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동행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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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동행 #6
불쾌한 음성.
잡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는 성별을 특정할 수 없었으며, 노파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거기냐.”
칼날을 내던졌다. 은빛 궤적은 잔향이 메아리치는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쇄도했지만, 명중하는 일 없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간 잘 지냈나 도란]
“......”
재차 칼날을 주워들어 투척했으나 이번 역시 불발로 그쳤다.
정체불명의 음성이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어떠냐 네가 저지른 과오를 다시금 되돌아본 소감은]
“좆까.”
[...아무래도 성미를 조금 가라앉혀야겠군]
푸화악!!!!!!
덤덤하게 칼날을 내던지던 중, 바닥에 널린 사체 중 하나가 터져나갔다. 뜨끈한 살점과 내장이 튀고, 날카로운 갈빗대가 뺨을 스치자 붉은 선혈 한 줄기가 턱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두 번 묻지 않는다]
망자들의 안구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울룩불룩하게 불거진 살가죽과 구불거리는 척추가 예사롭지 않다. 연이어 시체를 터트릴 셈인가.
“네가 알 필요 없다.”
[그런가]
푸확!!!!!!!
다시금 시체들이 폭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육박한 뼛조각이 살가죽을 도려내고 신체 내부로 파고들었다.
산탄처럼 복부에 박힌 손가락 뼈마디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몰아닥친다.
[좋다. 잡담이나 하자고 널 이곳으로 부른 건 아니니]
“너... 정체가 뭐야.”
난 저런 놈 따위 모른다.
대체 왜 이런 존재가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내 물음을 들은 직후 목소리에서 미묘한 감정의 기복이 느껴졌으나, 그 변화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놈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내 호칭은 시대에 따라 늘 바뀌어왔다. 지금은 날 반역자라 부르더군. 하지만 과거에는 영웅이라 불리었지]
“...헛소리 집어치워. 너 마족이지?”
확신.
놈의 목소리에선 악마 특유의 향취가 풍겼다.
그 증오스러운 존재들의 역겨운 날비린내가.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부정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나는 오늘 네게 해를 끼치러 온 게 아니다. 믿어주었으면 좋겠군]
“...뭐라, 방금까지 이런 짓을 벌이고도 그딴 개소리가 나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드리워 발밑의 참상을 가리키자 놈이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다소 거친 환영 인사였다고 해두지. 네놈과 대화를 트기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였으니. 그래, 도란. 나는 너와 거래를 하러 왔다]
“거래... 거래라... 무슨 시덥잖은 소릴 하나 했더니.”
장난하나.
마족들의 수법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놈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천년 묵은 여우보다도 더 교활한 놈들이 바로 마족이다. 그들은 대상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 뒤, 코앞에 들이닥친 난관을 타개할 해결책을 제시한다.
가장 최악의 방법을.
눈앞의 과실이 독사과란 걸 눈치채지 못하고 덜컥 낚인 사람들은 악마들의 포로가 되고 만다.
처음부터 그들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것도 모르고.
가소롭다는 듯이 조롱을 담아 쳐다보자 목소리에 낀 노이즈가 한층 진해졌다.
[과두시사가 따로 업군. 결국 악마 덕에 살아난 네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허공을 노려보자, 놈이 차갑게 비소했다.
이어 쇳소리 가득한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과거에 대해서는 함구할 테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말했잖은가. 나는 너와 거래를 하러 왔다]
“입 아프게 하지 말고 꺼져. 내가 악마의 말을 듣는 일은 절대로...”
[라디를 구하고 싶지 않은가?]
“....!!!”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지금 그녀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걸.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새끼가!!!!!!!”
땅을 박찼다. 지면이 함몰된다. 기이한 기류가 주변을 감싸고, 그림자들이 요동치며 끓어올랐다. 불길한 조짐을 감지한 망자들이 허겁지겁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슈화아아아악!!!!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단검을 내던졌다. 순식간에 내 손아귀에 출몰한 검은 단도. 놈이 불길을 가르자 칠흑의 궤적이 생겨났다.
