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4화 (84/375)

〈 84화 〉 이야기는 끝났다 #1

* * *

[084] 이야기는 끝났다 #1

라디가 사라졌다.

눈앞에서.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증오스러운 남자를 길동무 삼아.

나를 위해 희생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혼자 남았다.

또 혼자가 되었다.

나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 또 홀로 남겨졌다.

혼자...?

이제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떠나보냈다.

내가 약한 탓에.

지켜보이겠다고 각오했지만,

막상 지켜지는 건 항상 나였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던전에 들어오면서 했던 맹세는

이 순간

물거품이 되었고,

높다란 폭포에 이는 물결과 함께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나.

사소한 각오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나에게.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내가 이 세상을....

“......”

이젠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로소,

불씨가 꺼졌다.

당차게 모험을 떠났던 검은 머리 소년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났다.

시야가 어둠 속으로 암전되었다.

* * * * * * * * * *

“야.”

“......”

“야, 똥강아지.”

“.....”

“야!!!”

“아!! 왜 때려요?!! 머리 나빠지면 책임질 거예요!?”

“그럼 어른이 세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

그가 내 머리통을 한 차례 더 쥐어박았다.

억울한 마음을 가득 담아 밉살스럽게 노려봤지만, 그는 콧방귀를 뀌며 능글맞게 받아쳤다.

“어쭈... 그러다 한 대 치겠다?”

“....그러면 더 세게 때릴 거잖아요.”

“당연하지.”

징글징글한 미소.

내가 최대한의 적의를 눈빛에 꾹꾹 눌러 쏘아봐도, 그는 휘파람을 불며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곤 눈앞의 낚싯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 지긋지긋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니.

마음만 같아선 복수라도 하고 싶지만, 저번처럼 침낭 안에 불개미를 잔뜩 집어넣었다간, 상어 먹이 주기 실습을 손수 체험할 게 뻔했다.

물론 아무런 안전장치도, 아무런 미끼도 없이.

두 번 다신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상황이 다 아버지 때문이라는 자각은 있어요?”

“그러엄 물론이지. 그러니까 군말 말고 물고기나 낚아라. 오늘도 못 잡으면 우리 둘 다 진짜 굶어 죽는다.”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뭐, 한두 번이냐? 슬슬 너도 적응해야지.”

“.....”

입을 떡 벌렸다.

그 말대로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원망스런 눈길로 쳐다봐도 그는 느긋하게 수면 위를 떠다니는 낚시찌를 응시할 뿐이었다.

“......”

한숨을 내쉬며 눈씨름을 포기하자 새삼 그의 행색에 시선이 갔다.

성성한 밀짚모자에 색바랜 체크 무늬 셔츠. 구멍이 숭숭 뚫린 청바지는 학교 체험학습 때 전쟁사 박물관에서 보았던 베트콩의 바지를 훔쳐 입은 듯했다.

여기에 쇠스랑 하나만 얹어져 있으면 딱인데.

언뜻 보면 밭일 나온 농부처럼 추레한 차림이었지만, 짙은 흑발 아래 또렷한 이목구비와 굵은 얼굴선을 마주하면 옷차림이 무색해졌다.

하물며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셔츠 아래 터질 듯 팽팽한 근육은 엊그제 게임에서 봤던 오크 족장을 연상시킨다.

누가 이 남자를 고고학자라 생각하겠는가.

산악 동호회가 아니라 대학 개강총회를 가도 온갖 여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테지만, 그가 엄마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는 건 상상이 안 간다.

아버지가 불쑥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때렸다.

“아얏!!! 이번엔 또 뭔데요?!!”

“그냥.”

“.....”

“눈매가 나 닮은 게 재수 없어서.”

“.....”

그의 기행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때면 어떻게 매번 새롭고 신박한 방법으로 엿을 먹이는지... 가끔은 존경심이 들 정도다.

“....됐고, 빨리 구조될 방법이나 생각하세요.”

“너 하다못해 이젠 더위까지 먹었냐? 뭐라도 있어야 구조요청을 보내든가 말든가 하지.”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잖아요!!! 주위를 좀 둘러보세요!!!!”

