“개소리.”
신속히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가슴팍을 겨누었다.
이 남자가 몬스터 따위나 잡자고 이곳에 왔을 리가.
검붉은 자국이 잔뜩 눌어붙은 신발, 채 피가 마르지도 않은 부츠 장식.
인간의 살점으로 점철된 진흙탕을 밟는 자들의 훈장이다.
그에게서 자욱한 혈향이 풍겨옴에도, 당사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지껄였다.
“정말이에요. 전 오히려 도란 씨에게 호의를 품고 있거든요.”
“꺼져.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그건 참 유감이네요.”
사내가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색하면서도 절제된 그의 행동거지에는 영문 모를 기품과 방탕함이 동시에 공존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인물상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천의 얼굴을 지닌 피에로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내.
“...대체 원하는 게 뭐야.”
“흠... 어려운 질문이네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도란 씨가 가르쳐 주실래요?”
“.....”
말없이 칼날을 들이밀자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톡톡히 미운털이 박혔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하나 들고 오는 건데. 실은 저도 여기서 도란 씨를 재회할 줄은 몰랐거든요. 조만간 찾아갈 예정이긴 했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안 좋네요.”
“나를 만나려 했다고...? 어째서지.”
“그야...”
놈이 손가락을 들어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 단검이랑 투구. 도란 씨가 자켄의 부하들을 몰살했죠?”
“...자켄? 그게 누군데. 그놈의 복수를 하러 온 거냐?”
“아뇨아뇨, 그럴 리가. 흠... 분명히 본인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했는데... 뭐, 아무래도 좋아요. 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느긋하게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작별해야겠어요. 절 찾는 사람이 정말 많거든요.”
그가 말끝을 강조하며 밝은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손을 흔들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놈의 등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조소하며
“현명하지 못한 짓을 하시네요.”
도신을 쥐고 밀어냈다.
날붙이를 맨손으로 쥐었음에도 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는 모습.
이어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죠?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상대와의 실력 차이를 알고도 굳이 싸움을 걸다니... 도란 씨는 그런 만용을 부릴 사람이 아니잖아요?”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그쪽은 저와 닮았으니까요. 말이 더 필요한가요.”
“너 따위 도적 새끼랑 엮지...”
“같잖은 짓거리 집어치워 도란.”
불쑥, 얼음장처럼 서늘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가 손날을 비틀자 엇나간 장검이 강변을 나뒹굴었다.
차마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놈이 내 멱살을 붙들고 암반에 진 그림자 안으로 잡아끌었다.
“넌 나와 동류야 도란. 부정하지 마. 너 자신도 알잖아? 넌 양지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어디서 순진한 사람 한둘 모아다가 동료 놀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그가 조소하며 손가락으로 흉곽을 찌르자 핏방울이 스멀스멀 번져나왔다.
“꼴사나워. 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 그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을지.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살해하고. 돼지를 도축하듯 사람을 가르고. 생명을 짓밟고. 유린했는지.”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
“조언 하나 하지. 시답잖은 역할극 따윈 때려치워. 동료들이 네가 과거에 한 짓을 알고도 곁에 있어 줄 것 같아? 넌 그저 가면을 쓴 광대에 불과해. 무대가 끝나면 밧줄에 목이 매일 운명이지.”
“.....”
“이쪽 세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근 자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죽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어.”
그의 서늘한 구절 하나하나가 잔향이 되어 으슥한 강변에 메아리쳤다.
가슴팍에서 배어나온 핏줄기가 얼어붙어 방사형의 무늬를 그렸다.
나는 사지가 잘린 토끼처럼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다음번에 만났을 땐 조금이나마 네게 맞는 옷을 입고 있길 바란다. 도란.”
사내가 날 난폭하게 내치고는 하얀 흉소를 남기며 떠나갔다.
이번에는 그 발길을 붙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가 우뚝 멈춰서더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친구로서 조언 하나 하자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봐.”
아.
콰드드드득!!!
지면을 박찼다. 진흙이 튀어올랐다. 흙탕물이 치솟고, 등 뒤에서 광소가 들려온다.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씨발!!! 내가 왜 그 생각을...!!
질척한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섬뜩한 오한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미적지근한 공기가 발길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그물에 옭아매인 것처럼, 불온한 기류에 사로잡혔다.
젠장.
놈이 이곳에 나타난 시점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공기조차 저며내는 존재감에 판단이 흐려졌다.
그의 정체가 뭐였던가.
도적단의 수장이다.
“씨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높게 솟은 암석 뒤. 불그스름하게 물든 하늘.
그의 얼굴을 비췄던 불씨, 영문을 몰랐던 역광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야를 차단했던 거대한 바위를 돌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흥겨운 노랫소리로 들썩했던 야영지는, 비명과 절규로 난폭하게 덧칠되었다.
그 아득한 광경을 목도하자 심장이 멎어내렸다.
“라디!!! 말톤!!!!”
