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생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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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생존 #2
인외마경(人???).
단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사람이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끔찍한 존재들의 소굴이란 뜻이다.
이 세계에서 그런 장소라 함은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자연환경이 험난한 지역을 예로 들 수 있다.
베라스틴이 포함된 비스마르크 왕국령 남쪽에는 거대한 대사막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사시사철 붉은 태양이 내리쬐는 그곳에는 유랑민들이 모여 만든 취락과 끝이 없는 캐러밴의 행렬, 황금을 노리고 찾아온 여행자와 그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도적이 득시글거린다.
허나 사막을 자유롭게 누비는 그들조차 얼씬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
적사(赤?)의 최심부.
대사막의 중심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역이 존재한다.
도마뱀이나 딱정벌레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많은 학자가 이곳에 과거 수많은 문명을 멸망시켰던 대전쟁의 비밀을 풀 단서가 있을 거라 추측하지만, 막상 발걸음을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만만하게 떠난 이들 중 그 누구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척박한 자연환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침입을 막는 천연 요새가 되기도 한다.
반면,
그와는 다른 의미의 마경도 있다.
원시 제도.
뱃사람의 목격담으로만 전해지는 신비의 섬.
소금기 찌든 선술집에서 싸구려 럼을 대접하면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저 바다 너머 어딘가에는 안개와 함께 출몰하는 미지의 섬이 존재하고, 인간의 공포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원시 생명체들이 살아간다고.
독자적인 환경에서 진화해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혹은 수 세기 전 원초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몬스터의 선조이며, 우리가 보는 수많은 마물은 놈들의 열화판에 불과하다고.
오래전에 주워들었던 이 이야기가 왜 뇌리를 스쳤는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과 겹쳐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던전 7계층.
앞서 말한 두 장소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는 그에 한없이 근접한 곳이 아닐까?
나는 숨죽인 채 거대 매머드 무리를 목도하며 그런 감상을 품었다.
A급 정예 파티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는 이야기. 소문이란 으레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완전히 허황되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괴물을 마주한다면 아무리 초인들이라 해도 쉬이 감당할 수 없을 테니.
“.......”
이로써 자명해진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나는 혼자만의 힘으로 이 마경을 헤쳐나가 라디를 찾고 탈출해야만 한다.
A급 모험가도 탐색을 포기한 이곳에 구조대는 없다.
우연히 다른 모험가와 조우하는 일도 없다.
광활하고 낯선 공간 속.
나는 혼자다.
*
마지막 매머드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지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땅을 짚자 몸 위에 수북하게 쌓인 눈더미가 흘러내렸다.
삼십여 분 가까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지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하아.... 하..”
가쁜 호흡을 내뱉자 창백한 입김이 피어올랐다.
전신에 오한이 들고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다.
저체온증의 초기 증세.
여기서 쓰러지면
죽는다.
나는 녹슨 고철처럼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침엽수림으로 향했다.
몸을 굽혀 주변에 널린 잔가지를 주워들었다.
손가락이 굳은 탓에 놓치고 말았다.
거친 나무껍질에 쓸려 피부가 화끈거리자 나는 재빨리 단념하고 폭포로 향했다.
내가 깨어났던 바로 그 동굴로.
둥글게 회전하는 세계를 하릴없이 걸었다.
얼어붙은 몸을 채찍질해 쓰러지듯 굴 안으로 들어왔다.
배낭을 내동댕이치자 부서진 나뭇가지와 전나무 이파리가 쏟아졌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우치를 열어 부싯돌을 꺼냈다.
떨어뜨렸다.
손가락을 구부릴 수가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입김을 불어 얼어붙은 손을 녹이고 부싯돌을 주워들었다.
두 돌멩이를 맞부딪히자 통증이 몰아닥쳤다.
돌조각이 떨어질 때마다 피부 조직도 같이 뜯겨나갔다.
나는 이를 악다물고 계속 부싯돌을 마찰했다.
작은 불똥이 피었다.
다시 맞부딪혔다.
살이 찢겨났다.
피가 고인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한...
얼마나 흘렀을까.
점점 아득해져가는 시야 속,
동굴 안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하하....”
지친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잠시 후.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타닥타닥. 그을음을 피워올리는 불길 옆에서 정신을 차렸다.
나뭇가지를 배낭에 넣어 말린 게 신의 한 수였다. 기지를 발휘해 가방 안쪽 천을 잘라내 부싯깃으로 활용한 것도 유효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테지.
