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생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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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생존 #5
처음엔 녀석을 죽이고 고기와 모피를 얻을 생각이었다.
크르르르....!
쉽지 않았다.
먹이를 주어 방심시키더라도 단도를 빼내 들면, 놈은 내 탐욕스러운 시선을 눈치채고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했으니까.
아무리 새끼에 불과하더라도 지금 녀석과 싸웠다간 지고 만다.
내가 만전의 상태였다면 모를까, 현재는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황. 손가락이 얼어붙어 단검 손잡이를 쥐는 것조차 힘겹다. 허나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다.
장검이 없는 이상 놈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대인전에서라면 몰라도 단검은 몬스터를 상대할 때 불리하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날에 몸을 꿰뚫리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지만, 몬스터들은 타고난 생명력이 끈질겨 칼날 한두 방엔 죽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신이 짧은 단검 구조상 심장을 노리기도 어렵고.
즉, 녀석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을 때 한 방에 끝내지 못한다면 되레 당하고 만다.
간신히 접전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저항하는 사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 거다.
결국, 지금의 나로선 놈을 해치우지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날이 밝아도 눈보라가 그친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이틀, 혹은 일주일이 지나도 멎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당장 그때를 논할 필요도 없다.
“......”
창백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신체를 야금야금 잠식하던 떨림이 멎었음을 자각했다. 동공이 확장되어 빙벽의 검푸른 색채가 한층 짙어졌고, 신체를 야금야금 잠식하던 떨림이...
제길, 이젠 기억까지 오락가락하는 건가.
저체온증의 중간 단계.
이대로 간다면 날이 밝기도 전에
죽는다.
“......”
.....낑.
다음 먹이를 고대하며 꼬리를 흔드는 늑대를 보자 미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미친 생각.
지금 내 머릿속을 스쳐 간 계획을 털어놓는다면 라디는 분명 기겁하겠지. 말톤이라면 내 발상에 동조하며 극찬할지도 모른다.
추위 탓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도 자각하고는 있지만,
이젠 정말 다른 방도가 없다.
“...야, 배고프냐...?”
크응...
푸른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광채가 나와 늑대를 비추었다.
내가 빙판 끝에 서서 내려다보자 놈 또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의 늑대는 아직 새끼인 듯했다.
덩치는 이미 대형견 크기를 뛰어넘었지만 사자에 비견됐던 동료들과는 달리 앳된 구석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네 눈동자가 부담스러웠으나, 보다 보니 제법 익숙해졌다. 눈을 끔뻑거릴 때마다 번갈아 가며 열리고 닫히는 모양새가 나름 귀염성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잿빛을 띠던 동료들과는 달리 검은 윤기가 흐르는 털가죽. 저 푹신하고 따뜻한 모피에 파고들 수만 있다면 이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터.
나는 놈을 길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야, 이거 줄까..?”
눈앞에서 보란 듯이 고기 한 점을 흔들었다.
놈은 궁둥이를 바닥에 찰싹 붙이고 올려다보며 낑낑거렸다. 노란 눈동자는 내 손에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고, 입가에서는 투명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때... 맛있을 거 같지 않아...?”
늑대는 영리한 동물.
서열 구분이 명확하며 외사소통 체계가 잘 잡혀 있다. 머리가 똑똑해 여러 전술을 구사하고 다른 개체와 협력할 줄 알며, 감정표현이 뚜렷하다.
그런고로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길들이지 않아도 정을 붙이면 사람과 어울리는 게 가능하다.
그 말은 즉, 나도 늑대와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옜다 먹어라.”
컹!
고기를 던져주자 녀석이 공중에서 덥석 낚아챘다. 놈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콧노래를 부를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살코기를 다 먹어치우고 나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서글픈 눈길로 눈보라 치는 균열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 마음이 이해 간다.
낭떠러지 사이로 떨어졌고, 자력으론 헤어나올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추위와 배고픔이 육체와 정신을 좀먹어 올 터, 동료들도 하나둘씩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개중에는 부모와 형제도 있었을 것이다.
발달한 지능은 때때로 잔혹해서, 녀석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꼼짝없이 이 절벽 사이에 고립되어 죽을 신세라는 걸. 무력한 자신에 비례해서 끔찍한 절망이 휘감아 오겠지.
하지만 둘이 힘을 합친다면 어떨까?
“...야, 늑대야. 약속 하나만 하자.”
크릉...?
“눈보라가 그치면 여기서 빠져나가게 도와줄 테니까, 너도 나 좀 도와라.”
......
“알겠어?”
.....컹!
자신만만하게 눈을 번뜩이는 녀석을 보자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정말 나 안 물 거지...?”
크릉...!
녀석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시바견처럼 능청스럽게 앞발을 내저어 안심시키까지 한다. 정말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눈치.
“영 못 미더운데...”
가방에서 살코기 한 점을 더 꺼내 던져주었다. 녀석은 날름 받아먹고는 배를 납작 바닥에 붙이고 엎드렸다. 나더러 얼른 이쪽으로 넘어오라는 걸까?
“...얌전히 있어, 알겠지?”
....컹!
미친 도박수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생명이 위험하다. 한시바삐 몸을 데우지 못했다간 정말로 얼어 죽는다.
나는 배낭을 고쳐맨 뒤 얼음 끄트머리에 서서 뛰어내리...
크르르릉! 컹!!
는 척했다.
