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95화 (95/375)

〈 95화 〉 동행 #4

* * *

[095] 동행 #4

토끼 고기를 불 위에 얹자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입안에 군침이 팽 돌며 텅 빈 위장이 요란하게 아우성쳤다.

지글지글 살코기 겉면의 기름이 끓어오르자 검은 꼬리가 바닥을 부술 기세로 탁탁거렸다.

“불에 구운 고기는 처음 먹어보지? 조금만 기다려.”

­컹!

다행히도 토끼가 큼지막한 덕에 둘이서 먹기에도 충분하다. 내일이 되면 또 식량을 구해야겠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 차가운 물에 빠져 소모된 열량을 보충해야 한다.

어느 정도 추위가 진정되자 비로소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지금 협소한 통로 중간에 있었다. 다만 얼음으로만 이루어졌던 이전과는 달리 이곳부터는 듬성듬성 바위나 자갈 따위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으니­.

나뭇단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흘러드는 방향엔 얼음덩어리로 가로막힌 통로가 보였다.

“....저건 네가 한 거야?”

­컹.

“잘했다 인마.”

파우치에 든 플래시 골렘의 핵이 하나 줄어있는 걸 보니 내가 크레바스에서 써먹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한 모양이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고 기억해두었다가 응용하다니... 정말 보면 볼수록 영특한 놈이다.

“...이 정도면 먹어도 되겠다, 자.”

나는 기름을 받고자 펼쳐두었던 나무껍질을 치우고 잘 익은 고깃덩어리를 늑대에게 내밀었다. 녀석은 뜨거운 음식이 낯선 건지 앞발로 툭툭 굴러가며 잠시 주저했지만, 조심스레 한 입 베어물고 난 뒤부턴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맛있냐?”

­컹!!!

“...다행이네.”

퍽 마음에 드는 모양. 나는 뼈째 고기를 씹어먹는 녀석을 따스하게 바라보며 뒷다리를 뜯어냈다. 검게 탄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자 금빛 기름기가 자글거린다.

­꿀꺽.

만화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의 살코기.

천천히 입 근육을 풀어준 뒤 커다랗게 한 입 베어물자­

“....!!!”

환상의 맛이 느껴졌다.

‘뭐지 이건...?’

지금까지 토끼는 수도 없이 먹어봤다. 숲에서 살아가던 시절 가장 만만한 사냥감이 토끼였으니. 당연히 갖가지 방법으로 조리해봤고, 꼬치구이에 스튜는 물론이며 날것으로도 먹어봤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떠한 양념과 밑간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겪어본 모든 레시피를 압도했다.

더군다나 토끼는 단백질 함유량이 높아 매우 퍽퍽한 편이다. 조난 시 지방이 있는 다른 고기류를 섭취하지 못하면 토끼 기아에 걸리고 말 정도로. 하지만 이 녀석은 상당히 기름지기까지 하다.

‘설마... 강함에 비례해서 맛있게 느끼는 건가...? 아니면 추운 기후에 서식하는 동물답게 체내에 지방을 축적해놓는다던가...’

씹을 때마다 터져나오는 육즙에 감탄하며 눈앞의 늑대를 쳐다보았다. 토끼가 이 정도인데 늑대는 어떨까? 사실은 이 녀석도 엄청 맛있는 게 아닐까.

­크르릉?!!

늑대는 고기를 뜯다 말고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곧바로 대수롭지 않게 꼬리를 흔들고는 바닥을 뒹굴며 뼈를 오독오독 씹는 데 열중했다.

그때였다.

“.....?!”

두 눈동자로 똑똑히 목격했다.

늑대의 근육 밀도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걸.

“너... 방금 뭐였어...?”

­크릉?

직접 본 나조차 눈을 의심할 정도로 미묘한 변화. 하지만 다년간 사지를 전전하며 단련된 눈썰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몬스터의 발육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단시간에 이런 변화라니...

­크으응....

하지만 녀석은 내 의문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뼈를 씹는 데 몰입했다. 제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

“......”

방금 광경을 보고 한 가지 짐작 가는 게 있다.

몬스터의 특성.

마물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전투를 겪으면서 성장한다. 적을 쓰러뜨리며 경험을 쌓고 기술을 연마한다. 모험가와 기사들이 대장장이를 통해 위협적인 무구를 장비하면, 몬스터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갈고닦아 저만의 무기를 갖춘다.

