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동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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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동행 #2
만전의 준비를 마쳤다.
큼지막한 보폭으로 자신만만하게 동굴을 거닐었다.
새파란 얼음 표면에 반사된 내 오른손에는 새까만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다만, 그 어디에도 그와 유사한 털 색을 지닌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
구불구불 크게 굴곡진 통로를 지나 오르막길을 올랐다.
유려한 손놀림으로 칼자루를 빙빙 돌리며 토끼와 마주쳤던 장소에 다다랐다.
다행히도 녀석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나는 한쪽 어깨에 짊어졌던 배낭을 거칠게 옆으로 내던지며 외쳤다.
“설욕할 시간이다 이 새끼야.”
.....?
토끼가 순록 사체에서 주둥이를 들더니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 줄행랑 쳤던 상대가 제 발로 되돌아오니 의아한 걸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곧바로 깡충 뛰어오르며 임전 태세를 취했다.
“.....”
스윽.
나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단도를 중단으로 들어올리고, 왼손을 뻗어 공격에 대비했다. 보폭은 어깨너비로 벌려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하는 것만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도주가 아닌, 회피에 주력한다면 잠시나마 토끼의 공격을 흘려낼 수 있다.
단도의 짧은 도신으로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건 힘들지만, 잠시 시간을 끄는 것뿐이라면...
철컥.
도발하듯 날끝으로 놈을 겨냥하고 입꼬리를 비틀어보이자 토끼 또한 히죽 입가를 찢었다.
상어의 치열처럼, 귀밑까지 돋아난 세모꼴 이빨.
확장된 동공이 빙하 동굴의 색채를 한층 더 진하게 만들고, 녀석의 뒷발에 슬그머니 실린 하중을 목격한 순간ㅡ
“.....!!”
콰아아아아아앙!!!!!
토끼에게 직격당한 벽이 움푹 쪼개지며 방사형 무늬가 생겨났다.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 그 위력에 다시 한번 경악하기도 전에,
‘이크...!’
연이어 새하얀 궤적이 쇄도해왔다.
상단 일격. 재빠른 돌려차기.
허리를 젖혀 피하자 무지막지한 파공성이 턱 아래를 스쳤다. 거칠게 날뛰는 바람이 흑발을 나부꼈다. 뒤이어 하단에서 몰아닥치는 감아차기. 놈이 몸을 한 바퀴 돌려 축이 되는 디딤발을 상단으로 내질렀다.
‘제기랄...!’
이 큰 덩치에 이런 민첩성이라니.
회피에 전력을 기울였다. 온 안력을 다해 근육의 움직임을 쫓았다. 예비 동작으로 공격의 방향을 유추하여 미리 몸을 기울였고, 바닥을 기듯 무게 중심을 낮춰 빙판에 미끄러지는 일을 대비했다.
미꾸라지처럼 아슬아슬하게 회피하는 내 거동이 심기를 자극했는지, 토끼가 새빨간 홍안을 꿈틀거리고는 크게 도약해 두 다리를 내다꽃았다.
“.....”
기회.
나는 즉시 옆으로 뛰어 사선에서 벗어난 뒤 단도를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도신은 착실하게 털가죽을 스치고 빙판 위에 후두둑 핏물을 떨어뜨렸다.
“...나도 속도엔 조금 자신 있거든.”
어떠냐, 한 방 먹은 기분이.
토끼는 멍하니 발목의 상처를 응시하며 우두커니 얼어붙었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는가 싶더니
삐이이이이이이익!!!!!
분노했다.
풍선처럼 팽창하는 근육. 울긋불긋 핏발 선 두 눈동자. 하늘로 치솟아 내려올 줄 모르는 귀.
놈이 비대한 뒷발을 내디뎌 다가오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단도를 움켜쥐었다.
분노에 찬 울부짖음이 대기의 떨림을 자아내고, 점차 다가오는 신형이 내 발치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순간ㅡ
“이 하등한 털투성이 마물!!! 늬들 토끼는 자기 똥도 주워 먹는다며?!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던가!!!”
.....!!
등을 돌려 부리나케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먹혀들었겠지...’
달리면서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바짝 열 오른 토끼가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목격하곤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모두 계획대로. 구불구불한 통로를 필사적으로 질주했다. 여기까지 오는 경로는 머릿속에 다 넣어두었다. 급격하게 꺾어진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고, 단도로 미리 파 홈을 딛으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신속히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토끼의 태생적 약점. 놈들은 긴 뒷다리 탓에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속도가 현저하게 느리다.
나는 일부러 경사가 가파른 경로를 골라 질주했다. 가쁜 호흡이 자아내는 입김을 헤치며 푸른 세계를 헤집었다. 통로에 다급한 발소리가 메아리치고, 코너를 도는 순간 큼지막한 얼음 기둥 뒤에 웅크린 네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어 토끼가 골목 어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늑대 앞을 지나는 순간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늑대가 튀어나와 기습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새하얀 목덜미에 핏방울이 튀는 일도 없었다.