따뜻한 불을 쬐니 조금 여유가 돌아왔다.
나는 보리빵 한 귀퉁이를 뜯어내 침으로 살살 녹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계획을 좀 앞당겨야겠어.”
여기가 7층이란 건 안 이상 더욱 서둘러야 한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생존 확률은 급격하게 낮아질 터.
극심한 추위에 더불어 강력한 마물까지. 심지어 라디는 무기도 없이 고립된 상태다. 불을 피울 수단이 있는지조차 불확실하고, 나와는 달리 여분 식량마저 전무하다.
시간이 없다.
이 마경에서 라디를 찾고 살아나가려면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낭비해선 안 된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을 다잡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열기구에 구멍을 뚫어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조난당했을 당시의 기억을.
“...일단 방한 대책부터 준비해야겠어.”
서둘러 동굴 밖 침엽수림에서 나뭇가지를 추가로 가져왔다. 이후 대충 눈을 털어낸 다음 모닥불 옆에 늘여놓아 건조했다.
땔감으로 쓰고 남은 잔가지는 단열재 역할을 하도록 옷 사이에 집어넣었고, 전나무 속껍질의 섬유질을 코볼트 단검으로 길게 찢어 위급상황에 쓸 예비 부싯깃을 만들었다.
스윽...
“.....”
파우치에서 단도를 꺼냈다. 꺼림칙한 이 무기를 굳이 써야 하나 고민했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젓고는 작업에 착수했다. 곧게 뻗은 잔가지 두 개를 추려내 발 치수보다 조금 크게 자른 뒤, 배낭 안쪽의 남는 천을 뜯어내고 새끼줄처럼 꼬아 간단한 끈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설원을 횡단하려면 덧신이 필요하겠지...’
이 재료들로는 부츠에 덧댈 설피를 제작할 예정이다. 시간과 재료가 한정된 만큼 조악한 만듦새일지언정, 당장 눈에 빠지는 걸 어느 정도 방지해 줄 터다.
또 한 번 실감하지만 말톤에게 부츠를 빌려와 다행이었다.
만약 넝마가 되어버린 샌들을 그대로 신고 왔다면, 덧신이고 뭐고 지금쯤 내 발가락은 이미 떨어져나갔겠지.
나는 완성된 설피에 만족하며 방수천으로 눈을 돌렸다.
마 섬유를 두껍게 짜 만든 아마포에 밀랍과 웜뱃의 지방을 코팅한 물건. 라디의 크로스보우를 감쌌던 뻣뻣한 방수천을 풀러 머리에 덮자 아슬아슬하게 목까지 가릴 수 있었다.
“...쇠뇌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생존이 우선이니까.”
나는 단도로 방수포에 구멍을 뚫은 뒤 끈을 연결해 복면을 만들었다. 단순히 바람을 막는 게 고작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꽤 보온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거다. 체온손실을 막으려면 피부가 드러나는 면적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완성된 복면을 설피 옆에 내려놓았다. 숨구멍은 일부러 뚫지 않았다. 조금 불편할지라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기보단 입김으로 데운 공기를 호흡하는 게 체온 유지에 훨씬 유리하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눈앞의 두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코볼트 단검과 검은 단도. 영하의 온도에서는 날붙이가 살갗에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속해서 체온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심하면 피부에 달라붙을 수도 있으니.
나는 항상 바지 밑단 아래에 고정해두던 단검집을 풀어 웃옷 소매 위에 매달았다. 검은 단도는 새로운 나무줄기에 날을 끼운 뒤 파우치 안에 집어넣었다. 이러면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지.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머지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나는 만반의 각오를 다지며 동굴 밖으로 걸어나왔다.
*
“이제 안전하겠지...?”
매머드 무리와 마주쳤던 협곡 끝자락에 다다랐다.
노심초사하며 빙벽 너머를 엿보았지만 다행히도 놈들은 완전히 자리를 뜬 듯하다.
“어우... 추워...”
뽀득.. 뽀드득...
방한 대책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추운 건 매한가지. 아무리 7계층이라고는 해도 먹이사슬의 기저를 이루는 초식동물이 있을 터, 사냥에 성공하면 털가죽을 확보해 옷을 만들 수 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꿈같은 얘기다.