달려드는 도적 두 명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불길 속으로 뛰쳐들었다.
화르르르!!
살갗을 구워버릴 듯이 치미는 화염. 끓어오르는 암석.
잔디와 바위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검은 액체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열기가 전해져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잔해를 맨손으로 뒤져가며 방황하자, 불길을 가르고 새하얀 형체가 육박해왔다.
콰르르르르!!!
불붙은 지면을 뒹굴었다. 어깨에서 참렬한 고통이 느껴진다. 바짝 타버린 시체에 절묘하게 발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날아든 화살에 꼼짝없이 가슴팍이 꿰뚫렸을 것이다.
편전이 쇄도한 방향을 다급하게 쳐다봤지만, 자욱한 불길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잇따라 들려오는 불길한 소음. 천박한 고성 뒤로 새하얀 궤적이 화마를 흩트려놓았다.
“크윽...!!”
파스스슥...!
옷가지에 불똥이 옮겨붙었지만, 사소하다.
입안으로 들이차는 재를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빛으로 일렁이던 물안개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지독한 연무와 맹화가 자아내는 탁한 너울이 그 자리를 갈아치웠다. 나는 멀리 돋아난 암반과 잡목림을 이정표 삼아 말톤의 텐트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불타는 야영지를 가로지르며, 잔해를 뛰어넘고, 화살을 빗겨내고, 불길을 우회하고, 장검으로 불씨를 쳐내며.
지독한 열화가 폐부로 들이찼다.
거미굴에서 빠져나올 때, 불타는 숲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차마 두려워 확인하지 못할 팔다리에서 참혹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 속, 맹렬한 불길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무방비하게 횃불을 든 도적을 칼날로 관통하자
“말톤!!! 라디!!!!”
익숙한 천막이 보였다.
타인을 꺼리는 나와 라디의 선택이 빛을 발했는지, 야영지 외각에 자리를 튼 덕에 말톤의 텐트는 화마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구멍.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모닥불가에 커다란 화구가 파여 있었다. 검게 그슬린 초목이 사방으로 튀었고, 바위는 형체도 없이 터져나가 예의 검은 액체에서 뜨거운 신열을 토해냈다.
폭발의 흔적.
반파된 천막 입구를 들췄지만, 텐트 내부에는 두 명분의 배낭만 휑뎅그레 놓여있었다.
“아...”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명이 전장의 소음을 밀어냈다.
돌고, 돌고, 맴도는 비명이 사지를 옭아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 어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지금까지 애써 무시한 시체들 가운데, 바싹 타버린 망해 사이에 두 녀석이 뉘어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만 참혹한 현실은 내게 좌절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스윽...
살금살금 접근해오는 인영. 사방에서 검은 천을 검날에 두른 괴한이 접근해왔다.
하하. 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지면을 박찼다. 빠르게 돌변하는 시야. 전해지는 놀란 기척. 거리를 좁히고, 디딤발에 회전을 실었다. 일말의 전조도 없이 가속했다. 바람이 멎으면 나는 이미 놈들의 배후에 있었다.
손아귀의 장검을 휘둘러 목덜미를 절삭했다.
“커허헉!!!”
“뭐, 뭐야...!!”
“뒤다!! 어, 어느새...!”
피보라. 육체에 뒤집어쓴 혈흔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도적들이 즉각 태세를 가다듬고 덤벼들었다. 바라던 바. 자세를 낮추어 전방으로 치달았다. 발을 딛는 자리마다 이글거리는 잔상을 남기며 질주했다. 칼날이 옅게 떨리고, 가죽 손잡이에 둔탁한 감촉이 전해진다.
“끄아아아아아악!!!! 다리!! 내 다리가!?!”
“커허어어어억?!!”
처절한 울부짖음이 화음을 이루었다.
도적들이 살의를 불태웠다.
“이, 이 새끼가 잘도 케른을...!!”
“죽여라!!! 한꺼번에 덮쳐!!!”
몰아치는 칼날. 고개를 숙여 피했다. 허리를 비틀어 창날을 흘려냈다. 도신으로 날붙이를 틀어막고, 밀어붙이고, 비틀어 떨쳐낸다. 무책임하게 거리를 내준 적의 발등을 검끝으로 절단한다.
일순간, 크게 치솟은 화염이 투구 속 검은 눈동자를 비추자 사내들에게 당황이 번진다.
그야, 분노의 파랑에 몸을 맡긴 검객의 검무는 난폭하기 짝이 없으니.
푸확!!!
칼날이 사내의 등을 꿰뚫고 빠져나왔다. 그대로 끌어올려 허공에 내던졌다. 곧바로 선회. 지척까지 다가온 칼날을 틀어막았다. 복부를 걷어차고 검끝으로 정수리를 내려찍는다. 그 눈동자가 빠르게 흡떠지자 나는 장검을 뽑아내고 전방위로 휘둘렀다.
파스락!!