“감히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내 애인의 이름을 담아?!!!! 그 애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려 봐!!!! 죽여버리겠어!!!!!”
[슬슬 본성이 나오는군. 걱정 말거라. 아직 그녀에겐 아무 짓도...]
“닥쳐!!!!!!!!!!”
암막이 터져나갔다. 검은 물결이 파도치며 퍼져나갔다. 칠흑의 단도가 나와 공명하여 시꺼먼 해일을 일으켰다.
노도의 기세로 풀려난 급류는 난폭하게 소용돌이치며 지상의 불길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죽인다!!!!! 죽여버리겠어!!!!!!!! 당장 나와!!!!!!!!!!!”
[나를 죽인다고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텐데]
“그 입 다물어!!!!!!!”
솟구치는 혈류에 귓전이 울렸다.
악마의 표적이 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처참히 무너지는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번민하고, 회한에 잠겨 여생을 후회하며 보내게 되는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라디에게 악마의 입김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그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일어나라!!!!!!!!!”
분노를 해방했다. 내가 외치자 세계가 반응했다. 지각을 뚫고 기어오르는 검은 형체.
그림자 군단.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개미 떼가 끝도 없이 창궐했다. 놈들은 톱니를 까딱거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 구더기와 쇠파리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들 중 몇몇은 그에 그치지 않고 등딱지에서 날개를 펼치고 창공으로 날아올라 까마귀를 사냥했다.
온 세상의 생명체를 멸할 기세로.
“나와!!!!!!!!!!!!”
이 장소는 나의 그림자 속. 나의 내면 깊은 곳.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의 심상.
단도를 손에 쥐고 명령했다.
이 공간에서라면
내가 지배자였으니.
투화아아아아아아아악!!!!!!!!!!!!!!!!!!!!
바위산을 무너뜨리며 검은 덩굴이 솟구쳤다. 맹렬하게 요동치는 그림자 다발. 각각이 별개의 의지를 지닌 듯 꿈틀거리는 음영은, 물 밖으로 나온 기생충처럼 요동치며 지면을 휩쓸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칠흑의 군대.
놈들의 목적은 단 하나.
“나의 적을 쫓아라!!!!!!!!”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그림자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덩굴이 맹렬하게 가시를 돋쳐올렸다.
강대한 힘.
내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이 느껴졌다.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이 공간에서는 내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제야 좀 그럴싸해졌군]
“거기 서!!!!!!!!!”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간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강력한 힘을 행사한 반동이 찾아온 걸까.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세계로 하여금 나는 곧 끝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했다.
[내 조언을 명심해 도란]
“닥쳐!!!!!”
[인연을 소중히, 그리고..]
[말톤 그 자식을 조심해]
시야가 뒤집혔다.
*
컹!!!! 컹컹!!!!!
“......”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일어났다. 도통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를 간신히 움직이자 찌뿌둥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거운 고개를 드니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여긴....?”
원형 공간. 뿌옇게 빛나는 적설.
그래, 동굴에서 단도를 들여다보던 도중 정신을 잃었던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며 몸을 추스르자
컹!! 크응... 컹!!!!
시커먼 형체가 내게 안겨들었다.
“그래... 그래.”
나는 얼굴에 침으로 페인트칠을 하는 늑대를 보듬어주었다. 산만 한 덩치로 내 위에 올라타서 꼬리를 흔들어대는 녀석을 보자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지간히도 걱정했을까.
낑... 끼잉...
“알았어 인마, 조금 진정해.”
아무래도 쓰러진 날 대신해 줄곧 자리를 지켜주었던 모양이다. 털 한구석이 심하게 눌려있는 걸 보니 체온을 올려주고자 계속 끌어안고 있었던 건가.
발치 부근, 딱 녀석의 크기만큼 녹아내린 눈더미를 보자 조금 애틋해졌다.
“....뭐라도 좀 먹었어?”
컹!!!!