파란. 파란. 파란색.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푸른 망망대해만이 펼쳐져 있을 뿐, 세상 전부를 덮을 듯 광활하게 뻗어나간 지평선에선 구조선은커녕 돛단배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결국 지구는 지구온난화로 멸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정경.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본의 아닌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에서 깨어났더니 보트 안이었더라.. 한 게 벌써 사흘 전. 이번에도 내 방에서 보쌈당한 모양이다. 납치범이 친아버지란 점에서 범죄가 성립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법원에서 따져봐야 알겠지마는.

그렇게 예고 없던 항해를 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망망대해로 떠밀려 왔다. 안 그래도 낡았던 구형 모터보트는 덜덜 떨어대며 나 죽겠소 호소했지만, 아직 이때까지는 회생의 기미가 보였다.

전자기기는 때려서 고친다는 아버지의 철칙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내 얼굴만 한 주먹이 엔진을 강타하자 철판이 움푹 찌그러들었다. 지난 몇십 년간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온갖 세상을 누볐을 보트가 숨을 거두는 데에는 단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GPS와 기타 항법 장치도 그와 운명을 함께한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아닌 밤중에 납치당한 나와, 극성 기계치인 아버지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

그렇게 우린 나흘째 표류 중이다.

이런 기구한 사연이 한 해에도 몇 번씩이나 발생한다니...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나마 날씨가 잠잠해져서 다행이지.”

“그럼 물론이고말고. 여기에 상어까지 몰려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우글우글 떼거리로 달려들어서 보트를 물어뜯고...”

“제발 그 입 좀 닥치세요!!!!”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아버지가 불길한 소리를 입에 담을 때면 대개 실제로 이루어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세모난 지느러미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허미 시펄!!!”

나는 즉시 낚싯대를 내던지고는 뱃전에서 물러섰다.

“...너 뭐하냐?”

“뭐, 뭐하냐고요? 저거 안 보여요?!!! 상어잖아요!! 상어!!!”

“...넌 대체 누구 아들이냐. 고추 때라.”

“당신 아들이거든요!!!”

“잘 봐라. 이건 단백질을 확보할 기회란 거다.”

그가 낚싯대를 거두고 뱃전에 서더니, 회칼로 팔뚝을 내리그어 핏방울을 바다에 흩뿌렸다.

“이 씨발 도랏...! 미쳤나....!! 이 근육 괴물!!! 드디어 근육이 뇌를 점령한 거예요?!!!! 상어를 더 불러모아서 어쩌려고요!!!”

“그냥 입 닫고 구경이나 해라 똥강아지. 그리고 너 욕했으니 나중에 스쿼트 한 시간이다.”

그는 가볍게 일축하고선 주먹을 움켜쥐었다. 뚝 뚝 떨어지다 못해 주르륵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상어들을 유혹하고­

­첨벙!!!!!!!!!!!!!!!

보트에 버금갈 정도로 거대한 상어가 수면 위로 튀어올랐다.

놈이 큼지막한 아가리를 벌려 이빨을 드러낸 순간ㅡ

“흐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푸화아아아아아확!!!!!!!!!!!!!!

아버지가 정권을 내지르자 상어 대가리가 터져나갔다.

휘몰아치는 풍압과 둥글게 갈라지는 바닷물, 이리저리 날뛰는 선체까지.

상어는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살점을 흩날리며 수면에 처박혔다.

“게 섯거라!!!!”

“아니...!! 잠깐!!!”

아버지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다른 상어들이 이때다 싶어 몰려들었지만, 주먹질 몇 번에 코가 뭉개지자 허겁지겁 뒤도 안 보고 줄행랑쳤다.

나는 벙찐 채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고함만으로 고라니의 고막을 터트려 기절시키거나 딱밤으로 집채만 한 멧돼지의 골통을 분쇄하는 건 봤어도, 설마 해양 생물까지 주름잡을 줄이야. 이러다가 언젠가는 육해(??)를 뛰어넘어 공(?)까지 점령하는 날이 오는 게 아닐까?

독수리 머리 위에 곧추서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버지를 상상하니 먹은 게 없는데도 속이 느글거렸다.

단김에 도약해 보트 위로 뛰어들어온 아버지의 손에는 내 덩치보다도 커다란 상어가 축 늘어져 대롱거렸다.

