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88화 (88/375)

〈 88화 〉 생존 #3

* * *

[088] 생존 #3

생존 이틀째.

설원에서의 하룻밤이 흘렀다.

다행히 자는 사이 설동이 무너지는 일도, 대형 몬스터가 내 위를 짓밟고 지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 말은 즉, 오늘 하루도 생존에 힘써야 한다는 뜻.

‘...배수로를 파두길 잘했어.’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빵을 침으로 녹이며 뇌까렸다.

‘하마터면 얼어 뒤질 뻔했네...’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떠보니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수축되어 있었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피로감은 덤이고. 공간이 비좁아 모닥불도 피우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

“담요... 오리털 침낭까진 제발 바라지도 않으니 하다못해 얇은 담요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난데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떨어질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슬며시 옆의 배수로에 손을 집어넣자 오작동 난 냉동고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처럼 서늘한 냉기가 고여있었다.

이 구덩이가 내 묫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어우 추워...”

나는 빵 조각으로 대충 허기를 채운 뒤 철제 수통에 피부가 닿지 않도록 조심히 마개를 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마시기가 썩 곤욕스러웠지만 생존하기 위해선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게, 추운 기후에서는 탈수 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열대 우림보다야 덜 하겠으나, 추운 환경에서도 호흡과 피부를 통해 상당한 수분이 빠져나간다. 더욱이 차가운 공기에 혈압이 오르면 갈증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꾸준히 수분을 보충해 줘야 한다.

고산 등정에 도전하는 이들이 자주 목을 축이는 것도 이 때문.

실제로 설산에서 조난당했을 시 수통에 물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수분 섭취를 거부하다 탈수로 사망하는 예가 종종 있다.

나는 반쯤 빈 수통을 눈으로 메꾼 뒤 웃옷 사이에 집어넣었다. 이는 체온으로 데워서 마실 예정이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바닥에 깔았던 잔가지를 주섬주섬 긁어모아 배낭에 넣고 희미한 채광이 비쳐 들어오는 입구를 걷어찼다. 눈더미를 박찰 때마다 어두컴컴한 굴 안에 밝은 빛이 차오르고, 머잖아 성인 남성 한 명이 지날 정도의 통로가 생겨났다.

입구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히 설동을 빠져나오자­

“......”

설국(雪國).

순백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연풍이 발치를 쓸자 고운 눈싸라기가 흩날렸다. 흰빛 설막이 서서히 움직이자 은색 언덕이 아름답게 비추어졌다.

빈 도화지처럼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순구한 세계.

밤새 폭설이 내린 설원은 퍽 아름다웠다.

“.....큰일이네.”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는 유명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오를 정도로 멋진 광경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한가로운 감상이나 늘려놓을 때가 아니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없잖아...”

자고 일어나면 뭐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

산 넘어 산이면 차라리 낫지, 이런 허허벌판에선 식량은커녕 땔감조차 구하지 못한다. 이제 수중에 남은 보리빵이라고는 세 덩이하고도 삼분지 일 정도가 전부. 라디와 만난 뒤 탈출할 것까지 고려하면 최대한 아껴 먹어야 한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움직이자.”

바람이 잠잠해진 지금을 틈타 최대한 많이 이동해야 한다. 역풍을 맞으며 나아가면 그만큼 체력 소모도 현저할 테니까. 설동을 팔 때 입구를 풍향의 반대 방향으로 만들었으니 어느 진로로 향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 길, 길동무 삼아 과거를 반추하며 적적함을 달래고 있자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눈이 엄청나게 내렸었는데...”

유년 시절.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으레 밖으로 나가 놀았다.

여동생 손을 잡고 눈사람을 만들다 보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붉게 물들 때까지 눈싸움을 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젖은 눈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 현관에 들어서면 집안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지.

옹기종기 식탁에 둘러앉아 두런거리다 보면 가슴에 찬바람 들 새가 없었다.

사람의 온기.

그때는 그게 그리 소중한지 몰랐다.

지금쯤 내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가 사라진 걸 알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많이 울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또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까. 아직도 날 찾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더라.

이 세계에 오고 하루도 지구의 나날을 잊은 적 없던 내가 과거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숨 가쁜 하루를 보낸 날도 밤하늘 가득한 별을 보며 누울 때면 한물간 과거의 기억이 눈앞에 아른거렸는데.

