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동행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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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동행 #5
이상하다.
사고를 거듭할수록 이상했다.
어떻게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지.
이 장소는 불가침의 마경.
A랭크 파티조차 공략에 실패한 연옥이다.
하물며 변변한 장비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라곤 개 한 마리밖에 없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방금 괴조를 보고 떠오른 확신.
이제껏 내가 7계층에서 만나온 마물은 전부 잔챙이들이 아니었을까.
어제 쓰러뜨렸던 토끼도 이 층의 다른 몬스터와 비교하면 먹이사슬 밑바닥에 불과하겠지.
내가 살아남은 건 단순한 요행이었다.
거듭된 천운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당장 오늘 내 능력 이상의 적과 맞닥뜨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내가 약하면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지 못한다.
이미 라디를 한 번 내 손아귀에서 떠나보냈던 것처럼...
나는 강해질 필요를 느꼈다.
“....괜찮아?”
끼잉...
늑대의 털가죽에 박힌 파편을 뽑아주었다. 수백 년간 차갑게 얼어붙은 빙하는 날붙이에 비견될 정도로 단단했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가자.”
출혈이 조금 있긴 하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다. 늑대의 상처도 몬스터의 질긴 생명력이라면 금방 호전될 터.
나는 찢겨나간 팔뚝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이를 악다물어 치미는 신음을 틀어막고 늑대를 부축해 눈발이 닿지 않는 통로 안쪽으로 이동했다.
한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토끼 털가죽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눕히자, 녀석이 네 다리를 바둥거리며 신음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잠시 푹 쉬고 있어.”
끙...
늑대는 내가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준 다음에야 진정하더니, 애처롭게 목청을 가다듬고는 혓바닥으로 상처를 핥았다.
하얀 눈더미 위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녀석은 알까? 나를 보호하고자 감싸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거란 걸.
아무리 몬스터라 할지라도 서로 생명을 빚진 사이. 평범한 관계는 이미 뛰어넘었다. 아니, 그간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했던 여타 모험가에 비하면 이 녀석이 백배 천배는 훨씬 소중하다.
사람에게서도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마물에게 품게 되다니...
녀석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컹...
“그래...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라디를 찾는 게 제일 급선무지만, 가능하다면 그 이후에 녀석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 내가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녀석도 동료들을 그리워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나는 이 순간, 또 한 번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
끙...?
“괜찮아 멀리 안 가고 여기 있을게.”
녀석을 다독여준 뒤 천천히 일어났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광채가 쏟아지는 원형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이어 날을 감싼 나무줄기를 붙잡고, 천천히 벗겨내자 둔중한 광택이 눈가에 드리웠다.
칠흑의 단도.
한 뼘 길이의 검신이 은은하게 빛났다.
밤하늘을 닮은 도신은 새하얀 눈발 속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의문의 무구.
내가 가진 가능성 중에서 당장 전투력을 끌어올릴 수단을 꼽자면 단연코 이 단도겠지.
이 무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뭐라도 바뀌지 않을까?
단단한 암석도 송두리째 베어버리는 칼날, 언제나 내 곁으로 돌아오는 변칙성을 이용한다면 분명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있을 거다.
한데, 빨려 들어가듯 단도를 노려보고 있자니 문뜩 의문이 들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또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시감.
어째선지 이와 비슷한 무기를 예전에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보았단 말인가.
이러한 단검을 평범한 대장장이가 벼려낼 수 있을 리 없다. 경매장에 내다 팔면 작은 주택을 장만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 나같이 밑바닥을 전전하던 F급 모험가 따위는 구경조차 못 했어야 정상이다.
‘.....’
기억을 헤집어봐도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한 번 싹튼 의구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모했다. 동일한 형태는 아니었을지언정 이와 유사한 무구를 분명 어디선가 목격했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강자들의 무기를 머릿속에 하나하나 열거했다. 도적 대장의 예검, 한돈의 언월도, S랭크 수인의 활...
하지만 이 어디에서도 감이 잡히는 내용은 없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손안에 든 단도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생전 처음 경험한 절삭력. 보고 있으면 베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서슬. 미세한 이음매 하나 없이 마감된 날몸에 더불어 저주받은...
잠깐.
저주?
재빨리 어깨춤의 단검을 뽑자 새하얀 도신이 드러났다. 지하수로에서 코볼트 킹을 해치우고 얻은 전리품. 금속을 연성해 만드는 일반 날붙이와는 달리 놈의 발톱을 소재로 써 주문 제작을 의뢰했었다.
