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동행 #7
* * *
[098] 동행 #7
“일어나라.”
순간,
검은 형체가 몸을 일으켰다.
컹!
늑대가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말고.”
혓바닥을 내민 채 헥헥거리는 녀석을 보자 김이 빠졌다.
나는 녀석의 혀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긴 다음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잠깐 그대로 있어 줄래?”
크응!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에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언제부터 이 흉악한 몬스터를 애완견 취급하게 된 걸까.
...진지하게 테이머로 전향을 시도해봐야 하나...?
하다못해 언젠가 이름이라도 지어 줘야지.
훗날 녀석과 헤어지게 될 날을 생각하면 벌써 아쉬웠지만, 그건 그때 섭섭해해도 늦지 않다.
나는 미련을 떨쳐내고 다시금 단검에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읊었다.
“....일어나라.”
.....
“나타나라.”
.....
“자라나라...”
잠잠....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봐도 변화의 조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애꿎은 늑대만 신음할 뿐.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걸 아닐지 염려하는 걸까.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고 난 후 허공에 혼잣말을 하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어허... 그런 거 아니야.”
...끄응.
못 미더운 눈치.
나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고 주문을 읊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수차례 더 시도해봐도 무언가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건이 있나?’
특정 환경에서만 발동하는 능력이라던가.
아무리 이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지라도 재현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만일 그 능력을 자유자재로 발현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도 한층 쉬워질 터. 비교적 안전하게 사냥감을 확보하거나, 베라스틴의 가증스러운 인간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거다.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제길... 지쳤나...”
피곤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오늘만 해도 많은 일을 겪었으니... 거대 괴조를 목격한 일부터 얼음 조각에 베이기도 했고, 기이한 현상을 체험하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지치는 게 당연하다.
“잠은 안 오긴 하는데...”
내일 또 부지런히 나아가려면 지금 휴식해둬야 한다.
나는 토끼 모피 위에 드러누워 늑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행히 몇 번 뒤척이자 잠들 수 있었다.
*
생존 닷새째.
컹!
“.....”
컹! 크르르르..!
“...그래 일어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침 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손바닥으로 늑대의 목덜미를 토닥여주자 녀석이 흡족하게 눈매를 좁혔다.
“별일 없었지?”
컹!
배낭에서 보리빵을 꺼내 아침을 해결했다. 늑대가 관심을 보이길래 나머지 반쪽을 녀석에게 나눠주었다. 이제 남은 식량이라곤 골수가 들은 뼈다귀와 보리빵 두 덩이가 고작.
“...맛있어?”
크릉!
이쯤 되면 이 녀석은 그냥 다 잘 먹는 게 아닐까.
입맛을 다시는 녀석을 보자 보리빵이 아깝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곳에 조금 더 머물며 눈비둘기를 사냥하고 싶었지만 이젠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한시바삐 라디를 찾고 이 장소를 탈출해야만 한다.
이제 슬슬 마주칠 때도 된 거 같은데...
....컹!!
“왜, 설마...”
크르르르....!
토끼 가죽을 짊어지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늑대가 반대편 통로를 응시하며 눈초리를 매섭게 떴다. 지금까지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경우는 딱 하나.
추적자가 나타났을 때다.
“...그때 그 놈들이야?”
컹!!
“제기랄...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통로를 틀어막은 게 발걸음을 늦추긴 했지만,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끈질길 줄이야.
어제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린 게 치명적이었다. 늑대의 말을 들어보니 상대의 기척은 둘. 잠시나마 라디가 아닐까 헛된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이로써 그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서두르자.”
컹!
빈 수통에 눈을 채워 넣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안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기온이 따뜻해졌다는 증거로 바위나 암반이 노출된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빙하의 푸른 색채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 걸로 보아 이곳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지형이겠지.
동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
“...이대로라면 오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는데...?”
컹! 컹!!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읊조리자 녀석이 동의했다. 지금까지는 사방이 얼음으로 가로막혀 있었던 탓에 위치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다.
이따금씩 높게 뚫린 천장으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곤 했으니까.
나라면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간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불필요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줄이고 싶다. 더욱이...
컹!
“그래, 계속 가자.”
내가 이대로 여기서 탈출해버리면 이 녀석은 혼자 남게 될 테니까.
처음엔 언제든지 쓸모가 없어지면 내칠 생각이었지만, 이제 이 녀석을 버리고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무심코 늑대의 머리를 긁어주자 녀석이 의아하게 올려다봤으나 이내 노곤하게 표정을 풀며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좋아?”
컹....
“.....”
역시 인간의 손이 지닌 마력이란... 라디도 꼬리를 매만져줬을 때 상당히 좋아했었지. 조금 다른 의미로.
컹?
“...아무것도 아냐.”
혹시나 해서 늑대의 꼬리를 쭉 잡아당겨 봤지만 의아하게 쳐다봐 올 뿐, 녀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뒤, 그 눈동자에 알쏭달쏭한 기색이 서리더니 콧구멍이 눈에 띄게 벌름거렸다.
“...왜 그래, 혹시 적이 나타난 건...”
컹..! 으르르...! 컹!!
“....?”
뭐라는 거지?
지금까지는 눈치껏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이번에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위험한 건 아닌 모양인데...
다급하게 내 옷자락을 잡아끄는 녀석을 쫓아 십여 분 정도 잰걸음으로 걷자 달가운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횡재했네.”
잔해가 가득한 동굴 중앙, 말라붙은 고목 몇 그루가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침엽수림 아래를 거닐고 있었던 모양. 무너져내린 천장의 구멍 사이로 짙푸른 녹음이 드리우자 송진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잘했다 인마.”
컹!