녀석은 계속 숨죽인 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모두 우리의 계획대로.
늑대는 슬그머니 기둥에서 빠져나와 통로 저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 하나에 모든 정신이 팔려 쫓아오는 토끼를 보고 있자니 절로 실소가 자아졌다.
그렇게 모퉁이 몇 개를 더 지났을 즈음, 점차 토끼와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 육중한 덩치를 이끌고 뛰기도 쉽지 않으니 이제 체력에 한계가 찾아온 거겠지. 나도 슬슬 폐가 아파오기 시작했으니 이쯤이면 적당하다.
나는 불현듯 도주를 그만두고 자리에 멈춰섰다.
.....?
토끼는 그런 나를 의아하게 쳐다봐왔지만, 이내 두 귀를 곧추세우며 전의를 갈무리했다.
나는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녀석을 돌아보았다. 계획이 전부 예정대로 흘러갔음에 안도하며.
“야.”
삑...?
“너 이게 뭔 줄 알아? 구경이나 해본 적은 있으려나 모르겠네.”
삐익....?
손가락 사이사이로 은은한 불꽃을 머금은 광석 알갱이를 굴리고는
“이건 플래시 골렘의 핵이란 건데 강한 충격을 주면 폭발하거든?”
“엄청 비싼 물건이라더라. 개당 2~3실링은 하지 않을까?”
“근데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
“가령 네 발밑에 있는 돌멩이라던가.”
....?!!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강렬한 섬광이 발발했다.
토끼가 발치를 내려다본 순간, 도주하며 미리 굴려놓았던 핵이 터져나가며 놈의 청각과 시야를 앗아갔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내달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날뛰는 토끼 마물을 지나쳐 통로 저편으로.
“잘 있어라!!!”
지금 놈을 잡으려 해봤자 불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애먼 공격에 적중할 수도 있고, 놈 정도 되는 몬스터면 시력을 상실한 상태로도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재빨리 뒤를 돌아 확인해보니 토끼는 커다란 귀를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계획이 잘 들어먹혀서 다행이야.’
나와 늑대가 처음부터 노린 건 녀석이 먹다 남긴 순록 사체. 토끼를 잡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살아남는 게 목적인 이상 위험 요소를 최소화해야 한다.
적어도 라디를 찾아야 하는 이상 지금은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
나는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오랜만에 맛볼 고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슬슬 빙판 위에서 뛰어다니는 데에도 요령이 생긴 바, 쾌속으로 얼음 동굴을 질주하다 보니 처음 토끼를 마주했던 공동에 도달했다.
성공이다.
나는 순록의 핏자국이 늘어진 방향으로 나아갔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익숙한 늑대를 발견했다.
흠씬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녀석을.
“잠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삑?
“제길...”
얼음에 가려진 형체를 마주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눈이 밤탱이가 된 늑대 앞에는 또 다른 근육질 토끼가 녀석의 멱살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모양. 설마 한 마리가 더 있었을 줄이야.
뿌드득! 굵직한 목둘레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위에 얹힌 새빨간 두 눈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너도 한 패냐?’ 라고.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물러서려는 찰나, 늑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말았다.
“.....”
......
하아.
뻐근한 한숨을 내쉬었다. 멋쩍은 미소를 피어올리며 발뒤꿈치에서 힘을 뺐다. 단도를 중단으로 치켜들며 코볼트 단검을 뽑아 왼손에 역수로 쥐었고, 눈동자에 아릿한 살기를 담아 토끼를 노려보았다.
“...야, 늑대.”
끼잉....
“잘 봐둬. 인간은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줄 테니까.”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정신을 고무했다. 물러설 수 없을 땐 최선을 다해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이 나의 철칙.
감정이 희박한 홍안에서는 적의를 읽을 수 없었지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근육을 보면 내게 무슨 일이 닥쳐올지는 뻔했다.
거대 변이 토끼.
당장 늑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다. 플래시 골렘의 핵은 추후를 위해 최대한 아껴두어야 한다. 내가 지닌 무기라곤 짧디짧은 단검 두 자루가 전부.
불리한 상황이지만 아예 승산이 없지는 않다.
놈은 앞서 보았던 토끼보다는 덜 성숙해 보이니까.
긴장감이 고조되고, 푸른 빙하에 맺힌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내린 순간
쩌저저저저적!!!!
발밑의 얼음이 터져나갔다.
동시에 튀어나간 두 음영.
재빨리 옆으로 미끄러지자 커다란 두 발이 내가 있던 장소를 분쇄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며 공기를 찢어놓는다. 간발의 차.
나는 그 흉악한 위력에 아연실색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놈의 공격 패턴은 앞선 토끼를 상대하며 눈에 익혀두었던 바, 즉각 발차기가 날아들었지만 나는 옆으로 굴러서 회피했다. 이어 얼음에 단도를 박아넣으며 난폭하게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하아아아압!!!!!”
