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3화 (83/375)

〈 83화 〉 전조 #8

* * *

[083] 전조 #8

차디찬 고통이 치밀었다.

얼린 송곳으로 살갗을 천천히 베어파고 들어오듯이

첨예하게 정제된 통증이 옆구리를 동결했다.

아프다.

환부로부터 파고든 냉기가 서서히 몸을 굳혀나갔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아마존에서 푸른 독사에게 물렸을 때였던가.

그런데.

내가 방금까지 무얼 하고 있었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아, 그래.

지면이 가까워졌다.

물에 젖어 흐릿한 이명 사이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라디의 목소리가.

왜 울고 있는 거지?

나는 왜 쓰러져 있는 거지?

눈물을 닦아주러 가야 하는데.

가서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줘야 하는데

조금 전까진 불덩이처럼 뜨거웠는데도.

왜 지금은 오한이 드는 걸까?

추위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차갑다.

코가 흙탕물에 처박혀 숨을 쉬기 괴롭다.

힘없이 고개를 드니 수면 위로 붉은 핏줄기가 번져나갔다.

느릿한 잔물결이 일자 누군가가 뒤에서 내 뺨을 밟아 진흙텅이에 처박았다.

서슬 퍼런 음성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내 이름, 기억하라고 했지?”

“.....자켄.”

*

포도 향에 이끌려 오크통 안에 빠진 생쥐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한번 떠올려 보라.

있는 힘껏 포도주 속을 헤엄쳐 보지만 곁자리를 맴돌 뿐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어떻게든 원형 둘레에 도달해 간신히 기어올라도 몇 걸음 내딛다 보면 다시 미끄러져 태초로 돌아간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겉돌다 보면

몸부림치다 보면

어느새 통 안에는 회탁한 눈을 한 채 둥둥 떠다니는 덩어리만 남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워진다.

그것이 간혹 오크통 안쪽에 남아있는 얼룩의 정체다.

칠레의 한 유목 부족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아이들을 골려주고자 지어낸 낭설일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수면에 빠진 쥐 한 마리.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천천히 죽을 운명.

오만하게 설치다 독사에게 집어삼켜진 나다.

“쿨럭...!”

묵직한 기침이 새어나왔다. 잿물 섞인 핏덩이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새빨간 수면뿐. 오크통 안의 포도주.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모험가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

물에 잠긴 스피커처럼 먼발치서 들려오는 전장의 단말마와는 달리 차가운 침묵이 고요히 드리운 이곳.

사지가 결박된 송장에게서 고인 선혈이 낭떠러지 아래로 흘러내렸다.

독에 잠식되어 옴짝달싹도 못 하는 내 귓가에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네. 안 그래? 도란.”

“.....”

“도란이라... 그게 네 이름이었군. 왜 투구를 쓰고 다니는지도 알만하네. ...깜둥이 새끼가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걸 보니 요즘 세상도 참 좋아졌나 봐?”

터걱. 사내가 내 어깨에 발을 짚었다. 조금 힘을 주어 밀어내자 시야가 반전되었다. 수면에 비쳐 일렁거리던 반쪽짜리 세계가 기울어지고, 화염과 달빛이 선연한 세계가 내 눈가에 드리웠다.

그 외각에 선 남자.

플래시 골렘을 해치웠을 때 조우했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 그 남자가 발에 힘을 실어 내 어깨를 자근자근 짓밟았다.

“왜 갑자기 꿀 처먹은 벙어리가 됐어? 뭐라고 말 좀 해봐 도란, 응? 반가운 재회인데 이렇게 서먹해서야 되겠어? 응? 어때?”

“......”

젠장.

푸른 독사라는 별칭이었던가.

그 이명에 걸맞은 맹독이 혈관을 타고 신체를 얼려가는 탓에 손가락 하나 꼼작할 수가 없다.

자켄은 그런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치더니 난폭하게 내치고는 발길을 돌렸다.

“자, 잠깐.... 너... 어디....”

“.....”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은 끔찍한 비명으로 되돌아왔다.

“꺄아아아아아악!!!”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어붙은 관절을 깨부수어 상체를 일으켰다. 흐릿하던 시야가 어름어름 되돌아오자 그곳엔 붉은 로브에 휩싸인 작은 인영이. 내 사랑스러운 연인을 짓밟은 증오의 사내가.

“이 씨발새끼가!!!!!!!!!!”

“히히... 이제야 좀 대화를 나눌 생각이 들었나 보지?”

그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발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가녀린 목덜미를 짓누른 부츠에 체중이 실리자, 뿌드득 부러질 듯 불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씨발!!!! 씨발!!!! 씨발!!!!!!! 이 씹새끼가!!!!! 당장 그 발 치워!!!!!!!!!!”