“그때 분명히...”
나는 그중에서도 손잡이 끄트머리에 새겨진 직인에 주목했다. 대장장이의 명함과도 같은 부위. 그곳에는 ‘론디니움’이란 드워프 대장장이의 이름이 금빛 자수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그 대장간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라면 그 검에 손대지 않을걸세.’
기억났다!
기시감의 정체, 그것은...
“...대장간에 전시된 무구 중, 이 단검과 쏙 빼닮은 장검이 벽에 걸려있었어.”
칠흑의 장검.
나도 모르게 그 검에 홀린 일부터, 저주받은 마검이란 설명을 들었던 것도, 조명이 빛을 잃거나 그림자들이 내게 무어라 속삭이는 듯한 환청을 경험한 것도 전부 기억났다.
그래, 아무리 봐도 이 단검은 그 마검과 너무 닮았다.
장식이 일절 배제된 디자인과 정체불명의 재질, 검은 색상부터 저주받았다는 점까지.
드워프 영감이 그 장검을 건드리지 말라고 충고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내게 경고했던 건, 말톤과 라디가 단도를 만졌을 때처럼 반발 작용이 일어날까 봐 염려해서가 아닐까?
어째서 하자가 있는 마검을 대장간 중심에 진열해뒀는지 물었을 때 치를 떨면서 얼버무렸던 것도, 내 단도처럼 일정 시간 후에 도로 되돌아오는 특성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영감의 태도를 비롯해 모든 게 납득이 간다.
‘이 단도에 한 쌍이 있었을 줄이야...’
이런 특수한 무구들은 세트가 전부 갖춰져야 비로소 숨겨진 힘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이 단도가 변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장검은 대체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지닌 걸까.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자각하며 단도에 집중했다.
도대체 이 무기의 정체가 뭐길래.
언제 만들어졌을까? 누가 제작했을까? 진짜 재질이 뭘까?
처음엔 금속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단도는 코볼트 단검과 달리 맹추위 속에서도 얼어붙지 않았다. 그뿐만이랴, 마치 생명체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미약한 온기마저 느껴진다. 이런 금속 따위 들어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이 단도를 쥐고 있으면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오랫동안 손에 익은 것처럼.
이 단검이 내게 귀속된 이유도 모르겠고, 거리가 멀어져도 내 주변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에 대해서도 짐작 가는 바가 없다. 게다가 왕의 묘실에서 이 단도를 발견했던 때를 잘 떠올려 보면, 텅텅 비어있었던 석관에서 홀연히 나타났었다.
이게 정말 단검이 맞기는 할까? 어쩌면 내가 아니라, 이 단도가 의지를 가지고 내게 접근한 건 아닐까.
화산재처럼 겹겹이 쌓여가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처음엔 정말 오래된 골동품처럼 낡았다가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새것처럼 변하는 이유도 모르겠다.
이 모든 걸 그저 고대 유물이라는 말로 퉁치기엔 너무나 석연치 않다. 만약 저주가 걸려 있다면 대체 어떤 저주일까. 사용자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마검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듭된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고, 한 번 품기 시작한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막 떠오른 생각.
순수한 의구심에서 비롯된 의문.
분명 나 이전에도 이 무기를 쓴 사람이 있을 터.
이 무기가 제작된 의도가 분명히 존재할 터.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단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지?
찰나─
컹!!! 컹컹!!!!!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
어둡다.
너무 어둡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방금까진 분명 눈 덮인 동굴에 있었는데...
주변 기척에 귀기울이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에는 누군가가 발목을 낚아챘던 거친 감촉이 선연하게 남아있었다.
망자의 늪에서 기어나온 원혼이 사람을 잡아끌듯이.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혹시 이게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던 삼매(三?)의 경지라는 걸까?
단검에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명상에 이르렀다... 말이 안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런 게 고작이었다. 그게 아니면 백일몽이라던가. 그것마저도 아니라면...
‘내 그림자 안...?’
나는 불과 며칠 전, 한 괴물이 그림자 속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것을 보았다. 놈은 내 그림자에 숨어서 여정 내내 쫓아왔고, 종국엔 유적으로 안내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뒤부터는 기척을 감지할 수 없게 됐지만...
방금 발목을 잡아끄는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내 그림자 속, 어쩌면 내면세계와 비슷한 장소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제길... 이럴 때 말톤이나 라디가 있었더라면...’
