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99화 (99/375)

〈 99화 〉 동행 #8

* * *

[099] 동행 #8

­스으윽... 스윽....

“......”

­.....

“...갔냐?”

­....컹.

“어우 씨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바위 뒤에 숨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늑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큼지막한 서릿빛 슬라임 한 마리가 갈림길 너머로 유유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앞으로 슬라임한테는 깝치지 말자.”

­컹.

찢겨나간 소매를 추스르며 배낭을 짊어졌다.

둥글둥글한 외형이라 얕잡아 본 게 패인. 통로를 가로막고 있어서 가볍게 물리치고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설마 고등 마법을 구사할 줄은 몰랐다. 발밑에서 솟구치는 얼음 기둥에 꿰뚫릴 뻔한 적도 수 번.

슬라임이 개체 간 강함의 편차가 크다고는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심상치 않다.

녹아내린 얼음 사이로 엿보이는 녹음이 점점 더 푸르러졌고, 굵직한 뿌리가 빙하 사이를 파고든 광경이 자주 눈에 띄었다. 비교적 기온이 따뜻해진 건 다행이지만, 그건 그만큼 붕괴의 우려 또한 덩달아 커졌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몬스터와 조우하는 빈도도 잦아졌고.

늑대가 사전에 알아채고 경고해 주지 않았더라면 큰 위험에 처했을 터, 녀석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이쯤에서 한 번 더 바르고 가자.”

­끼잉...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천장의 구멍으로 무너진 잔해에서 토사류를 한 움큼 덜어냈다. 이후 재빨리 모닥불을 피워 꽝꽝 얼어붙은 진흙을 녹인 다음, 숯덩이와 고르게 섞어 머드팩을 만들었다. 이걸 몸에 바르면 조금이나마 체취를 줄여줄 터.

늑대는 털이 엉겨붙는 게 질색인 나머지 영 꺼리는 눈치였지만, 내가 눈짓으로 재촉하자 마지못해 다가왔다.

­끄응...

“잘했어.”

녀석의 몸 구석구석에 검댕칠을 한 다음엔 나도 온몸에 진흙을 펴발랐다. 남은 진흙은 다음에 쓸 일을 대비해 빈 칼집에 흘려넣어 보관했다.

­크으응....

“그래,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맛있는 거 잔뜩 먹자. 고기만 구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불에 구워줄 테니까 좀만 참아, 알겠지?”

­컹!

“그래 그래...”

살갑게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시꺼먼 진흙을 뒤집어써 볼품없는 모양새일지언정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안심이 된다.

“옳지... 자, 이제 계속 가자. 얼마 안 남았어.”

일단 이 지긋지긋한 동굴만 벗어나면 된다. 머리 위, 드넓게 펼쳐진 숲으로 나가면 언제든지 땔감과 식량을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라디를 찾는 데 늑대의 후각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디도 근처까지 와 있다면 좋을 텐데...’

녀석도 바람을 쫓아 왔다면 이 침엽수림에서 마주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반갑게 재회하고 나면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화포를 풀어야지. 그렇게 밤새 떠들다 늑대의 인사 세례를 받으며 아침을 맞이하는 거다.

이 층을 벗어나면 모험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고.

희망찬 전망에 들떠오르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나아가던 도중,

“....잠깐.”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바닥을 훑자 울퉁불퉁한 노면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컹...?

“...여기 좀 봐봐. 마물의 흔적이야.”

짐승 발자국.

워낙 어렴풋한 탓에 무심코 지나갈 뻔했지만, 명백한 몬스터의 족적이 진흙에 찍혀 있었다. 나와 늑대의 발 사이즈를 완전히 웃도는 크기. 단단히 얼어붙은 거로 보아 꽤 시간이 지난 모양이지만, 이러한 괴물이 이 동굴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젠장...”

무슨 맹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범상치 않다.

‘예감이 좋지 않아.’

식은땀 한 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둘러보자 놈의 흔적이 사방에 가득했다.

메아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널찍한 공간. 새까만 현무암에는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파여 있었고, 진흙과 눈이 한데 뒤섞인 바닥엔 희고 검은 터럭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간 갈고닦은 직감이 찌릿찌릿 목덜미로 신호를 보냈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잠깐...!”

­컹?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 쇳소리 같은...”

­크응...?

늑대가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이내 코를 치켜들고 킁킁거렸지만, 끝내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

불길하다.

늑대의 감각도 항상 정확하지만은 않다. 녀석의 청각과 후각 이상으로 기척을 지우는 게 능한 놈들이 있다.

예컨대 조금 전에 만났던 슬라임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피해!!!!!”

찰나, 시뻘건 아가리가 펼쳐졌다.

늑대를 덮치며 자리를 모면하자마자 서늘한 독니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이빨에 송골송골 맺힌 진녹색 액체를 보자 등골이 오싹했다.