“응? 안 치우면 어떻게 되는데. 바닥에 납작 엎드려 꼼짝도 못 하는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지?”

“씨발!!!!!!!!!!!!!!!!!!!!”

두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절규에 가까운 포효가 터져나왔다.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할 정도의 분노가, 노여움이 내면에서 용솟음쳤다.

­콰지직!!

아드레날린이 뿜어내는 열기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관절 마디마디에 낀 살얼음을 깨부쉈다. 응고되었던 단백질이 찢겨나가자 소름 끼치는 소음이, 통증이 신경을 타고 내달렸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날 차갑게 조소하며 지껄였다.

“크하핫!! 블루 카스피 코브라의 독을 맞고도 움직이다니 대단한데?! 너같이 터프한 놈은 처음 봤어!! 그래도 꼼짝할 생각 말고 거기 얌전히 처박혀 있어! 한 발짝이라도 다가왔다간 즉시 이년의 숨통을 끊을 테니까.”

“씨발!!!!!! 씨발!!!!!!!!! 씨발!!!!!!!!!!!!!!!!!”

격분. 뚝뚝 주먹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실핏줄이 터져나가 잿가루 섞인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증오. 살의. 내 모든 안력을 다해 사내를 노려보았다. 피웅덩이 위를 혈흔으로 덧칠하고, 손잡이가 부러질 듯 검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둘레가 짓밟힌 라디가 고통스럽게 몸서리치는데도, 자글자글 부츠 밑창이 여린 살갗을 파고드는데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칼날이 언제라도 관자놀이를 파고들 듯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탓에, 전부 내가 나약한 탓에.

타오르는 감정과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괴리감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나를 격자 안에 가두었다.

“흐, 후흑. 훗...! 좋은 표정이야 좋은 표정!! 그래, 바로 이 광경을 원했어!!!!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간 네놈이 절망에 겨워 몸부림치는 모습을!!!! 이 더없이 황홀하고 찬란한 복수의 순간을!!!!!! 아, 아아.......!”

“이 미친 새끼가!!!!!!!!!!!!”

“그래 그래!! 더 분노해!!! 더 열심히 발버둥쳐!!!!! 날 위해서!!!! 음악과 어우러져 거품 이는 포도주처럼!! 날 더 즐겁게 해줘!!!!”

사내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광소했다. 손가락을 구부리며 쾌락에 몸을 떨었다.

광기(??).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폭소하던 사내는 돌연 급작스레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낮게 읊조렸다.

“아하... 여흥은 이쯤 하고... 네게 이 얘길 꼭 해주고 싶었어. 어떻게 내가 이 자리까지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집념과 망집에 찬 눈동자를 희번뜩거리며.

“네 그 가증스러운 함정에서 빠져나온 뒤 나는 절망했다. 한없이 좌절하고, 체념하고 낙담하고. 또 비관하고, 괴로워 환멸하고 통증에 허우적거리며 자책하고.... 잠에서 깨어난 뒤, 내가 느낀 감정, 무력감, 고통, 환멸을 네놈에게 똑같이 되갚아주리라 각오했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던전을 횡단해 이곳까지 도달했지.”

촤륵. 그의 손아귀에서 체인에 묶인 나침반 하나가 흘러내렸다.

“그 뒤로는 정말 쉬웠어. 네놈들이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포로 속에 파묻혀있더니 계집이 달려오더군. 동료가 죽어가고 있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포션을 가진 사람이 없냐면서. 크핫핫...!”

“우스운 일이지? 참말로 웃긴 이야기야. 안 그래?”

설마 내가

“어디 뭐라고 말 좀 해봐. 큭큭...! 왜 다시 벙어리가 됐어 새꺄.”

그녀에게 사람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지만 않았더라면­.

“안 그래, 도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통. 부르트는 목청. 발발하는 증오. 공명하듯 터져나오는 원통함. 처형장으로 변한 벼랑 위. 즐비한 모험가의 주검과. 사내를 향한 원한과. 그로 인해 피어오르는 짙은 원념. 상실로 궤결되는 분노.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증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무력. 내 처지를 돌아보아 비관. 한심함에 스며나오는 회한. 검을 움켜쥐어 봐도. 목을 놓아 부르짖어 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서. 절망. 공포. 기증. 증질. 참회하고. 후회하고. 다시금 절망에 빠져. 실의.

아무것도 아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왜? 너 지금 왜라고 했냐.”

사내가 난폭하게 라디를 걷어찼다. 반짝이는 쇠뇌가 수면 위를 미끄러져 피웅덩이 아래로 잠겨들었다. 이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기둥.

