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5화 (85/375)

〈 85화 〉 이야기는 끝났다 #2

* * *

[085] 이야기는 끝났다 #2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저, 저건 뭐야...?”

“...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바위 뒤 숨죽인 도적들.

놈들도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의혹에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

수면을 기어오르는 한 형체.

저게 뭘까.

내 짧은 식견으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가 아니라 다른 선배 기사가 왔다면 어땠을까?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

왕실 특무부대 소속 가칭 틋콩은 납작 엎드린 채 바위 너머의 정경을 염탐했다.

새로이 발견된 던전을 조사하던 중 대규모 도적단의 존재를 미연에 감지하고 잠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야....”

민간인에게 유통이 금지된 불 마석을 일개 도적이 취급하는 걸로도 모자라 방화에 쓸 타르까지 준비하다니.. 설마 습도가 높은 이곳의 환경을 고려한 거라면 상당한 수완이다.

그래도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임무를 수행하며 많은 범죄조직을 만나보았고, 이 정도라면 보고서에 한두 줄 추가하고 끝났을 이야기니까.

하지만 도중부터는 마물 범람 현상에 더불어 특이 개체까지 등장했다. 안전을 고려하면 당장 모험가들을 대피시켜야 할 정도로 중대 사안이지만, 던전의 부산물과 부가 이득이 가져다주는 막대한 수입을 포기할 순 없으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토벌 부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할 셈이었다.

하지만 ‘저건’ 대체 뭐라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트, 틋콩님... 저 가느다란 건 뭐죠...?”

“...나도 몰라.”

“이럴 수가... 틋콩님마저 모르는 게 존재하다니...”

수습 종자 로닌이 입을 벌리고 신음했다.

하지만 곧바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유서를 적는 데 몰두했다.

“에이씨... 이번 임무에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틋콩님! 여기 마지막 문단에 장례식은 최대한 거창하게 해달라고 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조의금은 두둑이 넣어줘가 좋을까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음... 그런가...”

로닌이 깃펜으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금 손을 놀렸다.

녀석의 유서 따위 아무래도 좋다.

“....야, 너 저 마물이 뭔지 알겠냐?”

“네? 틋콩님도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너 공작 가문 출신이잖아. 아버님 서재라든가... 본 적 없어?”

“없는데요?”

“....그래 방해해서 미안하다. 마저 해라.”

“네!”

“......”

틋콩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벼랑 위 붉은 수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중심에서 서서히 솟아나는 검은 형체를.

위화감(???).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떻게 저런 생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미지에서 오는 근본적인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작은 마을에 시작된 역병의 조짐처럼 불길한.

익사체에 들러붙은 따개비처럼 불쾌한.

짧은 인생, 한 가지 단언하자면

저건 절대로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다.

*

피로 물든 지평선.

너른 피 웅덩이.

잔잔한 피 호수에서

도란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걸 도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더 이상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뒷목을 긁적이지도, 버릇처럼 검 손잡이를 매만지지도 않았다.

하물며 인간조차 아니었다.

─새까만 형체.

검도 장비도 일체의 검정색으로 물든 모습.

전신에 먹물을 뒤집어쓴 듯한 그 자태는

도란이 일전에 마주했던 그림자 여왕과 닮아있었다.

­꾸르륵...! 끄륵?!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멧돼지가 뒷다리를 움찔하며 반 발자국 물러났다.

기묘한 일이다.

지난 몇백 년간 숲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을 거대 괴수가 겁을 먹다니.

이 계층에서 그를 상회하는 존재는 늑대뿐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물며 이런 작은 생명체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오랜 벗이자 경쟁자인 두더지가 방금 이 장면을 봤다면 엄청 비웃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증명하겠다.

내가 방금 느꼈던 감정이, 단순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콰르르륵! 콰르륵!!

멧돼지가 발을 굴렀다.

엄니를 치켜세우고 표적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는 자신 있었다.

자랑스러운 엄니만 있으면 못 부술 게 없었다.