“젠장!!! 괜찮아?!!!”

­컹...!

늑대는 다소 놀란 기색이었지만,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뒤로 물리고 경계하자 비좁은 바위틈에서 거대한 코브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쐐기 모양의 두개골을 우리에게 고정하더니 목 양옆의 넓적한 볏을 펼치고 쉿쉿거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염병!!!!”

­컹!!!

말할 틈도 없이 녹색 진액이 쇄도했다. 땅을 굴러 회피하자 후방에 있던 바위가 액체를 뒤집어쓰고 녹아내렸다. 치명적인 산성 맹독.

“시발...!”

연이은 공격. 독액에 발이 묶인 사이 놈이 동굴을 가로질렀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육박해 주둥이를 벌려 온다. 나는 재빨리 사선을 벗어나며 코볼트 단검을 발도했고, 날렵하게 도약해 은빛 칼날을 몸뚱이에 박아넣었다.

허나­

­까아아앙!!!

“큿...?!!”

단검이 튕겨나왔다.

새빨간 불똥이 튀었을 뿐, 놈의 단단한 비늘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저릿한 감촉에 당황하며 재빨리 자리를 박차려 했지만, 바닥이 미끄러운 탓에 회피가 한 발 느려지고야 말았다.

놈이 육중한 꼬리를 휘둘러 흉부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앙!!!!!!

“크허억?!!!”

뼈가 모조리 깨져나가는 듯한 감각. 기도를 다쳤는지 피가 왈칵 게워나왔다. 현기증이 일어 불빛이 일그러지고, 폐 속의 공기를 강탈당해 숨을 쉴 수가 없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틀어쥐고 일어나 전방을 노려보자 뱀에게 뛰쳐드는 늑대가 보였다. 녀석은 독액을 날쌔게 회피해가며 지척으로 파고들었지만, 코브라의 민첩성이 그를 훨씬 상회했다.

­콰과과과각!!!!!

­컹...!! 컹!!!

거대한 꼬리가 튕기자 바위가 터져나갔다. 시커먼 파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비산했다. 늑대가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지만, 그 찰나의 틈을 노리고 치달아온 꼬리에 얻어맞자 맥없이 동굴 구석에 처박혔다.

­쉿...! 쉬이잇...!

두 갈래로 갈라져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만족스럽게 전장을 탐닉했다.

‘제기랄...’

설마 이런 장소에서 이 정도의 강적과 맞닥뜨릴 줄이야.

파충류가 이 계층에 서식하고 있는 것도 예상 밖이다. 변온 동물의 특성상 추운 기후에서는 활동할 수 없을 텐데.

지금껏 만나왔던 잔챙이들과는 격이 다르다.

극도로 치명적인 산성 독액을 발사하는 거로도 모자라 날렵하고, 거대한 덩치까지 갖췄다. 저 몸체에 짓눌리면 전신의 뼈가 으스러질 터, 마름모꼴 비늘의 강도는 강철에 비견될 정도.

등을 돌려 도망쳐봤자 이놈한텐 곧바로 따라잡힐 거다. 퇴로조차 없는 상황.

그나마 녀석을 해치울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

단도를 움켜쥐었다.

­쉬이잇..!

내 전의를 읽은 놈이 가소롭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잔인한 지성이 엿보이는 세로꼴 동공이 내 추이를 살폈다. 이어 역삼각형으로 펼쳐진 머리가 드높게 치솟아 본격적인 개전을 알린다.

큼지막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독액이 분사된 순간­

나는 놈에게 뛰쳐나갔다.

“하아아압!!!”

기합을 내질렀다. 지면을 박찼다. 동굴을 질주한다.

늑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세를 낮춰 울퉁불퉁한 노면 위를 활보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놈의 아래턱이 재차 벌어졌다. 선분홍빛 구강이 꿈틀거리고, 녹색 진액이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다.

­촤하아악!!!

“.....”

단조롭다.

변화무쌍한 궤도를 그리던 꼬리 공격과는 달리 독액은 놈의 시선을 주시하면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치명적이라고 한들 맞지 않으면 그만.

맹독을 뒤집어쓰기 직전, 나는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방향을 틀었다. 말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보법을 이용해 삽시간에 코브라의 배후로 치달았다.

동시에 역수로 쥔 단도를 내리긋자­

­쉬쉬쉿!?!!

푸른 혈액이 솟구쳤다. 노란 거체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가 사방으로 튀자 파르스름한 연무가 생겨났고, 꼬리에 부딪힌 현무암이 잘게 깨져나갔다. 확실한 일격.

하지만 아직 멀었다.

놈은 잠시 발광하더니 돌연 행동을 멈추고 날 노려보았다. 그 새빨간 눈동자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분노가 남실거렸다.