그가 내 검을 차내고 난폭하게 허벅지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땍땍거리지좀 마. 마물이 꼬이면 어쩌려고 그래.”

새내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올렸다. 남실거리는 화염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비로소 목도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죄다 빠져나가 부식된 두피를. 약품에 융해되어 주저앉은 반쪽 얼굴을. 그 아래 벌겋게 번들거리는 살덩어리와 힘줄을.

인의를 벗어난, 괴물.

그가 번뜩거리는 하얀 유리체를 굴려 나를 쳐다보았다.

“너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네놈들이 설치해둔 함정 때문에 피부가 녹아내렸지. 이제는 동료들도 날 징그럽다며 피하고 부하도 죄다 잃었어. 하나뿐이던 동향 친구도 죽었고, 대장의 신임마저 저버렸지.”

한차례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러니... 내게 남은 건 복수뿐이다.”

“─────!!!!!!!!!”

날붙이가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뱀의 몸줄기처럼 구불구불한 칼날이.

독기 어린 칼날이 허벅지를 찢어발기고, 조직을 벌리고, 뼈를 긁어내고, 사납게 뽑아낸 뒤, 발목의 힘줄을 끊고, 절단하고, 저며내고, 적출. 혈관을 도려내고, 살점을 베고, 손목을 비틀어서, 짓밟아, 뭉개며 조소한다.

“─────────!!!!!!!!!!!!!!!!!!”

“날뛰지 마. 빨리 끝장을 봐야 하니까. 아니, 이미 늦었나?”

쿡쿡. 가학적인 웃음. 다시금 반복. 고문.

온통 시뻘겋게 점등하여 명멸하는 세계 속에서,

고막이 파열되어 이명이 잠식한 세계 너머로부터 미약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제,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죽이려거든 절 죽이세요!!! 제가 함정을 설치했으니까... 그 사람은 관련 없으니까.... 도란을 풀어주세요.....”

흐릿한 시야 너머 라디는 원통함에 혀를 깨물었는지 입가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 날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웃는 얼굴을 꾸며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내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었다.

“히힉 힛...! 물론이지... 난 자비로우니까 선택권을 하나 줄게. 네가 죽고 저 계집을 살릴래? 아니면 비참하게 계집을 버리고 네가 살아날래?”

“안 돼요!!!!! 도란님!!! 전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도란님이라도 살아서 이 던전을 빠져나가세요... 부디.. 부탁할게요 도란님.... 절 버리고 떠나세요... 그리고.... 오늘 일을 잊고 살아가세요.....”

가슴이 미어졌다.

내 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쿨럭...!! 커흑.... 라디... 라디를 살려줘...!! 쟨 그냥 계약...! 쿨럭!!! 계, 계약 관계야...!! 남이라고!! 그러니... 크흑....! 제발.....”

“안 돼!!!!! 도란!!!!!!!”

“......”

자켄은 입가를 가리고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읊조렸다.

“...잘 알았다. 네 그 숭고한 정신은 잊지 않으마. 마지막 순간에서도 동료를 택할 줄이야...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쉽군.”

그가 느릿하게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 라디에게 향한다. 약속을 이행하러.

하지만ㅡ

불현듯 그 발걸음이 멈추고.

그림자 진 사내가 서서히 내 쪽을 돌아보고.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을 땐.

비웃음.

히죽이죽 올라간 입꼬리가, 명백한 조롱이 입가에 감돌고 있었다.

“크흐흣...! 그거 알아? 아무리 생각해 봤는데... 이대로 풀어주기에는 너무 아깝단 말이지. 그래서 네 사지를 자르고 눈앞에서 저 계집을 강간해 줄게.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 있게 네 머리통을 세워두고 망가질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지하실 안에 묶어두고, 질릴 때쯤이면 광산 근처 창관에 파는 거지.”

“매일매일매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매일매일매일 새까맣게 석탄칠을 한 광부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이 고장나고, 실성하고, 백지가 되어버리고,”

“나중엔 들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깃덩어리가 되겠지만... 뭐.”

약속대로 당장 죽이는 건 아니잖아?

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자 켄!!!!!!!!!!!!!!! 널 죽이겠다!!!!!!!!!!!!!!!!! 갈기갈기 조각내고!!!!!!!!!!!!!!! 찢어발기고 뼈를 갈라 잘근잘근 씹어먹겠다!!!!!!!!!!!!!!!!!!!”

“워후... 이건 좀 살벌한데....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구만? 네 눈동자를 봤을 때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지금껏 나도 꽤 거칠게 살아왔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 봤어.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사내가 조소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저 망연히 누워서 그가 라디를 향해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신의 상처로부터 둔중한 기운이 퍼져나왔다.