하다못해 죽은 짐승이라도 발견한다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골짜기 내부는 상공의 구멍으로부터 유입되는 공기 덕에 비교적 따뜻했던 모양인지, 협곡을 빠져나오자마자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이제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할 때다.
“....일단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보자.”
바람은 절대로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아무리 던전이라고 해도 자연의 법칙을 피해갈 순 없다. 그 끝에는 대류 현상을 일으킬 정도의 열원지가 있을 테고, 이의 정체는 다른 계층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아는 라디라면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녀석도 분명 탈출을 목적으로 움직일 테니, 운이 좋으면 바람을 거슬러 나아가던 도중에 마주칠지도 모른다.
라디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모르는 이상 녀석과 만날 확률을 높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여긴 대체 얼마나 넓은 걸까?
설피의 존재에 감사하며 완만한 경사를 오르자 드넓은 설원이 펼쳐졌다. 눈 언덕 위에 서서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새하얀 세상만이 존재할 뿐.
뿌연 눈발 사이로 어렴풋이 비치는 시커먼 수직굴의 존재로 간신히 천장의 위치를 어림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
하지만 동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면 나도 생존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나는 다시금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우고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말톤이 7계층에선 낮이 하루의 절반도 안 된다고 했던가.
밤이 되어 발광 이끼가 내뿜는 복사열이 줄어들면 기온이 떨어진다. 여기서 더 추워지면 이동하는 건 당연히 무리고, 당장 숨을 곳부터 찾아야 한다.
던전의 밤이 도래하면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배회하기 시작할 테니까.
날이 어두워져야 사냥을 개시하는 놈들이 있다. 녀석들은 야음을 틈타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그런 놈들에게 비명횡사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거처를 확보해야 한다.
퍼석!!
나는 서둘러 비탈면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허허벌판에 그냥 드러누웠다간 꼼짝없이 얼어 죽을 터, 다행히 추운 기후에 눈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설동을 만들기에 적합하다. 조금 힘이 들긴 하지만 입자가 너무 고우면 도중에 무너질 수도 있으니 이 정도 굳기가 딱 좋다.
파삭!
“읏...?!!”
맨손으로 땅을 파 내려가다 보니 날카롭게 응고된 눈 결정에 피부가 찢어졌다. 새하얀 눈밭 위에 붉은 선혈이 튀고 손이 깨질 듯 얼얼하다.
나는 즉각 머리에 덮은 방수포를 풀러 손에 감은 뒤, 칼집을 써서 눈을 파헤쳤다. 눈삽, 하다못해 냄비같이 오목한 물건이 있으면 눈을 퍼내기가 훨씬 편했을 테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사치겠지.
발광 이끼가 하나둘씩 휴지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날이 어두워졌다. 체력이 급격하게 소모됨에 따라 스멀스멀 땀방울이 배어나왔고, 점점 거세지기 시작한 바람과 맞물려 기하급수적으로 체온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더 경과했다간 목숨이 위험하다.
나는 깨질 듯한 머리를 무시하고 계속 손을 놀렸다. 지금 쉬었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거창하게 파낼 필요도 없다. 그저 내 한 몸만 건사할 수 있으면 되니.
입김조차 굳어버리는 극한의 날씨.
입가에 새하얀 성에가 낄 때 즈음이 되어서야 마지막 삽을 떠냈다. 나는 굴이 완성되자마자 황급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이 구덩이는 설동이 아니라 무덤이 되어버릴 테니까.
나는 입구를 숨구멍만 남기고 틀어막은 뒤, 칼집을 이용해 단단하게 벽을 다지기 시작했다. 거친 맞바람을 헤치며 걸어온 데다 굴을 파느라 체력을 거의 다 써버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밤새 설동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크윽...”
손톱이 빠질 것만 같다.
시뻘겋게 부르튼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벽을 견고하게 만든 뒤에는 배낭에서 잔가지와 풀잎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이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를 차단하고 체온으로 녹아내린 눈에 몸이 젖는 것도 방지하는 역할을 해줄 거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몸 옆으로 가능한 한 깊게 통로를 파내려갔다. 차가운 공기가 괴여들어 설동 내부를 훨씬 따뜻하게 만들어 줄 배수로를.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달콤한 유혹에 몸을 맡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하려면 이런 사소한 부분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됐다...”
작업을 마치자 나는 기절하듯 쓰러져 어두컴컴한 설동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는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선을 다하는 것뿐.
반드시 라디와 함께 살아서 돌아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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