하지만 둘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면 한계에 다다른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고 할지라도 거대한 전장의 흐름 앞에서는 일개 병사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그래서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력이다. 실로, 하이랭커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상 마나의 각성이 필수라고 여겨지니.

마력을 행사하면 육체의 강도를 높이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에게 마나가 발현되는 경위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몬스터는 대부분 선천적으로 마나를 타고난다.

평범한 짐승과 마물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마나의 존재 여부. 놈들은 다른 마물을 포식해 체내의 마나 용적을 늘린다. 일전에 봤던 괴수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론상 몬스터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고, 이 경우 태생의 한계를 극복한 강함을 거머쥐곤 하니까.

즉, 내가 방금 늑대에게서 목격한 광경은 몬스터가 다른 마물을 포식하고 마나를 강탈해 성장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왕국의 모든 모험가를 통틀어도 이러한 경험을 겪은 사람은 굉장히 드물 터, 야생 몬스터가 눈앞에서 발육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인간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방금 감상이 무색하게도...

“....한 점 더 먹을래?”

­컹!!!

내 몫의 고기를 조금 떼어주자 녀석이 날아갈 기세로 꼬리를 빙빙 돌렸다.

이쯤 되면 그냥 마물이고 뭐고 영락없는 애완견 아닌가.

기름에 번질거리는 콧구멍이 묘하게 우스꽝스러워 실소했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끝까지 지켜봤지만, 아쉽게도 오늘 녀석이 더 성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늑대의 품에 안겨 스르르 잠들었다.

*

­....할짝.

“으음... 라디야...?”

­할짝할짝!

“...아침부터 그런....”

­크르르르...!

“......”

생존 나흘째.

안면 가득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꿈에서 깨어났다. 벌써 날이 밝은 모양. 눈을 뜨고 보니 새하얀 이빨이 코앞까지 들이닥쳐 있었지만, 이미 두 번째 겪는 일이라 이번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으헉! 씨발! 깜짝이야!!”

그렇다고 아예 안 놀란 건 아니지만.

“야 인마, 사람을 깨울 거면 좀 미리 말을 하던가!”

­킁...?

“쯧... 이래서 마물이란...”

손바닥으로 주둥이를 밀어냈다.

수통을 들이키며 기지개를 켜자 졸음이 가셨다. 이렇게 숙면을 취한 게 얼마 만이더라.

어젯밤엔 늑대가 자는 사이에도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어 준 덕에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편리한 녀석이다. 이곳을 벗어난 뒤에도 데리고 다니고 싶을 정도로.

­크릉...!

“그래, 잠깐만 기다려.”

식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점만 빼면.

나는 피식 웃으며 어제 먹고 남은 고기를 던져주었다. 이후 토끼 가죽을 배낭에 동여매고 일어서자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걸 잘 건조하면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겠지. 추운 기후에 사는 녀석답게 털이 복슬복슬해 좋은 소재가 될 터다.

어쩌면 털가죽 코트를 만들어 라디에게 입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알몸 위에 모피만 걸친 라디를 생각하니...

­컹...! 컹컹!!

“...시끄러 인마. 새끼가 눈치는 또 빨라가지고...”

배낭을 추스르며 발길을 옮겼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흑발이 선선하게 나부꼈다. 빙하 동굴의 종착지도 얼마 안 남았는지 호수를 건너오고 나서부터는 바위나 돌멩이가 발에 밟히는 빈도가 확연하게 늘었다.

늑대 녀석도 좋은 예감을 감지했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설렁설렁 뒤따라왔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

­컹...?

“.....너도 느꼈어?”

­크릉... 킁!

“그래, 이 앞에 뭔가 있나 본데...”

바람의 흐름이 바뀌었다.

줄곧 일정하게 불어오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미약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하루 온종일 풍향에 의지해 빙하 동굴을 전전했기에 감지할 수 있는 미세한 변화.

늑대가 작게 짖고는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하지만 곧 무심하게 고개를 드는 거로 보아...

­컹!!

“뭐, 뭐야 잠깐...!”

별안간 네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녀석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허겁지겁 녀석의 꽁무니를 쫓았다.

­컹 컹!! 크르르르! 컹!!!

“야!! 야!!! 같이 가 인마!!!”

비좁은 통로를 질주했다. 급격하게 제동하며 모퉁이를 꺾었다. 울퉁불퉁한 빙하 동굴의 노면을 내달리며 이리저리 나부끼는 꼬리를 뒤쫓았다.

늑대의 달음박질 속도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으나, 필사적으로 달려 어찌어찌 크게 뒤처지는 일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적잖이 숨이 가빠져 올 즈음...

