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91화 (91/375)

〈 91화 〉 생존 #6

* * *

[091] 생존 #6

생존 사흘째.

비몽사몽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운 눈동자처럼 푸르른 빙하, 끈덕지게 귓전을 괴롭히는 바람 소리, 새하얀 입김.

나는 멍한 눈길로 세상을 응시했다.

망막 저편에는 아직도 꿈속에서 보았던 정경이 아른거렸다.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

그곳에서 나는 라디와 반딧불이 가득한 강변을 거닐고, 꼬치구이를 나눠 먹고, 마주 보고 웃으며, 애틋한 시선을 교환했다.

창공을 나는 배를 타고 유적 위를 지나기도 했고, 다정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

“.....”

­.....킁.

“시발 깜딱이야!!”

시야 한가득 들이찬 치열.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로 황급히 물러나던 도중 모골이 송연해졌다.

천천히 사선을 돌아보자 낭떠러지 아래로 후두둑 눈더미가 쓸려내렸다.

빙벽에 부딪혀 잘게 부서지는 얼음 파편을 보자 어젯밤의 일이 기억났다.

‘늑대한테 안겨서 잠들었지...’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살아있는 게 용할 지경. 아무리 추위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야생 몬스터와 동침할 생각을 하다니.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옳은 선택이었지만.

나는 곤히 잠든 늑대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상태를 점검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옷을 뒤척였지만, 다행히 몸 한구석에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돋아있거나, 발가락이 떨어져 있거나, 동상으로 피부가 검게 변해있는 일은 없었다.

전부 뜨끈한 늑대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 덕이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되니 조금 고맙긴 하네... 어떻게 보면 비슷한 처지이기도 하고... 응?”

배낭 밖으로 끄집어진 잔가지를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팩에는 큼지막한 이빨 흔적이 가득했고, 안에 넣어두었던 고기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내, 내 골수가...”

마지막 남은 하나를 제외하곤 누군가가 뼈다귀를 전부 산산조각 낸 뒤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뼛조각을 긁어모아 샅샅이 뒤집어봤지만, 어찌나 열심히 핥아댔는지 그 어디에도 골수는 남아있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누구긴 누구야

이 새끼지.

입가에 번지르르 기름을 묻힌 채 태평하게 잠든 늑대를 보자 깊은 빡침이 몰려들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뼈 몽둥이를 손에 쥐고 녀석을 후려갈겼다.

“야 이 상종 못 할 새끼야!!!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그렇지 내 비상식량을 처먹어?!!”

­깨갱?! 깽!!!

늑대는 난데없는 봉변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지만,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내게 이빨을 들이댔다.

­크르르르...!

“뭐 인마, 화내면 어쩔 건데. 불쌍해 보여서 밥도 주고 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오냐, 오늘이 된장 바르는 날이다!!”

­깨갱!!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에 사리분별이 안 됐다. 뼈다귀를 쥐고 깨 털듯 매타작하는 인간과 그걸 또 얻어맞고 있는 늑대. 언뜻 보면 헛것을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진귀한 광경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이 순간 진심이었다.

감히 내 생명줄과도 같은 비상식량을 훔쳐먹어?

나는 놈을 돈가스 만들듯이 흠씬 두들겨 주고 나서야 진정했다.

“....다음에도 내 음식에 손대면 정말로 뒤질 줄 알아.”

­.....끙.

아쉬운 대로 보리빵 한 귀퉁이를 뜯어내 입에 넣었다. 돌덩이라도 씹는 듯 딱딱한 식감에 잇몸이 아파 온다. 마분지처럼 무미건조한 맛은 덤이고. 여기에 골수라도 발라 먹었더라면 한결 나았을 텐데...

“제길... 빨리 여기서 벗어나든가 해야지...”

크레바스의 갈라진 틈 사이로 비치는 광경을 보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뿌연 눈발이 거칠게 휘날리는 모습으로 보아 오늘도 나가기는 글렀다.

“...염병할.”

­툭.

잔가지를 정리하며 남은 식량을 살폈다. 이제 내게 남은 먹거리라고는 보리빵 세 덩이와 골수 하나가 전부. 하루빨리 끼닛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아사할 거다. 고기가 떨어지면 늑대가 날 덮칠지도 모르고.

“어떡하지... 뭐가 됐든 일단 나가봐야 하나...?”

­툭.

“언제까지고 여기서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툭.

“아 왜...!!”

누군가가 등을 쿡쿡 찌르는 탓에 집중할 수가 없다.

신경질을 내며 뒤돌아보자 늑대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데.”

­크릉...

녀석이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보자­

협소한 틈 사이로 빛이 비치며 비좁은 길이 드러났다.

“.....잘했다 인마.”

*

절벽 사이 갈라진 틈. 한낮의 조명이 드리우자 비좁은 얼음길이 모습을 내비쳤다. 어제는 어두워 볼 수 없었던 샛길.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늑대의 턱을 쓰다듬어주었다.

고기를 다 훔쳐먹지만 않았더라면 간식이라도 던져줬을 텐데...

“근데... 너 건너갈 수나 있냐?”

얼음 통로까지 거리가 꽤 있다. 어림잡아 5미터 정도. 나라면 벽에 단검을 박아넣으며 도달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지만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 할...”

­턱!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녀석이 앞발로 내 어깨를 짚었다. 이내 귓가에 주둥이를 들이대고 으르렁거리며 협박한다. 내 태도를 보고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걸까?