그래, 내가 더 이상 옛 추억에 마음 아파하지 않게 된 건 분명...

라디.

그녀를 만나고 나서야 사람의 온기를 떠올렸다.

진정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 숨 쉬게 되었다.

과거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이 세계의 주민이 될 수 있었다.

그건 아마 너무나도 소중한 일.

내가 반드시 그녀를 되찾아야만 하는 이유다.

“.......”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이것저것 해줄 테다.

*

으슬으슬 몸을 떨며 하릴없이 걷다 보니 슬슬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때에 휴식을 취해주지 않으면 이후 계획에 차질이 생길 터.

이쯤에서 한 번 쉬기로 했다.

“...그래도 꽤 지나왔네. 이 기세면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도착하겠는걸...”

눈밭에 털썩 주저앉아 목을 축였다. 저 멀리 작은 배경으로만 보이던 설산의 윤곽이 제법 뚜렷해졌다. 원래라면 이 정도까지 오는 건 턱도 없었을 테지만, 날씨가 맑아 예상보다 먼 거리를 전진할 수 있었다. 게다가...

“.....”

체력이 올라갔다.

미묘한 차이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매일매일 사지를 넘나들며 육체의 한계를 시험한 덕에 내 체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보통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성장세가 더뎌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 그 임계점을 확실히 돌파했다.

‘포션의 효과인가...?’

짐작이 가는 건 그것밖에. 말톤이 날 치유할 때 썼던 힐링 포션. 원체 비싼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부가효과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감각이 날카로워진 것도 같은 이유일지도...’

완전히 납득이 가는 해답은 아니지만, 세포가 재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차 효과라고 생각하면 얼추 아귀가 맞는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왔던 게 유효했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신체 능력이 개화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쩝... 체력이 올라가면 나야 좋지. 기왕이면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하루 종일 라디랑 붙어먹는 것도... 음?’

영양가 없는 생각을 뇌까리던 도중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눈 덮인 언덕 중턱 부근. 잿빛 털가죽 같은 게.

나는 재빨리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질주했다.

능선 위를 활보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황량한 설원을 가로질러 온 지도 꼬박 하루,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곳에 어떤 마물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확인해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생존 상황에서는 사소한 정보가 생사를 좌우하니까.

다만, 저 잿빛 형체가 라디가 아니기를...

가까이 다가가 정체를 확인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건... 엘크인가?”

얼어붙은 무스 사체.

붉은 기운이 맴도는 살점과 뚜렷한 땀구멍은 방금까지 살아 숨 쉬었을 듯 생생했지만, 막상 단검을 찔러넣으니 꽝꽝 얼어 꿈쩍도 안 했다.

죽은 지 꽤 지난 모양.

재빨리 칼집으로 주변을 파내자 그 자태가 일부 드러났다. 반신 이상이 눈에 덮여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얼핏 보이는 뿔의 크기만으로도 얼마나 거대한 녀석이었을지 짐작 갔다.

“이 정도면... 거의 전차 수준이겠는데...”

엘크 성체는 3미터까지 성장한다고 하니 꼭 틀린 비유도 아닐 터. 성별과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톤에 버금가는 놈들도 버젓이 존재한다. 놈들의 돌격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간 다짐육 신세를 면하지 못할 테지.

게다가 더욱 두려운 것은, 이렇게나 무지막지한 놈을 죽인 녀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들개?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였어... 이빨 자국이 들쑥날쑥한 거로 보아서는 여러 마리가 협공한 것 같은데...’

이런 놈들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터. 이곳에선 내가 먹이사슬의 밑바닥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내 강함은 어디까지나 어중간한 단계에서나 통용될 뿐, 본격적으로 마력을 쓸 수 있는 강자나 몬스터에겐 쪽도 못 쓰고 당할 수 있다.

일전에 만난 도적 대장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제길...”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안 좋은 기억은 빨리 잊는 게 좋다.

나는 파우치에서 단도를 꺼내 얼어붙은 살점 몇 덩어리와 뼈를 떼어냈다.

살코기에 코를 박아보니 어렴풋한 악취가 풍기는 게 식용으로는 탈락이지만, 유사시 미끼 대용으로 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노리는 건 따로 있다.

