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2화 (82/375)

〈 82화 〉 전조 #7

* * *

[082] 전조 #7

“지, 지진인가...?!!”

“지진 따위가 아냐!!! 뭔가가 온다!!!”

“씨발 대체 뭐가 온다는 거야?!!!”

역병처럼 도적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번져나갔다.

달려오던 이들도 우뚝 멈춰서서 주위를 살폈다.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경계한다.

불길한 전조.

놈들도 알고 있다. 전장에서는 작은 변수조차 예상치 못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한데, 하다못해 돌멩이가 들썩일 만치의 땅울림이라면 어떨까.

“....꼬맹아.”

“네...!”

천천히 발을 뒤로 물렸다. 도적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놈들이 한눈 팔린 틈을 타 숲에서 거리를 두었다.

뱁새의 태동 수준에 불과했던 떨림은 차츰 커져서 중심을 잡지 않으면 넘어질 정도가 되었고, 뚜렷한 징후를 동반하며 되돌아왔다.

“나무들이 넘어가고 있어...?”

“지, 지반이 무너지는 건가!”

“저건... 쥐?”

멀리서부터 거목이 쓰러졌다. 지상에서는 황급히 달아나는 쥐 떼가, 상공에서는 흉물스럽게 지저귀며 배회하는 까마귀들이.

불현듯 모든 소리가 멎자 세상에 짧은 정적이 찾아오고ㅡ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숲의 일각이 터져나갔다.

산산조각 난 초목, 솟구치는 토사류, 쓸려나오는 바윗더미.

산림의 일면이 폭사하자 거대한 파편이 좌중을 덮쳤다.

거센 진동이 한차례 대지를 유린하고 나자, 형용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지상에 울려퍼졌다.

­─────────!!!!!!!!!!!!!

­─────....!!! ────────!!!!!!

­...............

압도적 위용과 함께 등장한 세 몬스터.

신전의 기둥처럼 커다란 엄니를 지닌 멧돼지, 흉측한 갈퀴손과 입가의 촉수를 벌름거리는 두더지. 그리고...

달빛 아래 은은한 광채를 흘리며 거만하게 선 늑대.

모두가 공성 병기에 맞먹을 만큼 거대하다.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광경.

이어 침수된 굴에서 도망쳐 나오는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몬스터들이 숲속에서 기어나왔다.

도적들이 혼비백산한다.

“모, 몬스터 군단이다!!!!”

“저게 뭐야?!!! 저 씨발 존나 큰 괴물은!!!”

“마, 맞서 싸워라!!!”

“맞서 싸우기는 개뿔!! 당장 튀어!!!”

“으아아아아아악!!!!!!”

혼돈.

리더 격으로 보이는 세 마물은 겁에 질린 인간들을 무시한 채 피웅덩이가 있던 곳에서 잠시 멈춰서더니, 고개를 들어 도적들을 쳐다보았다.

그 광경엔, 아무리 이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인 나라고 할지라도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야 이건 좀...”

“도, 도란님...? 분명 도란님이 봤던 거대한 발자국은 멧돼지 하나뿐이라고...”

“...그랬지.”

“이럴 수가...”

초대형 괴수.

나가의 심장이 강력한 매혹 성분을 지녔다고 한들 명확한 한계가 있다.

페로몬으로 사냥감을 유인해 먹이로 삼는 나가의 특성상 강력한 마물에게는 효과가 반감된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포식자를 불러들여봤자 아무런 득도 없을 테니까.

즉, 원물도 아닌, 하다못해 건조 분말 따위로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데는 분명한 임계점이 존재한다는 뜻인데...

아무리 전장의 소음과 피 냄새로 흥분된 상태라고 한들, 대형 괴수가 세 마리나 나타나는 게 가당키나 할까?

“이건 너무하잖아...”

지나치다.

지나치다 못해 두려운 수준이다.

도적들이 합심해 몬스터에 대항하는 그림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길을 찾게 생겼으니.

어째서 이런 일이...

“지배자... 옛 문헌에서 본 적이 있어요. 간혹 강한 힘을 거머쥔 마물 중에는 숲의 지배자를 자청하는 존재가 있다고...”

“...우두머리가 자기 부하들 데리고 텃세 부리러 왔다는 거야? ...나가의 심장이 그 신호탄 역할을 했고.”

“그... 그렇죠...? 아무래도...”

“제길...”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침착함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두려움에 못 이겨 줄달음질을 친 도적들의 결말은 좋지 못했으니.

“으아아아악!!! 씨팔 사람 살려!!!!”

“개­ 씨이발!! 미친 돼지가 우리의 모가지를 따러 온다!!! 모두 도망쳐!!!!”

“다들 피해!!!!!”

­꾸르륵!! 꾸르르르륵...!!!!

