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동행 #3
* * *
[094] 동행 #3
터벅터벅...
“....이 정도면 됐을까?”
크릉...! 킁!
“...그래?”
토끼를 사냥하고 대략 서너 시간이 흐른 시점.
추격자가 따라붙었다.
“제길... 아직 쫓아오고 있는 건 확실한 거야..?”
킁..!
“....알았어, 계속 가자.”
마치 거대한 수정 생물의 아가리 속을 탐험하는 듯, 일체가 얼음으로 이루어진 빙하 동굴을 거닐었다. 사방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나오는 덕에 조명 없이도 나아갈 수는 있었으나 대신 시간 감각이 마비되었다.
창자를 날카롭게 도려내는 공복감과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팔다리로 지금이 밤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
우리를 뒤쫓아오는 존재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상치 않은 늑대의 반응으로 보아 강적이란 건 확실하다.
적어도 토끼 때처럼 요행을 기대할 순 없겠지.
“......”
등 뒤, 지면에 방울져 흘러내리는 혈흔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토끼를 포기할까도 잠시 생각해봤지만, 곧바로 머리를 흔들어 떨쳐냈다.
벌써 몇 번이나 추적을 뿌리치고자 시도했다. 얼마 남지 않은 순록 사체를 버리기도 했고, 후각을 교란하기 위해 갈림길 너머에 토끼 내장을 유기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비좁은 굴을 통과할 땐 늑대와 힘을 합쳐 입구를 무너뜨리기도 했으니.
하지만 이런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착스럽게 쫓아오는 걸로 보아 한두 번 추격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니, 순록 사체를 던져 놨을 때도 뒤쫓아오는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 고기가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길... 대체 어떤 놈이 따라붙어선... 야, 빨리 가자.”
킁...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자 늑대가 제 몫의 토끼 고기를 입에 물고 졸래졸래 쫓아왔다. 그래도 이 녀석이 가자는 데로 고분고분 따라와줘서 다행이다. 요 하루 동안 행동을 함께하며 어느새 서로를 제법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얜 그냥 쫄보다 쫄보.
어찌나 겁이 많은지... 동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거나, 단순한 재채기에도 혼비백산해 얼음 뒤로 숨곤 했다. 그런 주제에 내 고기를 호시탐탐 노리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토끼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걸 보면 가끔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묘하게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야... 어떻게든 따돌릴 방법 없어? 슬슬 쉬어야 하는데...”
아침에 먹은 빵 쪼가리를 제외하면 내내 공복 상태. 어깨에 둘러멘 토끼 사체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또 저체온증에 걸릴 터, 어쩌면 그 전에 탈진할지도 모른다.
.....킁!
늑대는 입에 고기를 문 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발걸음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걸로 보아 짚이는 장소가 있는 모양.
녀석을 뒤따라 십여 분 정도를 더 걷자 새로운 지형과 맞닥뜨렸다.
킁!
“....아니, 확실히 이거라면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 좋다.
불길한 예감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다른... 길은 없을까...?”
크응... 킁!!
“젠장...”
얼음 호수
우리가 나아가던 통로의 끝자락에는 투명한 살얼음이 낀 너른 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의 피로도 잊고 멍하니 바라볼 정도로 청명한 광경. 푸른 색조의 천장과 맞물려 은은하게 빛나는 수면은 몹시도 매혹적이었으나, 그 이면에 도사릴 치명적인 위험을 생각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 안에 자칫 빠지기라도 했다간 절대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본능에서 오는 두려움이 발길을 옭아매었지만, 결국엔 이 호수를 건너가야 할 운명이란 걸 자각했다.
킁..! 크르르르.... 킁킁!!
늑대가 머리로 내 종아리를 밀며 재촉해왔다. 정체불명의 추격자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모양. 여기서 지체했다간 놈과 조우하고 만다.
“....젠장.”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는 없다.
도적의 습격으로부터 깨어난 이후로 느낄 수 있었던 감각.