나는 누가 훔쳐 갈세라 서둘러 나무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추운 기후에서는 땔감의 수분이 동결 건조되어 불에 잘 탄다. 침엽수 특성상 그을음이 다소 발생하기는 하겠지만 순간 화력이 뛰어나 추위 속에서 피우기에는 딱 좋다.
마침 장작을 보충해야 하던 차. 난데없는 행운에 감사하며 불쏘시개로 쓸 솔방울을 찾던 도중, 어쩐지 늑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왜?”
끼잉... 낑...
녀석이 앞발로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나무와 얼음이 맞닿는 부분을 긁어대며 내게 눈짓했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을 도와 썩은 나무둥치를 뒤엎자 묘한 걸 발견했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컹!!
“아니 이건 암만 봐도...”
버섯.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 짜리몽땅한 외견은 송이버섯을 닮았다. 조심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향긋한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 냄새에 이끌려 온 모양인데...
“...이거 아무리 봐도 독버섯이잖아.”
지나치게 화려하다.
사과처럼 새빨간 색상에 더불어 하얀 점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게, 독이 들어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열흘 넘게 굶주린 사람도 이런 건 거들떠도 안 볼 거다.
세간에선 나무에 자라는 버섯은 먹어도 된다느니, 결이 세로로 찢어지면 독버섯이 아니라느니 하는 말이 떠돌지만 전부 낭설일 뿐이다.
독에 능통한 라디라면 모를까 버섯 종류는 확신이 없다면 먹지 않는 게 최선. 아무리 식량이 없다고 한들 이런 도박을 할 수는 없다.
아쉬움을 달래고 내려놓으려던 찰나...
덥썩!
“어...! 야! 야!!! 뱉어!!!”
늑대가 내 손에 든 버섯을 날름 집어삼켰다. 재빨리 녀석의 주둥이를 벌리고 팔을 들이밀었지만 버섯은 이미 목구멍 너머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컹!
“아니 너 지금.... 괜찮아...?”
컹! 컹!!
녀석이 안심하라는 듯 해맑게 짖어 보였다. 텐션이 올라간 걸 보니 맛도 좋은 듯하다.
“...아니 이거 진짜 수상한데...”
하지만 내 위장도 만만치 않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시달리며 온갖 괴식을 먹고 자랐으니.
늑대가 괜찮다면 나도 문제없을 터, 버섯 귀퉁이를 살짝 베어 물자
“......!!!”
맛있다.
어마어마하게 맛있다.
뭐지 이 중독성은...?
홀린 듯이 손안에 든 버섯을 통째로 먹어치웠다. 그걸로 모자라 양손에 각각 하나씩 쥐고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컹! 크르르르...! 컹컹!!!
“그래, 잠깐만...!”
버섯을 조금 더 뽑아내 늑대에게 던져주었다. 나도 고민하지 않고 몇 송이 더 집어삼켰다. 도저히 손을 멈출 수 없는 맛. 하지만 나는 이 시점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늑대는 원래 버섯을 먹지 않는다는 점을.
놈이 고작 균류 쪼가리에 집착을 보였던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어어, 이거 좀 이상하다...?”
크헝헝..?
늑대가 두 마리로 늘어났다. 네 눈동자가 여덟 개로 불어나 거미처럼 꿈틀거렸다. 이어 시야 구석이 무지갯빛으로 일그러지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경쾌한 곡조처럼 구불거렸다. 그리고...
“....딸꾹!”
멍!
취기 어린 딸꾹질이 새어나왔다.
구름 위에 붕 뜬 듯한 느낌. 몸이 가볍고 머리가 몽롱하다. 고급 양주를 병째로 들이부은 느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게 얼마 만이지?
“뭔가 했더니 마약이였냐아아아..”
왈!! 왈!!!
늑대는 자신의 본분도 잊고 개처럼 짖어대기 시작했다. 이어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꼬리를 쫓더니, 제풀에 걸려 넘어지고는 허공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으어어...”
나도 그와 별반 다른 신세는 아니었다. 현기증 이는 시야를 뒤로하고 바닥에 엎드려 얼음에 뺨을 문대는 게 고작이다. 통각 완화 효과가 있는지 상처의 통증이 확연하게 줄어들긴 했지만, 속이 심하게 메스꺼웠다.
결국, 삼십 분 정도를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난 뒤에야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야.”
......
“야, 이 약쟁이 새끼야.”
머, 멍...?
늑대가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침을 질질 흘렸다. 아직도 약발이 안 풀린 모양. 어쩐지 맛이 간 채로도 계속 주워먹더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녀석의 꼬랑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깽!! 깽깽!!! 크르르르...!
“뭐 인마. 너 때문에 시간 잡아먹은 거 안 보여?”
축축한 콧구멍에 딱밤을 때리고는 배낭을 짊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장작을 확보한 건 좋지만, 우리는 쫓기는 처지. 추적자가 이곳까지 당도하기 전에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왈왈!!
“시끄러. 다시 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건 약재로 쓸 거야.”
나는 버섯을 몇 송이 더 채취해 배낭에 넣었다. 여기에 토끼 기름을 적시고 나뭇가지에 끼우면 임시 횃불로 응용할 수 있을 터, 남용만 하지 않으면 진통제로 쓸 수도 있겠지.
최대한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만.
나는 휘청거리는 늑대를 보채며 통로를 향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 동굴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히 라디와 만날 확률도 올라갈 테고.
그때였다
철컹!!
날카로운 금속음이 동굴에 메아리쳤다.
시선을 내리자 그곳엔 철제 검집이 널브러져 있었다.
허리를 굽혀 주워드니, 낡아서 끊어진 가죽끈이 시야에 들어왔다.
“......”
불길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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