마물은 본능에 충실히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먹잇감부터 쫓기 시작했다.

거대 멧돼지가 투우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바닥을 골랐다. 이어 예고 없이 돌진해 거암을 들이받는다. 쫄지에 샌드백이 된 암벽은 불길한 소음과 함께 갈라지더니, 대형 마차만 한 거석 덩어리들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무너져내렸다.

그 아래 깔린 도적들의 운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으아아아아!!!”

“따, 땅이 움직... 여...?”

“뭐냐 이건!!!”

“다들 침착해!!! 허둥대지 마라!!!!”

별안간 반대 방향에서도 의구에 찬 고성이 들려왔다. 도적들이 기우뚱하며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았지만, 이내 땅줄기가 치솟고 발밑에서 거대한 다갈색 형체가 솟아올랐다.

단단한 지면을 달걀 껍데기 깨부수듯 등장한 두더지는 길쭉한 손톱으로 도적들을 꿰어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눈 대신 축수가 달린 그 기형적인 괴물이 인육을 맛보며 환희하는 모습과, 탯줄처럼 상공에서 주르륵 늘어진 핏줄기는 맹렬한 위화감을 치밀게 했다.

재액(災?)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면모.

과거, 대전쟁 이전에 존재했다던 대괴수의 편린을 목격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두 괴물도 한 존재 앞에선 약과였으니­

“도란님...?”

“......”

은랑(??).

달빛을 온몸에 두른 듯, 은연한 취광을 풍기며 오연하게 선 늑대.

녀석에게선 한 왕국의 지배자도 절로 고개를 숙일 만큼의 기품이 흘렀다.

전장에 팽배한 죽음의 단말마도 갓난아기의 울음으로 바꾸어놓을 정도의 존재감.

늠름하고 지성이 휘황한 눈동자가 전장을 관조했으나, 놈의 샛노란 동공은 떠들썩한 소란에도 아랑곳않고 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꼬맹아.”

“...말씀하세요.”

“몬스터들을 불러 모을 때... 내 피를 썼잖아...”

“네... 혈액에 섞어야 효력이 좋거든요... 무슨 문제라도...?”

“혹시, 혹시나 해서 그런데... 그 피 냄새를 맡고 온 몬스터가 나를 노릴 수도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말끝이 떨렸다.

종아리를 타고 흐르는 새빨간 핏줄기. 그것이 포격 유도탄의 붉은 조명처럼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반면, 라디는 주변에서 날뛰는 몬스터에 정신이 팔려 늑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침착하게 후퇴하며 읊조렸다.

“에이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이렇게나 피 냄새가 짙은데... 아무리 후각이 뛰어난 몬스터라고 해도 거기까지는...”

“......”

그럼 저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살며시 칼집에서 검을 들어올리자, 녀석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확신.

‘어....’

좆됐네.

의심이 추측으로 변하고, 추측이 확신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늑대는 자그맣게 콧방귀를 뀌고는, 제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암반 위에 걸터앉아 턱짓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이.

“...도란님 괜찮으세요?”

“......”

입을 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놈의 신경을 거슬렀다간 당장에라도 집어삼켜질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다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목숨과 맞바꿔 번 시간이다.

상정 외의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당초의 목적은 바뀌지 않는다.

몬스터도 불길을 뚫고 들어오지는 않을 터, 놈들이 도적을 추격하는 사이 우리는 포션을 찾는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슬슬 움직이자.”

“네.”

마물들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할 만큼 거리를 벌리고 나자 활동을 개시했다.

지면을 박차 아비규환으로 변모한 벼랑을 가로질렀다.

이제는 모습을 감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도적들은 제각기 살아남는 데 급급해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도란님...! 전방 바위 뒤에 두 명이에요!”

“그래! 먼저 덤벼들지만 않으면 지나치자!”

소리 없이 질주하던 중 바위 뒤에 웅크린 두 사내와 마주쳤지만, 짧은 눈빛이 오갔을 뿐, 교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현명한 판단. 지금 소란을 벌여봤자 표적이 될 뿐.

마물이 한바탕 식사 삼매경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그만큼 동료는 많이 죽겠지만 살아남으려면 뭔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머리가 굳은 놈들도 꼭 있기 마련인지라­

“저기 누군가가 있다!!!”

“아까 그놈이야!! 케른의 복수를 할 때다!!!”

“갈 땐 가더라도 저 새끼는 죽인다!!”

마물이 코앞에서 날뛰는데도 불구하고, 몇몇이 야단법석을 피우며 활을 쏘았다.

“제길...! 꼬맹아!!”

“네!”

미리 짜맞추기라도 한 듯 라디가 내 뒤로 숨었다. 나는 히터 실드를 내세워 화살을 튕겨냈다. 두꺼운 강철판 너머로 전해져오던 둔탁한 소음이 멎자, 그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쇠뇌를 격발해 세 놈의 숨통을 끊었다.