­휘이이잉...!

“....!!”

바람의 변화가 현저해졌다.

점점 거칠게, 불규칙적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눈송이가 새하얀 입김에 녹아내렸다.

푸른 빙하가 자아내는 윤곽이 한층 명료해졌다.

출구가 얼마 머지않은 걸까.

“드디어...!!”

마지막 모퉁이를 지나친 순간...!

순백.

온통 백색 일체의 공간이 드러났다.

천장이 노출된 구조의 지형. 너르게 뚫린 하늘에서 새하얀 함박눈이 쏟아졌다. 그보다 더 하얀 햇살은 장엄하게 머리 위를 비추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눈더미 위로는 투명한 수정들이 돋아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푸른 빙하의 빛과 어울려 영롱한 광채를 흩뿌렸다.

­사박...

포근한 눈 한 송이가 콧등 위로 떨어지자 나는 홀린 듯이 빙설 위를 거닐었다. 프리즘의 빛을 몇 배로 증폭시킨 듯, 무지개처럼 내부가 반짝이는 크리스탈. 정체불명의 광석은 내 손가락이 닿자마자 신비로운 기운을 머리끝까지 퍼트리며 녹아내렸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광경이 존재할까.

나는 허공을 춤추는 휘황한 광채를 바라보며 말문을 잃었다.

높게 솟은 하늘에서 서늘한 바람이 쏟아지자 수정에서 풍경종처럼 맑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불현듯 발발한 돌개바람은 눈송이와 빛무리가 자아내는 아름다운 연무를 통로 곳곳으로 퍼트렸다.

비록 기대하던 탈출구는 아니었지만, 이런 경관을 본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고생이 조금은 보답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라디도 이걸 보면 좋아할 텐데...’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감상하고 있자니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밥은 잘 먹고 있을까. 혹 지금까지 제대로 잠도 못 잔 건 아닐까.

푸르른 눈동자와 닮은 빙하의 색채, 그녀의 살결처럼 고운 눈을 보자 추위에 몸을 떨며 어스름한 밤하늘 아래 내게 안겨들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분명 아름다운 장면일 텐데, 어째선지 내 마음속엔 슬픔만이 가득했다.

돌연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시선을 내리니 샛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늑대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문대며 손등을 핥았다. 내 눈그늘에 어린 슬픔을 알아챈 걸까.

­낑....

“...난 괜찮아.”

아마도.

나는 늑대의 검은 털가죽을 고적하게 쓰다듬었다.

녀석과 묘한 유대감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평온하던 이곳에 변화가 몰아닥친 건.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궁!!!!!!!!!!!

“뭐, 뭐야...!!!”

­컹!! 컹컹!!! 크르르르...!!

이곳이 잔악무도한 마경이란 걸 잠시나마 잊은 것에 대한 벌이었을까.

별안간 대기가 진동했다.

땅이 요동치자 눈더미가 낙하했다.

얼음이 갈라지며 섬뜩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천장이 부서지자 집채만 한 얼음 덩어리들이 추락해왔다.

불길한 전조.

“제길!!! 꽉 잡아!!!”

­컹!!

우리는 중앙으로 뛰쳐나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근처에 돋아난 수정이 터져나가며 날카로운 파편이 쇄도했다.

깨져나간 얼음 조각이 공기 중을 맴돌자 오싹한 광환이 흐드러졌다.

다급하게 검집으로 막아봤지만 살갗이 찢겨나가며 붉은 선혈이 흩날렸다.

검은 털가죽이 피로 물들고, 늑대가 애처로운 신음이 메아리쳤다.

찡그린 눈을 들어 두려운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빛이 저물고

소리가 사라지고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괴조(??).

전신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푸른 빙조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지금껏 봐왔던 모든 몬스터를 압도하는 자태.

패악(??)이라 일컬어도 모자람 없는 괴수가 창공을 날아 설원 저편으로 향했다.

그 어떤 추위도, 고통도 무색하게 만드는 존재감.

“......”

영겁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지나자 동굴에 햇살이 드리웠다.

어느새 대지의 진동은 그쳤고, 몸의 떨림도 멎어들었다.

새하얀 공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을 되찾았다.

하지만 박살 난 잔해들 탓에 이곳에선 더 이상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었다.

날갯짓만으로도 천지를 뒤흔드는 위용.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마물이야말로 이 층의 주인.

A급 파티를 궤멸시킨 범인.

이 여정의 말미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 최악의 적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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