쫓아오는 대상이 평범한 마물 따위가 아니라는 걸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 라디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곧바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녀석이 이런 위압감을 내뿜을 리 없으니까. 마치 일전에 그림자 괴물과 마주했을 때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염병할...”
결국, 나는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면서도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크응...!
“잠깐만 기다려!”
서둘러 탈의했다. 추위에 얼어붙은 손을 간신히 놀려 매듭을 풀고 속옷까지 전부 벗겨낸 뒤, 난폭하게 배낭에 집어넣었다. 얼굴에 뒤집어썼던 방수포는 부싯돌과 부싯깃을 감싸고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밀어넣었다.
킁! 크응!!
“조금만 더...!”
늑대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나는 이빨 자국이 가득한 배낭 위에 대충 손질한 토끼 가죽을 덮고 끄트머리를 묶어 구멍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토끼 고기를 한데 묶어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어서자 냉랭한 한기가 몸 구석구석 엄습해온다. 피부에는 오돌토돌한 닭살이 돋아올랐다. 고작 잠깐 옷을 벗었을 뿐인데 이런 추위라니.
킁!!! 크으응!!!!
“그래!! 가자!!!”
알몸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얼음판 위에 발바닥을 얹기가 무섭게 살벌한 소리가 들려온다. 지각 아래서 지열이라도 뿜어나오는 모양인지 유독 이 호수만 얼어붙지 않았으나, 수온은 0도에 육박할 터.
약 오십 미터 정도 되는 이 웅덩이를 가로지르고 플래시 골렘의 핵을 터트리면 살얼음을 전부 깨트릴 수 있다. 어지간히 제정신 박힌 상대라면 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헤엄쳐 오지는 않을 테고. 즉, 이 호수를 건너기만 한다면 추격을 뿌리칠 수 있다.
건널 수만 있다면.
쩌저적...!
“.....!!!”
찰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지며 내 발밑으로 하얀 금이 뻗어나갔다.
......낑.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던 도중, 늑대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자, 잠깐...!”
끼깅...! 낑!!! 깽!!!
늑대가 뒤도 안 돌아보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재빨리 납작 엎드려서 빙판 위를 네발로 기었다. 녀석은 토끼 고기를 덜렁거리며 달려나갔고, 나도 무언가를 흔들거리며 빙판 위를 바퀴벌레처럼 질주했다.
끄트머리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에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어쩔 수 없다. 늑대가 밟고 지나간 부분부터 얼음이 깨져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야, 야!!! 얼음 작살나는 거 안 보여?!! 당장 거기 서!!!”
크르르르!!! 끙!! 껑!!!
“멈추라고!!! 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팔다리를 놀렸다. 남은 간격은 약 이십 미터. 평소에는 단걸음에 주파했을 거리가 이렇게나 멀게 느껴지다니.
“제기랄!!! 너 나가기만 해 봐!! 이번엔 진짜 뒤질 줄 알아!!!!”
끼깅!!! 깽!!!!
늑대 녀석의 뒤꽁무니를 쫓아 빙판 위를 빨빨 기다 보니 점점 땅이 가까워졌다. 물에 빠지지 않았음에 내심 안도하며 마지막 오 미터를 남겨 둔 순간─
쩌저저저저저저저적!!!!!!!
“...!!!!”
시야가 가라앉았다.
소용돌이치는 기포와 휘몰아치는 물살, 살을 찢는 추위.
그리고...
고통.
날카롭게 벼려진 냉기가 피부를 난자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추위가 몸속의 공기를 쥐어짰다.
맹렬한 전류가 요동쳤고, 송곳으로 전신을 찌르는 듯 섬뜩한 통증이 몰아닥쳤다.
이건,
이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다.
[......!!]
[...!!!]
[....!! ...!!!!]
내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시야가 암전됐다.
*
[꼭... 다시 만나 도란...] [이번엔 실패했지만,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난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란님... 그럼 안녕히...] [반드시 구하러 가겠네]
[사랑했어]
“커헉...! 헉...!!”