온 세상 산천초목이 거대한 엄니 앞에 산산조각났으니

이 되다만 생명체 또한 마찬가지리라.

멧돼지가 콧방귀를 뀌고,

시커먼 형체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였다ㅡ

“사, 사라졌어...?”

“무슨 일이에요?”

“......”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검은 형체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걸.

마치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듯이’.

내 예상이 맞다면...

“로닌...! 지금 유서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 그럼....”

“앞을 봐 멍청...!”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가각!!!!!!!!!!!!!!!!!!!!!!!!!!!!!!

지면이 폭사했다.

단단한 지각을 뚫고 수십 가닥의 검은 덩굴이 솟구쳤다.

하나하나가 거목의 뿌리처럼 굵직한 줄기.

재앙과도 같은 불가사의한 힘이 먹잇감의 사지를 옭아매었다.

당황한 멧돼지가 몸부림쳤지만,

칠흑의 그림자 다발은 끊어지지 않고 더욱 세게 옥죄여갔다.

­꽈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뀌이이이이이이익!!!!!!!!

도적들의 끔찍한 단말마만이 가득하던 벼랑에 멧돼지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저 수십 톤의 거구를 뭉개버릴 힘이라니.

터무니없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근처의 암반이 무너져내리며 그림자 다발이 추가로 돋아났다.

검은 넝쿨은 순식간에 지면을 휩쓸며 쇄도했고­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꿰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멧돼지의 두꺼운 가죽을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뿜어져 나오는 선혈.

인간의 몸뚱어리만 한 핏덩이들이 후두둑 지상에 떨어졌다.

그림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꿈틀거리며 멧돼지 속을 유린했다.

먹잇감을 물고 회전하는 악어처럼. 동물 사체에 머리를 처박고 살을 파먹는 치어 떼처럼.

검은 아지랑이를 뿜어대며 일렁이는 그림자 다발은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악신(??)과 닮았고

옛적에 잊혀진 고대 생명체의 일각을 연상케도 했다.

­스르륵.

그림자 다발이 갈라지더니 검은 형체가 걸어나왔다.

검은 형체는 피철갑이 된 채 사지가 결박된 멧돼지에게 향했다.

두려움에 혼탁하게 번진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가 숨이 멎지도 않은 멧돼지를 산 채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넝쿨 또한 먹이를 둘러싸고 첨단을 살점에 파묻어 선혈을 빨아마셨다.

살아 움찔거리는 붉은 핏덩이를 난폭하게 물어뜯으며 점점 선명해지는 음영을 보니 지독한 혐오감이 치밀었다.

“...로닌, 그림자를 다루는 마물 얘기 들어본 적 있어?”

“그림자요? 섀도우 계열 몬스터 말이에요?”

“....아니 그런 어쭙잖은 거 말고. 말 그대로 그림자를 권속처럼 부린다거나...”

“에이... 그런 몬스터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 게 있으면 이미 알려졌겠죠. 그럼 막 그림자 속에서 병사를 소환하거나 하게요? 차라리 사람 말을 알아듣는 히드라가 더 현실성 있겠어요.”

“......”

로닌은 틋콩을 딱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금 유서를 쓰는데 몰두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림자를 수족처럼 부리는 마물?

불가능하다.

그런 괴물이 있었더라면 이미 왕실에도 존재가 알려졌겠지.

유명 모험가 길드에 외주를 맡기거나, 마탑의 마법사 혹은 상급 기사들로만 이루어진 토벌대가 구성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 눈앞의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나마 가능성을 꼽자면...

“...로닌, 너 대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괴물들에 대해 들어봤어? 아니면 악신의 피조물이라던가...”

“그건 왜요?”

“그냥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음...”

로닌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뇌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요?”

“......”

“아니, 오백 년도 더 지난 과거 얘기를 왜 지금 해요? 당장 오 분 뒤에 살아있을지조차 장담 못 하는데.”

“......”

아니, 이건 중요한 문제다.

내 직감이 말했다.