강한 공격 뒤에는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
찰나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양손의 칼날을 교차했다. 두 자루의 단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청회색 공간에 흑백의 궤적이 그어졌다.
서걱!!!
.....!!!
단도로 털가죽을 스치자 붉은 선혈이 검신에 배어나왔다. 붉은 눈동자가 크게 띄었다. 그야 인간을 만나본 적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날붙이의 예리함은 생소할까. 나 같은 적수 또한 생소할까.
후방으로 물러났다. 근육이 응축되고, 폭발적인 발차기가 날아든다. 위태위태하게 고개를 숙여 피해냈다. 발을 내디디며, 가속한다.
콰드드드득!!!!
얼음을 즈려밟는 기척. 사각에서 날아드는 하얀 궤적. 털투성이 뒷발이 심장을 노리고 육박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그대로 비명횡사했을 터. 허나 이 던전에 들어오고 난 후, 크나큰 상실의 고통을 겪고 난 뒤로 나는
한 단계 성장했다.
콰과과과과!!!
몸을 비틀었다. 바람이 휘몰아친다. 바닥을 박차올라 공격을 빗겨내며 두 자루 도신을 휘둘렀다. 흑안에 잔인한 살기를 피어올리며 광소했다. 살갗을 스치는 발톱, 칼바람에 옷자락이 옅게 찢어진다. 이는 내게 전투의 감각을 상기시켰다.
.....!!
올려베기. 붉은 실선을 그렸다. 내려찍기. 깊게 살점을 도려낸다. 기세를 살려 회전. 칼날을 선회하며 돌려차기. 반 회전 후 상대를 걷어차며 다시 역회전. 바닥을 미끄러지며 칼날을 박아넣는다.
삑...! 삐익...!!
토끼의 주둥이에서 새하얀 신음이 흘러나왔다. 종아리를 크게 베이자 놈이 물러났다. 나는 그럴수록 투망처럼 끈덕지게 눌어붙었다. 날렵하게 공격을 회피해 목덜미를 틀어쥔다. 당황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연거푸 칼날을 쑤셔박는다.
삐이이익!!! 삐익!! 삑!!!
“......”
단도의 진로를 바꾸어 역수로 거머쥐었다. 날카로운 외날 도신으로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놈의 털가죽을 관통할 때마다 뜨끈한 핏덩이가 옷자락을 적셨다. 토끼가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한 번 거리를 내준 이상은.
“손바닥 안이다!!!”
초식동물의 특징, 결함. 눈이 양옆에 달린 탓에 원근감에 취약하다. 포식자를 미리 발견하고 도망치는 데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다. 태생적 한계.
삐이익...!
이대로면 손수무책으로 당한다는 걸 깨달은 토끼가 필사의 공격을 강행했다. 피해를 감수한 비장의 한 수. 섬광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발차기가 측면에서 쇄도했다. 놈에게 근접한 나로서는 피할 도리가 없는 맹공이었으나
“늑대야!!!!!”
컹!!!!
시커먼 음영이 솟구쳤다.
익숙한 늑대가 동굴 구석에서 뛰쳐나와 토끼의 목을 물어뜯었다. 회심의 일격.
녀석은 아까 얻어맞은 걸 분풀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살점 깊숙이 박아넣었다.
삑...! 삐이익....
“잘했어!!!”
나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단검을 내리찍어 놈의 숨통을 끊었다. 하얀 덩어리가 축 늘어지자 붉은 선혈이 빙판 위에 느릿하게 퍼져나가고, 고통스러운 비명 또한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로써 전투는 끝났다.
‘우리’의 승리로.
“잘했다 인마.”
......
입가에 후련한 미소를 피어올리며 늑대를 토닥였다. 앞으로 당분간은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열량 하나가 얼마나 간절했던가.
한데, 불현듯 뒤돌아보니 늑대 녀석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왜 그래?”
.....컹.
녀석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쑥스러운 걸까? 동족 외 다른 동물과 협력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럴지도. 아니, 놈은 아직 어린 개체니 본연의 힘으로 사냥을 성공한 것 자체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늑대는 살벌한 네 눈동자로 통로 한구석을 응시하더니 토끼를 주둥이로 잡아끌며 내게 눈짓했다.
“....그래, 빨리 여길 뜨자.”
공동 한구석에 퍼질러진 배낭을 어깨에 짊어졌다.
방금 전투로 깨달은 사실.
이 정도 덩치의 몬스터가 서식할 정도면 분명 다른 포식자도 존재할 터.
잠시 후면 이 공동에 가득한 혈향을 맡고 다른 마물들이 꼬일 거다.
단순한 토끼가 이 정도 강함이라면 다른 짐승은 어떨까.
우리는 전리품을 들쳐메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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