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0화 (80/375)

〈 80화 〉 전조 #5

* * *

[080] 전조 #5

“말톤....”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흘러나온 핏줄기가 바닥을 적셨다.

“...! ..!”

그가 기침하자 찐득한 핏덩이가 뭉텅이로 튀었다.

피에는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현기증이 치밀어오르는 걸까.

으슬으슬한 한기가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망가진 태엽시계처럼 삐걱삐걱 시계가 어긋나갔다.

“건드리면 안 돼요!!”

말톤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라디가 절박하게 잡아끌었다.

“내상을 입었어요! 지금 움직였다간 위험해요!!”

커다란 바위에 기대고 누운 말톤.

녀석은 온몸에 열상을 입은 채 눈을 감고 침묵했다.

뜯겨나간 피부 아래로 언뜻 보이는 장기들은 잿빛으로 그슬렸고, 전신에 박힌 시꺼먼 파편은 문둥병 환자의 썩어내려 간 피부를 보는 듯하다.

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와 뭉개진 한쪽 눈.

간헐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흉부가 아니었다면 시체로 착각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톤... 어째서.. 이렇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

라디의 눈동자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간신히 입을 뻥긋거려 보지만, 차마 말을 이루지 못했다.

자세는 무너지고, 폐 속에 물이 찬 사람처럼 호흡이 고장났다.

뇌리에 선연한 폭발의 흔적과 죽어가는 말톤, 그와는 대조적으로 상처 없는 라디를 보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예상이 갔다.

아, 이 우둔할 정도로 정직한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동료의 목숨을 지켰구나.

늘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 뒤에 감춘 그 숭고한 정신을, 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말톤.

베라스틴의 모험가 사이에서도 늘 빛났던 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이

그가 있어 두렵지 않았다.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줄 알았다.

그렇게 항상 올곧게 내 등을 맡아주었던

동료. 전우. 친구.

언제나 밝게 웃던 녀석이

언제까지고 함께할 줄 알았던 그가

눈앞에서 죽어간다.

“저.... 저.. 때문에...”

라디의 신형이 사시나무처럼 떨듯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눈동자가 공허하게 움츠러들었다.

벌어진 입가에선 뜻을 알 수 없는 울음이 새어나왔다.

“......”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짚어 위로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오열과, 친우의 살덩어리에서 피어오르는 탄내를 맡자 되려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릿속이 냉정해졌다

“아직... 아직이야...”

떨리는 목소리를 비집어­

“...아직 죽지 않았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회복 포션.”

“포, 포션...?”

“그래, 기억해? 야영지에서 모험가가 팔고 있던 물건. 그것만 있으면...”

말톤을 구할 수 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숨만 붙여놓으면 된다.

사고가 수면 위로 부상하자, 심해에서 건져올린 그물에 흡착한 따개비처럼, 머릿속에 잔재한 기억의 부산물이 함께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때 분명히...

‘사실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서 그래요. 어릴 적 화상을 입었거든요. 남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은....’

‘도란님이야말로 제가 누군지 잊으신 건 아니죠? 저 신성력 쓸 수 있는 거 아시잖아요! 어디 한 번 진찰해 보고 고칠 수 있는 흉터면 치료해드릴게요! 아, 이거 원래 엄청 비싼 건데... 어디 가서 말하지 마세요...?’

“....죽지만 않으면 돼. 아가사 교단에 믿을 수 있는 사제가 있어.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분명 어떻게든 해 줄 거야. 설령 얼마를 요구하더라도, 아니, 내가 가진 걸 모조리 팔아치우고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녀석 만큼은 돌려놓고 말겠어.”

살려서 지상으로 복귀할 수만 있다면 원상태로 돌이킬 수 있다.

유적에서 술을 구한 게 다행이었다.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이제야 가닥이 잡혔다.

라디 또한 희망을 봤는지, 떨리던 목소리가 조금 다잡혔다.

“저, 저도 지금까지 저축해 놓은 금이 있어요! 그걸 돈으로 환전하면 치료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견뎌낼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는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그래, 베라스틴 지부 아카이아 길드의 마스코트 말톤이 겨우 이 정도 일로 죽을 리 없다.

며칠 밤이 지나고 난 후면 훌훌 병석을 털고 일어나 예의 그 능글맞은 미소를 피워낼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우리의 질긴 악연을 떨쳐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으면, 마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떨쳐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라며.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짓누르던 무력감이 사라졌다.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에 불이 붙었다.

일어섰다.

검을 움켜쥐며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도란님...”

“...난 포기 못해. 녀석의 숨이 끊기기 전까진. ...끝나지 않아.”

“그, 그래도 이대로면 너무 위험...!”

“말톤이 나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그래, 그 녀석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고민할 것도 없다.

창에 꿰뚫리고, 수십 수백 검격에 살가죽이 찢겨나가고, 그 육신을 화살촉으로 덧씌우고, 동료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마지막 소명을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진했겠지.

지금,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처럼.

내 결의를 목도한 라디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호흡을 가다듬고, 푸른 눈동자에 서서히 총기를 들였다.

이어 결연한 목소리로 고했다.

“...저도 따라갈게요.”

“죽을 수도 있어.”

“그럼 같이 죽어요. 다 함께. 먼 훗날 오늘 일을 돌이키며 후회하지 않도록.”