입에 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끔찍한 존재.

대전쟁 이전 존재했다던 괴물들. 구시대의 잔재.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 편린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로닌 하이젠베르그,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

“네...? 갑자기요?”

“그래.”

“앗! 내 유서...!”

틋콩이 로닌의 양피지와 깃펜을 빼앗아 거칠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할 의무가 있다.

그래,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료가 왕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걸 틋콩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두려움과 임무에 대한 열정이 상충하며 자아내는 도파민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놈과 눈이 마주치기 전까진­

─섬뜩.

차가운 오한이 전신을 덮쳤다.

밤 부둣가에 범람하는 파도처럼 공포가 밀려들었다.

휘몰아치는 칠흑의 아지랑이 가운데 선 존재.

귀밑까지 쫙 찢어진 새빨간 입.

핏덩이를 입가에 묻힌 채 소름끼치게 웃는 그 존재를 보자 깨달았다.

기록의 의무?

개소리.

당장,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

검은 덩굴이 멧돼지를 짓눌렀다.

다리를 옭아매고 복부를 꿰뚫어 전신을 구속했다.

하면, 덩굴의 주인은 지독한 누린내를 풍기는 날고기를 물어뜯었다.

우두머리에게 위기가 닥친 걸 깨닫고 몰려든 마물이 사방을 에워쌌지만 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거대한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끼리리리리리리리릭!!!!!!!!!

아무런 전조 없이 땅이 불거졌다.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거대 두더지가 솟아오르며 그림자의 주인에게 쇄도했다.

몸무게만 수 톤에 육박하는 두더지의 공격은 질량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으나­

[.....]

검은 형체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새까만 연무가 솟구쳤다.

젖은 나뭇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맹렬한 기세로 용솟음치는 검은 장벽이 그의 종적을 감췄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두더지가 촉수를 벌름거리며 그의 종적을 쫓았으나 이내 온몸을 털을 곤두세우며 얼어붙었다.

바위 아래, 젖은 흙더미, 박살 난 고목, 한밤의 어둠이 내리깔린 모든 공간에서 그의 기척이 느껴졌기에.

뭔가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자각한 두더지가 재빨리 땅속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키리리리리리릭?!!!!!!!!!

용암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출렁거리는 놈의 뱃살에는 인간 덩치만 한 개미 수십 마리가 살가죽을 물어뜯고 있었다.

전신이 칠흑으로 물든, 그림자 병정.

음영으로 이루어진 검은 병사들이 두더지가 파 놓은 굴에서 바글바글 기어나왔다.

­카르르르륵?! 카르르르!! 키르!!!

­카칵!! 카카칵!!! 카각!!!

­키기기기긱!!!!

두더지가 땅속으로 숨을 걸 예상하고 미리 준비 중이던 충직한 그림자 군단이 지상에 도래했다.

주특기가 막힌 이상, 오랜 세월 숲의 지배자 중 하나로 군림했을 두더지도 압도적 물량 앞에는 손수무책이었다.

곧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사탕처럼 개미들이 두더지를 뒤덮고, 뱃가죽을 뚫어 기름진 내장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이뿐만으론 왕성한 개미 군단의 식욕을 충족하기 무리였던지라­

­키리리리리릭?!

­카르!!!

먹이 경쟁에서 도태된 개미들이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그 열렬한 눈길을 뒤집어쓴 마물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낭자한 살덩어리와 비릿한 혈향, 잔혹한 참상에 잔뜩 얼어붙은 몬스터와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인간 무리.

뭐든지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보는 그들에게 이곳은 뷔페와 다름없었을 테니.

톱니가 불거진 주둥이에서 묽은 군침이 흘러내리고, 가느다란 다리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서서히 움직이다 보면,

도처에서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한때 도란이라고 불리었던 존재는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광소했다.

이곳은 현세에 현현한 지옥.

그의 영토일지니.

자신의 색채가 세상을 뒤덮어가는 모습을 관조하며 머리 위, 문명을 건설하고 살아갈 지상의 인간들을 눈에 담았다.