­슈화아아아악!!!!

독니가 몰아닥쳤다. 파충류 특유의 썩은 구취가 훅 끼쳐온다. 나는 고개를 숙여 회피했다. 신속하게 발을 디뎌 선회하고, 바닥을 짚으며 접근한다. 하지만 놈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의식하기도 전에 꼬리가 날아들었다.

“....!!”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머리통이 날아갔을 일격. 눈앞을 스치는 굵직한 비늘에 식겁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시야를 가렸던 육벽이 사라짐과 동시에 산성 독액이 쇄도해왔고, 바닥을 굴러 회피하자 뾰족한 돌조각이 등을 파고들었다.

얼어붙어 단단하게 굳은 진흙과 모래에 맨살이 쓸렸지만, 참아야 한다.

천장에서 부서져내린 고드름이 내 몸체를 꿰뚫을 듯 내려찍혔으니.

‘....제길.’

능란한 기교. 전투가 익숙한 놈이다. 살아온 세월도 내 곱절은 될 터.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한순간에 골로 갈 수도 있다.

­콰아아아아앙!!!!!

연이어 잇따른 공격. 좌우로 도약하고 단도로 응수한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츠리다가도, 순식간에 접근해 독액을 흩뿌린다. 나는 최대한 민첩하게 회피하며 기회를 노렸지만, 사각에서 엄습하는 꼬리 탓에 쉽지 않다.

­스스스슷...!!

“염병!!!”

지면에 납작 엎드리자 묵직한 질량이 머리 위를 스쳤다. 이어 돌부리를 즈려밟으며 즉각 자세를 고쳐잡았다. 허벅지를 스치는 파편들과 교차하며 높게 비약하고, 벽을 디뎌 간격을 좁힌다. 하지만 도중에 놈이 늑골을 부풀리고 독액을 발사할 전조를 보여 멀찍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크윽...!”

놈의 주요한 공격 기술은 꼬리 강타와 독니, 맹독 분사. 가진 거라곤 짧은 단도 하나밖에 없는 나와는 천지차이다.

놈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려면 필시 가까이 접근해야 할 터, 하지만 코브라도 그걸 알고 있기에 내 단도를 예의주시하며 간격을 내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근접하려 하면 꼬리로 견제하며 독을 뱉어대니 까다롭기 짝이 없다.

차츰차츰 피부 위를 수놓는 생채기와 늘어나는 산성 웅덩이에 조바심을 낸 순간ㅡ

­쉬이잇!!!!

놈의 노림수에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새빨간 시야. 고름이 찬 듯 귓가를 잠식한 이명.

맹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뱀의 지능을 간과했다.

놈의 뒤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꼬리가 내 측두를 강타했다.

“쿨..럭...!”

울렁거리는 이물감을 왈칵 쏟아내자 토사물에 붉은 핏덩이가 섞여나왔다.

숨을 쉴 수가 없고, 얼음에 처박힌 몸뚱어리를 끄집자 팔다리가 후들거린다.

단도는 어디론가 날아가 보이지도 않는다.

최악.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놈의 눈빛에서는 더 이상 긴장을 엿볼 수 없었다. 대신 먹잇감을 바라보는 승자의 여유가 번들거렸다.

허나ㅡ

­쉬이익...?!

기다란 꼬리 끄트러미가 내 턱을 들어올려 얼굴을 엿본 순간 놈이 흠칫 놀랐다.

전장의 패자에게 응당 있어야 할 비통함이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파 뒤지겠네.”

피를 머금은 잇새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한 번 제대로 얻어맞고 난 다음에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타오르는 고통이 본능을 일깨웠다.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감각이 깨어났다.

“야.”

­스슷...?!

“너 좀 세다?”

이전이었다면 즉사했을 일격.

원래대로라면 방금 일격으로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던전에 들어오고 많은 경험을 쌓았다.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장애물과 마주했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채로운 적들과 싸웠다.

동료와 함께 싸우고 유대를 키웠다.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강해졌고.

이제 두 번 다시 손아귀에 들어온 것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되찾기 전까진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쉿..! 쉬이잇...!!!!

뱀이 몸을 움츠리며 볏을 빳빳하게 폈다. 본능에 새겨진 직감이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재빨리 내 숨통을 끊으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츠츠츠츠츳....!!

익숙한 아지랑이가 피투성이 오른손에서 피어올랐다. 곧이어 검은 형상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척박한 대지에서 덩굴이 피어오르듯. 서서히.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내가 목도했던 힘.

그 힘의 작은 편린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내게 주어진다면­

“일어나...!”

­아우우우우우우!!!!!!!!!

─콰직!!!!!!!!!!!!!!!!!!!!!!!

솟구치는 핏줄기.

“늑대........ 야.....?”

뜨끈한 피가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난입에, 전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듯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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