피와 살점으로 점철된 진흙탕에 처박혀 꼼짝하지 못했다.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코볼트 단검을 부여잡았지만ㅡ

“어허... 그러면 안 되지.”

­푸욱!!!!!!

놈이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내 손등 위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칼날에서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전해져온다.

어두컴컴한 시야 구석으로 검은 인영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어디서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무리 과거를 반추해봐도, 어떠한 대답조차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라곤 전무했으나

마침내 손에 넣은 행복마저 잃어버렸다.

원통하다.

원통하다. 원통하다. 원통하다.

깨질 듯 틀어막은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신경을 타고 퍼지는 끔찍한 절망에 내 존재가 씹어먹혔다.

흘러넘친 원한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등에 박힌 칼날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붙이. 둔중한 빛이 흘러내리는 그 도신이. 너무나 무거워서. 증오스러워서. 손등에 불이 붙었다. 맹렬한 고통. 찢어발기고. 새빨간 선혈. 지독한 악취. 너덜거리는 팔다리. 나락.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사고.

나. 도란은 절망했다. 좌절하고. 규탄하여.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그에 낙광하고. 번민하고. 인과가 뒤틀려 서원했지만. 다시 또 무너지고. 격양하고. 감정을 격발하고. 표백되어버린 논리 속에서 악을 지르고. 절감하며 발악하고. 차디찬 후회의 사슬이 신체를 끌어내리면. 포효가 공허히 울려퍼지고.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려서. 세상이 밉다. 증오한다. 가증할 인간들. 모조리 깨부수어. 육신을 덧칠하고. 공포. 살을 베고. 씹어뜯어. 광기. 복수.

하지만 이 자리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나약해 빠진 그저 인간이었기에.

무력(無力).

기진(??).

박약(??).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환멸과 저물어져 가는 시야.

흐릿해져 오는 청력.

스스러지는 자아 속에서

나, 인간 도란이 마지막 절망을 경험하던 때

먹먹한 소음 사이로 불협화음이 들려온다.

“이, 이 계집이...! 지금 무슨 짓을....!!!”

“.....”

“다, 당장 이거 안 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그곳엔ㅡ

새빨간 분말을 머리에 뒤집어쓴 라디가 있었다.

이제는 텅 비어버려, 수면 위에 파문을 자아내며 떨어진 은색 용기.

“지,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이, 이거 놔 이 계집!!!!”

결연한 각오.

한일자로 다문 입술에서 고결한 의지가 전해져왔다.

이어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천천히, 매끄러지며 피어났다.

상냥한 눈길.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 맑게 번져나는 미소.

푸른 눈동자가 더디게 벌어지며, 내게 이별을 고했다.

도란.

같이 놀러 가자는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먼저 떠나가게 돼서 미안해.

앞으로는 검 손질 귀찮다고 게을리하지 말고.

말톤하고도 잘 지내고.

나 없어도 아침에 잘 일어나야 해.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밥 잘 챙겨 먹어.

또...

......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함께 붐비는 시장을 구경하고

맑은 호숫가를 거닐고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밤새 두런거리고

별을 보며 웃고

너른 초원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을 보고 싶었어

널 돌아가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었어

이 사람이 내 애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싶었어

우리가 함께하다 보면 많은 일이 벌어졌을 거야

이런 건 어때?

하루는 나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가는 거야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해변을 거닐다 보면 소나기가 쏟아져

우리는 작은 오두막으로 달려가 비를 피하려 해

따뜻하고 아늑하게, 탁탁 타들어 가는 벽난로 앞에 앉아

물기를 말리고, 웃다 보면

점점 서로에게 이끌리는 거야

그렇게 손을 맞잡고

천천히 입을 맞추어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고

애타게 서로를 갈구하고

하룻밤을 같이한 뒤로는

아늑한 침대 위에서 함께 눈을 뜨는 거야

그렇게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보면

함께 늙어가다 보면

마지막엔 도란을 닮은 아들, 날 닮은 딸

그리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서로의 품에 안겨 잠드는

그런 나날을 잠시 상상해 봤어

.....

도란

미안해

혼자 가버려서

먼저 떠나버려서

그리고...

고마웠어

내게 사람의 따뜻함을 알려줘서

소녀의 마음을 알려줘서

잠시나마 행복했어

그럼... 안녕

날 잊고 행복해야 해 도란.

사랑했어.

“라디!!!!!!!!!!!!!!!!!!!!!!!!!!!!!!!!!!!!!!!!!!!!!!!!!!!!!!!!!!”

멧돼지가 달려와 그녀를 절벽 아래로 들이받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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