그때였다ㅡ

­───────!!!!!!!!!!!!!

별안간 은빛 섬광이 치달았다.

달빛을 수천수만 배로 압축한 듯 강렬한 빛.

순백의 빛줄기가 대지를 찢어발기며 도란이 서 있던 일대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하얗게 물들었던 세상이 차차 색조를 되찾고, 서서히 섬광이 멎었을 땐 깊은 골짜기가 생겨나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끓어오르는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들고 배가 터져나간 개미들이 물살에 휘말렸다.

한순간에 지형이 뒤바꿀 정도의 위력.

[......]

검은 인영이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들자, 저 멀리 거만하게 선 늑대가 사납게 입꼬리를 올렸다.

놈의 샛노란 눈동자가 호기로운 빛을 띠었다.

신의 대행자처럼 고고한 자태.

은빛 늑대가 주둥이를 벌리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쏘아졌던 섬광과 같은 빛.

그 강력한 위력으로도 모자라 연사까지 가능하다니.

저걸 정통으로 맞는다면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

도란은 난폭하게 웃어젖히며 힘을 끌어모았다.

그가 집중하자 검은 기운이 빨려들었다.

빛이 명멸하고, 어둠이 공명한다.

일전에 여왕이 동굴 내부에서 모험가들을 전멸시켰던 기술과 같은 전조.

허나 그 기세는 더욱 흉포하고 포악하다.

팽배한 피 안개가 모여들자 붉은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검은 덩굴이 맹렬하게 요동치며 날카로운 가시를 사방으로 돋쳐냈다.

짙어지는 음영이 시야를 칠흑으로 물들였다.

무구(無?)의 백색.최흉(??)의 검은색.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두 힘이 괴여들자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만상을 이룬 던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근의 모든 생명체는 숨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흔들리는 지각 탓에 발을 딛고 서지도 못한 채.

공기 중에 밀집하는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대기의 진동이 최고조에 달하고

마침내 떨림이 멎은 순간­

마침내 두 힘이

*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투구를 매만졌다.

시도했었다.

육체가 심해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업용 망치로 전신을 강타하는 듯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이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비틀려나왔다.

분명 내 목소리일 텐데, 이상하다.

물속에 잠긴 듯, 두개골을 타고 흐르는 어렴풋한 울림만이 전해져왔다.

더군다나.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암흑뿐이었다.

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알이 타버린 것처럼.

어둠만이 자리한 이곳에, 나는 혼자였다.

정말로 바다에 가라앉아 버린 걸까?

“......”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깨질 듯한 머리에서 들려오는 이명이 사고를 잠식했다.

생각을 되풀이할수록 깊은 늪에 잠겨드는 기분이다.

의식이 다시 수면 아래로 잠겨들어가는 찰나,

­촤악!

무언가가 내 몸 위에 흩뿌려졌다.

뚜렷한 통증을 뚫고 간신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서늘한 무언가가 닿은 부분부터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나를 돌보고 있었다.

누굴까.

라디인가.

녀석의 맑은 웃음을 떠올리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사무치게 그리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어째서일까.

눈을 뜨면 바로 만날 수 있을 텐데.

언제까지고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눈만 뜨면...

“정신이 좀 드나, 도란”

시야가 밝아졌다.

욱신거리는 몸을 다그쳐 일으켰다.

지근거리는 고개를 들자, 그곳엔

말톤이 있었다.

짙은 담녹색 눈동자로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그의 손에는 기시감이 드는 빈 유리병이 쥐어져 있었고,

슬픔에 젖은 외눈을 바라보자...

외눈.

외눈.

외눈...?

말톤은 외눈이 아니다.

두려워졌다.

깨진 기억 파편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절벽 위 야영지.

도적 때의 습격.

...중상을 입은 말톤.

그리고,

그리고....

.....

“....그렇군.”

말톤이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한 듯하다.