내 예상대로 녀석은 내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자마자 이빨을 드러냈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지...”
전력으로 얼음을 내던지자, 녀석을 코를 얻어맞고는 난폭하게 짖어댔다.
그래, 처음부터 들짐승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하물며 포악한 몬스터 아닌가. 히드라와 키메라의 경우에는 워낙 특수한 상황이었고.
왕도에는 정말 드물게 테이밍 기술을 단련한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토끼 한 마리 길들이기조차 빈번히 실패하기 일쑤다. 내가 이 야생 늑대와 협력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나는 손에 단도를 거머쥐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녀석을 죽여서라도 모피를 얻어내겠다.
까딱 실패하면 죽겠지만, 어디 내 인생 중에 쉬운 선택이 있었던가.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나는 서서히 발을 옮겼고
단김에 어둠 너머로 도약했다.
풀썩.
눈발이 휘날렸다.
찰나, 시간의 유속이 느려지며 눈이 마주친다.
검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전시 태세로 돌입하고, 그보다 먼저 시퍼런 송곳니가 육박해왔다.
무시무시한 속도.
예상을 초월한 민첩성에 경악하며 각력을 쥐어짰다. 빙판을 박차며 육체를 가속했다. 추위에 수축했던 근육이 급작스럽게 뒤틀리자 맹렬한 고통이 몰아닥치고, 뒤집힌 시야 아래로 섬뜩한 이빨이 스치며 아가리가 닫혔다.
기회.
타각!!
벽을 걷어차 쇄도했다. 발끝에 회전을 실어 주둥이를 차올렸다. 놈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혀 피하더니 샛노란 안광을 길게 늘어뜨리며 내게 치달아왔다. 나는 관성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미끄러져 빙벽을 딛고, 크게 도약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휘둘러졌지만, 모두 계산 안. 나는 얼음 표면에 단도를 박아넣으며 그대로...
“크으읏?!”
미끄러졌다.
몸 상태를 간과한 탓. 잔뜩 피멍이 들고 얼어붙은 손가락은 더 이상 내 체중을 지탱하지 못했고, 그대로 칼자루를 놓쳐버렸다.
검은 단도는 푸른 빙벽에 박힌 채 서서히 멀어져갔고, 나는 중력에 이끌려 낙하했다.
털썩.
크르르르...!
하필 떨어진 지점이 놈의 털가죽 위. 푹신한 모피에 안착하자 등 아래가 낮게 떨렸다. 곧 난폭한 부유감이 엄습해왔고, 딱딱한 얼음과 부딪히는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찰나, 나는 오른손을 뻗어 코볼트 단검을 움켜쥐었다. 놈이 나를 물어뜯고자 주둥이를 벌리면 입천장에 박아넣겠다는 각오로.
팔 한쪽을 잃게 되겠지만, 더 이상 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보단 낫다.
절체절명의 순간
크르르르.... 컹?
“.....?”
킁...??
늑대의 주둥이에서 다소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체취를 맡았다.
“무슨...”
놈이 방심한 틈을 타 재빨리 단검을 뽑으려 했지만, 영하의 기온에 날이 얼어붙었는지 칼자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차선책으로 온 힘을 그러모아 녀석의 눈을 찌르려던 찰나ㅡ
......
늑대가 내게서 물러났다.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채 녀석을 응시했다.
당장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모자랄 판에 놓아주다니?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며 시선을 마주하자,
....킁.
늑대는 꼬리를 갈팡질팡하며 자세를 낮추고 내 눈치를 살폈다.
놈도 나 못지않게 당황한 모양.
“.....?”
키잉....
어정쩡하게 자세를 고친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자니 결국 늑대가 먼저 꼬리를 내렸다. 녀석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하울링하더니, 내게서 적의를 거두고 조심조심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대체 이건...’
지금까지 야생에서 많은 늑대를 봐왔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보통 늑대라고 하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는데. 사냥감을 두고 대립을 하거나 실랑이를 벌인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한 적은 없다.
...이 늑대 품종이 특별히 온순한 건가?
벼랑 위에서 떼거리로 날 공격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마지막으로 늑대를 목격했던 건 던전까지 오면서 상단을 호위... 아니, 나가의 심장으로 몬스터를 불러모았을 때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 거대한 늑대 괴수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지.
잠시 그 늑대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그야, 그런 무지막지한 괴물과 얽히고도 살아남은 존재가 있을 리 없으니까.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앞의 늑대에게 다가갔다. 힘을 주어 코볼트 단검을 뽑아낼 때 녀석이 살짝 움찔하며 경계했지만, 꼬리로 지면을 탁탁 두드렸을 뿐 딱히 공격해올 낌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
사박...
“.....”
나머지 한 손으로 모피를 어루만졌다.
근육질의 어깨를 매만지자 푹신한 털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푸르스름한 빙하의 빛을 반사해 신묘한 광채가 흐르는 검은 털가죽. 녀석은 인간의 손길이 낯선 건지 다소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이 푹신한 모피에 안긴다면 분명 따뜻하겠지.
“....고기 먹을래?”
.....
단검으로 고기를 잘라 넘겨주자 녀석이 꿀떡 집어삼켰다. 좀 전과는 확연히 뒤바뀐 태도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놈이 내 가방을 탐내는 눈치길래 가볍게 코를 튕겨 다그쳤다.
“....그럼 난 이만 잔다.”
더 이상은 무리.
나는 늑대의 품에 안겨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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