“..그래.”

아슬아슬하다.

곧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다.

회복에만 전념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도적들은 우리를 찾고 있다.

더 없이 최악의 상황이지만ㅡ

살아있다.

그거면 됐다.

녀석이 숨 쉬고 있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거라도 덮고 계세요 말톤님. 금방... 다녀올게요.”

“다녀올게.”

라디가 로브 아래 겉옷을 벗어 말톤에게 덮어주었다.

“.....”

찰나, 살며시 벌려진 눈꺼풀 사이로 녹빛이 반짝였다.

진녹색 눈동자에선 뜻을 읽어낼 수 없었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씨가 전해져왔다.

*

피와 화염이 대지를 붉게 수놓은 밤.

바위 뒤에 몸을 낮춰 전황을 엿보았다.

말톤을 혼자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리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진 않는다.

위치가 발각되면 그 즉시 포위될 터, 도적들의 조롱을 들으며 천천히 말라 죽을 바엔 한 명이라도 더 나서서 회복약을 찾아야 그를 살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라디가 날카로운 눈동자로 도적들의 거동을 훑으며 읊조렸다.

“...장비의 품질로 판단했을 때 대단한 놈들은 아니에요. 대부분 E랭크에 간간이 D계급 인원이 섞여 있는 정도. 다만... 어떤 무기를 소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에요. 설마하니 유통이 금지된 불 마석을 소유했을 줄이야...”

“내가 상대했던 한 놈은 아티팩트도 가지고 있었어. 시발, 그 번개를 뿜는 단검만 아니었다면 꽤 분전했을 텐데... 게다가 장비만 문제가 아니라 수도 너무 많아. 언뜻 시야에 보이는 놈들만 해도 쉰 명이 넘어.”

“이 근방 도적들은 전부 모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인원이 뭉칠 수 있었을까요...? 그토록 오합지졸에 자기들밖에 모르는 놈들이 한날한시에 모여서...”

“.....”

그 점에 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다.

“...대장이 있었어. 저번에 1층 냇가에서 만났다던 A랭크 기억해? 그 새끼가 여기에 왔다 갔어. 아마 그놈이 이들을 한 집단으로 규합했을 거야.”

짧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 사내라면 이들을 전부 휘어잡고도 남을 거다.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존재라면 굳이 도적들을 불러모으지 않아도 모험가를 전멸시킬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의문을 잠시 제처두어야 할 때다.

“저 불길의 중심지가 모험가들의 천막이 있던 위치야. 저 안으로 들어가서 짐을 뒤질 수만 있다면 회복 포션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완전히 전소된 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도적들도 지능이 있는 이상 노획할 물품을 모조리 불사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만... 어떻게 저기까지 도달하는지가 문제인데...”

불타오르는 절벽 위, 야영지.

보글보글 맥주 거품이 끓어오르던 공간에는 들끓는 화염이, 건배하는 모험가들의 환성이 자자하던 자리엔 도적들의 저열한 웃음이 깔렸다.

지금 나섰다간 모든 이목이 쏠릴 터, 이번에도 맞서 싸웠다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허벅지의 상처를 압박하며 분한 눈길로 도적들을 노려보자니, 라디가 야영지 한구석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저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잘 궁리해 보면...”

“...제길.”

벼랑 끝, 사지가 결박당한 채 일렬로 꿇어앉혀진 모험가들이 보였다.

그들 대다수는 지금 당장 옆자리 동료의 목이 잘려나감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피를 한 움큼 뒤집어써도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일관하는 걸 보니 술에 뭔가 있긴 있었나 보다.

만약 우리도 넙죽 그 맥주를 마셨더라면 지금쯤 같은 신세가 되어 있을까?

어쩌면 적어도 저들한테는 그게 더 나은 결말일지도 모른다.

제정신을 유지한 놈들은 완강히 저항하다 끝내 머리통이 썰려나가거나, 폭포 아래로 걷어차이며 끔찍한 절규를 내질렀으니.

“들개 먹이만도 못한 새끼들...”

라디가 콧잔등을 흉흉하게 일그러뜨렸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선 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없어.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 조금 매정할 수도 있지만 저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에 행동해야 해. ...불길이 멎기 전에.”

“동감이에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들킬 텐데... 제가 양동이라도 해볼까요...?”

“...그래봤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잡힐 거야. 그 정도로는 모자라... 큰 거 한방이 필요한데...”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뒤집어놓을

비장의 한 수가.

“...꼬맹아, 너 지금 수중에 쓸만한 물건 없어?”

“저도 말톤님을 업고 급하게 도망쳐 나오느라 얼마 못 챙겼어요... 그나마 플래시 골렘의 핵이 있었는데 도적들을 따돌리느라 거의 다 써버렸고...”

라디가 말끝을 흐리며 로브 안 공간을 뒤석거리자 여러 잡동사니가 떨어졌다. 골렘의 핵, 독병 두어 개, 쇠뇌용 볼트, 자그마한 은색 수납 용기 등.

“붕대하고 연고도 다 써버렸어요. 남은 와이어도 없고 예비 볼트도 얼마 안 남아서...”

“.....”

“죄송해요... 어떻게든 사수했어야 했는데...”

“꼬맹아.”

“만약 제가...”

“찾았다.”

“네..?”

“찾았다고.”

비장의 한 수.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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