“어떠냐 똥강아지.”

“.....저 그냥 오늘부터 고추 떼고 딸 할게요.”

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시간이 지나자 해가 저물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지자 바다는 신비한 빛깔로 물들었다.

잔잔한 수면에 비추어진 수천수만의 별빛.

창공에서는 은하수가 가로지르며 별자리를 흩뿌렸고, 찬연한 불꽃을 토해내 세상을 뒤덮었다.

망망대해에서 바라보는 밤바다는 그 어떤 예술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푸른 그림자가 너르게 일렁이는 물살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사색에 젖어있자니, 끼릭끼릭 녹슨 쇳소리가 들리고 어두컴컴했던 수면에 환한 불꽃이 일었다.

“....일어나셨어요?”

“오냐.”

참 멍청하게도 이 작자는 상어를 잡은 뒤 과다출혈로 기절했다.

그러니까 누가 회칼로 팔뚝을 그으래.

“얼마나 지났냐?”

“한두 시간쯤 지났을 거예요.”

“그래? 역시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하네. 수면이야말로 최고의 보약이지.”

“.....”

그는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더니 뱃머리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상어를 손질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아버지가 내게 손짓했다.

“거기서 멀뚱멀뚱 보고만 있지 말고 이리 와. 상어 손질하는 법 가르쳐 줄게.”

“배워도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데...”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자, 여기 앉아 봐. 저 대가리 보이지? 저 아래 칼집을 내고 꼬리를 잘라낼 거야. 그다음은 칼날을 밀어넣고... 이렇게. 상어 가죽은 질기니까 칼을 이용해서 벗겨내는 편이 좋아. 그리고 이 다음엔....”

“.......”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굳은살투성이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부자라고는 죽어도 말 못 하지만, 이런 아버지가 싫지는 않다.

“....자, 이제 네가 한번 해봐라, 똥강아지.”

그가 회칼을 내게 쥐어주었다.

밤바다를 닮은 그의 눈동자엔 검은 물결이 잔잔하게 너울거렸다.

굳건한 애정과 부모의 자부심이 담긴...

“...네.”

나는 서투른 손동작으로 상어를 손질했다. 비록 미숙하고 굼떴지만 그는 싫증 내는 일 없이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털썩.

뱃전에 걸터앉아 상어 회를 맛보자 아버지가 소주를 들고 다가왔다.

“우리 똥강아지, 한잔할래?”

“....저 아직 중학생이거든요.”

“중학생이면 다 컸지 뭐. 아빠는 막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네 할아버지 창고에서 훔쳐다가 마셨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잔 대신 병째로 내게 떠밀고는 새로이 한 병을 더 꺼내 병나발을 불었다.

그가 흘깃 쳐다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다 마시기 전까지는 잘 생각하지 마라.”

“....친아빠 맞아요?”

“물론이지. 고추 큰 거 보니 넌 내 아들이 맞다.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안 놀라든?”

“여자애들이 제 고추 크기를 어떻게 알아요!!!”

...뒤에서 빨개진 얼굴로 수군거리는 것 같긴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조심스레 소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으나 쓰기만 하다. 어른들은 대체 왜 이런 걸 마시는 걸까.

“어때?”

“써요.”

“크흐흐흐.... 지금 잘 기억해둬. 나중엔 없어서 못 마신다.”

그가 병나발을 불 때마다 공병이 하나씩 생겨났다.

어찌나 주량도 센지, 아버지는 전혀 취하는 기색 없이 소주를 냅다 들이부으며 남자는 술에 강해야 한다는 등 쓸데없는 소리를 늘여놓았다.

“네 동생한테도 슬슬 술을 가르쳐야 할 텐데.”

“...미쳤어요? 걘 아직 초등학생이에요.”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그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말을 이었다.

“정란이는 조금 더 일찍 배워도 돼. 철부지 너와는 다르거든. 게다가 엔간히 이뻐야지.. 나중에 성인이 되면 온갖 남자란 남자들이 수작을 부려올 텐데 미리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공부 열심히 하는 얘 괜히 이상한 바람 들이지 마세요.”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아버지가 엄격하게 대하는 건 나뿐이다.