숙연한 그의 태도에 나 또한 다시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라디가 떠났다는 현실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치발을 들어 상냥하게 흑발을 쓸어주던 그녀가, 새침하게 웃으며 볼을 콕콕 찌르던 그녀가

달밤 아래서 손을 맞잡고 사랑을 속삭였던 그녀와의 기억이

먹먹한 추억이 되어

잔인한 비수가 되어

심장을 도려내었다.

“......”

마침내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말톤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많은 일이 벌어졌나 보군. 미안하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

나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내 유일한 벗을 눈에 담았다.

그리곤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록 혈색은 창백할지언정 검게 타버렸던 피부가 벗겨진 자리엔 붉은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장기가 들여다보였던 환부에는 얇은 세포층이 들이찼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했던 왼쪽 눈에 금빛 광휘가 아른거리며 서서히 재생되고 있었다.

“너 그...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거야...”

“....이건...”

“포션...?”

“.....그건 아닐세, 단지.....”

말톤이 웃옷으로 상처를 덮으며 대답을 주저하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가호일세.”

“가호...?”

“그렇네. ....이 이야긴 나중에 하도록 하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가 굽혔던 한쪽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제야 주변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구덩이.

나는 거대한 크레이터 한복판에 누워있었다.

머리가 지근거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기억이 안 나...”

고온에 노출되어 검게 번들거리는 분화구를 보자 두통이 일었다.

말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내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었다.

“....조금 힘들겠지만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네. 곧 모험가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올 테니.”

“모험가...? 왜 우리가 모험가를 피해야 해...?”

“......”

말톤이 무언으로 재촉했다. 도움을 받아 일어나자 그가 부축해주려 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가벼워.”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육신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땅을 딛는 발바닥에 힘이 실리고, 손끝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귀를 기울이자 둔탁한 말톤의 심장 박동이 들려왔다.

시야가 이전보다 명료해지고, 타오르는 불길의 소음이 또렷해졌다.

나 도란은, 감각이 한층 날카로워졌음을 자각했다.

어쩐지 메이스에 손을 얹은 채 긴장한 말톤과 함께 구덩이를 걸어나오자 황량한 대지가 보였다.

잠시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야영지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괴수들이 이렇게나 강력했단 말인가.

나는 범람한 강물과 갈아엎어진 땅을 멍하니 응시하였다.

문뜩 고개를 들어 늑대가 앉아있었던 바위를 올려다보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우리는 야영지를 가로질러 텐트로 돌아왔다.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신세를 졌던 텐트는 이리저리 찢기고 파묻혀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강물에 젖은 잔해더미를 힘겹게 치워내고 천막을 들추자 배낭이 보였다.

나는 넝마가 되어버린 옷을 갈아입었다.

맨발 대신 말톤의 여분 부츠를 빌려 신었다.

쓸만한 짐을 추려내 등에 짊어지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절벽을 향해.

“......”

말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봐왔다.

조용히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입술을 열어 고했다.

“...도란, 그녀 일은 정말 유감이네.”

“자네가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지만...”

“이상한 생각 말게.”

“도란...”

“......”

찰나, 발치에 파묻힌 무언가가 반짝였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물체를 주워들었다.

“.....”

크로스보우.

언제나 그녀와 함께하던 쇠뇌가 수면에 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표면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자 기계장치가 은은하게 빛났다.

옛 주인이 그리워 울듯이.

“...도란.”

“부탁하네... 제발 내 말 좀 듣게나.”

“자네마저 잃을 순 없다네.”

“도란...”

“말톤.”

크로스보우를 품에 안았다. 배낭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맹세했었어.”

“....도란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을 지켜보이겠다고.”

“도란....”

“약속했어.”

“....부탁하네.”

“반드시 셋이서 돌아가겠다고.”

“지금이 그 약속을 지킬 때야.”

들린다.

저 아래

나를 찾는 목소리가.

“....나와도 약속하게.”

“살아남겠다고.”

“...반드시 구하러 가겠네.”

“.....그래.”

나는 칠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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