은밀하게 사각에서 접근한 사내들이 도끼창을 휘둘러왔지만, 즉각 방어 태세를 풀고 응전해 목을 절단했다.

“야영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빨리 가요!!”

라디가 재차 내달리며 팔을 잡아끌었다. 좀처럼 불길이 사그라들 줄 모르는 야영지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지척에서 길길이 날뛰는 거대한 형체도.

“저건...”

“쳐다보지 마세요!!”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키에에에에에엑!!!! 키르르르르엑!!!!

불과 이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두 괴수가 도적들을 도륙했다.

거대 멧돼지가 미친 황소처럼 벼랑을 휩쓸고 다니면, 두더지가 그 주위를 맴돌며 도적들을 집어삼켰다. 긴밀하게 협력하는 두 녀석의 모습에선 서로에 대한 친밀함이 묻어나왔다.

“활을 쏴 멍청아!!!”

“아, 안 돼!! 지금 화살을 낭비했다간...!”

“목소리 죽여 이 등신 새끼들!! 어차피 저놈들도 곧 뒈질 텐데 뭐가 문제야?! 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네가 제일 시끄러워 병신아!!”

사방에서 흉흉한 노성이 오갔다. 꼴에 패거리라고 전우애는 있는 건지, 도적들은 우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눈치였지만, 괴수들이 두려워 차마 소란을 피우지는 못하고 이만 박박 갈았다.

“도란님 도착했어요!! 어서 안으로!!”

나와 라디는 불길이 이는 야영지 안으로 뛰쳐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벗기고, 그을음 섞인 재가 폐부로 들이찼다.

“콜록 콜록..! 빨리 포션만 찾고 나가야겠어요!!”

“그래! 혹시 어디서 발견했었는지 기억해?!”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 탓에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라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불현듯 귀를 쫑긋거리며 외쳤다.

“...저쪽이에요!!”

“확실해?”

“네!! 저기서 곡풍이 불고 있어요!! 저희가 포션을 목격했을 때 낭떠러지하고 가까운 위치였으니 저 근처가 맞을 거예요!”

“그래! 빨리 가자!!”

불붙은 잔디 위를 가로질렀다. 불길이 통제를 잃고 옮겨붙자 난폭한 화마가 치솟았다. 화염을 두른 천막이 파람에 펄럭일 때마다 시뻘건 잔상이 허공에 그림을 그렸고, 아울 베어의 가죽이나 천연 마석 덩어리 등 상당히 고급 소재들이 한낱 잿더미가 되어 속절없이 바스라졌다.

다급하게 불구덩이를 뛰어넘으며 목표 위치에 도착하자 라디가 각목을 주워들고 잔해를 뒤졌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흩어져서 찾아봐요!!”

“그래!!”

포션 같은 고가의 물품은 보통 내열 성능이 뛰어난 특수 용기에 보관하니 불길 속에서도 무사할 거다.

필사적으로 잿더미를 파헤치자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불붙은 목재를 걷어차니 뻘건 불씨가 사방으로 튀었다. 바람을 타고 번진 불똥은 레더아머에 내려앉아 시꺼먼 구멍을 만들었다.

팔에 맨 방패가 불판처럼 뜨겁게 달궈져 황급히 내던졌다.

“콜록...! 분명 여기 쯤에... 있을 텐데... 쿨럭!!”

“저는 콜록...! 저쪽을... 뒤져볼게요!”

손끝을 저미는 뜨거운 감촉. 살갗이 오그라들 정도로 섬뜩한 열기가 전신을 희롱했다. 목구멍을 가득 메운 연기에 호흡할 수가 없고, 잿가루 섞인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불가능하다.

­콰드드드득!!

검집을 풀어 모험가의 짐더미를 들쑤셨지만, 약해진 텐트 지지대가 와르르 무너져내려 투구를 강타했다. 눈가를 가리며 뒷걸음질 치니 형체만 남은 시커먼 팔뚝이 신발 밑창에 바스라졌다. 척박하게 갈라진 입술 너머에서 타는 듯한 갈증이 치밀었다.

뭉게뭉게 들이차는 연기와 온통 새빨간 시야. 바짝 타버린 망자들의 한스러운 시선과 콧속으로 스며드는 유독 기체...

하다못해 회복 연고나 환약이라도 발견했으면 좋으련만. 수색을 개시한 지 한참이 지나고,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잔해를 뒤져봐도 포션을 발견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부풀었던 희망은 점점 검게 물들어 가고, 짙은 연매가 끼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콰르르르!!

“크헉..!”

“괘, 괜찮으세요?!!”