쪼개진 두개골에서 뇌수가 치솟았다. 살점 파편이 튀어오르고, 피가 뺨에 튀었다. 아랑곳않고 적들을 도살한다. 곳곳에 쓰러지는 망자들의 아가리에선 언어를 이루지 못한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있나.”
“뭐, 뭣...! 이 새끼 지금 뭐라고...”
“라디와 말톤은 어디 있나.”
“그, 그게 누... 커허헉!!!”
장검을 내려쳤다. 창대를 붙잡아 진격을 틀어막았다. 상체를 비틀어 멀리 내던지고, 흐름을 살려 회전했다. 도적들이 술렁이며 경악으로 물들어갈 때, 나는 발을 놀려 놈들의 그림자를 밟는다.
내게 경솔하게 다가온 순간, 놈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푸화아아아아악!!!
“모, 모두 물러서...!”
“만만치 않은 놈이다!!!”
“이대론 안 돼...! 동료들을 더 불러와 어서!!!”
“여기 지원을 요청한다!! 비상!!! 초비상!!!!”
투구 틈새로 노려보자 놈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짙은 혈향이 비강으로 파고들고, 검을 타고 흘러내린 핏방울이 대지를 물들였다.
입가에 묻은 혈흔을 머금자 도적들이 주춤주춤 물러났고, 그 겁먹은 모습이 내 살의를 들끓게 했다.
고작 이런 좀벌레도 못한 새끼들이 내 동료를 해치다니.
“질문. 라디와 말톤은 어디 있나.”
“그, 그게 누구냐니까...?!”
“반론은 없다.”
참격. 피어나는 호선. 어스륵한 야음 속 칼날. 이글거리는 불꽃의 기운을 반사해 붉게 타오르는 궤도.
적색의 검흔이 공간을 헤집을 때마다 검붉은 살덩이들이 터져나왔다.
추가로 병력이 몰려들지만, 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난자한 고깃덩이와 핏줄기로 대지를 적셨다. 사지가 결딴나 바닥을 기는 시체가 낭창했다. 도처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연이어 발발하는 폭음이.
동료의 비명만큼 끔찍한 소리도 드물지.
내가 당한 걸 모조리 되갚아주마.
웅장한 폭포가 흐르던 벼랑이 아비규환으로 변모한다.
적색의 포도주로 비천을 물들였다.
혈혈단신으로 수십이 넘는 도적 떼를 잔인하게 학살하는 나는 그토록 증오하던 악마와 닮아있었을지언정, 영웅의 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혼자서 놈들을 전부 대적하는 건 무리였던지라.
내가 간과했던 건
“뒈져라아아앗!!!”
“......!!!”
적을 도륙하던 중, 한 잔챙이가 휘두른 단검에서 벼락이 일었다.
즉각 아티팩트라는 걸 깨달은 나는 잔디 위를 굴러 간신히 회피했지만, 이어지는 추격타까지 피해낼 수는 없었다.
불시에 예리한 창끝이 허벅지를 파고들고, 첨예한 고통이 몰아닥쳤다. 뜨거운 열풍에 어지러지는 성난 고함. 이때다 싶어 물밀 듯이 몰아닥치는 은빛 궤적.
바닥을 뒹굴었다. 반격할 여유는 없다. 닥쳐오는 날붙이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점점 육신에 생채기가 누적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소리가 늘어갔다.
이대로면 돌이킬 수 없다.
절체절명의 상황─
“눈 감아요!!!”
“....!!!”
즉각 눈가를 가려 시야를 차단했다. 곧바로 지독한 폭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터져나왔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더라면 자칫 실명했을 정도로 밝은 섬광. 플래시 골렘의 핵.
“......!!”
흔들리는 지축과 귓전을 가득 채운 이명, 뒤죽박죽으로 얽혀버린 세상 속에서 억센 힘이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내 흑발을 몇 번이나 어루만져주었던 이 손길을 잊을 리 없다.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끌리는 대로 나아갔다. 머잖아 날 인도하던 손아귀가 떨어졌다. 이어 세찬 충격 뒤로 딱딱한 바위의 감촉이 느껴졌고, 허벅지가 도려내는 듯이 타올랐다.
“크으으윽!!!”
“조.. 참으.... 도란..!!”
아직 청각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희미한 시야를 비집자 라디의 필사적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에 숫검댕칠을 한 녀석은 내 허벅지에 약초를 덧바르고 붕대를 동여매었다.
“꼬맹...”
“입 다물어요!!”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천천히 고개를 떨구자 온통 피범벅에 그을음투성이인 살덩어리가 보였다.
단순 생채기에 불과한 줄 알았던 상처들은 하나하나가 깊게 팬 자상이었고, 시뻘겋게 변해버린 피부는 검게 물든 피멍과 혼재되어 맹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녕, 이게 내 몸뚱어리란 말인가.
하지만 무사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윽...! 난 괜찮아...! 그보다 네가...”
“.....”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야.
아니여만 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말톤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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