시도 때도 없이 기행을 벌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참 좋은 부모인데. ...고삐를 쥘 엄마가 없으면 망나니처럼 굴어서 문제지.

돌아가면 방금 한 말 일러바쳐야겠다. 엄마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내겠지. 아버지는 밥그릇 뺏긴 개처럼 일주일쯤 처량하게 지낼 테고.

“그래서... 요즘 학교는 어떠냐?”

“네...?”

“똥강아지,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 겨 묻은 개라도 봤냐?”

“....아버지가 지금까지 제 안부를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내가 남정네 안부를 알아서 뭐하게?”

“아니 자식한테 그게 무슨.... 별일 없어요. 아빠가 다짜고짜 납치해와서 돌아가면 또 보충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걸 제외하면....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여자친구라든가 그 뭐냐... 썸... 썸띵? 그런 거 없지?”

“썸녀 말이에요?”

“그래 그거. 요즘 젊은 애들은 뭐 요상한 말을 다 지어내가지고...”

“....없다면요?”

“병신. 지금까지 연애도 안 하고 뭐 했냐.”

“.....그러는 아버지는요.”

눈매를 게슴츠레 뜨고 쏘아봤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뱃전을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 나야 네 나이 땐 여자가 줄을 섰지. 두 팔에 다 안기도 힘들 정도였다 야.”

“.....엄마한테 이를 거예요.”

“은서도 다 알아.”

아버지가 해묵은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이어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애인 없으면 잘됐네, 너한테 소개해줄 약혼녀가 있다.”

“네...?”

“너. 약혼녀가 있다고.”

“.....???”

뭐라굽쇼?

이해불능. 뇌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단어를 하나씩 찬찬히 곱씹어 보고 나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이... 또 실없는 농담을....”

“.....”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진짜예요...?”

“그래.”

“.....”

나는 천천히 심호흡해 마음의 평정을 되찾....

“씹탱!!! 이 뇌까지 근육진 괴물!!!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예요?!!!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약혼녀라니!!! 아직 연애도 못 해봤느아아아악!!!!”

딱밤에 튕겨나가 뱃머리에 찧은 머리를 앞뒤로 부여잡고 원망스럽게 노려보자니, 그가 말조심하라는 듯 입가를 툭툭 두드렸다.

“....또 이번엔 뭔데요. 설마 만화처럼 내기에서 져서 약혼시킨다 뭐 그런 건 아니겠죠?”

“내기를 한 건 맞는데 내가 이겼다. 엄청 오래전에 했던 약속이라 지금까지 잊고 있었어.”

“그게 무슨 무책임한.... 엄마도 알고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 자리에 같이 있었으니까. 애초에 은서가 먼저 꺼낸 얘기야.”

“......”

말도 안 돼.

엄청난 충격이다. 내게 약혼자가 있다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약조를 했다는 점이.

평소 아버지의 행실을 생각해 보면, 내게 약혼녀가 아니라 숨겨진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심지어 당사자인 나도 모르는.

하지만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다분히 상식적인 우리 엄마가 그런 중대사를 내 의사 없이 결정했을 리 없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뭔 그렇다면 그런 거지 쫑알쫑알 말이 많아.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얘기야. 그쪽 부모랑 담판을 맺었어.”

“....사진 있어요?”

솔직히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약혼을 맺게 된 사람이 누군지 불쌍하기도 하고. 그 부모의 뻔뻔한 낯짝도 궁금하고.

하지만 아버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사진은 없는데 걱정 마라. 엄청 예쁠 테니까. 약속을 맺을 때 어린 모습을 잠깐 봤는데 지 엄마랑 판박이더라고. 지금쯤 엄청난 미인이 되어 있을걸?”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약속을 맺었는데 어린 모습을 봤다는 건... 적어도 저보단 연상이겠네요. 정확한 나이는? 특징 같은 건 없어요? 그... 가슴이 크다던가...”

“가슴 밝히는 거 보니 역시 넌 내 아들이 맞다. 그리고 나이... 나이는.... 너보다 조금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특징이라고 하면....”

묘한 침묵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일단 그 뒤에 이어질 내용에 집중했다.