“...그럼 어쩌자고. 너 저기까지 뛰지도 못하잖아.”

­컹 컹! 크르르르..! 컹!!

“어떻게든 하라고...? 내가 무슨 마법사라도 되는 줄 알아?”

­으르르르...! 컹!!

“하... 알았어 알았어, 일단 해 볼게.”

두고 가면 물어 죽일 기세였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도 녀석이 따라온다면 반가운 일이기는 하다. 놈의 털가죽이 있으면 두고두고 유용할 테고, 유사시에 비상식량 대용으로 잡아먹을 수도 있을 테니까.

더욱이 이 설원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녀석이니 미연에 위험 요소를 감지하고 대비책을 세울 수도 있을 거다.

녀석을 저기까지 데려갈 방법도 대충 짚이는 구석이 있고.

­촤르륵...!

얼어붙은 코볼트 단검에 물을 끼얹어 날을 뽑아냈다. 실수로라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방수포를 벗어 단검과 왼손을 동여맸다. 잠도 충분히 잤고 배도 채웠으니 꽤 체력이 돌아온 바, 단검으로 얼음을 파내어 발을 디딜 홈을 만들 예정이다.

이제 남은 건...

“아, 아니 자, 잠깐...!?”

­크응?

단도.

단도가 사라졌다.

빙벽에 박혀있어야 할 검은 단도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늑대와의 교전 이후 다음날 회수할 생각으로 방치했었는데... 어제는 피곤해서 그대로 곯아떨어졌으니.

황급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그곳엔 시꺼먼 어둠만이 도사릴 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도는커녕 날붙이 비스무리한 건 하나도 찾지 못했다.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그게 얼마짜린데!!!”

무려 고대 유물이다. 고대 유물. 돈이 보따리째 있어도 매물이 없으면 구하지 못한다는. 아무리 사용자를 가리는 무기라고 한들 경매에 내다 팔면 연구 목적으로 사 갈 사람이 줄을 설 텐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잃어버리게 되면 부끄러워서 어디 말도 못 꺼낸다.

“끄아아아앗!!”

머리를 싸매며 주저앉았다. 장검을 망가뜨린 데 이어 단도까지 손실하다니! 이 마경을 코볼트 단검 하나만으로 어떻게 헤쳐나가란 말인가.

“아냐... 혹시 몰라...”

정신을 가다듬으며 파우치로 손을 뻗었다. 어젯밤 일은 추위와 피로에 시달리던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회수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조심스레 가죽 덮개를 열자...

“...그럴 리가 없지...”

파우치 안에는 플래시 골렘의 핵과 부싯돌 등 잡다한 잡동사니만이 들어가 있을 뿐 단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늑대 녀석은 태평하게 배를 깔고 앉아 망연자실한 내 표정을 보며 비웃었다.

­컹! 컹!!

“웃기냐? 지금 이게 웃겨?”

­컹!!!

“그거 없으면 너도 여기서 못 나간다고!!!”

­....컹?

“이 띨빡한 새끼가...”

정말 진지하게 이놈을 다짐육 신세로 만들어버릴지 고민하던 찰나­

­달그락.

기시감.

발치에서 친숙한 금속음이 들렸다.

고개를 내리자 그곳엔 낯익은 도신이ㅡ.

“......”

저주받은 아이템 확정.

허리를 숙여 단도를 주워들었다. 입에서 너털웃음이 새어나왔다. 익숙한 검신과 익숙한 그립감. 내가 몇 번이나 신세를 진, 바로 그 단검이다.

“...소유자 근처로 되돌아오는 건가...”

평범한 단도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기능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이제야 말톤에게 맡기고 왔던 이 단도가 왜 파우치 안에서 나타났는지 이해가 갔다.

돌아오는 조건이 뭔지, 어디까지 멀어져도 기믹이 작동하는지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크르르르...!

“그래, 안 버리고 갈 테니 걱정 마라.”

혼자 두고 갈까 봐 불안해하는 늑대를 안심시키고 천천히 발판 너머로 향했다. 빙벽에 단도를 꽂아 무게를 지탱한 다음, 울퉁불퉁하게 불거진 굴곡을 딛고 얼음에 홈을 파냈다.

­팍! 파각!!

­크릉..?

“좀만 더 기다려.”

충분히 발을 디딜 수 있게 후벼내고 팔을 교차해 전진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적당히 거리를 벌린 뒤에는 마찬가지로 벽에 구멍을 파냈고, 2미터 정도 떨어진 반대편 빙벽에도 마찬가지로 홈을 새겨넣었다.

늑대가 발을 디딜 발판을 만들며 얼음 굴이 있는 장소까지 도달하고 난 뒤, 한 발자국 물러서서 턱짓했다.

“자, 이 정도면 됐지?”

­.....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못 건너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 내가 직접 등에 업고 절벽을 뛰어넘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행히 늑대는 짧게 목청을 가다듬고는 아무런 주저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절벽 좌우에 파낸 홈을 디디며 날렵하게 벽을 박차오르는 모습을 보니 몬스터가 맞긴 하나 보다.

­쿠웅!

녀석이 눈발을 휘날리며 착지하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래그래, 잘했다.”

나는 녀석을 가볍게 무시하며 배낭을 추스르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비좁은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간에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터.

­크릉...

늑대도 어슬렁어슬렁 내 뒤를 따라왔다. 배가 고파지기 전까지는 공격해오지 않겠지.

...아마도.

그렇게 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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