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동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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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동행 #1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컹! 컹!! 크르르르....!!
“네가 이 길로 오자며.”
으르르르....! 컹컹!!”
“뭐... 한 판 뜰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하며 비좁은 얼음길을 나아가다 보니 막다른 지점에 도달했다. 점점 절벽 아래쪽으로 내려온 탓에 크레바스 입구가 까마득해 보일 지경. 그만큼 시야도 어두워져서 손을 더듬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위로 올라가서 다른 길이 없나 찾아볼 테니까...”
크르르르...!
“....뭐가 또 불만인데.”
....킁.
“아 진짜 안 두고 간다고. 속고만 살았냐.”
크릉... 컹!
“...이 새끼가 진짜... 그래, 어디 함 뜨자! 누가 윗대가린지 서열을 확실히 정해놓고 가자고!!”
배낭에서 기다란 뼈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컹!
늑대도 물러나서 자세를 낮추고 뒷다리에 힘을 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놈에게 도약하려던 찰나
“...야 너 저거 어떻게 생각하냐.”
크릉...!
“저기 위에 보이는 거 말이야 저거.”
컹!!
“아 진짜 말 돌리는 거 아니라고. 저기 봐봐.”
뼈다귀를 내리며 머리 위를 턱짓했다.
정확히는 그곳에 도사린 균열을.
“...길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보고 올 테니...”
크르르릉...! 컹!!
“아 진짜 안 버리고 간다고...!”
컹! 컹...!!
“가방이라도 두고 가라고...?”
컹!
“개새끼 주제에 까다롭긴...”
하는 수 없이 배낭끈을 풀었다. 지금까지 실랑이 끝에 깨달은 게 있다면, 이 늑대가 예상보다도 훨씬 영리하다는 것. 눈짓 손짓만으로 말귀를 알아듣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끔 널리고 널린 모험가들보다 똑똑한 게 아닐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 됐지? 여기 두고 갈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투덜거리며 빙벽에 손을 짚었다. 단검을 교차하며 벽을 기어올라 틈새 앞에 도달하자 서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말은 즉 이 통로가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
“야, 이거 아무래도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파각!
나는 능숙하게 단도를 바꿔쥐고 입구를 파헤쳤다. 큼지막한 빙설 조각이 튀어오를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끼쳐왔고, 머잖아 사람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완성되었다.
“오오... 안은 꽤 넓은데...?”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을 듯하다. 이 정도면 늑대도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겠지. 바람이 불어오는 걸로 보아 분명 탈출구와 연결되어 있을 거다.
“야, 여기로 가면 되겠.... 너 뭐하냐.”
한데,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까지 감내하며 열심히 굴을 파고 고개를 돌리니 배낭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입가엔 익숙한 뼈다귀가...
“이, 이 쌍놈의 새끼가...!”
킁...?
나는 그대로 빙벽을 박차고 뛰어내려 늑대의 주둥이에 드롭킥을 내다꽃았다.
깨갱... 깽..!
“이 똥개 새끼가! 그렇게 얻어맞아 놓고도 정신을 못 차려?!! 오냐, 나도 모피 코트 한 번 입어보자!!!”
컹! 컹컹!!
녀석이 억울한 듯 앞발을 휘저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뼈 몽둥이로 녀석을 후려갈겼다. 놈은 내가 없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
성이 풀릴 때까지 혼쭐을 내준 뒤, 세상 서럽게 주저앉아 훌쩍거리는 늑대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야, 나는 저 굴로 나갈 테니까 쫓아올 거면 맘대로 해라.”
.....컹.
배낭을 짊어지고 다시금 빙벽을 기어올라 굴 안으로 향했다. 늑대는 퍽 토라진 모양새였지만, 별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지못해 따라왔다.
허리를 굽히고 구불구불 크레바스 안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탁 트이며 드넓은 지형이 드러났다.
“여긴...”
빙하 동굴.