희미한 기억들 속에서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맹렬한 사고가 빈자리를 메꾸며 경종을 울렸다.
춥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끼잉.
고개를 들자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샛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순간, 몬스터가 나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 눈빛에 서린 걱정과 동요를 읽고 나서야 녀석과 함께한 시간을 기억해냈다.
짧다면 짧은 시간.
팔뚝에 난 이빨 자국을 보고 나서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네가 날 살린 거야...?”
킁...!
녀석은 그럴 리가 있냐는 듯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지만,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로 하여금 날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몬스터에게 구해지다니.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다.
“엣취...!”
늑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쳤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알몸이란 걸 자각했다.
“젠장...!”
늑대가 체온으로 품어준 덕에 얼어 죽는 일은 면했지만, 이대로라면 동상에 걸리고 말 터.
황급히 등 뒤에 매달린 배낭을 벗어던졌다.
토끼 털가죽 표면에 붙어 있는 살얼음으로 보아 물에 빠진 지 고작 몇 분밖에 흐르지 않은 모양. 하지만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매듭을 풀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다급하게 늑대의 품속에 팔을 넣어 손을 녹이고자 시도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벌려.”
컹...?
“주둥이 벌리라고.”
......컹.
묘한 침묵이 흐른 뒤, 늑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아가리 안에 손을 집어넣고 굳은 손가락을 녹였다. 상당히 민망한 모양새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고맙다.”
끄응.....
어느 정도 손이 녹은 뒤에는 재빨리 배낭을 고정했던 가죽을 풀었다. 마치 더러운 거라도 맛본 양 헛구역질하는 늑대를 무시하고선.
“엄살은...”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배낭 입구를 열어젖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야.”
도리도리.
허나 늑대가 완강히 고개를 젓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마찰시켜 열을 발생시키고는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내가 찾는 건 부싯돌.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덕에 젖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꺼내기 버거웠다.
“젠장..”
재빨리 배낭을 엎었다. 끄트머리를 잡고 뒤집어 몇 번 흔들자 나뭇가지와 의복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그중에서 방수포를 찾아내 벗기고, 불쏘시개 대용으로 미리 만들어둔 여린 속껍질들을 한데 모은 뒤 부싯돌을 맞부딪혔다.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난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극저온의 기온에서 물에 빠지면 몇 분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
늑대가 체온으로 데워주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전에 물속에서 끄집어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호수 밑바닥에서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겠지.
물에 빠지면서 느꼈던 통증이 떠오르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의식을 잃을 줄이야. 지난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추위 속에서 강행군을 하며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터진 모양이다.
의식을 잃기 전 라디의 환청을 들은 일을 떠올리니 새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든가 해야지..”
재빨리 나뭇가지를 모아 화력을 높였다. 귀중한 땔감을 소모하긴 아까웠지만, 이럴 때 쓰지 않으면 언제 쓰겠는가.
적당히 몸을 녹인 뒤에는 토끼를 해체했다. 간단한 손질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미리 해뒀으니 이제 세부 사항만 마치면 된다. 나는 능숙한 칼질로 가죽에 들러붙은 살점을 마저 떼어내고 모닥불 근처에 늘여놓아 물기를 말렸다. 나머지 살코기들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 배낭의 빈 공간에 집어넣었다.
한데, 고기를 굽고자 손을 뻗은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야... 너 토끼는...?”
늑대 몫의 토끼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곧 입에 물고 한시도 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컹.
풀이 죽은 늑대를 보자 팔뚝에 난 이빨 자국이 떠올랐다. 날 구하기 위해 고기마저도 포기했던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녀석이 먹을 걸 버릴 리 없으니까.
그렇게나 식탐이 강한 녀석이었는데...
“....내 거 나눠줄 테니까 같이 먹자.”
컹!!!
늑대는 그제야 기분 좋게 짖으며 내 옆에 주저앉았다.
녀석이 조금 대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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