하다못해 보리빵이라도 챙겨 먹었으면 좋으련만, 다행히 날 기다리는 내내 쫄쫄 굶은 건 아닌 듯하다. 녀석이 재빨리 달려나가 눈밭을 파헤치더니 머잖아 멧비둘기를 닮은 새 하나를 물고 돌아왔다.
“오, 네가 잡은 거야?”
컹!!!
“잘했네.”
크릉..!
늑대가 뽐내듯이 콧김을 내뿜었다.
다만, 녀석은 내 예상과는 달리 다소곳하게 눈비둘기를 내려놓았다.
“설마... 나 먹으라고 주는 거야?”
컹!!!
“....고마워.”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검은 머리칼 탓에 이 세계에서 차별을 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어딜 가더라도 차가운 흰자위가 꼬리표처럼 내 등 뒤를 따라다녔고, 잠시나마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을 겪기도 했다.
반면 이 녀석은 내 외모를 보고도 전혀 꺼리지 않으니 당연히 감동할 수밖에.
그런 인간들보다 눈앞의 이 몬스터가 훨씬 낫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남은 장작에 불을 붙였다.
모닥불에 새고기를 던져넣고 등을 젖히자 늑대가 찰싹 달라붙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컹!! 크르르르....?
“왜 갑자기 쓰러졌냐고?”
컹!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나도 내게 일어난 일을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불가능했다. 아무리 마법이 판치는 세계라고는 하나...
나는 잠시 고민한 뒤 대답 대신 검은 털가죽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그걸로 만족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
수수께끼의 마족.
내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존재.
악마가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게 꼭 드문 일만은 아니다. 인간을 이간질하고 교란하는 건 놈들의 흔한 특기 중 하나니까.
놈이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는지, 어떻게 내 과거를 알고 있는지, 이후로도 수작을 부릴 셈인지는 모르겠다만...
‘...말톤을 조심하라고?’
헛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나와 말톤의 관계를 와해시키려 하다니.
악마들은 하나같이 간악한 놈들밖에 없다. 이런 순간에 찾아와 계략을 꾸미다니. 증오해 마지않는 존재. 지금껏 내가 만나왔던 마족은 전부 그런 놈들이었다.
...아니,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제기랄....”
어금니를 깨물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부러진 장검을 뽑아 고기를 뒤집자 노릇노릇하게 익은 살점이 보였다.
컹!!
“그래, 역시 불에 구워 먹는 게 맛있지?”
잘 익은 살코기를 늑대 앞에 덜어주고 한 입 베어물자 입안 가득 담백한 맛이 느껴졌다. 토끼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먹을 만하다. 지구에서 먹어본 비둘기는 꽤 비렸는데.
적당히 배를 채우고 일어나자 늑대가 걱정스럽게 쳐다봐왔다.
“그냥 요 앞에 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컹... 컹컹!!
“...안 쓰러져 인마. 누굴 약골로 아나. 아깐 좀 특별한 상황이었고.”
끙....
이 감각이 사라지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천천히 밤하늘 아래로 나왔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라도 보는 양 졸래졸래 쫓아오는 늑대를 뒤에 달고선. 이후 천천히 오른손을 전방으로 뻗으며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집중했다.
잠시 후, 손아귀에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익숙한 칼자루의 감촉이 느껴졌다.
칠흑의 단도.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무구가 주인의 부름에 응했다.
도신에서 반짝이는 은은한 광채는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이제 나도 조금이나마 녀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걸까.
심상세계(心?世?).
나는 그 장소에서 이 단검의 편린을 엿보았다.
지상을 휩쓰는 해일. 치명적인 가시덩굴. 검은 병사들.
당시엔 수족을 부리듯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은 지금은 조금이나마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이라...”
이번 일로 이 단검이 어마무시한 위력을 숨기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그래, 이 단도의 출처를 따라가 보면 전부 그림자와 연관이 있었지. 고대 유적의 입구를 발견하게 된 계기도, 미로에서 길을 찾아낸 것도, 그 끝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여왕도.
컹?
“...아무것도 아냐.”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뒤 작게 읊조렸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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