그가 턱에 손을 짚고 고민하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너 뿔 좋아하냐?”

“......예?”

“뿔 좋아하냐고.”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에이, 지금까지 장난치신 거죠?”

“......”

아버지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지 입을 뻥끗거렸지만, 금세 싫증을 내고 손을 휘휘 저으며 병나발을 불었다.

아이씨. 그냥 무시할걸.

이 작자가 날 골려주고자 헛소리를 늘여놓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

나는 손에 든 소주병을 얌전히 내려놓고는 새까맣게 물든 지평선을 감상했다.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바다일까 해풍을 맞으며 가늠하고 있자니, 불현듯 저 멀리서부터 밝은 불빛이 다가왔다.

“어...!! 아버지!!! 저기 좀 봐요!! 저거 어선 맞죠?!! 빨리 구조요청...! 조명 스위치 어디 있어요?!! 빨리!!!”

“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버지 빨리...!! 이대로 저희 못 보고 그냥 지나치면 어떡해요?!!!”

내가 다급하게 잡아끌었지만,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팔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소주병을 기울이던 아버지는 손목의 싸구려 시계를 한번 응시하더니,

천천히 일어나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도란. 이 아비 말 잘 들어라.”

“아빠...?”

억센 손가락이 살갗을 파고들자 살짝 아팠다. 몸을 비틀어봐도 굳건한 두 손은 내 어깨에 뿌리를 내린 듯 놓아주지 않았다.

통증을 호소하며 그의 눈을 바라본 순간ㅡ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흑안에 생전 처음 보는 감정이 남실거렸기에.

“...내 가르침을 잘 새겨듣거라 도란. 남을 시기하지 말거라. 물욕에 눈이 멀지 말거라. 현실에 안주하지 말며, 나태를 경계하여 끝없이 정진해라. 선과 악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남의 첨언에 휘둘리지 말고, 네가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해라.”

“.....”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들이지 마. 아무도 믿지 마. 설령 네 앞에 신이 나타나더라도. 네가 믿음을 주어도 되는 건, 오롯이 너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나서주는 사람뿐이다.”

“....알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당부하셨던 말씀이잖아요.”

“그래, 그럼 그다음에 이어질 말도 알고 있겠지?”

“...소중한 사람을 많이 만들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게....”

“잘했다. 네가 명심해야 할 건 그거면 충분해. 이 아비랑 약속해라.”

“네, 약속할게요.”

“그래, 장하다... 안타깝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또 너를 떠나보내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훌륭한 우리 아들... 네가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구나. ...부디 밥이라도 잘 먹고 다녀라.”

그가 자상하게 웃으며 내 흑발을 쓰다듬었다.

언제쯤이었을까.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 건.

“왜 그래요...? 갑자기 작별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

그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금 얼굴을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온화했던 눈동자엔 더 이상 일말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운, 각오의 빛.

“아, 아빠?”

“......”

그가 억척스러운 손길로 내 목덜미를 들어올렸다.

나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아, 아버지..? 아빠!! 잠깐....!! 잠깐만...!!”

그가 나를 보트 끄트머리로 끌고 갔다.

이윽고 두꺼운 다섯 손가락이 불시에 펴지자­

­첨벙!!!!!

“푸하핫...!! 이게 무슨...! 아빠!!! 아빠!!!!!”

나는 시커먼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한겨울 해가 지고 난 뒤의 밤바다는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만큼이나 차가웠던지라, 그만 온몸이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뭇 다른 아버지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끼며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어째선지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뭐, 뭣...! 헤, 헤엄이 안 쳐져요!! 살려... 푸핫...! 살려주.... 아빠!!!!!!”

“.....”

공포.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담한 눈길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끝까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입꼬리를 미끄러뜨리며 그믐달처럼 차가운 미소를 자아냈다.

“도란, 한 가지 말 안 한 게 있다.”

“넌 조금 특별해.”

“살다 보면 위험할 때도 있겠지.”

“네 역량만으론 헤쳐나갈 수 없는 상황도 생길 거야.”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거라.”

*

“저, 저건 뭐야...?”

“....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절벽 위.

피로 물든 지평선.

수면을 기어오르는 한 형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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