천연 만년빙으로 이루어진 공간. 새벽녘 호숫가에 일렁이는 색채처럼 신묘한 광택이 얼음을 타고 흘렀다. 매끄럽고 단단한 빙하에서는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나왔고, 물결이 흐르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다채로운 무늬를 형성했다.
왜곡된 구조와 울퉁불퉁한 내벽 탓에 전체 크기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장관이네... 이 정도 규모면 반드시 어딘가 탈출구가 있겠어. 좋은 소식이야.”
컹...
마치 해저를 거니는 듯 초현실적인 경관에 감탄하며 나아갔다. 설피를 떼어내 배낭에 매달고 걷자 부츠 밑창이 얼음을 밟는 소리가 청명하게 메아리쳤다.
무심코 투명한 얼음을 가까이 들여다보자 매끈한 표면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검은 머리칼과 그 아래 새까만 눈동자. 이젠 투구가 없으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야윈 얼굴.
컹?
“...아냐, 아무것도.”
멈추었던 발걸음을 되돌렸다. 처음엔 동굴이 무너져내리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곧바로 근심을 거두어들였다.
빙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푸른 빛을 띠는 바, 이 정도로 오래된 얼음 동굴이면 적어도 하루아침 만에 붕괴하지는 않겠지.
만약 그럴 징조가 있으면 이 녀석이 먼저 눈치챌 테고.
늑대를 돌아보자 녀석도 빙하 속 풍경이 신기한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7계층에 서식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이런 장소까지 들어와 본 경험은 드물 테니까.
은근슬쩍 녀석의 털을 어루만지며 몇 마디 물으려던 찰나
녀석이 불시에 멈춰서더니 꼬리를 꼿꼿하게 치켜세웠다.
“.....”
나 또한 말없이 단도를 거머쥐고 전방을 경계했다. 몬스터의 감각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놈이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그렇게 긴장하기를 한참,
불현듯 녀석이 자세를 풀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끄응...
녀석은 자그맣게 침음하고는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다만 그 발놀림에선 이전에 없던 다분한 주저함이 묻어나왔다.
“.....”
뭔가가 있었다가 사라진 건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곧 알 수 있었다. 얼음 동굴을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고, 늑대가 그중 한 통로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으르렁거렸으니까.
“...이만 가자.”
.....
나는 녀석의 머리를 툭 친 뒤 반대편 갈림길로 나아갔다.
놈이 이토록 경계할 정도라면 뭔가 위험한 게 있다는 소리겠지.
이곳에 뭐가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닥뜨리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
끄응...
“....왜 그래, 변비라도 걸렸어?”
크르르르...!
미약한 바람을 쫓아 통로를 나아가기를 한참, 늑대가 반응을 보였다.
녀석은 바닥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며 통로를 배회하더니 내 쪽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왜, 사냥감이라도 있어?”
컹.
“...정말로?”
그냥 찔러봤는데 정답이었나 보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얼음밖에 없는 이런 곳에 사는 생물이 있을 줄이야.
“그럼 그냥 가서 잡으면 되지 왜 그래?”
끄응...
“뭐야...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던 놈이... 그럼 내가 가서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컹.
어째선지 어물쩍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전진했다.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지나쳐 녀석이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서나오자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그 중심엔
.....
토끼가 있었다.
붉은 눈. 앙증맞은 귀. 새하얀 솜털.
흉악한 이두박근. 울긋불긋한 핏줄. 터질 듯한 허벅지.
‘예, 옘병...’
간신히 토끼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절대 초식동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외형. 근육질 몸매에 더불어 육중한 덩치는 기형 캥거루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녀석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순록 사체에 주둥이를 들이박고 꾸물거리는 중이었다.
조용히 못 본 척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
눈이 마주쳤다.
스윽.
놈이 새빨간 핏덩이에서 고개를 들고 비대한 앞발을 내디뎠다.
‘시발...’
토끼가 느슨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자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싸구려 호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 놈의 턱을 적시고 떨어진 핏방울이 투명한 얼음 바닥에 파문을 만들었다.