머리 위로 불붙은 나무가 쓰러졌다. 간신히 몸을 던져 직격은 피했지만, 허벅지가 쓸리며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들이닥쳤다.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이 사이로 치미는 독한 연기.

오븐처럼 머리통을 구워삶는 투구를 벗어던지며 말을 토해냈다.

“..콜록! ...꼬맹아!! 넌 모험가들한테 가!!”

“네?! 아, 안 돼요...! 콜록..! 도란님을 버리고 갈 수는...!”

“누가 버리고 가랬냐...! 쿨럭!! 가서 모험가 중에 포션 주인을 찾아서 데리고 와!! 콜록..!! 나는 그동안 여기서 찾고 있을게!!”

“하,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없어!! 빨리!!!”

“윽...! 알았어... 요! 금방 다녀올게요!! 콜록!”

라디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해 화염 밖으로 뛰쳐나갔다. 불길이 갈라지며 잠시 그녀에게 앞길을 틔워주었으나, 곧바로 검은 장벽이 맹렬하게 요동쳐와 내게서 그리운 뒷모습을 앗아갔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광경을 망막 안쪽에 되새겼다.

그렇게 비로소 나는ㅡ

“.....”

혼자가 되었다.

불길이 자아내는 요란한 적막 속에 놓이자 외로움이 사무쳤다.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 한 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망향에 헤메이는 눈동자는 아직도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을 응시했다.

이거면 됐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점점 숨이 가빠져 온다. 폐 속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지고, 엉망이 된 신체에선 더 이상 땀조차 나지 않았다.

회색빛 재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망연히 서서 불타오르는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라디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곧 전부 불타서 없어질 테니까.

내 몸, 유골, 삶의 흔적마저도.

“콜록...! 콜록!!”

찐득한 기침에 섞여나오는 회진이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렸다.

몸은 말을 듣지 않고, 화염의 주홍빛만이 선연한 세상 속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어갔다.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지자 지금까지 이루지 못하고 소멸해버린 여러 꿈이 되살아났다.

다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진실하게 소망하는 것이 단 한가지 있다면­

“말톤....”

그 녀석을 살리고 싶다.

내 목숨을 바치어 동료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내할 수 있을 텐데.

­콰르르르르!!!

잔해더미가 무너지며 등을 덮쳤다. 무뎌진 감각을 뚫고 날카로운 통증이 치밀었다. 뼈를 깎는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손을 뻗자 붉게 달아오른 대못이 뽑혀나왔다.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허벅지의 상처로부터 유실된 피가 치사량에 달했다.

더는 무리인 걸까.

여기까지인 걸까.

마법이 끊긴 목각인형처럼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소리가 멀게 느껴지고, 눈이 스르륵 감겼다.

주마등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죄악으로 점철된 길을 걸어온 나에게 그런 건 과분할 테니.

좁아지는 시야 속 보이는 거라곤 그저 어렴풋한 빛...

...빛?

찰나, 눈앞의 잿더미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홀린 듯이 팔을 뻗어 잔해를 치워내자 점점 빛이 뚜렷해졌다.

이윽고 화염을 반사해 붉은 색조를 띈 내 안구에 희미한 연록빛이 비추어진다.

말톤의 두 눈동자와 닮은 신록의 빛, 수많은 사람을 구원해온 그 빛이 지금 이 자리에서 청명하게 울려퍼졌다.

짙은 해무를 뚫고 비쳐오는 등대처럼 찬란한 광채.

포션

“아...”

신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던가.

어쩌면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까.

이것만 있으면... 이것만 있으면.....

옛적에 마른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사그라들었던 생기가 온몸에 맴돌았다.

삶의 끝에서 발견한 희망, 그 희망에 나는­

“조금만 기다려 말톤... 내가 지금 갈게....”

무거운 육신을 채찍질해 일으켰다.

떨리는 두 다리를 부여잡고 걸었다.

불타는 잔해를 헤집어 달렸다.

온몸에 불씨가 옮겨붙었지만, 어떠한가.

아득한 고통이 온몸을 달구었지만, 어떠한가.

이제 셋이서 돌아갈 수 있는데.

말톤과 라디와 나.

언제나처럼.

셋이서.

불길을 뚫고 나오자 저 멀리 라디가 보였다.

녀석도 반가웠는지 간절하게 내 이름을 연호했다.

그래 우리가 해냈다.

말톤이 우리를 구했듯이, 이번엔 너와 내가 말톤을 구할 차례다.

나는 필사적으로 목을 놓아 고아댔다.

“꼬맹아...! 찾았어..!! 포션이야!!!!”

“도란....! 안...!”

“해냈다고!!! 우리가 해냈...!”

“안 돼 도란!!!!!!!!!!!!!!!!”

차디찬 고통이 치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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