마법에 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 아니, 누구나 이러한 상황에 놓인다면 마찬가지 아닐까.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호흡에는 지장이 없다. 시야가 온통 칠흑으로 물들어 발아래 뭐가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 내 육체는 또렷하게 내려다보이니 맹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부츠 매듭에 쌓인 하얀 눈부터 손바닥에 난 미세한 손금까지 전부 보였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으나 딱히 이렇다 할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전후좌우 빽빽한 암흑 속을 막연하게 거닐다 보니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난 언제까지 이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설마 평생 머물러야 하는 걸까. 지금도 늑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라디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젠장!! 거기 누구...!”
끝내 참지 못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치려던 찰나
쿠오오오오오!!!!
크아아아!!!
꺼흑...! 꺼허어!!
“....!!!!”
불쑥 발치에서 새하얀 팔뚝이 돋아났다. 살점이 떨어지고 썩어 푸른색으로 변한 팔뚝. 망자의 전유물과도 같은 메케한 시향(??)이 팽배하고, 부패한 악취가 전염병처럼 창궐했다.
그리고,
세계가 뒤집혔다
쿠구우우우우우웅!!!!!!!!
시야가 반전되자 대지가 불타오르고 붉은 강이 흘렀다. 하늘에선 거대한 우박이 떨어졌고, 지상에서 은빛으로 번뜩거리는 풀이 자라나 사람들의 육신을 첨예하게 난자했다. 도처에서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져 고막이 고통을 호소했다.
푸드덕! 푸드드드득!!
몸 전체에 괴이한 눈동자가 돋아난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놈들이 뾰족한 부리로 산 송장을 파먹자 검은 깃털을 비집고 핏발 선 눈동자가 희번뜩거리며 자라났다.
지평선을 틀어막고 선 날카로운 바위산은 시체로 그득했고, 거대한 구더기와 쇠파리가 송장의 체액을 빨아마셨다.
발아래에서 창백한 인면이 돋아나 증오와 원념으로 가득한 저주를 내뱉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죽어죽어죽어죽어!!!!!”“널 믿었는데...!! 너를...!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미워미워미워미워미워미워미워!!!!!!”
“......”
지옥.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한 공간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마모되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스으윽... 스으윽....
망자들이 점점 다가왔다. 피와 살덩이로 점철된 진흙탕을 헤집으며. 손톱이 뽑혀나가고 상반신만 남은 몸뚱어리에서 검푸른 내장이 질퍽하게 늘어졌다. 그들이 팔을 뻗자 내 종아리에 손바닥 모양의 시퍼런 멍자국이 생겨났다.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참회해라... 목숨으로 죗값을 치러라.... 검투사...”“배반자... 어째서 너는... 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우리와 하나가 되어라.... 살인자.... 살인자...”
한때는 미인이었던 금발의 여인이 추레한 차림으로 기어왔다. 짓뭉개진 외다리를 잡아끌어 천천히 일어났다. 마디가 뽑혀나간 손가락이 서서히 올라오고, 내 목을 졸랐다. 그녀의 복부에서는 검은 창자가 녹아버린 폐타이어처럼 늘어졌다.
까마귀에게 파먹혀 공허한 눈두덩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
나는 그저 묵묵하게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내 몸에 보랏빛 상흔을 남기더라도.
귓전에 알 수 없는 저주를 읊조리더라도
설령 이빨을 들이대더라도.
내겐 이 사람들을 해칠 자격이 없었다.
다만,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원하는 게 뭐야.”
이건 모두 과거의 일.
오래전에 극복했다.
어떤 개자식이 내게 이 장면을 보여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걸로 날 좌절시킬 수는 없다.
“나를 동요하게 할 속셈인가 본데...”
발치에 돋아난 잡초를 뽑아 손에 쥐었다. 은빛 칼날로 이루어진 풀잎에 베이자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 겁쟁이처럼 굴지 말고.”
칼날을 손에 쥐고 허공을 향해 겨누었다. 여기 어딘가에 날 이곳으로 끌고 온 놈이 숨어 있을 터.
망자들의 속삭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초리를 매섭게 뜨자 돌연 소리가 사라지고 나락에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도래했다.
덥고 습한 공기가 끝도 없이 늘어지며, 맹독성 늪지대가 피어올리는 탁한 독무에 후각이 마비될 즈음
[오랜만이다]
녹슨 쇠사슬로 차가운 돌바닥을 긁는 듯, 서슬 퍼런 음성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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