늑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자 토끼가 깡충 뛰어 다가왔다. 칼자루에 힘이 들어가는 걸 자각하며 숨을 들이마시자 놈이 입맛을 다셨다.
이내 점점 긴장이 고조되고, 토끼의 튼실한 허벅지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순간
콰과아아아앙!!!!!!
“히이이익!!!”
빙벽이 깨져나갔다.
산산조각 난 얼음 파편이 허공에 푸른 잔상을 자아냈다.
본능에 의지해 재빨리 엎드리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으깨졌을 터. 차마 도약하는 순간을 눈에 담지도 못했다.
토끼가 벽에 박힌 발을 빼내자 얼음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미, 미친...!!”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나는 즉각 바닥을 박차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쪼, 쫓아오나...?”
.....깡총!
“씨발!!!”
기괴한 외견에 상반되게도, 묘하게 앙증맞은 몸동작이 괴리감을 부추겼다. 놈은 미끄러운 빙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착실하게 거리를 좁혔다.
일순간 등 뒤에서 기척이 멎는가 싶더니, 바닥이 함몰되었다.
콰드드드득!!!!
“허억...!”
거미줄처럼 쪼개진 빙하를 보자 정신이 아찔했다. 양발을 모아 날아차는 공격. 속도와 힘에 의존할 뿐인 단순한 발차기지만 그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다.
자칫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가슴팍이 꿰뚫렸을 터.
“크흑... 헉.. 야!! 빨리 와서 도와줘!!!”
빙판 위를 허우적거리며 동굴을 질주하다 보니 늑대와 헤어졌던 지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자...
“......”
.....
“....너 거기서 뭐하냐.”
....컹.
커다란 얼음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벌벌 떠는 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가 막 지나왔던 통로에서 토끼가 나타나자 놈은 꽁무니가 빠져라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미, 미친...! 너는 왜 도망가?!!”
컹컹!! 크응 컹!!
“무섭고 자시고 너 늑대잖아!! 맞서 싸워!!!”
깽! 끄르르르... 깽!!
“이 똥개가!!! 토끼한테 겁먹는 늑대가 세상에 어딨ㅡ?!!”
콰앙!!!!
“허미 씹탱!!!”
깨갱! 깽!!
놈은 토끼의 괴력을 직접 목격하고는 혓바닥을 휘날리며 속도를 높였다.
나와 녀석은 너나 할 것 없이 엎치락거리며 필사의 도주를 감행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토끼는 추격을 그만두고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통로 한구석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들이켜며 물을 나눠마셨다.
“어우 씨... 뒤지는 줄 알았네... 무슨 토끼가 저래..? 보충제라도 잘못 처먹었나...”
크응...
“...넌 어디 가서 늑대라고 하지 마라.”
.....
녀석이 밉살스럽게 올려다봤으나 딱히 할 말은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놈이 성체였더라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아직 새끼라 약한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토끼한테 쪼는 늑대라니.
“제길... 그런 놈이 이곳에 수두룩하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야, 이제 어떡할 거야? 여길 벗어나려면 그 토끼가 있는 곳을 지나야 하는데.”
크응...
이 빙하 동굴을 통과하려면 필연적으로 방금 도망쳐왔던 길을 거처야 한다.
뒤돌아서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갈림길이 있었던 장소까지 되돌아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할 테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생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질 터, 토끼를 상대하는 건 상당히 위험부담이 크지만 우리에겐 반드시 녀석을 뚫고 지나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래야 고기를 얻든 말든 하지...’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가죽과 식량을 확보하는 게 가능하다. 어떻게든 잘 해보면 큰 피해 없이 놈을 격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잠시 턱을 짚은 채 고민하던 도중,
“...야, 너 쟤랑 정면으로 맞붙으면 지지?”
컹...
“...그럼 기습은 어때? 그건 이길 수 있어?”
크응! 컹!
“그래..? 그럼 기막힌 계획이 하나 있는데...”
컹...?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