‘이건... 골수가 그대로 남아있잖아?’

뼈다귀.

뼈 안의 골수는 단단하게 밀폐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다. 고기에서 제일 유통기한이 긴 부위가 바로 골수다.

더욱이 조리도 필요 없을뿐더러 대부분 지방으로 이루어진 덕에 열량도 많다. 영양도 풍부해 예로부터 고대인들의 귀중한 식량으로 쓰여왔다.

맛 또한 뛰어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뼈다귀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여기서 이런 횡재를 하게 될 줄이야.

나는 무스 사체를 뒤로하고 다시금 설원을 나아갔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걸 체감하며 문뜩 지평선을 응시하자 눈의 명도가 낮아진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상공을 올려다보니 미세하게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벌써 밤이 찾아온다고? 아무리 7층은 낯이 짧다고는 하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오늘 꽤 걸어온 것 같기는 하다. 아침에 깨어났을 땐 이미 대낮인 상태였고, 바람이 점점 강해지는 거로 보아 눈보라가 몰아칠 전조일 수도 있다.

계획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본 덕에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하는 수 없지 오늘은 조금 일찍... 크헉?!!”

­콰르르르르르!!!!!!!

돌연 급속도로 땅이 무너져내렸다.

뒤집히는 시야. 회전하는 창공. 망막에 때려박히는 얼음의 푸른 빛.

황급히 팔을 휘저었지만, 기세가 붙은 육체는 멈출 줄을 몰랐다. 돌출된 얼음을 붙잡아봐도 미끄러질 뿐.

빠른 속도로 빛이 멀어져갔다.

“젠장!!”

나는 황급히 어깨춤의 단검을 뽑아 얼음벽에 박아넣었다.

“크헉...!!!”

강렬한 통증이 치밀었다.

오른손에 하중이 실리며 끔찍한 고통이 몰아닥쳤다. 배낭의 무게에 더불어 가속도까지 더해지자 좀처럼 제동할 수가 없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얼어붙은 손을 발파할 듯 압박해오고, 간신히 지혈했던 손가락 끝의 상처가 터져나갔다.

­콰지지지직!!!!!

빙벽이 길게 찢어졌다.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쪼개지며 섬뜩한 소음이 들려온다. 나는 오른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갔고, 수십 미터를 넘게 밀려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시꺼먼 낭떠러지 아래로 눈더미가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자 머리가 아찔했다.

“허억... 헉... 큰일.. 날.... 뻔했네...”

느닷없이 크레바스와 조우할 줄이야.

눈이 수북하게 덮인 탓에 빙하 지대 위를 거닐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가쁜 호흡을 갈무리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윽...”

불현듯 불어온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갈라진 지각의 틈새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유입되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더듬더듬 검은 단도를 꺼내 이빨로 나무줄기를 벗긴 뒤, 칼날을 빙벽에 박아넣었다.

­콰직!!

“......”

한 번에 한 걸음씩. 두 자루의 단검을 피켈 대용으로 찍어누르며 푸른 얼음벽을 천천히 기어올랐다. 지상에서 세찬 바람이 불자 눈더미가 와르르 쏟아졌다. 이따금씩 머리 위에서 큼지막한 얼음덩어리가 갈라질 때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었다.

“젠장... 추워....”

땀으로 흥건한 두 손이 깨질 듯 시려온다. 오른손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똑 똑 떨어져 눈두덩이를 적셨다. 전신에 몰아닥치는 근육통에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다.

나는 라디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서히 낭떠러지를 기어올랐다.

긴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땅거미가 드리우고 나서야 간신히 갈라진 틈 너머로 손을 뻗을 수 있었다.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오고 나서는 옷이 축축하게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눈밭 위를 굴렀다.

“......”

피로감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에 쥔 단검을 올려다보았다. 그간 날이 꽤 상한 검신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이 단검이 조금이라도 물렀으면 나는 지금쯤 죽은 목숨이었겠지.

안도의 시간도 잠시,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크레바스가 가득한 빙하 지대.

이제 잠시 후면 해가 진다.

완전히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 은신처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서둘러 배낭을 둘러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난 자리를 되짚으며 신속히. 이런 빙하 지대에서는 설동을 팔 수도 없을 테니.

하지만 야속하게도ㅡ

­아우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ㅡ!!!

절망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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